사라진 13년
본문: 창세기 16:16-17:1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편년체 서술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기전체 방식입니다. 편년체는 연월일시에 따라 일어난 사건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사관이 곁에서 지켜보며 마치 일지를 기록하듯 모든 일을 담아냅니다. 이런 방식으로 기록된 대표적인 책이 공자가 노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춘추이고, 우리나라에는 조선왕조실록이 있습니다. 이 방식의 장점은 사관이 역사를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왜곡의 위험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왕의 입에서 나온 말, 신하들의 발언,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평가는 후세의 몫으로 남겨둡니다. 그러나 단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의미 없는 것까지 다 기록하므로 양이 방대해진다는 것입니다.
기전체 방식은 왕의 업적, 제후들의 업적, 그리고 그 당시 뛰어난 인물들의 행적을 열전으로 기록하는 방식입니다. 사마천의 사기가 그렇고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이 방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기전체 역시 장단점이 분명합니다. 사관이 역사를 평가하므로 읽는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관의 성향에 따라 역사가 왜곡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관이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역사관을 품고 있는지에 따라 사실로서의 역사가 의미로서의 역사로 바뀔 때 변질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록하시는 인생
그렇다면 성경은 어떤 방식으로 기록되었을까요? 엄밀하게 따져보면 성경의 사관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감동시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의미의 책이고 가치의 책입니다. 역사적으로 일어난 모든 일을 성경이 다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만 기록해 두셨습니다. 그런데 왜곡의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의 사관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말씀을 살펴봅니다. 우리 자신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기록하신다면 기록할 거리가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어서 단 한 줄도 기록할 여지가 없는 사람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갈이 집을 나갔을 때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와 말씀하셨습니다. 돌아가서 사래의 수하에 복종하라고 하시며, 가진 아기는 아들이니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갈은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대로 돌아갔습니다. 돌아온 하갈을 맞이하는 사래도 이전처럼 함부로 하갈을 대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만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갈의 기도도 들어주신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만의 하나님이 아니고 하갈의 하나님이기도 하기에 이전처럼 하갈을 학대하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하갈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대로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제 이 가정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두 여인이 다투지 않습니다. 멸시하지도 않고 압제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브람이었을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아들을 안아본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창 16:16)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란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올 때 나이가 칠십오 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때 아브람에게 두 가지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땅의 약속이고 또 하나는 자손의 약속이었습니다. 사실 땅의 약속에 대해서 아브람은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자손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십 년이 지나도 아이가 생기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기도해도 아이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방법이 아니라 하더라도, 본부인 사래를 통해서 낳은 아들은 아니지만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아브람은 그 아들에게 푹 빠져서 살았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랬을까요?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일 년 이 년이 아닙니다. 자그마치 십삼 년 동안이나 아들 이스마엘에게 흠뻑 빠져서 살았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창세기 16장을 마감할 때 아브람의 나이가 팔십육 세였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실 때 아브람은 구십구 세였습니다. 그러면 십삼 년은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우리는 16장 16절과 17장 1절을 한 호흡에 읽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16장에서 17장으로 넘어오는 이 지점에는 십삼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존재합니다.
십삼 년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입니까? 역사를 편찬하시고 성경의 사관이신 하나님께서 아브람 인생의 십삼 년은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의 인생 십삼 년은 단 한 줄도 기록할 가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판단이었습니다.
행복했지만 기록되지 않은 시간
그런데 아브람 입장에서 십삼 년은 어떤 기간입니까? 아브람 편에서 생각해 봅시다. 이 십삼 년의 시간은 일생일대의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한 번도 안아보지 못했던 아들을 안아본 순간이었고, 아들의 재롱을 보는 시간이고, 아들이 성장하고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가치 있는 시간이고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모처럼 이 가정이 행복한 시간입니다. 항상 갈등이 있었고, 항상 어둠이 있었고, 항상 그늘이 있었던 가정이었는데, 이제는 어둠도 그늘도 갈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브람에게는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단 한 줄도 기록할 가치가 없는 시간이라고 하시니,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행복을 질투하시는 것입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이 행복하기를 가장 바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아브람의 십삼 년을 기록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아브람이 세운 언약을 아브람이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이 고민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가십니다. 짐승을 잡으라 하시고 쪼개어 놓으라고 하시고,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께서 타는 횃불이 되어 그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만약에 내가 너와 맺은 언약, 땅의 약속과 자손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여기 이 짐승들처럼 나는 쪼개져도 좋다고 하시며 아브람과 쪼개짐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이 언약 이후에 돌아서서 16장에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 언약을 붙잡고 계시는데, 하나님은 여전히 그 언약의 주인 되어 주시고 한 번도 그 언약을 변하려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계시는데, 아브람이 일방적으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파기해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자기는 행복에 겨워합니다. 즐거워합니다. 