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강 / 할례언약 (17:9-14)

할례언약

본문: 창세기 17:9-14

고대 로마가 지켜온 외교의 원칙은 '당신이 나에게 주면 나도 준다'는 상호주의였습니다. 로마의 군사력을 고려하면 이러한 접근이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적을 제압하고 필요한 것을 빼앗으면 될 터인데, 왜 상호주의에 입각한 외교 정책을 펼치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기원전 493년 라틴 동맹을 결성할 때부터 시작하여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상호주의에 입각한 외교 정책을 고수했습니다.

993년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 일이 있습니다.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는 거란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거란의 요구는 명확했습니다. 평양을 포함한 북쪽 지방의 땅을 내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려 왕실에서는 원하는 것을 주고 목숨이라도 보전하자는 여론이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서희는 달랐습니다. 일단 만나서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보고, 협상이 안 되면 그때 땅을 내줘도 늦지 않을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서희가 협상 테이블에서 만나보니 거란도 고민이 있었습니다. 당시 거란은 송나라와 전면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송나라와 친한 고려가 후미를 치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거란의 의도를 알아챈 서희는 먼저 제안을 던집니다. "당신들이 송나라가 고민인 것처럼 우리의 고민은 여진족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강동 6주를 주신다면 우리는 여진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당신들이 송과 전쟁할 때 우리는 송을 돕지 않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우리의 왕이 거란의 왕을 찾아가서 인사도 드릴 수 있습니다." 소손녕은 기뻐하며 돌아갔고, 실제로 강동 6주가 고려에게 돌아왔습니다. 누가 승자입니까? 거란이나 고려나 똑같이 승자입니다. 외교 관계에서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았기 때문입니다.

서희가 훌륭한 것은 단순히 강동 6주를 받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데 있습니다. 상대의 의중을 알아야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언약의 본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언약을 여러 차례 맺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할례 언약입니다. 할례는 언약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할례 언약을 맺으시는 그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의중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저 살을 베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왜 할례의 언약을 행하라 하시는가, 하나님의 본뜻과 의중을 깨닫는 것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할례 언약의 깊은 속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우리가 끊어내고 결단해야 할 것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 17:9-10)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가족들도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대대 언약'이라고 말씀하신 할례 언약은 후손 대대로 받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해야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 확정됩니다.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 17:11)

살가죽을 베어내야 합니다. 마취가 있지도 않았던 시절이었으니 살을 베어내는 것은 아픔이고 고통입니다. 멀쩡한 살을 잘라내는데 어찌 아프지 않겠습니까?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이때 찾아오셔서 그에게 할례를 요구하시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살가죽을 베어내어서 그것을 어디에다 쓰시겠습니까?

끊어내고 결단하는 것이 할례의 본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요구하시는 것, 할례의 본뜻은 '잘라냄'입니다. 끊어내는 것이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할례, 잘라내고 결단하고 끊어내는 것은 이전에 아브라함의 행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에게 빠져서 13년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13년 동안 아브라함이 이스마엘 한 사람에게 빠져서 종기 한 아버지 아브라함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제는 열국의 아비가 되라 하시고 아브라함이 되라 하시면서, 아브라함이 되려면 지금까지 우상처럼 섬기고 있던 이스마엘, 그 마음속에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우상처럼 섬기고 있던 이것부터 잘라내지 않으면, 이것부터 끊어내지 않으면, 이것부터 결단하지 않으면 너는 결단코 아브라함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아브라함 마음속에는 하나님 아닌 이스마엘이 우상처럼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것을 정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할례 언약 이후에 결단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보내야 했습니다. 그것은 살을 잘라내는 아픔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습니다. 이스마엘이 어떤 아들입니까? 하갈이 어떤 여인입니까? 그런데 할례 언약 이후에 하나님보다 더 섬겼던 이스마엘과 하갈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 후에는 이삭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합니다. 이삭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내 아들, 내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그 다음 일생은 할례 언약 이후에 끊어내고 잘라내고 결단하는 것이 그의 일생 전체의 과제요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생활의 핵심은 끊어내는 것입니다. 정리하고 잘라내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신앙생활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으고 챙기고 쌓아두는 것,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 가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지렛대 삼아서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의 본질에서 어긋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분들은 매순간 결단해야 합니다. 결단하고 끊어내고, 무엇을 끊어낼 것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행위는 무엇인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내 마음의 우상은 무엇인가, 이것을 살피고 깨닫고 항상 버리고 끊어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핵심 가치입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 19:29)

