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본문: 창세기 18:1-8
전국 각지에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빵집들이 있습니다. 지역을 대표하는 빵집은 유명하기도 하고 매출도 상당합니다. 대전에 가면 성심당이라는 빵집이 있는데, 이 빵집이 시작된 유래가 은혜롭고 의미 깊습니다. 1997년에 작고하신 김길수 순신은 성심당의 창업주였는데, 이 분은 1950년 흥남 부두 철수 때에 빅토리아 호를 탔습니다. 사선을 넘나들며 가족과 자녀들을 데리고 빅토리아 호에 올라 피난을 왔습니다. 거제 수용소를 거쳐 진해와 부산을 전전했지만 먹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데리고 사람들이 많이 사는 서울로 가면 좀 낫겠거니 하고 1956년에 기차를 타고 서울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서울행 기차가 대전에서 고장이 나버렸습니다. 기약이 없었습니다. 언제 수리가 되고 언제 고친다는 이야기도 없이 마냥 기다리라고만 합니다. 어린 자녀들은 배고프다고 야단입니다. 하는 수 없이 정처 없이 자녀들을 이끌고 대전에 내렸습니다. 가장 가까운 성당에 갔습니다. 성당 신부님께 자신들의 사연을 말했더니 신부님이 말없이 밀가루 두 포대를 주었습니다. 그것으로 찐빵을 만들어 대전역 앞에서 팔았습니다. 그것이 대전 성심당의 시작입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빵집은 부흥했고, 날이 갈수록 장사가 잘되어 지금의 유명한 빵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창업주인 김길수 씨는 그때부터 시작해서 밀가루 두 포대를 거저 받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은혜로 받았기 때문에, 하루에 만드는 빵의 3분의 1은 나누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돌아가실 때까지 실천했습니다. 지금은 아들인 김대진 씨가 이어받아서 운영하고 있는데, 한 달에 약 3천만 원어치의 빵을 사회복지시설에 기부하고 있습니다.
원래 은혜를 베푸는 것은 물처럼 위에서부터 아래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은혜를 받고, 우리가 은혜를 베풀 만한 때가 되고 시기가 되면 다시 우리도 받은 은혜를 누군가에게 흘려보내고 삽니다.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얼마나 값지고 얼마나 큽니까?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우리는 때가 되면 하나님의 백성들인 주변 이웃들과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풀며 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의 삶을 살펴보고 우리도 베풀고 나누고 흘려보내는 삶을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그네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창 18:1-2상)
하나님이 천사 둘을 데리고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천사 둘을 수행원 삼아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십니다. 특별한 방문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런 식으로 찾아온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실 때 항상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는 분 아닙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누구에게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찾아오셔서 그를 가나안 땅으로 부르실 때도 말씀하셨고, 그에게 교제하시고 그에게 명령하실 때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찾아오십니다. 그것도 두 천사를 데리고 세 명이 함께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하게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이 장면은 두 가지 의미에서 특이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왕의 행차를 달리고 찾아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100미터 전부터 수행원들이 쫙 늘어서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연도에 도열하고, 왕의 행차를 알리는 풍악이 울리고 나팔을 불고, 야단법석이 났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극진히 최선을 다해서 왕을 대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왕의 행차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주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 평범한 모습은 바로 나그네의 모습이었습니다. 나그네는 영접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유롭습니다. 그냥 눈 딱 감고 흘려보내도 그만입니다. 나랑 상관없는 사람 아닙니까?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는 사람이 나그네인데, 그 사람을 영접하고 대접을 하건 그렇지 않건 나에게는 전혀 부담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나그네로 우리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성경은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 (신 10:17-19)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그네에게 떡과 옷을 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그네를 특별히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자를 하나님은 사랑을 베풀라고 하십니다.
