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강 /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17:1-8)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본문: 창세기 17:1-8

암환자를 주로 치료하는 서울의대 김범석 교수는 환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합니다. "암에 좋은 음식이 무엇인가요? 건강보조식품을 먹어도 됩니까? 고기가 먹고 싶은데 먹어도 될까요?" 음식에 대한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김 교수의 대답은 항상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무엇을 먹느냐보다 어떻게 먹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마음이 편안한 사람과 함께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예쁜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으면 무조건 건강에 좋습니다."

의사가 비과학적으로 대답하는 것 같지만, 오랜 임상 경험에서 나온 확신 있는 답변입니다. 비단 먹는 것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은 인생에서 '무엇'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무엇을 이루었는가, 직업은 무엇인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그 '무엇'에 집중하면 무언가를 이루지 못할 때 불행해집니다. 남들이 다 가진 그 무엇이 나에게 없으면 열등감을 느끼고, 피곤해지며, 불만이 켜켜이 가슴에 쌓여갑니다.

인생의 전환은 '무엇'에서 '어떻게'로 집중점을 바꾸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어떻게 이것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것인가, 어떻게 이것을 의미 있게 가져갈 것인가, 어떻게 가정을 행복하게 꾸려나갈 것인가, 어떻게 믿음 생활을 할 것인가. 방법의 문제를 고민하고 기도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무엇에서 어떻게로

아브라함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는 '무엇'에 집중했습니다. 아들에, 자식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들 다 있는 자녀가 나에게 없으니 불평이 생기고 불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녀가 생겼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자녀가 생겼는데, 그 무언가를 얻었는데 하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그 '무엇'이 그를 오히려 불행하게 만들고 죄짓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에 집중하지 말고 '어떻게' 살 것인지를 돌아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에 방향 전환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이스마엘을 낳은 이후 13년 동안 아들에게 흠뻑 빠져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예배를 빼먹은 건 아닐 것입니다. 다른 사람처럼 타락하거나 심각하게 하나님을 떠나 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과 마음 중심을 감찰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죄짓지 않고 타락하는 인생을 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섬기는 이스마엘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우상 숭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십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완전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완전하라 하신 것은, 말씀으로 나와 동역하자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앞으로 아브라함을 초대하신 것입니다.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이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창 17:4)

'여러'라는 말은 히브리어 '하몬'으로, '큰' 또는 '많은'이라는 뜻입니다. 너는 큰 민족의 아버지,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말씀은 그 앞에 나오는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만났을 때, 그를 불러 하란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 들려준 말씀이 아브라함과 24년 동안 함께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창 12:2)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 하나님이 그를 처음 만나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 들려주셨던 말씀입니다.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고 24년 동안 함께 동행하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형상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를 위하여 형상을 만들지 말고 조각하지도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당신의 백성과 함께하실까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방식은 언약의 말씀으로 항상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동행하셨다는 뜻입니다. 24년 전 75세 때 처음 부르실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하신 그 말씀, 24년 동안 하나님은 변함없이 이 말씀을 지키시며 함께 머무셨는데, 아브라함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99세가 되어 하나님이 다시 처음 하셨던 약속을 일깨워주시며 "내 언약이 너와 항상 함께 있으므로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한 번 더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99세 때 이 말씀을 처음 하신 것이 아닙니다. 24년 전에 하셨고, 하나님은 24년 동안 이 말씀으로 아브라함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까맣게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줄, 그것도 언약의 말씀으로 항상 지키고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삼손의 이야기

아브라함만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 오늘 우리조차도 하나님이 언약의 말씀으로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삼손도 그랬습니다.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삿 13:5)

삼손이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태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어머니에게 나타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실인이 될 것이다,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그는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될 것이다. 이 언약의 말씀은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삼손과 함께 있었습니다. "내 언약이 너와 함께하겠다" 하셨으니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함께 있었는데, 삼손은 나중에 커서 사사가 되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의 언약이 자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함께하면 그는 말씀이 함께하는 자답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여인을 가까이했습니다. 딤나의 여인, 가사의 기생,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 여인들 뒤꽁무니만 쫓아다녔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에게 넘어가 자신의 힘의 비밀을 말해버렸고, 깨어나 보니 머리카락이 잘려 있었습니다. 힘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블레셋 사람에게 끌려갔습니다. 두 눈이 뽑혔습니다.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가 되리라 하셨는데, 그는 오히려 블레셋 사람에게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연자맷돌을 돌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조롱당하고 손가락질 당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인생의 마지막에 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올려드립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삿 16:28)

