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강 / 엎드려 웃으며 (17:15-17)

엎드려 웃으며

본문: 창세기 17:15-17

한여름 뜨거운 무더위에 수박화채를 먹으면 무더위도 사라지고 갈증도 해소됩니다. 그런데 수박화채를 더 시원하게 먹는 방법이 있습니다. 화채에 넣는 얼음 알갱이를 작게 쓰면 열용량 때문에 빨리 녹아서 더 시원해집니다. 반대로 얼음 알갱이가 크면 잘 녹지 않아 덜 시원해집니다. 우리 조상들은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하여 석빙고를 운영했습니다. 냉장고가 없었던 시절에도 한여름에 얼음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석빙고 덕분이었습니다.

한강변에 동빙고와 서빙고가 있었고, 전국 곳곳에 석빙고가 여럿 있었습니다. 그중 지금까지 형체가 잘 보존된 것이 경주 석빙고입니다. 석빙고에는 한겨울에 언 얼음을 큰 덩어리로 저장해 두었습니다. 얼음과 얼음 사이에는 볏짚을 넣고, 복사열로 인해 쉽게 녹지 않도록 환기장치를 갖추어 두었습니다. 그러나 석빙고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얼음의 덩치와 크기입니다. 큰 얼음을 두면 여름 내내 사용해도, 더위에 조금 녹더라도 무사히 여름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겨울이 되면 사용하고 녹은 만큼의 얼음을 다시 채워 넣으며 석빙고를 운영했습니다.

석빙고에 있는 이 얼음의 단단함과 크기를 오늘 우리의 믿음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석빙고 안의 큰 얼음처럼 단단하고 덩치가 크다면, 악한 사탄 마귀가 아무리 우리를 뒤흔들어도 쉽게 녹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수박화채 속 얼음 알갱이처럼 작고 연약하다면, 사탄이 흔들어 놓으면 주변 상황과 세상 시류에 따라 녹아버리고, 나중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믿음의 크기와 단단함이 어느 정도인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의 상황을 통해 반면교사의 교훈을 얻기를 원합니다.

가정의 일치를 통한 동역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창 17:15-16)

하나님께서는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신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존귀한 아버지였던 아브람을 열국의 아버지 아브라함으로 바꾸라고 하셨고, 이제는 사래를 사라로 바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래는 '공주' 혹은 '여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여주인', '여러 민족의 어머니', '열국의 어머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두 사람의 이름을 모두 바꾸라고 하신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가정의 대표인 아브라함의 이름만 바꾸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사래의 이름도 사라로 바꾸라고 하셨을까요?

첫 번째 이유는 가정의 일치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동역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열국을 섬기는 아버지로서 자기 가정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을 섬기고 돌봐야 하는데, 부인인 사래가 여전히 공주로, 여왕으로 산다면 가정의 일치가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자동차가 굴러가려면 바퀴가 똑같은 크기여야 합니다. 한쪽 바퀴는 크고 다른 쪽은 작으면 힘을 줘서 굴려도 제자리만 뱅글뱅글 돌 뿐, 앞으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습니다.

가정의 부부가 똑같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비전을 가지고 아브라함이 되고 사라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마음껏 일을 맡겨주실 수 있습니다. 한때 사래는 공주처럼, 여왕처럼 살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자기 몸종 하갈이 임신한 것을 알고 여주인을 멸시하자 견딜 수 없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임신한 여종 하갈을 학대하고 집에서 내쫓아 버렸습니다. 사래였기에, 공주였기에, 여왕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사라가 되면 품어주고, 용서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의 동역과 가정의 일치를 통해 그들에게 맡겨주실 일이 앞으로 많다는 것을 암시하고 계십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일치와 두 사람의 동역을 통해 크고 위대한 일을 많이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가정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가정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일생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만약 바울의 일생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없었다면 바울의 사역이 그토록 위대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 절반도 그 일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덕분에 바울은 위대한 사역을 이루게 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을 처음 만난 곳은 고린도였습니다. 그때 그들의 생업이 같았습니다. 천막을 만들고 수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생업이 같았을 뿐 아니라 복음 안에서도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바울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앞에 무릎 꿇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서로 영적으로 하나가 되고 통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결정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이 사람 바울을 통해서 주의 일을 감당해야겠다고 두 사람이 마음을 모아 바울을 섬기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행 18:24-26)