이 중에 버리기 쉬운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 중에 '이것은 아깝지 않으니 나는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집도 아까운 것 아닙니까? 버리기는커녕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신앙생활하지 않습니까? 좋은 집 달라고, 좋은 땅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고 매달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이것을 끊어내고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라면 이 땅에서는 버려야 하고 그 보상은 천국에서 받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사도 바울의 결단을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일생 동안 가장 잘 지키고 살아간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7-9)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하여 버리는 것이 사도 바울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 이유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바울이 어떤 인물입니까? 그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본토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외국에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집안이 좋았습니다. 부자였습니다.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아버지가 열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외국어도 잘 가르쳐 주었고, 그는 가장 좋은 선생님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부자였고 학벌이 있었고 권력도 있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섬기기 위해서 세상에 거추장스러운 것을 다 끊어 버렸습니다.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해로 여겼습니다. 그는 영생을 상속받기 위해서 자기에게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을 결단하고 끊어내고, 진정한 할례자로 살았던 믿음의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얻기 위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끊어버리는 것이 신앙의 본질인데, 오히려 예수를 팔아서 내가 필요한 것을 얻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가롯 유다가 그랬습니다. 유다는 은 30에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면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 공동체에서 재정 출납을 맡았던, 회계 책임자였습니다. 헌금을 도둑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라다닌 목적은 돈이었지 예수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돈을 긁어 모으기 위해서 그는 헌금 도둑질을 하는 사람이었고, 그는 예수님조차도 은 30에 팔아버린 파렴치한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롯 유다를 이렇게 조롱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가롯 유다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예수를 이용해서 돈벌이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예수 믿는다는 이름을 팔아서 오히려 이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선거철만 되면 예배당을 기웃거리는 철새 정치인들도 있고, 교회 안에 있으면서 직분을 이용해서 가짜 크리스천으로 명함을 돌리는 사람들도 있고, 오히려 교회 공동체가 그들의 재산을 늘리기 위한 하나의 플랫폼이 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 팔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 예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려야지 그것이 신앙생활인데 반대로 예수 팔아서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 유다 같은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오늘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질문하십니다. 너는 예수 잘 믿기 위해서, 신앙생활 잘하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고 있느냐고, 무엇을 끊어내고 무엇을 결단하고 어떻게 살아야 예수 잘 믿는 사람인지, 그런 삶인지를 고민은 하고 있느냐고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질문하고 계십니다.

마음의 할례가 본질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런 언약을 맺은 후에 할례가 형식화되어 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육체의 할례만 받으면, 살갗만 베어내면, 그러면 아브라함의 자손,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자녀를 난 지 8일 만에 성전에 데려가서 할례를 받게 했으니 이 아이도 아브라함의 자손이에요. 이 아이도 하나님의 백성이에요'라고 생각하고 그저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례를 받았는데 행동이 변하지 않고, 할례를 받았는데 삶이 변하지 않으면 그것은 가짜라고 말씀하시고 마음의 할례를 강조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네게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네게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신 30:6)

어디에 할례를 행한다고 하셨습니까? 너의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육체 할례는 받았는데 삶이 변하지 않습니다. 행동이 그대로입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의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까? 마음부터 결단하지 않고 잘라내지 않는데 어떻게 행동이 바뀌겠습니까? 신명기 법전이 선포되는 자리, 아브라함 시절부터 수백 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입니다. 그런 시점까지 가면서 사람들은 할례가 화석화되고 형식화되고 말았습니다.

신약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 받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할례 받으면 '우리는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다'라며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멸시했습니다.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는 유대인들이 할례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방인들과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 2:28-29)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육체 할례만 받는다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마음에서 끊어낼 것 끊어내고 떠나보낼 것 떠나보내고 도려낼 것 도려내야 그래야 그분이 진실로 유대인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우상들로 가득 차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똑같은 맥락에서 말씀을 하셨는데, 산상수훈 말씀 중에 팔복을 선포하셨습니다. 그중에 첫 번째 복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마음의 할례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결단하고 끊어낼 것 끊어내고 정리할 것 정리해서 마음이 텅 빈 마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가난해진 마음에 성령께서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비워내면, 우리가 마음에서 결단할 것 결단하고 정리할 것 정리해 놓으면, 하나님의 영인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임재하셔서 우리에게 복 주시고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그렇게 하는 자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지금 무엇으로 가득해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 물질과 종욕과 자녀와 세상 걱정으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공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끊임없이 요청하십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여 하나님의 영을 거기에 부어 주시려고 마음을 끊어내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하지 않으면 그다음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비워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고난을 주시면 됩니다. 우리 인생에 고난의 큰 파도가 닥치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온갖 복잡한 것들이 한순간에 다 사라집니다. 세상을 향한 욕욕도, 물질에 대한 욕심도, 고난 앞에서는 부질없고 덧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기 전에, 고난의 큰 파도가 우리에게 닥치기 전에, 하나님이 그 사랑하는 자들에게 고난을 주어서 마음을 비워내기 전에, 우리 스스로 할례 받은 백성으로 사셔야 합니다. 매일같이 우리 마음을 살피고, 마음속에 일어나는 잡초들과 온갖 생각에 정욕들을 끊어내고 뽑아내셔야 합니다. 그래서 악한 양의 틈탈 시간을 주지 않도록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합니다

