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강 /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18:9-16)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본문: 창세기 18:9-16

19세기까지만 해도 과학자들 중에 무신론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당시 과학계에서는 신적 존재를 인정하거나 하나님을 믿는 것이 과학자답지 못한 태도로 여겨졌습니다. 진정한 과학자라면 보이는 세계에만 집중해야 하며,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초중반을 거치면서 과학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이후, 과학자들 중에서도 신적 존재와 하나님을 인정하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과학자들이 경험하는 일종의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평생을 바쳐 하나의 문을 열었더니 그 안에 백 개의 또 다른 문이 있었다. 온 힘을 다해 그 백 개의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다시 천 개의 문이 나타났다. 그 앞에서 우리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과학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창조하신 피조 세계가 이토록 완벽하고 아름다운데, 인간의 좁은 소견과 지혜로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주에 대한 인간의 지식을 백 퍼센트라고 가정해 봅시다. 그 가운데 73퍼센트가 암흑 에너지이고 23퍼센트는 암흑 물질입니다. '암흑'이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무엇인지 판단하거나 분별할 수 없기에 '암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제 4퍼센트 정도가 남았는데, 그마저도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먼지와 기체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지금까지 밝혀낸 것은 그 가운데 0.4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우리가 우주를 다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지혜로 우주를 정복하겠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허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이런 상황에서 과학자들이 신적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20세기가 낳은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인 아인슈타인에게 어떤 신문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이렇게 질문한 기자는 철학적이고 심오한 대답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모차르트를 들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대답 같지만, 그로서는 가장 현명하고 당연한 대답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라 하더라도 자신이 연구하고 자신의 지성으로 하나님의 다음 세계를 끝까지 증명해 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지성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좁은 소견과 지성으로는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요구되는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셨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지, 왜 이런 방식으로 인도해 가시는지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어느 한 단계에 부딪히면 그다음은 힘을 빼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따라가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창 18:9)

아브라함은 나그네 세 분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듣고 이분들이 평범한 나그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일반적인 나그네, 지나가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아브라함의 아내 이름이 사라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처음 보는 사람의 아내 이름이 사라인 것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분들은 아브라함의 아내가 사라인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여기서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자신이 극진히 섬기고 대접한 이분들이 평범한 나그네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말씀이 그 다음에 이어집니다.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창 18:10)

이 말씀을 듣고 난 이후에 아브라함은 확신했습니다. 이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입니다. 왜 하나님인 것을 확신했을까요? 처음부터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르 땅에서 그들을 불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내 몸에서 날 자라야 내 후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할례의 언약을 위해서 그를 찾아오셨을 때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말씀을 듣고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똑같은 말씀을 지속적으로 하시는 분은 자기 인생의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분이야말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게 됩니다.

은혜의 참된 근거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창세기 18장을 피상적인 논리로만 읽으면 아브라함 가정이 가장 필요로 하던 선물, 곧 아들을 선물 받은 이유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천사들을 잘 대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송아지 고기를 대접했고, 치즈를 대접했고, 우유와 떡을 대접하지 않았습니까? 극진히 대접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나그네를 잘 대접하면, 혹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성실하게 잘 해 드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반드시 갚아 주실 것이라고 쉽게 유추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그렇게 읽으면 큰일 납니다.

창세기 18장을 넘어 창세기 전체의 흐름을 보고, 성경 전체의 흐름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천사들과 하나님을 잘 대접해서 소원 성취했다면, 성경 전체가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 그러면 소원을 이룰 것이다'라는 말로 도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다루는 신약의 한 구절을 봅시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히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 말씀이 전부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천사를 대접한 것은 그의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종교 안의 아버지, 좁은 소견의 아버지가 아니라 열국의 아버지로서, 공주의 어머니가 아니라 열국의 어머니로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중에 손님을 극진히 대접한 사건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천사들을 이렇게 대접하지 못했어도 하나님은 당신이 하실 일을 성실하게 이루어 가셨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아브라함을 통해서, 사라를 통해서 자녀를 주시고 믿음의 백성을 이루기로 작정하셨고, 그 흐름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좁은 소견으로, 혹은 인간의 얄팍한 술수와 계획으로 하나님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우주를 운행하시는 데 있어 당신의 섭리와 계획대로 섬세하고 체계적으로, 차근차근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자녀를 줄 계획이 없었는데 대접을 잘 받고 기분이 좋아져서 이 가정의 소원을 성취해 주셨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결코 그렇게 쉬운 분, 그렇게 만만한 분이 아닙니다.

