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
본문: 창세기 18:17-19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 세계에는 정교하고 치밀한 손길과 사랑이 가득 묻어 있습니다. 생태계를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이토록 정교하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들을 무분별하게 포획하면 먹이 사슬이 깨어져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이 일어납니다. 생태계는 그대로 두는 것이 스스로 경쟁하고 발전하며 보완하는 데 가장 이롭습니다. 사람이 손을 대면 댈수록 문제가 생기고 파괴만 될 뿐입니다.
탄자니아에 가면 세렝게티라는 초원이 있는데, 세렝게티 건너편에 서울시 면적의 약 절반 정도 되는 분지가 있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자들에게 1980년대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연구하는 학자들이 사자들을 관찰하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사자들의 개체수가 줄어들고 활동량도 줄어들고 새로 태어난 새끼 사자의 덩치도 작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연구 결과 수사자들의 정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수사자는 기형을 일으키는 정자를 가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더 깊이 추적해 보니 그로부터 약 10년 전에 이상 기후가 발생해서 흡혈 파리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흡혈 파리 때문에 사자 떼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사자가 몇 마리 있었는데, 수사자 한 마리와 암사자 여러 마리였습니다. 그때부터 이 살아남은 수사자 한 마리의 열성 유전자가 암사자들을 통해서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으로 말하면 그 10년 동안 근친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약한 유전자가 근친혼을 통해서 전파되었고 그 문제가 10년이 지나서야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다양한 개체의 사자들을 투입함으로써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이런 사건이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자연은 치밀하게 관계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관계를 맺고 다양한 관계 가운데 건강함을 유지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가셨습니다.
1. 죄 문제가 해결된 자와 소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연만 이렇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도 삼위일체의 관계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과 인간도 관계 안에 있고, 사람과 사람도 역시 관계 안에 있습니다. 이 중에서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과 인간이 관계 맺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습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과 적절한 관계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역설적으로 반대로 말하면 죄 문제만 해결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의 디자인처럼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죄 문제가 해결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시고 긴밀한 관계를 맺어 가고 계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 가운데 지내고 있는지, 혹시 내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죄가 있다면 무엇인지,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 풀어갈 것인지를 함께 묵상하고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그네 세 분이 아브라함의 가정에 찾아가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세 분의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합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세 분 중에 한 분이 하나님이시고 두 분은 천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두 천사는 소돔 성으로 떠나고 하나님 한 분만 남으십니다. 이제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대화를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창 18: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먼저 하시는 첫 번째 말씀입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당신이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씀하겠다는 뜻 아닙니까? 획기적인 말씀입니다.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려는 것을 나에게 숨김없이 말씀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들여다보면 이것은 충격적인 말씀도 획기적인 말씀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실 때부터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이 하려는 일을 사람들에게 숨긴 적이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아담, 하와와 동행하시고 교제하셨습니다. 시간을 정해두고 그들과 함께 산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고 속을 다 나누시고 대화하셨습니다. 에녹은 또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에녹과 함께 동행하시다가 그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은 그를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 노아에게도 똑같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할 것을 말씀하시고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하나님의 사람들과 이렇게 밀접하게 소통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소통하고 대화하고 당신의 마음을 알려주시는 분들, 그들의 공통점은 죄가 제거된 상태라는 것, 죄 문제가 해결된 상태라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선악과 사건 이전에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죄 짓기 전에 하나님은 그들과 거칠 것이 없이 대화하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하나님이 똑같이 에덴동산에 내려오셨습니다. 아담이 숨어버렸습니다. 하와도 숨어버렸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말합니다.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결국 죄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을 갈라 놓습니다.
에녹을 보십시오. 300년 동안이나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단 하루도 하나님과 동행하기 힘든데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자기 부인이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가자는 곳으로 따라갑니다. 나는 남쪽으로 가고 싶은데 하나님이 북쪽으로 가자면 나는 남쪽으로 가고 싶은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가기를 원하는 곳으로 따라갑니다. 그것을 자그마치 300년을 했습니다. 죄를 떠난 상태, 그래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노아 시대를 보십시오. 죄악이 관영해서 하나님이 그대로 홍수로 쓸어버릴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습니다. 죄를 떠난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죄를 떠난 상태이기에 하나님은 그들과 교제하십니다. 직접 찾아오시고 당신의 속마음을 알려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도 역시 죄 문제를 해결한 상태입니다. 그는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13년 동안이나 이스마엘에게 빠져 살았습니다. 죄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름도 바꾸어 주십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할례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고 할례 받았습니다. 할례가 어떤 의미입니까? 결단하는 것, 잘라내는 것 아닙니까? 끊어내는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을 떠나 살았던 나의 잘못된 점들을 끊어내겠습니다, 결단하겠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죄를 끊어내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겠습니다, 결단했습니다. 살을 떼어내고 피를 흘리며 마음의 할례를 받고 육체의 할례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살기를 결단하며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사명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를 떠났더니 하나님은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다 말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을 한번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왜 잘 발견하기가 어려울까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 것 같은데 왜 나는 그 뜻을 찾아가기가 힘들까요? 하나님이 왜 이렇게 나에게 불분명하게 다가오시는 것 같을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을 텐데 왜 들리지 않는 걸까요? 왜 이해되지 않는 걸까요? 이럴 때는 우리 죄 문제를 들여다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 문제만 해결된다면, 내가 죄 문제를 해결해 놓고 있다면, 하나님은 당연히 나를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당신이 하고 싶은 것과 계획하시는 것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실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사명을 주실 때도 죄를 먼저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6:6-7)
하루는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노래를 부릅니다. 두려웠습니다. 죄가 있으니까요. 천사들이 제단의 숯불을 가지고 와서 그의 입술에 댑니다. 악을 제하여 주고 죄를 제거해줍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사 6:8)
죄 문제가 해결되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오셔서 사명을 주시지 않습니까? 죄가 사하여지고 나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내가 소통하는 것,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발견하는 것, 사명을 받는 것, 이 모든 것이 죄 때문에 가리워져 있었는데 죄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될 것입니다.