아볼로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학생 같은 사람입니다. 집안도 좋고 많은 학식이 있었지만, 예수에 관한 것과 요한의 세례까지만 알고 있었습니다. 더 깊은 세계, 더 깊은 성령의 세계, 영적인 세례에는 무지한 사람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의 설교를 듣고 보니, 그의 자질이 훌륭했기에 불러서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제대로 세우면 훌륭한 목회자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평신도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초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풀어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볼로가 깨닫게 됩니다. 그 당시 고린도교회에 목회자가 비어 있었는데, 1대 목회자가 바울이었고, 두 번째 목회자로 아볼로를 파송해 주었습니다. 두 사람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복음 안에서 일치를 이루었고, 두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아볼로라는 위대한 인물을 길러내어 고린도교회 사역자로 파송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바울은 3차 선교여행 때 에베소로 가고 싶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에베소에 먼저 가서 그곳을 개척했습니다. 두란노 서원을 세워두고, 바울이 와서 설교만 하면 되도록 모든 제반 문제와 상황들을 정리해 두었습니다. 바울이 그곳에서 3년 동안 눈물로 복음을 전해 에베소가 위대한 복음의 현장이 되도록,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먼저 터전을 닦아 놓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바울이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말했습니다. 그러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에베소를 떠나 로마로 갔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서를 쓰면서, 이미 로마에 가서 바울의 사역을 위해 준비하고 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고마움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롬 16:3-5a)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가정교회를 세우고 복음의 불모지에 들어가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워 놓았습니다. 언젠가 바울이 로마에 오면 그 성도들을 기틀로 삼아 교회를 세우라고 자기들의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 바울의 사역이 위대해졌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 사역은 귀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만약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도 이런 일을 반대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는 좀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너무 별나게 예수 믿지 말고 편안하게 예수 믿고 싶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이렇게 위대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브리스길라는 사라의 역할을, 아굴라는 아브라함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일치가 되었기에 하나님은 그 가정에 마음껏 하나님의 일을 맡기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바꾸어 주신 것은 앞으로 이 가정에 많은 일을 맡기시겠다는 것을 이미 암시하시고 복선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의 극복과 성숙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꾸라고 하신 두 번째 이유는 사라를 복음 사역의 또 다른 한 기둥으로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고 훌륭한 인물이었으며, 사라는 그저 동역자로서 뒷받침만 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도 복음사의 한 축으로, 사라도 복음사의 또 다른 축으로 세우셨습니다. 성경은 남녀를 차별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남성 편향적인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대로, 사라는 사라대로 구원과 복음을 위한 훌륭한 도구로 준비해 두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사래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사래가 사라가 되어야 복음 사역의 기둥 같은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래는 공주요 여왕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공주와 여왕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이 준비되고 돌아가야 합니다. 주변의 몸종과 시종들이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해 주어야 하고, 하나라도 거슬리면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사래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품는 존재입니다. 용서하고 섬기는 존재입니다. 나는 못 입고 못 먹고 원하는 것 하지 못하지만,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감당하는 것이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한 가정의 어머니가 아닌 열국을 섬기는 어머니, 모든 사람들을 가슴에 품는 어머니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라의 역할입니다.

자기중심성을 극복해야 복음사의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녀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은혜받기 전에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나를 위해 살아가고, 나에게 덕이 되면 하고, 나에게 해가 되면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 생활을 하면서 성장해 갑니다. 사래의 삶에서 사라의 삶으로 바뀌어 가는 것, 우리는 이것을 성장이라고 부릅니다.

