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이라 하라
본문: 창세기 17:18-27
지난 2020년 국정감사에서 현재 화폐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한국은행 본관의 정초석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1909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정초'라는 두 글자를 자필로 썼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느냐, 알았다면 왜 방치했느냐, 이제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를 두고 정치권의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처리 방안을 두고 오랜 공방이 있었습니다. 철거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그대로 두자는 사람도 있었고, 길바닥에 깔아서 오가는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게 하자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결론은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그 앞에 안내판을 설치하여 후세대들이 역사의 아픔을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도록 했습니다. 탁월한 결정이었습니다. 역사에는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고 아픔의 역사도 있습니다. 눈 감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떼어내고 없앤다고 해서 그 수치와 굴욕의 기록까지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정면으로 응시하고, 살펴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서울 송파 석촌호수 주변에 가면 삼전도비가 서 있습니다. 이 비석은 1639년에 청나라 태종이 조선을 정복하고 인조 대왕의 항복을 받은 기념으로 세운 것입니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고종이 왕이 되면서 보기 싫다고 한강에 던져 넣으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데 1913년에 일제가 다시 비석을 건져 올렸습니다. 조선이 본래 외세의 침략과 압제를 받아온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굴욕을 주기 위해 버젓이 전시해 두었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주민들이 그 비석을 보기 싫어 땅을 파고 묻어버렸습니다. 그런데 1963년 대홍수가 나자 땅에 묻혔던 비석이 다시 드러났습니다. 그때 정부는 비석을 한강에 넣지도, 없애버리지도 않고, 아예 모든 사람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전시했습니다.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또한 탁월한 결정이었습니다.
역사는 인간의 실수와 죄에 의해 한순간 굽어가기도 하고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을 통해서도, 전 세계의 역사를 통해서도 당신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풀어가시고, 해결하시고,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도 그렇게 일하셨습니다.
문턱에 머문 13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의 여정을 걷기로 결정하시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주지 않았습니다.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13년 동안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하나님과 별다른 교제 없이 지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지방에 웅크리고 있는 그에게, 문턱에 머문 그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주시며 다시 일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오셔서 '아브라함'이 되게 하셨습니다. '존귀한 아버지'가 '열국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사래'를 '사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공주와 여왕으로 군림하던 자가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열국의 어머니가 되어 품고 섬기고 먹이는 자가 되라 하시고, 할례하라고, 내 언약을 맺자고 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엎드려 그 이야기를 듣다가, 92세 된 자기 아내가 아이를 낳는다는 말씀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웃음, 기쁨의 웃음이 아니라 비웃음이었습니다. 쓴웃음이었습니다. 불가능하다는 체념의 웃음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된 것일까요? 그 큰 믿음을 가졌던 아브라함이 13년 동안 자기 믿음의 창고가 텅텅 비는 줄도 모르고, 믿음의 얼음이 녹아가는 줄도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어서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웃고 난 후에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하고 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 17:18)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충분히 설명하고 알아듣게끔 말씀하셨는데, 이런 말을 들으시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힘이 빠지셨겠습니까? 대화를 하다 보면 진도가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제가 있어서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서로 대화를 나눕니다. 문제를 풀어갑니다. 잘못한 것을 사과합니다. 앞으로의 비전을 제시하며 이렇게 한번 해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일이 잘 풀려가는 것 같습니다. 이제 합의하고 악수하고 헤어지면 되는 상황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다시 제자리입니다. 돌고 돌아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런 대화 상대를 만나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다시는 이 사람과는 말 않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힘이 빠지지 않겠습니까? 아마 하나님께서 지금 아브라함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와 같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13년간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할례 언약을 맺으라 하시고, 아내를 통해 자녀를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나오는 아브라함의 반응이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합니다'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의 특징을 '문턱에 주저앉아 있는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조금만 더 가면 금은보화가 있는데, 도끼로 땅을 파면 엄청난 것이 있는데, 얕은 물가에서만 헤엄치고 있는 것입니다.