2. 죄 문제 해결을 위한 기도
그러면 우리가 죄 문제 해결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당연히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결단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돌이키면 그대로 유지하고 다시 죄로 돌아오면 안 됩니다. 돌이켜서 그것을 그대로 유지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그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말씀 듣고 성경 읽을 때 결단은 하지만, 마음의 결심은 하지만, 돌이키고 난 후의 지속성이 떨어집니다.
사람과 동물의 가장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동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거기에 가장 다른 점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을 새겨 놓았습니다. 동물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접촉점이 있다는 뜻입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동물 중에 기도하는 동물을 본 적이 있습니까? 동물은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어떤 의미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면서 내가 필요한 것만 그저 하나님께 구하기만 합니다. "이것도 주십시오, 저것도 주십시오." 구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참된 기도는 나를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기도 시간을 통해서 나의 내면을 살피는 것입니다. 내 속에 무엇이 들어가 있는지, 지금 나는 어떤 욕심에 사로잡혀 있는지, 내 죄가 무엇인지, 나를 살피고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이 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것을 포기하고 그것을 드러내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말씀을 채우고 성령을 채웁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우리는 소통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하나님께 구하기는 하는데, 내가 원하는 것만 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원하시는 것, 나를 비워내지 않으면, 내 죄를 해결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을 잘 들여다보고 죄 문제를 해결하셔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 하나님과 우리는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위인들처럼 하나님께서 이미 인간을 이 땅에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 디자인대로 우리가 죄 문제 해결하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 가운데 온전함을 이루고 교제하며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말씀이 앞서가고 믿음으로 따라가는 삶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하고 싶으셨던 말씀이 무엇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창 18:18)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될 것이다. 천하 만민이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우리가 이전에 많이 들어봤던 말씀입니다. 창세기 12장 2절과 3절에서 이미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2-3)
이 말씀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 하셨던 말씀입니다. 하란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부르실 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도 두 가지가 나오지 않습니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겠다. 이 말씀이나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말씀이나 똑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똑같은 말씀을 두 번이나 반복하시는 걸까요? 성경에는 의미 없는 말씀이 없다고 했는데 왜 하나님은 이 똑같은 말씀을 여기에도 기록하고 이전에도 기록해 주셨을까요?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는 패턴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찾고 부르실 때는 먼저 말씀을 앞세우십니다. 사람은 그 말씀을 뒤따라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말씀을 앞세우셨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천하 만민이 너로 말미암아 복 받게 하겠다. 이제 그다음은 아브라함의 몫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삶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살아내는 것은 그에게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먼저 주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어떻게 여겼습니까?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 12:4)
이 말씀이 무척 중요합니다.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이 말씀이 아브라함 인생을 집약하는 그의 인생 구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삶이었습니다.