우리 예수님의 비유에도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5)
종말의 때에 양과 염소를 나누는데, 양의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말합니다. "내가 특별히 잘한 것도 없는데 왜 이 자리에 서 있습니까? 내가 언제 주님을 모시고 섬겼습니까?" 이렇게 질문했더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나그네를 영접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나와 관계에 있는 사람은 잘 섬깁니다. 말하지 않아도 명령하지 않아도, 사업 관계에, 이해관계에 걸려 있는 사람을 우리가 극진히 접대하지 않습니까? 우리 자녀와 관계에 있는 사람도 우리 아이가 혹시 불이익을 당할까 봐 얼마나 극진히 잘 섬기고 눈치까지 봅니까? 나와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나그네는 언제 봤다고 우리가 그 사람을 잘 섬기겠습니까? 특별히 날이 뜨거울 때 나그네로 우리 하나님이 천사들과 함께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런 존재는 귀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 나그네의 모습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예고 없이 찾아오신 하나님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의 두 번째 의미는 예고 없이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집에 몇 날 몇 월 며칠에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 아브라함이 아마 한 달 전부터 야단법석이 났을 것입니다. 열심히 준비하고 열심히 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예고 없이 불쑥 찾아가십니다.
이것은 종말의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음을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막 13:32)
종말의 때는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하늘 아버지만 아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종말의 때 누구도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가정에 찾아오신 것으로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앞으로 종말의 때 이런 식으로 부지불식간에 불쑥 찾아갈 텐데, 그때 너희는 나를 어떻게 맞이할 것이냐?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영접하면 됩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 (창 18:1)
"날이 뜨거울 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아 있다가"라는 말은 논리적으로 모순입니다. 왜냐하면 팔레스타인 가나안 땅에 날이 뜨거울 때는 오침식 시간입니다. 워낙 더우므로 그 시간에 쉬어 줘야 됩니다. 그래야 활동할 수 있고 생산성을 가지고 일할 수 있습니다. 날이 뜨거우면 당연히 시원한 나무그늘에서 쉬든지, 집 가운데 시원한 곳에 가서 낮잠을 청하고 있어야 되는데, 아브라함은 장막 문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입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기름을 준비하고 항상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지혜로운,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우리가 잠들어 있지 말고, 우리의 영이 깨어서 하나님이 언제 오시든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언제 재림하시든지 간에 우리는 그때와 시를 놓치지 않고 깨어 있으라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있지 말고 깨어 있으라! 우리는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처럼 누구 하나 허투로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걸 보여줍니다. 극진히 섬겨야 될 사람이 따로 있고, 함부로 대우해도 될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준 하나님의 형상의 사람, 각 사람 각 사람은 다 존귀한 분들입니다. 그 사람이 나그네이건, 아니면 존귀한 직책을 가진 사람이건, 몸이 불편한 사람이건,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 그것은 곧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과 똑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것은 바로 우리에게 그 사실을 극명하게 알려주는 사건입니다.
받은 은혜를 고백하는 영접
이제 하나님과 두 천사를 맞이하는 아브라함은 어떤 자세로 나그네를 영접합니까?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옵고" (창 18:2-3)
달려나갔습니다.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혔습니다. 온몸으로 표현합니다. 반가움을, "우리 집에 들어오십시오" 하는 마음을 진심으로 자기의 몸을 다해서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다음 이어지는 말입니다.
-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 "주께"라는 표현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이분들이 하나님과 천사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나친 추측입니다. 왜냐하면 롯도 이렇게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저녁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창 19:1-2)
롯은 어떤 사람입니까? 롯은 영안이 어두운 사람 아닙니까? 소돔 성에 가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도 천사를 보고, 나그네를 보고 "주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나가는 낯선 사람을 극존칭으로 존대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아서 표현한 것이 아니고, 지나가는 나그네를 극존칭으로 존대하면서 "주께"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이라는 표현입니다. 사실 생면부지의 사람들 아닙니까? 지나가는 나그네 세 명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사람들을 지금 처음 만났습니다. 은혜를 입은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이 사람들에게 도움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지금 아브라함은 자기 이름대로 삶을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존귀한 아버지입니다. 지금 날이 대단히 무더운 시간입니다. 만약 그가 아브람으로 살았다면, 존귀한 아버지로 살았다면, 시원한 나무그늘에서 두 다리 뻗고 편히 쉬었을 것입니다. 그게 존장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존귀한 아버지로 만족하지 말라, 열국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되라, 그래서 많은 사람을 섬기고 돌보고 품어 안는 사람이 되라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살과 피를 떼어 냈습니다. 결단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가 앞으로 그렇게 살겠습니다" 결단했습니다. 결단하고 난 이후에 아브라함은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장막 문에 앉아서 열국을 섬기는 사람으로, 내 집에 지나가는 나그네부터 내가 그냥 흘려보내지 않으리라 결단하고 이 무더위에 사람을 영접하고 돌보고 섬기는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결단한 대로 잘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살펴보려고 땅에 내려오셨는데, 그냥 지나가도 그만인데 아브라함은 달려가서 영접하고, 몸을 땅에 굽히고,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그저 지나가지 마시고 내 집에 들어와서 쉬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아브라함을 보고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얼마나 고마워하셨겠습니까?
