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강 /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2 (18:20-33)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1

본문: 창세기 18:20-33

종교를 뜻하는 영어 단어 'religion'은 라틴어 어원에서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다시 읽다'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다시 읽어가는 여정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며 성경을 읽다 보면, 믿음의 위인들뿐 아니라 비겁한 사람, 악한 사람, 정의로운 사람, 바른 사람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 말씀이라는 거울에 나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그러면서 내 인생을 다시 읽어내고 재해석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늘 자신을 반성하고, 돌이키고, 다시 곱씹어 봅니다. 되새기며 다시 하나님 은혜 가운데 살려고 발버둥칩니다. 이것이 믿음의 여정입니다.

또 하나의 의미는 '연결하다'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원초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날 때부터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죄 있는 인간은 하나님과 연결될 수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요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보혈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가 주님을 중보자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연결하는 사명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세상과 사람,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중재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바로 그러한 중재자의 역할, 연결자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 문제를 해결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밝히 보여주시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부르짖음의 역설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창 18:20-21)

하나님께서 소돔 땅을 살펴보시려고 내려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부르짖음과 소돔 땅의 상황이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살펴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 내려오신 목적은 소돔을 심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부르짖음'이라는 단어입니다. 20절과 21절에 두 번이나 등장합니다. 부르짖었다는 것은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기도하고 부르짖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기도했습니까? 누가 부르짖었습니까? 소돔 성에 있는 사람들이 부르짖고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소돔성은 악한 도성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고, 하나님께서 완전히 쓸어버려 마땅한 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읽어보니 그 성의 사람들도 부르짖고 있었고, 기도하고 있었고, 하나님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 성을 살피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부르짖는 사람이 있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은 이 성을 심판하려고 오셨다는 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있고 부르짖는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은 왜 이 성을 심판하려 하신 것일까요?

의인을 바라보는 두 관점

이것은 우리의 의문일 뿐 아니라 아브라함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창 18:23)

아브라함은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라고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아브라함이 생각할 때, 부르짖는 사람과 기도하는 사람은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부르짖고 간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하나님이 왜 이 성을 멸하려 하십니까?

아브라함은 소돔성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조카 롯과 그의 가족이 거기 살고 있었고, 가까운 성이었기 때문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성에도 기도하고 부르짖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 18:24-25)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부당합니다"라는 말을 두 번이나 드립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정말 하나님 말씀하시는 정의입니까?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본뜻이고 본심이며 정의입니까? 저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지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여기 본질적으로 의인을 바라보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점에는 큰 괴리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짖고 기도하는 자를 의인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고 인내하며 여기까지 오셨는데, 부르짖는 자는 있고 기도하는 자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소돔성의 변화를 이끌었습니까? 그 사람들이 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소돔성 사람들을 고치려 했습니까? 함께 뜻을 모아서 '우리가 이렇게 살지 말자, 이렇게 살면 안 된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우리 제대로 살자, 죄짓지 말자'라고 이 사람들이 함께 뜻을 모았다면 이 성은 달라지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소돔성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이 묻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기도하고 부르짖는 사람이 네 말대로 의인이라 한다면, 그 사람들은 기도는 하는데 왜 행동하지 않느냐? 기도는 간절하게 하고 부르짖기는 하는데 왜 삶이 바뀌지 않느냐? 기도하는 사람들이 함께 연대하고 손을 잡고 뜻을 모아서 그 성의 변화를 주도하고 이끌어 가야 하는데,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오래 참고 기다렸는데 이 성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기도만 하고 부르짖기만 한다고 해서 내가 어떻게 이 성을 그냥 그대로 두고 볼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아마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성 멸망의 책임을 악인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소위 의인이라고 말하는 자들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기도하되 행동하지 않는 자들