그가 사람들이 자기를 조롱하기 위해 모인 큰 모임 가운데 양쪽 기둥을 의지하여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 이렇게 간구하고 기둥을 힘껏 밀었습니다. 건물이 무너져 블레셋 사람과 삼손이 함께 그 자리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살아있을 때 죽인 블레셋 사람의 수보다 그가 죽으면서 함께 죽은 블레셋 사람의 수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삼손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평생 동안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을 떠나 살았고, 말씀을 떠나 여인을 쫓아 살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여전히 삼손과 함께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 이번 한 번만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성도의 견인

아브라함이 13년 동안 하나님을 떠나 살았지만, 그가 이스마엘에게 푹 빠져 살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아브라함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13년 후에도 그를 찾아오셔서 이 사실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처음 주님을 만났던 그 시간, 내가 은혜 받았던 그 시간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그 시간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셨고, "내가 너를 죄에서 건지기 위해 내 독생자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위로하시고, 말씀 들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찔림을 허락해 주시고,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나와 함께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믿음이 시들해지고 사라지면서 하나님의 언약은 나와 함께하셨는데 내가 하나님을 떠나 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나를 떠난 적이 없고 "내 언약이 너와 함께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아브라함은 13년을 떠나 살았고, 삼손은 평생을 떠나 살았고, 지금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떠나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내가 떠나 살면서 하나님이 나를 떠났다고,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오히려 볼멘소리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나와 함께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실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면 됩니다. 언약의 말씀이 나와 함께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그때 그 순간 하셨던 약속을 영원히 지키고 계시니, 지금도 그 약속이 유효하니 나와 함께해 달라고 손 내밀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변함없으신 하나님, 영원히 지금도 우리를 지키고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언약의 손을, 사랑의 손길을 허락하실 줄로 믿습니다.

칼빈주의 5대 교리 가운데 '성도의 견인'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굳셀 견(堅), 참을 인(忍)입니다. 성도가 굳세고 성도가 참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 대해서 인내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성도를 인내하셔서 그를 굳세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를 많이 참아주시고 용서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이 정말 진리인 것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인내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 단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 지을 때마다 하나님이 심판하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실망시킬 때마다 하나님이 그때마다 내 인생을 파멸시켰다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어떻게 멀쩡히 앉아서 예배드릴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13년 동안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했는데, 길이 참으시는 하나님이 13년은커녕 13개월도 참지 못하고 아브라함을 심판하셨다면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삼손의 평생을 참아주신 하나님, 그가 여인들을 쫓아다닐 때마다 하나님이 참아주지 않으셨다면 삼손은 마지막에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고 하나님을 원망했는데, 하나님이 그때마다 심판하셨다면 출애굽은 아예 불가능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사랑 많으신 하나님, 성도를 굳세게 하시고 참아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인내를 무색하게 만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참아주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지금이라도 속히 돌아가서 하나님의 손을 잡고 믿음의 동행을 이루어 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창 17:5)

하나님이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아브람은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는 실제로 13년 동안 존귀한 아버지로 살았습니다. 한 가정의 한 아들, 이스마엘의 아버지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너는 이제 한 가정, 한 아들의 아버지로 살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 열국의 아버지, 여러 민족, 큰 민족,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살아야 한다"고 하나님이 방향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큰 인물이 돼라, 위대한 인물이 돼라, 출세하라, 이렇게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본질에 충실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창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은 창조 후에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방식은 독특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모든 일에 개입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함께 동역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설하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동식물의 이름을 짓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을 창설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의 동역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믿음의 백성들을 동역자로 삼아서 이 세상을 다스려 가고 함께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너는 아브라함이 되라" 하신 것은 "너는 나의 동역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한 가정, 이스마엘에게만 매여서 존귀한 아버지로 살 것이 아니라 나의 동역자가 되어서 여러 민족을 먹이고 그들을 책임지는 진정한 아비가 되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의미는 자식들의 먹거리를 공급하고 가정을 책임지는 존재입니다. 너는 한 아들만 책임지는 존재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부디 나와 함께 동역해서 온 세상을 섬기고 돌보는 믿음의 동역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복음대로 살면, 본질에 충실하게 살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서 여러 사람을 섬기는 아브라함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김점동

사도 바울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사울이었다가 바울이 되었습니다. 사울 시절 그는 분리주의자였습니다. 유대교에 몰입된 편협한 분리주의자로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다가 죽이고 옥에 넘기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때부터 그는 복음에 사로잡혔습니다. 복음에 충실한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 사람은 이방을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대로 그는 열심히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1차, 2차, 3차 선교 여행을 다니며 로마까지, 스페인을 향한 선교의 열정까지 품었습니다.