성장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장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인 성장이 있습니다. 비가시적인 성장을 우리는 성숙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하나님은 사래를 사라로 부르시면서 성숙한 존재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래가 하나님을 만나서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은혜를 경험했습니까?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장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성숙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이타적인 삶으로, 사래의 삶에서 사라의 삶으로 옮겨가서 사람을 품는 자가 되어야 복음의 한 축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면서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눅 9:52-54)

전도하는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태워 죽이자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였던 야고보와 요한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오랫동안 예수님을 섬기고 따라다녔지만, 여전히 그들은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힌 것은 인정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하늘에서 불을 내려 멸망시켜 달라고 말할 정도로 자기중심성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받은 이후에 그들은 성숙해졌습니다. 야고보는 사도들 중에 첫 번째 순교자가 됩니다. 순교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내 목숨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 목에 칼이 들어오는데 어떻게 그 자리에서 내가 예수 믿겠다고 그대로 버티고 있겠습니까? 그런데 야고보가 변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복음을 위한 훌륭한 도구로 변했습니다. 성장했고 성숙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 중 첫 번째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요한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7-8)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말합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을 하늘에서 불을 내려 태워버리면 좋겠다던 요한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외치는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사도가 되어 사람을 품는 자가 되니 하나님께서는 요한을 통해 복음사에 훌륭한 일을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이것이 성장이요, 이것이 진정한 성숙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십시오. 예수 믿으면서 수년, 수십 년 동안 눈에 보이는 성장은 이루었습니다. 직분도 받았고, 교회 봉사도 하면서 가시적인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의 성숙은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 여전히 공주로, 여왕으로 인정받고 대접받으려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불편한 말 한마디를 하면 그 말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화가 나고 견딜 수 없어 하지 않습니까? 내 마음속에 한 사람도 품을 수 없을 만큼 아직까지 좁쌀만 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야 어떻게 우리가 복음을 위한 훌륭한 도구가 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섬기고, 이웃을 돌보고, 누군가 불편한 말을 하더라도 그들을 끌어안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하고 나아가야 하나님이 나를 마음껏 복음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사래의 인생에 머물러 있어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사라의 삶으로 바뀌어야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부디 우리 인생을 돌아보며 나는 아직도 사래적인 인생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께서 나를 사라로 바꾸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맡기려 하시는데 나는 그 부르심에 어느 정도 응답하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를 말씀에 비추어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현실에 짓눌린 믿음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주시는데, 이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창 17:17)

아브라함이 이 말씀을 듣고 엎드려서 웃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아브라함의 웃음은 무슨 의미입니까? 기뻐서 웃은 것입니까? "하나님, 드디어 제게 자식을 주시는군요. 그토록 바라고 원했는데 이때가 하나님의 때이군요!" 이렇게 기뻐하며 웃은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 웃음은 헛웃음입니다. 비웃음입니다. 불가능하다는 표현입니다.

'내가 건강할 때, 내가 남자의 기력이 있고 내 아내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상황이 될 때 하나님께 달라고 했을 때는 주시지 않더니, 지금 와서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나는 남자의 기력이 떨어졌고, 내 아내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이제 와서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현실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이런 식으로 반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며 '내가 아는 아브라함이 이렇게 반응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좋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반응했을까요? 그는 이 현실을 뼈저리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을 알고, 아내의 몸을 알았습니다. 내년이 되면 백 세가 되고, 아내는 구십 세가 됩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이 믿음을 짓눌러 버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현실, 사라의 현실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현실을 넘어서는 말씀을 주시는데, 자기 앞에 닥친 현실이 압도적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고 받아들일 여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비난하지만, 사실 우리도 똑같은 전철을 밟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눈앞에 어떤 현실이 있습니까? 피곤하고 힘들고 어려운 현실이 매일같이 다가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이 현실을 뛰어넘어 극복하라는 말씀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성경은 옛날이야기이고, 과거에는 그렇게 되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현실은 과거 성경 속의 현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어렵고 힘든 현실이다. 하나님은 우리 속도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다.' 우리도 하나님 말씀 앞에서 엎드려 웃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우리도 똑같이 현실과 상식 앞에서 무너져 내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 도처에는 현실과 상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가 얼마나 많이 나타납니까?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비현실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칼과 창과 단창으로 중무장한 훈련받은 골리앗, 그 당시 최고의 장수 골리앗을 맨몸의 다윗이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며 물맷돌을 던져서 이겼습니다. 믿음이 현실을 뛰어넘는 순간입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은 모압과 암몬 군대와 맞서 싸울 때 앞이 캄캄했습니다.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쳐들어오는데, 유다의 군사력으로는 그들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전쟁할 때 찬양대를 앞세웠습니다. 군인이 아니라, 중무장한 화기가 아니라, 찬양대를 앞세웠습니다. 그런데 승리했습니다.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대하 20:21-22)