만약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봅시다. 전쟁은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에게 심각한 피해를 줍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크리스천들을 포화가 피해 갑니까? 기도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교회 열심히 다니고 봉사 열심히 한 사람, 전쟁 나면 우리가 거리를 활보하고 다녀도 폭격이 우리를 피해 갑니까? 전쟁 나면 교회는 폭격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전쟁 나면 예수 믿는 자나 악인이나, 부르짖고 기도하는 자나 자기 멋대로 사는 자나, 누구나 다 전쟁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함께 혼연일체가 되고 뜻을 모아야 합니다. 좋은 정치인을 뽑고, 분별력을 가지고 기도하며 이 나라를 살릴 수 있을 좋은 정치인들을 세워야 합니다. 부정부패가 국력을 좀먹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감시해야 합니다. 혼연일체가 되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행동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강한 나라가 되어 그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나라, 좋은 나라가 되어 모두가 부러워하는 나라를 이루어 가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막아야지, 이미 전쟁이 일어난 이후에는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일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이런 맥락에서 소돔성을 바라본다면, 기도만 하고 부르짖기만 하는데 자신의 행동도 하나 변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힘을 모아서 성의 개혁을 주도하지 않았던 기도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나는 너희들을 의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너희들을 의롭다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국회가 21대 국회입니다. 국회의원 300명 중에 125명, 41.6%가 크리스천입니다. 그런데 지난 54일 동안 원 구성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국회는 공전 상태였습니다. 지금 얼마나 이 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위기 상황입니까?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국민들은 못 살겠다고 아우성인데, 125명의 크리스천들이 국회에 들어가 있으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자기 편과 당의 이익과 계파의 이익만 좇아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각자 교회에 가면 의인들입니다. 각자 교회에 가면 대접받는 의인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부르짖고 기도하고 열심히 외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장로님이 대통령이 된 적도 있고, 국회의장에는 여러 믿는 사람들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 정치가 발전했습니까? 달라졌습니까? 오히려 더 나빠지고 더 심각해지고 국론은 분열되어 심각한 사태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들을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보실 때 어떻게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의인입니까?

이런 지경인데, 우리의 시각을 돌려서 기후 문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앞으로 50년 이후에, 앞으로 70~80년 이후에 지구가 지금처럼 존속 가능하겠습니까? 이렇게 아무 문제 없이 우리가 살 수 있다고 보장하겠습니까? 지금 이 지구는 위기 상황, 심각한 위기입니다.

이탈리아 돌로미티 산맥 꼭대기에 있는 빙하가 녹아내립니다. 등산객들이 빙하에 맞아서 실종됩니다. 그들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스위스 알프스의 산꼭대기에서 빙하가 녹아내렸습니다. 관광객들이 쓸려 내려갔습니다. 그들의 시신도 찾지 못했습니다. 지난 5월 인도의 델리에서 최고기온이 49도를 찍었습니다. 미국 캔자스 주에서는 소 떼 2천 마리가 열기를 이기지 못해서 집단 폐사했습니다. 지난 1990년 대비 2019년 온실가스 배출량이 54%나 급증했습니다.

우리는 기후를 두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땅을 고쳐 주십시오. 우리 걱정합니다. 하나님, 이래가지고서야 우리 후손들에게, 우리 아들딸들, 손주들에게 아름다운 이 나라, 이 강토, 이 지구를 물려줄 수 있겠습니까? 이 땅을 고쳐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귀찮아서, 힘들어서 분리수거도 제대로 하지 않고, 음식물 쓰레기는 함부로 버려지고, 일회용품은 마음대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고서 어떻게 우리가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일도 하지 않는데, 자그마한 수고도 하지 않고, 어떤 노력도 애쓰는 것도 없는데, 우리가 입으로만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 지구를 고쳐 달라고, 이 땅을 고쳐 달라고 기도하는 우리가 이율배반적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너 입으로만 신앙생활하는구나. 너희들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그런데 이 성에, 이 땅에, 이 지구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겠구나. 하나님께서 안타깝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열심히 하셨습니다.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새벽에도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깨어 계시는 동안 열심히 행동하셨습니다. 기도하신 대로 행동하시고, 기도하신 대로 실천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 문제를 앞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기도가 끝나고 십자가 지러 가셨습니다. 실천하셨습니다. 행동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따르는 제자인데, 기도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소돔성의 멸망을 막지 못한 부르짖는 자들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넌 진짜 의인이냐, 가짜 의인이냐? 그 질문 앞에서 "하나님, 제가 진짜 의인이 되어가겠습니다"라고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열국의 아버지가 드린 중보기도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숫자를 바꿔가며, 숫자를 줄여가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50명의 의인만 있으면 하나님, 이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습니까? 그러겠다.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낮추어서 기도합니다.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 18:32)