운동 선수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감독이나 코치가 볼 때 이 단계만 뛰어넘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는데,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는데, 그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딱 걸려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도자가 손을 뻗어서 끌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도자가 내미는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문턱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미신 손, 붙잡아야 할 손
아브라함이 지금 안 된다고 포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하나님이 손을 내밀어 주셔야 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날 때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행 3:2)
나면서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경제활동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2000년 전 그 시대에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먹고살 길이 막막합니다. 그런데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인지 동네 사람들인지 모르지만, 그를 날마다 메어다가 성전 문에 데려다 두었습니다. 구걸해서 먹고 살라고 성전에 출입하는 사람이 많은 미문 앞에 이 사람을 매일 데려다 놓았습니다. 아침이 되면 집에 가서 이 사람을 메고 거기에 데려다 놓고, 하루 일과가 끝나면 다시 집에 모셔다 주었습니다. 매일같이 이렇게 했습니다. 아마 이 친구들은 보람 있었을 것입니다. 몸이 불편한 친구를 먹고 살게끔 도와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는 알고 더 중요한 것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전 문턱에 매일 이 사람을 두었습니다. 성전 문턱을 넘어가면 바로 성전인데, 성전 안으로는 단 한 번도 이 사람을 데려다 준 적이 없습니다. 성전 문지방만 밟게 하고 성전 미문에 매일 이 사람을 두고 있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해 주었을지 모릅니다. 배가 고픈 것, 먹고사는 것은 걱정 없게 해주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사람의 영혼 아니겠습니까? 매일같이 이 사람을 메어다가 미문에 두면 오가는 사람들이 돈을 던져주어 먹고사는 것은 해결되었을지 몰라도, 이 사람의 영혼은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살다가 생명이 다하면 이 사람의 영혼은 누가 책임져 줍니까?
이 문제를 베드로와 요한이 주목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하루는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다가 성전 문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을 보았습니다. 눈이 마주쳤습니다. '이 사람이 왜 나에게 돈을 던져 주지 않고 그냥 쳐다보는가' 하는 눈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봅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 사람에게 강력하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행 3:6-8)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중요한 세 가지가 보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어나 걸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말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7절에 보면 오른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줍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말로만 그치지 않고 이 사람의 손을 잡아 세워주었습니다. 8절에 보면 함께 서서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람이 여기에 머물지 않도록, 성전 문지방에만 머물러 있지 않도록 그를 잡아 세워주고, 성전에 함께 데리고 가서 영혼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해주었습니다.
사탄이 이 사람에게 속삭이지 않았겠습니까? '평생 동안 여기에 있는 것이 너에게 복이다. 성전 미문이 너에게 가장 중요한 자리다. 이 자리를 절대로 벗어나지 마라. 누군가 너의 병을 고쳐준다 하더라도, 누군가 너를 이 자리에서 옮겨준다 하더라도 꼼짝도 하지 말고 이 자리에 머물러 있으라. 이 자리보다 더 좋은 자리가 너에게 있겠느냐? 만약 네가 병이 낫고 나면 그 다음은 이 험한 세상에서 돈을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건 또 힘든 일이니, 평생 동안 어차피 이렇게 살았으니 너는 여기 문턱에 주저앉아서 구걸하고 살고 있으면 먹고사는 걱정 없지 않느냐.' 사탄은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탄의 권세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베드로와 요한이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서 세워주었습니다. 만약에 날 때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이 사람이 '나는 싫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손을 잡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그냥 이 자리에서 구걸하고 사는 것이 좋습니다' 하고 거절했더라면, 그 사람은 평생 그렇게 살다가 죽어가는 인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전에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하고, 영혼 구원 얻지 못하고, 먹고사는 것만 해결하며 살아야 하는 인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은 손을 내밀었고, 그 사람은 두 사람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함께 일어나서 성전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 이후에 그에게는 더 큰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영혼 구원을 얻었지만, 차가운 현실은 그때부터 그는 더 이상 구걸하고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몸으로 일해서 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평생 동안 한 번도 직업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이 험한 세상에서 일하며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턱을 넘어서 성전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를 붙들고 있는 문턱이 무엇입니까? 이 두 사람이 머물러 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이스마엘이라는 자리 아닙니까? '그냥 이스마엘로 나는 만족합니다. 나는 그저 이스마엘 하나로 족합니다. 내 나이가 100살이 되고 내 아내의 나이가 90이 되었는데, 이제 나에겐 약속이라고는 없을 텐데, 그냥 이것으로도 나는 만족합니다. 저는 여기에 그냥 머물러 있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초대하십니다. 하나님이 손을 내미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에게 손을 내민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창 17:19)