말씀이 아브라함보다 앞서 갑니다.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천하 만민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이 앞서가고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뒤따라 갑니다. 말씀을 뒤따라가며 분투하고 열심히 살았기에 실제로 그의 인생에 기적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불러 주십니다. 성경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요셉에게 꿈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이 두 가지 꿈을 꾸었지 않습니까? 형제들의 곡식 단이 요셉의 곡식 단에게 절하는 꿈을 꿉니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요셉의 별에게 절하는 꿈을 꿉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꿈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요셉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나태하게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분투하고 노력하고 애쓰고 힘썼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 갑니다. 거기서 죽을 만큼 열심히 일해서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합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언급하며 "나는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하면서 믿음의 정절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오해를 받습니다. 누명을 씁니다. 다시 감옥에 들어갑니다. 낙심할 만하지 않습니까? 만약 우리라면 "내가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굳게 지켰는데 내가 왜 감옥에 들어와 있어야 되느냐?"고, "인생 이제부터는 나는 막 살겠다"고, 인생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감옥에서도 성실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풀려나면서 "내가 너를 기억하겠다" 말합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2년입니다. 2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입니다. 하지만 견뎠습니다. 믿음을 굳게 붙잡고 견디고 또 버티고 견뎠습니다.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그 결과 때가 되니 하나님이 그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십니다. 총리가 되었더니 어느 날 곡식을 사러 온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하나님이 꿈으로 하신 말씀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넘어가버렸다면, 만약에 그가 감옥에 들어가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살았다면, 그의 인생에 이런 역사적인 일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그는 붙잡고 뒤따라갔습니다. 말씀이 앞서가고 그는 온 힘을 다해서 말씀 붙잡고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에 말씀이 현실이 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말씀과 반대로 달려가버렸다면 그의 인생에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를 기억해 보십시오.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장차 게바가 될 것이라." 원래 그의 본명,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시몬입니다. 시몬은 히브리어 '듣다'(샤마, שָׁמַע)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네가 3년 동안 내 말을 잘 듣고 따라오면 너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게바가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의 인생보다 앞서 갑니다. 베드로는 말씀을 붙잡고 뒤따라갔습니다. 말씀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3년 동안 온 힘을 다해서 말씀 듣고 따라갑니다. 물론 좌충우돌하기도 하고 실패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 붙잡고 따라갑니다. 게바가 되었습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페트라,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말씀이 앞서가고 그가 뒤따라갔기에 일어난 역사입니다.
반대로 실패한 사람도 있습니다. 위대한 약속의 말씀을 받았는데 말씀 붙잡고 살지 않아서 인생을 망친 사람도 있습니다. 솔로몬이 그랬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 그가 왕이 되고 난 이후에 기브온 산당에서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네게 줄꼬?" 그때 솔로몬이 말합니다.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는 듣는 마음을 주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셨습니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왕상 3:12-14)
"다윗이 행한 것처럼 나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면 네 날을 길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축복의 말씀을 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솔로몬의 그다음 행적이 어떠합니까? 그에게는 후궁이 칠백 명이나 있었습니다. 첩이 삼백 명이나 있었습니다. 이방 여인들이었습니다. 이방 여인들이 솔로몬에게 시집올 때 이방의 신들을 같이 데리고 왔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이 우상 천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은 우상에게 절했습니다. 우상숭배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한 것처럼 나의 법도와 명령과 규례를 지키면 네 날을 길게 하겠다" 하셨는데 솔로몬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말씀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달려가버렸습니다. 우상숭배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의 사후에 결국 나라는 나누어집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집니다. 전쟁이 끊이질 않습니다. 갈등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자고 나면 왕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도 갈림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우리가 붙잡고 살아내면, 아브라함처럼 요셉처럼 베드로처럼 말씀 붙잡고 살아가면, 말씀은 우리에게 현실이 됩니다. 반대로 솔로몬처럼 말씀과 상관없이 살아가면, 아무리 귀한 말씀 아무리 좋은 말씀을 내가 받았더라도 그 말씀은 나하고 아무런 상관없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어떻게 살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송구영신 예배 때마다 말씀을 봅니다. 7월 중순이 되었습니다. 송구영신 예배 때 받았던 말씀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말씀 받을 때는 기쁘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때 받았던 말씀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 말씀을 붙잡고 분투하고 투쟁하고 살아내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말씀은 받았는데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앉아 있으면 말씀이 내 것이 되겠습니까? 말씀이 앞서고 우리는 그 말씀을 뒤따라 살아가야 되는데, 말씀은 주어졌는데 상관없이 살고 있는데 어떻게 말씀이 내 것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말씀과 아무 상관없이 산다면 송구영신 예배 때 말씀 받는 것은 그저 기복적인 주술적인 말씀 뽑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특징을 요한계시록 3장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3:10)
하나님 말씀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인내의 말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루 이틀 지킨다고 끝나는 말씀이 아닙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칭찬하면서 주셨던 말씀입니다. 오래도록 붙잡고 지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주신 말씀을 25년 동안 붙잡고 지켰을 때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강대한 나라가 될 것이다, 천하 만민이 너로 말미암아 복 받을 것이다" 다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다시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중간 평가입니다. "25년 동안 잘 살아왔구나. 이제 다시 너의 인생 마치는 그날까지 이 말씀 붙잡고 따라가라. 그러면 너는 복된 사람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 않습니까? 그의 후손 중에 다윗이 나고 그의 후손 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지 않았습니까? 강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보다 더 강대한 나라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천하 만민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 하셨는데,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 받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간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복과 은혜가 가득 차고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죄 문제를 해결한 사람과 소통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없고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무너지는 이유가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임을 깨닫습니다. 주여, 기도를 통해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통해서 죄 문제를 해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깨끗하고 정결하게 된 우리에게 하나님 찾아오시고 말씀하여 주시고 당신의 뜻을 알려 주시옵소서. 우리 앞에 갈림길이 있습니다. 말씀이 앞서가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는데, 앞서가는 말씀 따라가고 그 뒤를 따라가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걸어가는 하나님의 자녀, 믿음의 백성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걸어가고 달려가서 언제나 말씀대로 우리의 인생에 온전한 성취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