언약궤 사건의 교훈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을 자기 뜻대로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꽤 있었습니다. 언약궤 사건을 보면 특별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약궤를 굉장히 아끼고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성막을 만들었는데 성막은 지성소와 성소로 나뉘어집니다. 지성소 안에 언약궤를 두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일 년에 딱 한 번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언약궤 위에 속죄소를 두었는데,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들어가서 일 년에 딱 한 번 대속죄일에 백성들의 죄 사함을 얻는 곳입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의 두 돌판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창일하게 흘러내리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그 발을 요단강에 넣으라 하셨습니다. 그러자마자 요단강이 멈추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에 무슨 신비한 마법이라도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것을 특별하게 아끼고 사랑하시니까 이것을 들고 나가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길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언약궤를 갖추고 나갔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랬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밀리고 열세를 보이니까 언약궤를 메고 나갔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삼상 4:10-11)

전쟁은 패하고 언약궤는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었던 엘리는 놀라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맙니다. 하나님의 언약궤에 마치 신비한 마법이 있는 것처럼 그것을 들고 나갔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쉬운 분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

그렇다면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7-8)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하게'라는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천천의 숫양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 소원을 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좋아하시니까 숫양 천 마리를 한꺼번에 가져다가 하나님의 번제단에 다 태워 올려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 소원에 응답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 만 마리의 양을 잡아서 그 기름을 강물처럼 흐르게 하며 하나님께 태워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만만한 분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하나님을 조정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돈이 많아서 억만금을 가지고 하나님께 헌금해도, 내가 하나님의 섭리 아래 들어가 있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아래 순종하고 겸손하게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와 별개의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 없었는데 하나님과 천사들에게 송아지 고기를 대접해서 소원 성취했다고 성경을 읽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이해하고 오해한다면 우리 수준으로 하나님을 격하시키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가 천박한 종교가 됩니다. 우리 수준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면 우리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신앙생활 할 것이고, 교회 안에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대하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해도 한참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수준으로 우리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아브라함과 사라를 향한 말씀의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 계획을 따라 하나님은 섭리대로 인도해 가시고 이끌어 가시는데,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행하지 않아서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응답받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섭리 아래 아브라함과 사라를 훈련시키고 연단시켜서 빚어 가시고, 사람을 만들어 가고 계시는 중입니다.

포기의 웃음,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

이제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그네들이 하나님과 천사들임을 깨닫습니다. 그분들은 사라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처음 하시는 말씀이 아니지 않습니까? 할례의 언약을 행할 때도 하나님은 이 아기의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이름까지 지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때와 지금 상황이 어떻습니까? 달라졌습니까? 아들을 낳으려면 적어도 몸 상태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창 18:11)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습니다. 이제는 안 되는 시점이 온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의 건강 상태가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런 상태인 것을 아브라함도 알고 사라도 압니다. 그래서 사라가 음식을 준비하고 대접하다가 장막 문에서 하나님과 천사들이 아브라함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창 18:12)

이 사라의 웃음은 어떤 의미입니까? 사라가 웃으며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라고 말하는 속마음이 무엇입니까? 만약 사라가 조금 더 젊었더라면, 자녀를 낳아 기를 수 있는 건강한 상태에서 지금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더라면, 아마 사라는 하나님께 쳐들어가서 따졌을 것입니다. 왜 빨리 자녀를 주지 않느냐고,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피 말리게 하시느냐고 하나님께 따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할 기력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웃는 것입니다. 즐거워서 웃는 것이 아니고 포기되어서, 이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포기하고 낙심하고 절망해서 '이제 우리에게는 즐거움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라를 보며 연민을 가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너무하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주시려면 좀 빨리 주시지, 두 사람이 건강할 때, 그리고 좀 젊을 때 빨리 주시지, 기왕 해주실 거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미루고 더디게 하셔서 이들을 이렇게 비참하게 하시는가, 이들을 이렇게 힘겹게 하시는가, 너무하시지 않는가 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의 본질: 힘을 빼는 것

그런데 이 질문의 답을 찾으려면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바라시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의 본질은 힘을 빼는 것입니다. 힘이 빠져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 좋습니다. 우리가 힘이 빠져야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몸에 힘이 들어가 있는데 하나님이 힘 들어가 있는 사람을 어떻게 일에 쓰시겠습니까? 자기 힘으로 가득 차 있는데 말입니다.

운동선수들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되려면 감독과 코치가 지속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힘 빼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테니스 선수들은 어깨에 힘을 빼야 되고, 수영선수는 힘을 빼야 되고, 육상선수는 몸에 힘을 빼야 기록이 단축된다고 합니다. 야구선수도 방망이를 잘 휘두르려면 몸에 힘을 빼야 된다고 하는데,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은퇴할 때쯤 되어야, 이제 운동을 그만둘 때쯤 되면 힘 빼는 게 이런 거구나 막연히 어렴풋이 알아 갈 때쯤 되면, 그때는 운동을 그만둬야 된다고 합니다.

어떤 선수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손가락을 다쳐서 어쩔 수 없이 힘을 빼고 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그때 힘 빼고 치는 게 어떤 건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선수가 일취월장했다는 고백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운동이 이런데 우리의 믿음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힘을 빼야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귀하게 보시고 사용하십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한번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혈기왕성했습니까? 그가 얼마나 자기 힘으로 펄떡펄떡 뛰고 충만했습니까? 하나님은 그를 부르실 때부터 내 몸에서 날 자가 너의 후사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때 미리 힘을 뺐더라면 하나님은 이삭을 진작에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힘이 빠지지 못했습니다.