노래하는 자들에게 예복을 입혀서 앞장세웠습니다. 전쟁하는데 찬양대가 앞서 나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합니다. 이런 전쟁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복병을 두셨습니다. 그 복병은 유다의 군인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천군 천사,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그 군대가 모압과 암몬 연합군을 쳐서 이겼습니다. 비상식적인 일 아닙니까? 현실을 뛰어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그런 놀라운 사건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 창조의 법칙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면, 믿음을 가진 자들을 보시면,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 창조와 운행의 법칙을 뛰어넘어서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하란에서 가나안 땅으로 올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왔습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면서 "네 자손이 저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 말씀하셨을 때도 아브라함이 이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이를 그의 의로 여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정도로 믿음 좋았던 아브라함이 왜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까? 하나님께서 상식과 현실을 초월하는 믿음을 요구하시는 말씀을 하시는데, 왜 하나님 앞에서 비웃는 표정을 하고 안 된다고 부정했을까요?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이렇게 된 이유는 잃어버린 13년 때문입니다. 이스마엘과 보냈던 13년, 그 13년 동안 아브라함은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자기 일생의 가장 빛나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아브라함의 믿음의 석빙고에서 그의 단단하고 여물었던 얼음이 점점 녹아서 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자기 일생의 가장 빛나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아브라함의 믿음의 석빙고에서 단단하고 여물었던 얼음이 점점 녹아 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그는 그 믿음의 창고를 열고 자신의 믿음을 계속해서 채워 넣고, 말씀과 기도와 예배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그 믿음을 견고하게 해야 했건만, 13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이 순간에 하나님을 비웃고 말았습니다.

언제가 진짜 위기입니까? 내 인생에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사업이 파산하고, 눈앞에 여러 가지 문제들이 나타날 때 우리는 그때를 위기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위기, 진짜 위기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시작됩니다.

"나는 평안하다"고 말할 때,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때, 내 인생의 가장 화려하고 가장 아름다운 일이 항상 나에게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할 때, 그때 우리는 영적인 기본 생활을 게을리하여 내 마음속에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을 모시고 살면서, 그 우상 때문에 내 믿음의 석빙고의 얼음이 끊임없이 녹아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 그때가 진짜 위기입니다.

사탄은 이런 상황을 보고 우리를 한 번에 흔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견딜 믿음이 없습니다. 그것을 견디고 이겨낼, 우리의 믿음을 뒷받침할 믿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진짜 위기는 그때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지금 혹시 위기 상황에 있지 않느냐? 네 믿음의 창고를 열어서 강도를 측정해 보고, 얼마나 크고 단단하게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다시 영적인 기본 생활에 충실히 하며, 우리 믿음을 돌아보는 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래의 삶에서 사라의 삶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가정의 일치와 동역을 위해서, 복음사의 또 다른 기둥을 세우시기 위해서 사라의 삶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나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는 평안하다, 괜찮다, 문제없다 말하고 있었지만, 잃어버린 13년 동안 자기 믿음의 창고에 얼음이 녹고 있는 줄 몰랐던 아브라함처럼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여, 코로나 2년 6개월 동안 우리는 이렇게 믿음 생활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저 이렇게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며 살았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다시금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게 하시고, 믿음의 창고를 살피게 하여 주시고, 영적인 기본 생활을 충실히 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강도를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