하나님과 언약 관계 가운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떠나서 등지고 살아가는 인생을 하나님은 가치 없다고 선언해 버리신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신문이나 언론 매체에서 기대수명이라는 단어를 가끔 접합니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가 별다른 사고 없이 문제없이 자라면 몇 살까지 살 것인가를 나타내는 것이 기대수명입니다. 의료기술이 발전했고 약이 좋아졌습니다. 요즘 태어나는 남자아이의 기대수명은 80.5세이고, 여자아이는 86.5세입니다. 평균이 83.5세입니다. 요즘 태어나면 적어도 83~84세까지는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과거에 조선의 왕들의 평균 수명은 46.1세였습니다. 왕들의 수명이 46.1세라면 그 당시 노비들, 가난한 사람들, 일반 평민들, 전쟁과 부역에 동원되어야 했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형편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래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환갑잔치를 했지만, 이제는 팔순잔치도 민망해서 잘 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백 년을 산다고, 120년을 산다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지금도 붙잡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시간의 주인 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길고 유구한 역사 가운데 우리 인간의 100년, 200년의 인생은 점 하나조차 찍을 수 없을 만큼 보잘것없습니다. 우리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83세를 산다고, 100세를 산다고 감히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오래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잘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드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길고 긴 인생을 산다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의미 없고 가치 없는 인생을 살면, 기록할 만한 가치가 단 한 줄도 없는 인생인데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로보암 2세의 41년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은 북왕국과 남왕국 두 조각으로 나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에서 다스렸던 왕들 중 최고의 치세를 구가했던 왕이 여로보암 2세입니다. 여로보암 2세는 기원전 793년부터 기원전 753년까지 41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그 나라 왕들 중에 여로보암 2세만큼 탁월했던 왕은 없었습니다. 우선 영토를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전쟁을 하면 패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부국강병을 이루어냈습니다. 백성들은 왕의 덕을 보았습니다. 경제는 잘 돌아갑니다. 백성들은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왕을 칭송합니다.
만약 인간적인 관점에서 여로보암 2세의 전기를 쓴다면 얼마나 많은 분량을 쓸 수 있겠습니까? 전쟁사를 써도, 문화사를 써도, 정치경제사를 써도 그의 치세에는 기록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 2세의 사역을 단 여섯 줄로 요약하십니다.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 2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내가 너 인생을 보고 기록할 것이 단 하나도 없다고 하나님은 여섯 줄로 끝내고 마십니다.
"유다의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제십오년에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일 년간 다스렸으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왕하 14:23-24)
41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은 그가 부국강병했는지, 영토를 넓혔는지, 경제적으로 잘 살게 해주었는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그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제대로 살았는지입니다. 그런데 그는 여로보암 1세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여로보암 1세는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모든 백성을 우상 숭배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레위인이 아닌 일반인을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절기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었습니다. 여로보암 2세는 여로보암 1세의 죄에서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도 역시 모든 백성을 우상 숭배자로 만들었습니다.
백성들을 잘 살게 해주면 무엇합니까? 백성들의 영혼을 파멸시켰는데, 백성들의 영혼이 다 우상 숭배자가 되었는데, 하나님은 그 여로보암 2세의 죄를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인간들이 볼 때는, 너의 국민들이 볼 때는 칭송받을지 몰라도 내가 볼 때는 기록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인생이라고 하나님께서 선언해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의 3년
반면, 우리 예수님은 어떠하십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짧은 공생애 3년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마가복음 16장, 누가복음 24장, 요한복음 21장, 총 89장을 할애해서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방대한 양입니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사도행전과 서신서들과 요한계시록은 예수님 사역의 주석입니다. 범위를 더 확장하면 구약성경은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결국 신구약 성경 전체가 예수님으로 수렴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짧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짧은 인생, 그러나 하나님은 기록할 것이 무한히 많으십니다. 성경 전체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복음을 위해 사셨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셨고, 이 땅의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3일 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고, 그 이후에 지금도 교회를 세우시고 지금도 통치하시는 예수님의 능력, 그 주님을 위해서 우리 하나님은 기록할 것이 무한하십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그러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 인생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보시고 우리 이름 석 자를 적고 그 밑에 단 한 줄이라도 제대로 기록할 것이 있도록 우리가 지금까지 살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가치 있는 인생을 살고 있는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지금 살고 있는 인생,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이 하나님께서 한 줄이라도 제대로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생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브람처럼 사라진 십삼 년만 보내고 있다면, 아브람의 사라진 십삼 년이나 여로보암 2세의 41년이나 똑같은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결단해야 합니다. 지금 제대로 결단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코의 호흡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멀쩡하게 살고 있어도, 지금 건강하게 살고 있어도, 지금 아무 문제 없이 걸어 다니고 활동하고 있어도 우리는 내일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내일 건강하게 눈 뜬다고 누가 우리 인생을 보장해 주었습니까? 지금이라도 즉시 돌이켜서 하나님 앞에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학교 아이들에게 간식이라도 나누어 주어야 하고, 그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주어야 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로 바쁜, 주님 안에서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다 바쁘다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학교 가고 학원 가느라 바쁘고, 입시를 앞둔 학생들은 밤늦도록 공부한다고 바쁘고, 취업을 앞둔 사람들도 바쁘고, 직장에 취직해도 살아남기 위해 바쁩니다. 결혼한 부부들도 몹시 바쁩니다. 아이들 키우느라, 주말이 되면 캠핑 간다고 바쁘고, 나이가 들어서는 손주 키운다고 바쁘고, 건강 유지하느라 등산 다닌다고 바쁘고, 맛집 찾아다닌다고 바쁩니다. 