우리는 아브라함이 기도하는 것을 보고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왜 10명에서 멈추었는가? 아브라함이 소돔성에 있는 롯과 롯의 아내와 롯의 두 딸들, 그 가정을 사랑했다면 네 명까지 낮추어서 기도하지, 그들을 정말 사랑했으니까. 왜 아브라함은 10명에서 멈추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지금 아브라함이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람의 인생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존귀한 아버지' 아브람의 인생을 살고 있었다면 네 명까지 기도했을 것입니다. 롯의 가정만 소중하니까. 소돔성 사람이야 망하건 말건, 그들이 죽건 말건 아브람은 그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존귀한 아버지로서의 삶은 그냥 롯의 가족만 소중합니다.

그런데 그는 이제 그런 인생이 아닙니다. 열국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내가 소돔 땅을 멸망시키겠다" 말씀하셨을 때, 그때 가슴이 무너집니다.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로서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 이 성에 의인이 열 명이라도 있으면 하나님께서 이 성을 고쳐 주시고 기다려 달라고, 기도의 지경이 깊어지고 넓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자기 자신의 기도의 터를 점점 넓히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만약 아브라함이 다섯 명 혹은 한 명까지 낮추어서 기도했다면 하나님이 들어주셨을까? 하나님이 화를 내지 않으셨을까? "지금 나하고 뭐 하자는 거냐, 왜 그렇게 자꾸 숫자를 낮추느냐"고 하나님이 역정 내고 화를 내셨을까, 아니면 하나님이 그냥 받아주고 들어주셨을까?

아마 하나님은 한 명까지 낮추어서 기도했다 하더라도 수용하고 들어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하나님, 우리가 신앙하는 하나님은 숫자에 좌우되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5만 명, 500만 명, 5천만 명이 있은들 무엇 하겠습니까? 단 한 사람, 하나님은 영향력 있는 사람을 기대하고 기다리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명의 의인만 있어도, 그 한 명이 행동하는 신앙인이고, 그 한 명이 가능성이 있다면, 그 하나가 또 다른 하나를 전도할 것이고, 두 사람이 네 사람을 만들 것이고, 네 명은 8명이 될 것이고, 그렇게 해서 숫자가 불어날 것 아닙니까? 단 한 사람, 가능성 있는 한 사람만 있다면 하나님은 그 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심판을 좋아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들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인데,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세계를 보전하고 싶어 하시지 심판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전의 조건은 단 한 명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펴보시고 '내가 이 사람 한 사람 때문에 이 성에 기대감을 가질 사람', 그 한 사람만 있으면 하나님은 그 성을 기대하시고 돌봐 주시고 결단코 멸망시키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이 어떻게 됩니까? 소돔성은 불행하게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한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단 한 사람, 하나님이 그 사람을 봐서라도 내가 이 성을 살려 두겠다 할 그 단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성을 멸망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슬픈 일이지 않습니까? 가슴 아프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아끼시는 한 교회, 한 성도

온 세상에 교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무수히 많은 것이 십자가요,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할 때 좋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대형교회 좋아하지 않습니까? 숫자가 많이 모이고, 헌금이 많이 걷히고, 건물이 크고 넓은 큰 교회.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엄청나게 많은 교회가 있어도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려 하실 때 그 교회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빛을 잃고 맛을 잃은 소금 같은 교회들이라면, 그 교회는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