사실 결단하는 것을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하루에도 열두 번 더 결단하지 않습니까? 설교 들을 때 결단하고, 성경 읽을 때 결단하고, 내가 잘못 살았음을 깨달았을 때 결심하고, 다시는 이렇게 살지 않아야 되겠다고 결단하고, 결단을 밥 먹듯이 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결심하고 기억하는 것과 이것이 삶으로 나와서 삶으로 옮겨지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힘든 문제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결단했기 때문에, 그가 원래 사람이 좋아서 사람을 집에 초대하고 모시고 함께 먹고 마시는 걸 좋아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아브라함의 삶으로 결단했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제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아브라함은 이를 꽉 깨물고, 귀찮지만, 피곤하지만, 힘들지만, 그러나 사명을 감당하는 자세로 이렇게 성실하게 살아내고 있는 중입니다.
둘째,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이라는 이 말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이렇게 말로 표현하며 신앙고백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그의 가정을 불러내시고, 하란에 머물러 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다시 찾아서 불러내십니다. 애굽으로 갔을 때 아내를 빼앗길 뻔했는데 하나님이 다시 되찾아 주셨습니다. 왕들의 전쟁에 무모하게 뛰어들었는데 거기서도 하나님이 건져 주셨습니다.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13년 동안 이스마엘에게 빠져서 하나님을 떠나 살았는데 다시 찾아오시고,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 말씀하시고 그를 다시 신앙의 궤도 위에 세워 건져 주셨습니다.
돌아보니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인생은 하나님을 위하여 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풀어보니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한 것이 크고 값지고 놀랍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그는 드디어 깨닫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하나님께 받은 사명으로, 아브라함다운 삶을 감당하면서 갚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원래 사랑은, 은혜는 물처럼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았으니,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것 아닙니까? 우리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 10:8)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거저 받지 않았느냐, 고기 잡다가 제자가 되고, 세관에 앉아 있다가 제자가 되고, 너희들이 택함 받아서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는데, 구원을 거저 받았는데, 능력도 거저 받았는데, 베풀고 거저 나누어 주라, 포도주와 젖을 사라, 값없이 돈 없이 와서 마음껏 먹고 마시라" 우리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잘 기억하니 그 은혜가 값져서 그저 베풀고 나누고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런 귀한 은총이 있기를 바랍니다. 돌아보고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잠깐만 생각해 봐도 구원받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지금 이렇게 말짱하게 건강하게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가정을 이루고 자녀들 건강하게 취직 입장과 가고 공부하고 사회인으로 살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인생의 부침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흡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우리는 그저 받은 은혜를 그저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색하게 굴지 말고 그저 나누고 베풀고, 하나님의 은혜를 아브라함처럼 잘 흘려보내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이 하나 되어 섬기다
이제 아브라함은 구체적으로 나그네들을 어떻게 대접했습니까?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하는지라" (창 18:6-7)
아브라함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라도, 하인들도 가정의 일치를 보여주며 일사분란하게 나그네를 대접합니다. 사라에게 가서 고운 가루를 가지고 떡을 만들라 합니다. 하인에게 가서는 송아지를 주고 송아지 요리를 얼른 준비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의 가정이 하나가 되고 혼연일체가 되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만 아브라함으로 바꾸지 않고, 사래도 사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만약 사래 그대로 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 무더운 날에 남편이 손님 셋을 의논도 하지 않고 집에 데리고 왔습니다. "당신이 데려왔으니 당신 마음대로 하라, 이 무더위에 지금 못 할 짓이냐"고 짜증 내고 화냈을 것입니다. 지금 편하게 쉬어야 하는 이때 "지금 당신 못 할 짓이냐"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는 예전의 사래가 아니었습니다. 공주가 아니었고, 여왕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아니고 열국을 섬기는 어머니입니다. 열국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지나가는 나그네를 남편이 모시고 오면 함께 합심해서 같은 마음으로 그를 섬기고 돌봐 줍니다. 최선을 다해서 영접합니다. 뜨거운 여름에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는데 불 앞에 앉아서 떡을 만들고 있습니다. 빵을 구워서 나그네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인들이 이렇게 하니까 하인들도 은혜를 받습니다. 그들도 쉬어야 되는데, 하인도 송아지 잘 잡아서 열심히 섬기고 열심히 대접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9장을 보면 롯의 가정이 나오는데, 롯의 가정에는 롯만 바쁩니다. 롯의 아내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대로 부장이었습니다. 소돔 성에서 굉장한 부자였는데, 롯의 아내가 함께 동역하지 않으니 내어놓은 것이 무교병밖에 없었습니다. 맛없는 무교병, 아무것도 가정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바꾸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동역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가정에 부부의 일치가 되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위대한 사건이 일어나고,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할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함께 동역하게 하신 것입니다. 가정의 일치로 열심히 섬겼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엉긴 젖과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 놓고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창 18:8)