모두가 바쁘게 삽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를 위한 바쁜 인생이지, 진실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음 사역을 위해서, 영혼 구원을 위해서 나는 얼마나 바쁘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기록할 거리가 참 많구나 할 정도로 우리가 바빠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무엇 때문에 바쁘게 살고 있습니까? 나중에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너는 기록할 것이 하나도 없구나'하시면 그 황망함을 어떻게 감당하시겠습니까? 진실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 기록할 거리가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부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제대로 살아서 많은 것들이 기록되고, 짧은 인생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많은 인생,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있는 인생, 그런 인생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창 17:1)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완전을 요구하셨습니다. '완전하라', 히브리어로 '타밈'이라는 말인데 온전함을 뜻합니다. 영어 성경에는 perfect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완전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인간이 perfect할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인간이 완전하다는 것, 불가능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스스로 완전을 이루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닌 하나님을 통해서는 가능합니다.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면 가능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 5:9, 11)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똑같은 말이 세 번 반복됩니다. '말미암아, 말미암아, 말미암아'.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워합니다. 그렇습니다. 의로워지는 것, 구원받는 것,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완전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의로울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나의 힘과 나의 능력으로는 의로워지고 구원받고 즐거워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와 동역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잡으면 우리는 의로워질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고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맥락에서 아브람을 찾아와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너 나와 손잡고 일하자, 너 나와 동역하자, 왜 너 나와 등 돌리고 지금 너만을 위해서 살고 있니?'라고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원래 아브람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불러 주셨을 때부터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며 좌충우돌했지만, 하나님을 떠난 적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 12:2-3)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셨을 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때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명을 받은 아브람은 하나님과 함께 손잡고 동역했습니다. 하나님과 동역할 때 그때 우리는 완전해집니다. 나는 불완전하니까 완전하신 하나님과 함께 일하면서 우리는 의로워지고, 복을 누리고, 구원받고,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자기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렸습니다. 등을 돌렸습니다. 홀로 스스로 있습니다. 불안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존재의 특징이 불안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리 크게 누린다 하더라도 그 마음 깊숙한 곳에는 불안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언제 이 물질이 사라질지, 언제 내가 가진 권력이 마치 신기루처럼 없어질지 불안합니다. 불안한 그 틈바구니로 사탄이 틈을 탑니다.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연합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삼 년을 기다리셨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아브람이 돌아오기를,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과 동역하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제 99세가 되어서 하나님은 다시 아브람에게 와서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너 나와 처음 만났을 때 그 약속을 기억하지 않니? 이제 돌아와서 다시 사명자로 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집사의 사명, 목사의 사명, 장로와 권사의 사명, 성도의 사명을 주셨는데 우리는 그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일을 성실하게 해 가는 것이 하나님과의 동역인데, 하나님께 받은 사명 멋대로 팽개치고 내가 원하고 내가 기뻐하는 일에, 내가 바쁜 일에 몰두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일날 한 번 예배드리는 것으로 위안 삼으면서 하나님과 등지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아브람이 십삼 년 동안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았겠습니까? 당연히 예배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그 마음 중심이 떠나 있는 아브람의 십삼 년은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다시 동역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 붙잡고 주의 몸된 교회를 섬겨야 하고, 가정에서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고 가르쳐야 하고, 일터에서도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런 자신의 다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골 1:28)
바울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사람은 완전한 자가 될 수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주님 안에서 완전한 사람이 됩니다. 이 말은 모든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동역하게 만들어 가겠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우리 각 사람과 함께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우리를 완전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우리가 섬길 곳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면서 하나님의 완전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도 하나님이 나에게 부모 된 사명으로 자녀를 맡겨 주셨다면 그들을 믿음으로 잘 기르고 기도하고 양육해 가야 합니다. 일터에서도 나에게 주신 믿음의 사명을 피하지 않고 전진하고 부딪쳐 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동역의 꿈을 이루고 완전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 인생의 이름 석 자 밑에 하나님이 기록할 것이 무한히 많아서 '너는 정말 잘 살았구나'라고 말씀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사관이 되시어 우리 인생을 풍성하게 기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귀한 은혜가 우리 인생에 복으로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 인생이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저마다 분주하게 살았지만, 돌아보면 나를 위한 분주함이었고 하나님을 위해 분주하게 살지 못했음을 고백합니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바쁘게 살았는데,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사라진 십삼 년, 잃어버린 십삼 년, 아브람의 실패의 전철을 반복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이제 다시 우리를 찾아오셔서 손 내밀어 '너는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앞으로 하나님 앞에 기록할 것이 많은 인생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부터 돌이켜 일하게 하시고, 지금부터 돌이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명자의 자리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