종교개혁 이전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돈이 많았습니다. 부자였습니다. 교회가 부자가 된 이유는 권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황의 권력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세속 권력인 왕을 임명할 수도 있고 폐할 수도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잘 보이려고. 그래서 교회는 돈도 많았고 땅도 많이 차지하고 있었고 권력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교황의 말 한마디가 성경의 권위보다 위에 있었습니다. 교황이 말하는 것이 전통이 되면 그 전통은 성경의 권위보다 더 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자 '아드 폰테스(Ad Fontes)', 오직 성경으로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본질로 돌아가자고 외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아드 폰테스'라고 말하고 '솔라 스크립투라'라고 말하는 것은 할례 정신을 회복하자는 말입니다. 끊어내자는 이야기입니다. 물질도 끊어내고 권력도 끊어내고 세속 권력과 결탁한 것도 다 끊어내고 오직 하나님의 본질인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뜻입니다. 교회가 갖고 있는 부정직한 물질은 가난한 자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교회가 소유한 부정직한 땅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농사짓게 하라고 떼어 주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로만 돌아가자. 이것이 종교개혁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개혁된 교회를 우리는 개혁교회라고 부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개혁교회를 세운 후에 그들이 아주 위대한 말씀을 남겼습니다. 그들이 말한 것 중에 정말 위대한 말은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입니다. 이 말은 정말 위대한 명제입니다.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의미는 개혁교회를 세운 사람들이라도 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오래되면 사람은 타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개혁교회는 할례 정신을 가지고 끊임없이 잘라내고 뜯어내고 결단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개혁교회의 본질입니다.

오늘 우리는 개혁교회 후손들 아닙니까? 종교개혁으로 본질로 돌아간 개혁교회 후손들인데, 오늘 우리는 끊임없이 개혁하고 있는 개혁교회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끊어낼 것이 없습니까? 정리하고 바꾸고 결단할 것이 없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모든 것이 다 잘하고 있는 일입니까? 우리 스스로 돌아보고 본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것이 있으면 정리하고 끊어내고 결단하셔야 합니다. 할례 정신을 교회는 끊임없이 회복하여야 합니다.

얼마 전 한 연구에서 우리 교단의 현실을 발표했습니다. 우리 교단 소속 교회 중에 약 60% 정도가 교회학교가 없다고 합니다.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유치부부터 없어지기 시작하는데, 초등학생, 중고등 청년부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 열 곳이면 여섯 교회가 교회학교가 없습니다. 그저 이것을 학령인구가 감소해서 교회학교의 아이들이 당연히 줄게 되었다고 안심하고 있어야 될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20세 미만의 아이들, 20세 미만이면 고등학생까지의 아이들, 그들 중에 보고에 의하면 약 3%밖에 되지 않습니다. 백 명 중에 세 명만 교회에 나옵니다. 전교생이 500명이라면 열다섯 명만 교인입니다. 150명이 아니라 15명이 교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해 줍니까? 충격적인 결과 아닙니까?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저 아이를 적게 낳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목사인 저부터 교회가 끊어낼 것 끊어내지 않고, 잘라낼 것 잘라내지 않고, 교회가 교회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성세대가 성도로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교회가 정말 본질로 돌아가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고,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 실상을 주었기 때문에 그들이 교회를 떠났고 그들의 자녀들도 자연스럽게 교회를 떠나는 것 아닙니까? 20~30대 청년들, 그들이 교회를 떠났는데, 그들이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는데 어떻게 그 자녀를 교회에 보내겠습니까? 교회라고 생각하면 상처 밖에 남은 것이 없는데, 교회가 이래도 되느냐고 그들이 소리를 높일 때 아무도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았는데, 할례 정신에 입각한 교회가 없었는데,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 처참한 결과를 받아들이고 이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결론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주님도 결단하고 오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자기를 비워 '케노시스(kenosis)',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하늘에 그대로 계셨으면 삼위일체 가운데 한 분 아닙니까? 하나님과 본체가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결단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마음의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자기를 다 비워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대접받고 대우받는 것, 그것 다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온전히 다 비워내고 빈 마음이 되어서, 가난한 마음이 되어서, 심령이 가난한 분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육체 할례만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은 마음의 할례를 100% 완벽하게 받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따르는 제자라고 하면서 왜 할례 받지 않습니까? 우리는 왜 할례 정신에 입각해서 살고 있지 않은 것입니까? 단 한 가지라도 결단하고 실천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가 되고, 우리 후손들, 우리 자녀들에게는 예수는 이렇게 믿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미래가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할례 정신,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이 정신에 깊이 들어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결단하시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할례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아버지, 우리는 할례 받기를 싫어하고 그저 육체로만 성도로 살았습니다. 세례 받았다고, 직분 받았다고, 헌금한다고 성도인 척하고 살았습니다. 아버지여 용서하여 주옵소서. 끊어내지 않으면, 결단하지 않으면, 비워내지 않으면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그 말씀 기억하고 깨닫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의 마음속을 깨끗하게 비워내게 하옵시고, 오직 예수를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살고 우리 자녀들이 살고 이 나라 민족이 사는 놀라운 구원의 시작이 나로부터 시작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