조금 기다렸는데 자녀를 주지 않으니까 롯을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후사로 점찍어 둡니다. 롯과 밀당을 하다가 롯이 소돔 땅으로 떠나 버립니다. 그러자 소돔 성에서 왕들의 전쟁에 휩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한 번 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혈기가 넘칩니다. 자기 힘이 넘쳤습니다. 집에서 기른 318명의 군인들을 거느리고 롯을 구출하기 위해서 전쟁터로 뛰어들어 버렸습니다. 혈기가 동하니까 하나님이 사실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키셔서 다시 건져 데려왔습니다.

이제는 롯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면 힘이 빠져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자리에서 아브라함이 다시 '내 후사는 다메섹 엘리에셀입니다'라고 우깁니다.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쪼개고 하나님이 그 가운데를 지나가시면서 저주의 언약까지 맺어 가시면서 '내가 만약 너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면 이 짐승처럼 쪼개어도 좋다'고 하나님께서 약속을 맹세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를 돌아서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힘이 남아 있으니까, 아직까지 자기 혈기가 남아 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한계치가 아직까지 다다르지 않았으니까 그 힘을 다 소진할 때까지 하나님은 그냥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어도 듣지 않고 롯에서 다메섹 엘리에셀로, 엘리에셀에서 이스마엘로 넘어가는 기간, 이스마엘을 얻고도 아직까지 힘이 있어서 그 아들을 키우고 돌보느라 13년의 세월을 허송세월하는 동안 하나님은 그냥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힘이 빠질 때까지 말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기력이 다하고 사라의 생리가 끝날 때까지, '이제는 안 된다'고 포기할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야 이제 하나님 말을 들을 것이니까요. 하나님은 그때까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들어서 하나님과 동역하기를 원하시는데, 우리 몸에 힘이 들어가 있으면, 아직까지 내 계획이 끝나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말씀과는 별개로 내가 원하는 일이 있으면 그것이 다 끝날 때까지, 그러면서 거기에 막히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부서질 때까지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두고 보실 것입니다. 힘이 빠져야 하나님께서 쓸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빨리 깨달으면, 빨리 우리 몸의 힘을 빼면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과 오랜 기간 동역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미련하게도 자기 몸에 힘이 다 빠질 때까지 이것을 못 깨달았습니다. 이제서야 몸에 힘이 다 빠지고 나니 '안 된다'고 주저앉아 포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의 사람과 믿음 없는 사람의 차이

믿음의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은 모든 것이 사방이 다 막히면 그때는 손을 놓아 버립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는데도 안 되니까 포기해 버립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은 모든 것이 다 막혀야 그제서야 진짜 기도가 시작됩니다. 안 되니까, 나로서는 안 되니까, 하나님 봐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이전에도 기도했고 그 이후에도 기도하지만, 진짜 기도는 사방팔방이 다 막혀서 아무것도 안 될 때 그때부터 진짜 기도가 시작됩니다.

그런데 사라는 아무것도 안 되는데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이제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포기합니다.' 그런 사라에게 하나님은 다시 한번 용기 주시고 힘을 주시고 그를 다시 끌고 가십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창 18:13-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너는 왜 안 된다고 포기하느냐? 하나님께는 능하지 못한 일이 없으니 너는 엎드려 기도하라. 다시 일어나서 힘을 내고, 힘 빠진 몸 그대로 나를 따라 오라. 그러면 내가 너와 함께해서 원래 계획하고 약속한 모든 것을 이루어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막혀 있습니까? 사방이 다 막혀 있다면 점검해 보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힘 빼라고 하시는데, 하나님 말씀과 계획과 상관없이 내 뜻대로 내 혈기를 부리고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빨리 힘을 빼면 뺄수록 하나님과 함께 동역할 수 있는 시간은 늘어납니다.

그런데 만약 그 시기를 놓쳤다고 해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다 막히게 되고 힘이 다 빠진 상태라 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때부터 하나님은 진짜 일하십니다. 우리가 힘이 빠져서 이제는 하나님만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한 분 붙잡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살려 달라고 하고 도와달라고 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아름다운 믿음의 여정을 새롭게 시작하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붙잡고 다시 한번 힘을 내고 일어서는 주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얕은 계획과 술수에 쉽게 넘어가시는 분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그 말씀을 섭리대로 이루어 가시는데, 우리가 변화되어 하나님의 섭리에 몸을 맡기고 순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힘 빠지기를 기다리고 계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내 계획과 혈기대로 믿음생활 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고집 부리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고집했고 다메섹 엘리에셀을 주장했으며 이스마엘을 고집했던 것처럼, 우리도 역시 그 여정에 있다면 속히 내려놓고 힘 빼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혀 주의 일을 하려면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위탁된 믿음이 되어야 하오니, 나를 주장하고 내 의지를 주장하는 자기중심적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겸손히 무릎 꿇고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힘 빠진 나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고, 낙심하거나 절망의 상태에서 결단코 포기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더 크고 위대함을 믿고 온전히 하나님께 위탁하고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