'아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는 말씀이 자주 나오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아발'은 '참으로, 진정으로'라는 의미입니다. '아니라, 참으로, 진정으로 네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아줄 것인데 그의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너는 지금 이스마엘에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너는 지금 너의 나이가 100세이고 아내의 나이가 90세라고 거기 그 문턱에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내 손을 붙잡고 일어나야 할 존재다.' 하나님은 그렇게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이제 공은 아브라함에게 넘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손을 붙잡든지, 손을 뿌리치든지, 둘 중 하나가 아브라함의 결정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뿌리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치면 그는 앞으로 '아브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존귀한 아버지로, 한 사람 이스마엘에게만 매여 있는 아버지로 살아야 합니다. 뿌리치면 사라는 어떻게 됩니까? 공주와 왕비로, 자기중심적인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기중심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할례도 필요 없습니다. 결단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아브라함에게 속삭입니다. '열국의 아버지가 되는 것, 열국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아느냐? 네 나이가 100살인데, 네 아내 나이가 90인데, 이제 여기서 포기하고 그냥 이스마엘로 만족하라.' 하나님은 '아니라' 하시고, 사탄은 '여기에 머물라' 합니다. 이 선택 가운데 무엇을 붙잡아야 합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손을 붙잡은 자도 있고, 하나님의 손을 뿌리친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손을 뿌리친 자가 가인입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분노를 동생을 향한 살인 충동으로 쏟아냅니다. 동생을 죽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아셨습니다. 가인에게 찾아가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손을 내밀었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살인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죄의 문턱을 넘어서 멀리 가지 말고 내 손을 붙잡고 이리로 건너오라' 하고 하나님이 가인에게 초대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때 가인은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하나님의 품에 안겨야 했습니다. 살인의 충동을 억누르고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결단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손을 뿌리칩니다. 살인하고 말았습니다. 들에 있을 때 돌을 가지고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반대편으로 더 멀리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이후에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누군가가 나를 죽일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삽니다. 두려워서 죽을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내가 너에게 표를 주마, 나를 떠나지 말라, 나와 함께 머물라.' 그런데 가인이 다시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기 싫습니다. 가인은 다시 하나님을 떠나 동편 놋 땅에 가서 성을 쌓아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단절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나타나셔서 두 번이나 손을 내밀었습니다. 죄의 문턱을 넘지 말라고 손을 내밀었고, 하나님을 떠나지 말라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두 번이나 하나님의 손을 뿌리치고 자기 마음대로 떠나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상관없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 역시 그의 가정이 소돔 땅에 거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소돔 땅을 유황과 불로 멸하고 싶으셨습니다. 심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롯의 두 사위는 하나님의 거짓 심판 명령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천사들이 롯과 그 가족의 손을 붙잡고 이끌어 냈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창 19:17)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창 19:26)
천사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냈습니다. 손을 잡고 이끌어냈습니다. '들에 머물지 말고 도망하라, 끝까지 도망가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그들의 손을 붙잡아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런데 롯의 아내는 그 손을 뿌리치고 뒤를 돌아봅니다. 자신의 재산과 집이 불타고 있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땅에 두고 온 것, 돈이 아까워서 뒤를 돌아봅니다.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불행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손을 뿌리쳐서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었고, 가인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아브라함이 기로에 서 있습니다.
가짜를 끊어내고 진짜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실 때, 문턱을 넘으라고 말씀하시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가 문턱을 넘고 있지 못합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내 건강 때문에, 혹은 내 가정의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 때문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자신감이 없어서, 혹은 내 나이 때문에, 가짜에 속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마엘은 가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닙니다. 사라를 통해서 출산한 자녀가 진짜입니다.