복음에 충실하게, 본질대로 열심히 살다 보니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돌아보니 신약성경 27권 중 13권을 바울이 기록했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손을 들고 "저는 유명해지고 싶습니다, 저는 위대한 사도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보다 가장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야망을 품은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그저 본질에 충실했습니다. 말씀에 충실했습니다. 그랬더니 바울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었고, 그 동역자로서 열심히 살다 보니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되었고 가장 탁월한 전도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의 삶이 아니라 본질에 충실한 아브라함의 삶으로 바뀌어져 있었습니다.

김점동이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조선 최초의 여자 의사입니다. 이 분의 아버지는 아펜셀러 선교사의 일을 도와주는 일용직 잡부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에게는 딸이 참 걸리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똑똑하고 영특하고 말도 잘 듣고. 그래서 아펜셀러 선교사 집에 자주 출입하던 스크랜튼 여사에게 딸을 부탁합니다. "제 딸을 한 번만 봐주십시오." 스크랜튼 여사가 김점동을 보니 과연 영특했습니다. 스크랜튼 여사는 이화학당을 세운 인물입니다. 김점동을 데려다가 그녀에게 복음을 가르칩니다. 성경을 알려줍니다. 복음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영어를 특별히 잘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스크랜튼 여사는 김점동을 로제타 셔우드 홀에게 소개시켜 줍니다. 로제타 셔우드 홀은 부인과 의사로서 부인들의 질병을 치료하고 수술하는 여성입니다. 셔우드 홀은 김점동의 재능을 높이 사서 이 여인을 미국에 유학을 보냅니다. 의사 공부를 시키려고.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 지금의 존스홉킨스 의대에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여자 의사가 되어서 다시 조선에 돌아옵니다. 보구여관이라는 여성 전문 의료기관을 맡아서 책임지는 의사가 됩니다. 한 해에 수천 명의 환자를 진료했습니다. 황해도까지 나귀를 타고 가서 환자를 돌봅니다. 가마를 타고 가서도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몸을 살피지 못해서 폐결핵에 영양실조가 겹쳐서 34살의 나이로 천국에 간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 여인이 "저는 조선 최초의 여자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라는 야망을 품은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습니다. 한 해에 수천 명의 환자를 진료하게 해달라고 그런 꿈을 가진 적도 없었습니다. 그저 복음에 충실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였고 말씀대로 살았고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여인을 아브람의 삶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삶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야망을 가지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복음이 없는 사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우리 자녀들에게 야망을 넣어줍니다. 그러나 복음을 넣어주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그 말씀으로 거듭나고 그 말씀대로 살게 되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동역자를 아브람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삶으로 변모시키고 바꾸어 주십니다. 시간이 지나 보면 "내가 지금 아브라함의 삶을 살고 있구나, 내가 진정 위대한 역사의 한 일익을 감당하고 있구나, 나는 원래 이런 걸 꿈꾸었던 것이 아닌데 그저 하나님과 동역하다 보니 이런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람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복음적인 사람은 누구나 다 아브라함의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신경이 쓰입니다. 내 식구, 내 가족, 내 자녀만 먹이고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힘들고 헐벗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적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도 아브람적인 교회가 있고 아브라함적인 교회가 있습니다. 자기 교회만 생각하는 아브람적인 교회는 복음적인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 교회 건물만 올리고 자기 교회만 아끼고 사랑하는 교회,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적인 교회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저 먼 곳에 있는 아프리카 백성들이 가슴에 걸려서 눈물 흘리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하고, 북녘 땅에 있는 동포들이 가슴에 걸려야 하고, 우리 교회 주변의 예루살렘, 우리 지역에 있는 분들이 마음에 쓰여야 정상입니다. 복음적인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적인 가정을 이루고 사는지, 오늘 우리가 복음적인 교회의 한 일원인지를, 우리는 아브람적인 존재인지 아브라함적인 존재인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로 방향을 전환하고,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적인 인생을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24년 전 75세 때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말씀하신 그 언약은 24년 동안 말씀으로 아브라함과 함께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기억하지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24년 후 99세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다"고 일깨워 주셨습니다. 평생을 삼손과 말씀으로 동행해도 삼손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여, 우리는 이런 미련한 존재들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하고 주셨던 그 뜨거운 말씀, 그 사랑의 말씀이 지금도 여전히 나와 함께 있음을 믿고 깨닫사오니, 그 말씀이 일하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그 말씀과 함께 동역하는 믿음의 자녀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우리와 동역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그저 존귀한 아버지, 아브람으로만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열국의 아버지, 여러 민족, 큰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여 주시고, 우리가 세상을 책임지는 복음적인 성도, 복음적인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야망을 품으라는 말씀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서 아브라함으로 살게 하실 줄을 믿고 의지하오니, 주여 우리가 그런 자들, 주여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 우리 자녀들이 그런 믿음의 백성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