엉긴 젖은 치즈입니다. 우유와 송아지 요리를 벌여 놓고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 상을 차립니다. 그리고 모셔 섰습니다. 앉지도 못했습니다. "부족한 거 말씀하시면 제가 달려가서 지금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하는 자세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아브라함이 섬겼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자라서 소를 잡은 걸까요? 창고에 곡식이 넘쳐나서 이렇게 잔치를 벌인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받았기 때문에 그도 최고의 것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것은 부스러기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찌꺼기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아브라함에게 베풀어 주셨고, 아브라함이 묵상하고 돌아보고 자기 인생을 생각해 보니까 하나님이 내 인생에 베풀어 주신 것은 최상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그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인 나그네들에게 자기가 받은 은혜대로 최고의 것을 대접하고 베푸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 찌꺼기 은혜가 아닙니다. 그냥 부스러기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장 귀한 당신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가장 값진 은혜 아닙니까? 최고의 은혜로 우리가 받았습니다. 영원한 구원을 받았고, 죄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에서 우리는 건짐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생각한다면 어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인 나그네, 사람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겠습니까? 아침에 먹다 남은 식은 밥으로, "그거 먹고 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이제 한번 보면 다시 안 볼 사람인데 함부로 대접할 수 있겠습니까? 받은 은혜가 극진한데 베푸는 은혜도 극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그래서 최고의 것으로 대접한 것입니다.
지난주 주보에 보면 우리 교회가 지난 6개월 동안 나눔을 어떻게 했는지에 관한 보고를 드렸습니다. 성도들이 헌금한 성금을 이렇게 사용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창고에 쌓아 놓고, 차고 넘쳐서 부자 교회라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넘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건물을 짓고 있는 중입니다. 비전센터를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하는 이유는 받은 은혜가 극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난 65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 부어 주신 은혜를 돌아보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의 불모지에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여기까지 부흥시켜 주시고 함께하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역사 아니면 이런 은혜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거저 받았는데, 놀라운 은혜를 받았는데, 우리가 움켜잡고 베풀지 않고 나누지 않으면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우리 가정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 우리 각자 개인 개인들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 맥추 감사 주일 오늘을 돌아보고 생각해 보시면서 그 은혜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움켜쥐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흘려보내고 나누고 베풀고,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이 앞으로 더 많이 우리에게 부어질 줄로 믿습니다. 그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믿음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으로 결단하고 사래는 사라가 되기로 결단한 후에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했습니다. 날이 더운 날에 장막 문에 앉아서, 뜨거운 날에 지나가는 나그네를 모셔 들이고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평범하게 부지불식간에 찾아오셨지만, 그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성실하게 대접했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도 이런 깨어 있음의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크고 놀라운데, 가장 귀한 것을 주셨는데, 우리는 아낀다고 베풀지 않고 나누지 않는 어리석은 자 되지 않도록 보시고, 받은 대로 베풀며 나누며 살아가는 지혜로운 인생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도 아브라함이 되고 우리도 사라가 되어서 함께 가정이 동역하고, 교회 공동체가 한마음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섬기고 나누는 믿음의 백성으로, 맥추 감사 주일을 기점으로 우리 인생을 하나님 앞에 결단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