사탄이 속삭이는 그 가짜에 속아서 '나는 이 가짜와 영원히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아니라, 그런 가짜에 속지 말고 이삭이라 이름하라' 하시며 진짜를 기다리라고, 내 손을 붙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머물러 앉아서 하고 싶은 것, 혹은 우리 앞에 놓인 모든 것들을 돌아보면, 우리는 가짜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손 내밀어 주실 때 그 진짜를 향한 믿음의 여정을 향하여 걸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제 아브라함에게는 한 가지 걱정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싶기는 한데, 진짜를 향해 달려가고 싶기는 한데, 걱정되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스마엘입니다. 13년 동안 길렀지 않습니까?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열심히 키웠지 않습니까? 그런데 내 아내 사라를 통해서 아이가 태어나면, 이 아들 이스마엘, 13년 동안 키운 열세 살짜리 아들 이스마엘은 어떻게 됩니까? 이것이 걱정됩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창 17:20)
한마디로 말하면 '걱정하지 마라, 내가 책임지겠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왜 이스마엘을 걱정하느냐? 내가 책임진다. 내가 돌보고 내가 책임질 테니 너는 내 손을 붙잡고 따라오기만 하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하다못해 구역장을 해도, 교회학교 교사를 맡아도, 크고 작은 봉사의 직을 감당하려고 해도 걱정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내가 지금까지 보내왔던 시간을 이런 일을 하면 누릴 수 없을 텐데, 내 남편 밥은 누가 해주고, 내 자식들과 내 가족은 누가 챙겨주나 하는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걱정을 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다 책임지고 내가 다 돌볼 테니 걱정 말고 내 손만 잡고 따라오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이 말씀대로 걱정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지금도 우리에게 여전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기 전에 염려하는 것이 많습니다. 주께서 붙잡고 아브라함의 인생을 살고 사라의 인생을 살려고 하는데 염려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 것 염려하지 말라, 내가 다 돌보고 책임질 테니 너는 나만 믿고 따라오라' 말씀하십니다.
이제 드디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결단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의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아브라함이 그의 포피를 벨 때는 구십구 세였고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의 포피를 벨 때는 십삼 세였더라" (창 17:23-25)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는 잘라내는 것, 결단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지난 인생을 잘라냈습니다. '이제는 존귀한 아버지로 삼지 않겠습니다. 이제 저는 열국의 아버지가 되겠습니다.' 사라의 인생을 잘라냈습니다. '이제 저는 자기중심적으로 공주와 여왕의 인생을 살지 않겠습니다. 열국을 품고 섬기는 열국의 어머니가 되겠습니다.' '이제 저는 가짜인 이스마엘에게 집착하지 않겠습니다. 진짜를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손잡고 나아가겠습니다.' 이 결단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은 여기가 분기점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인생은 경계선상에서 살고 있었던 인생입니다. 가짜와 진짜 사이, 이스마엘과 이삭 사이, 가짜에 속아서 13년 동안 그것이 진짜인 줄 알고 살았던 어리석은 인생이었습니다. 그 문턱에 주저앉아서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니라' 하시고 '내 손을 붙잡고 일어나라' 하시니, 여기서부터 진짜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믿음생활을 하고 있는데, 우리 신앙생활이 진짜 믿음의 신앙생활인지, 아니면 가짜에 속고 여전히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믿음을 정직하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가짜에 속지 말고 내 손을 붙잡고 다시 일어서라'고 말씀하시는 이 도전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 말씀 붙잡고 일어나서 앞으로 전진하고,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니라' 하시고, 지금까지 우리가 믿고 있었던 것, 붙잡고 있었던 것, 진짜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이스마엘 같은 가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스마엘을 진짜로 생각하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13년 동안 주저앉아 있었고,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했던 아브라함처럼 우리는 그렇게 문턱에 주저앉아 있지는 않았는지, 주님, 우리의 믿음을 다시 돌아봅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러 있었던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고, 이제는 결단하고 믿음의 손에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 앞으로 전진하고 나아가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도록 도우시고,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믿음의 백성으로 온전히 세워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