단 하나의 교회만 있어도 하나님이 그 교회를 보시고, '이 교회 성도들이 제대로 말씀 붙잡고 투쟁하고 살아내고 있기에 내가 이 교회를 봐서 이 세상 심판을 내가 늦추고 또 연기하겠다'라고 하신다면, 그 교회가 제대로 된 한 교회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멸망을 가속화시키는 교회, 하나님이 심판하려고 할 때 하나도 아깝지 않은 교회가 되면 우리는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잘못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두고 보시는 교회, 하나님이 아끼는 하나의 교회, 온 세상 다 멸망시켜도 이 교회 때문에 내가 이 세상을 지금도 두고 보고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 이유가 되는 교회,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성도, 성경 들고 가방 들고 주일날만 되면 교회 가는 성도들이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려고 할 때 하나도 아깝지 않은 성도들이 된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생활 잘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심판하려 하실 때, '나는 저 아이 하나 때문에, 저 사람 하나 때문에, 저 사람을 가능성으로 보고, 이 사람이 의인이기 때문에, 이 사람 하나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세상에 심판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만한 그런 한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과거 수십 년 전 한국 교회는 교회학교 숫자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산업화 시대, 그때는 숫자로 승부했습니다. 교회학교에 수백 명이 모였습니다. 아이를 많이 낳았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시절이 아니지 않습니까? 인구 절벽, 인구 감소 시대에 교회학교는 숫자가 줄어듭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걱정합니다. 한탄합니다.

그런데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한탄할 일이 아닙니다. 이제야말로 영향력에 집중해야 할 시기입니다. 이제야말로 목회자인 저부터 교회학교에서 우리 어린아이들을 위해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교육전도사님들, 우리 교사들이 생명 걸고 목숨 걸고 복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영향력이 있는 한 사람을 길러내도록, 하나님께서 그 아이 하나를 보시고 이 세상에 희망을 두시도록,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한 아이를 길러내도록 우리가 열심히 가르쳐야 합니다.

세상에 공부 잘하는 사람은 정말 많습니다. 돈 많이 버는 재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좋은 차 타고 다니는 사람들. 우리 아이들을 그렇게 길러내고 싶습니까? 우리 가정의 자녀들을 공부 잘하는 사람으로, 세상에 돈 많은 부자들로 길러내는 것은 세상에 수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길러내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향력 있는 한 사람으로 길러내야 합니다. 세상이 악으로 다 썩어가는데, 그 한 아이가 일어나서 주변 친구들을 불러 모으고 세워서, 그 한 아이 때문에 그 공동체가 살아나는 영향력 있는 한 사람으로 길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부모들의 사명입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정을 원하시고, 그런 교회를 원하시고, 그런 성도들을 원하십니다.

중보기도의 참된 가치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평가절하합니다. 왜냐하면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다고, 아브라함이 기도 열심히 했는데 소돔성이 멸망당했으니까, 기도 응답 받지 못했다고, 소돔성을 멸망시켰다고 그의 기도를 평가절하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기도는 그 자체로 가치가 있고 그 자체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진지하게 반응하셨기 때문입니다. 6번이나 숫자를 바꿔가며 기도해도 하나님은 다 받아주시고 다 들어주셨습니다. 회개한 자, 죄 문제를 해결한 자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중보기도할 때 하나님은 진지하게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도 들어주셨습니다. 모세는 일생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큰 두 번의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출 32:31-32)

금송아지 사건 이후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멸하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때 모세가 차라리 생명책에서 저를 지워버릴지언정 이 백성들을 건져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고,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시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 (민 14:18-19)

정탐꾼 사건 이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크게 실망하시고 그들을 다 심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하게 엎드립니다. 한 번만 살려달라고. 하나님은 또 모세의 중보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결론

오늘 우리의 기도의 지경이 넓어지기를 바랍니다. 나 자신만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 가족만 위해서 기도하고, 내 자식만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적인 기도로 기도의 지경이 점점 넓어져 가기를 바랍니다.

또 한 가지, 기도만 하는 것으로 그치면 우리는 소돔성에서 부르짖는 자로 끝날 것입니다. 기도하고 행동하고, 고쳐나가고, 손잡고 연대해서 이 사회를 고치는 진실로 하나님 기뻐하시는 의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저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봉사 열심히 하고 교회 잘 다니면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의인은 사회를 고치고 세상을 고치고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실천하고 움직이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가 진실로 예수 닮은 의인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저 기도하고 입으로만 행동하고 입으로만 말하는 자들 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우리의 손과 발이 움직이고 행동하고 함께하는 크리스천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브라함처럼 중보기도자로 살기를 원합니다. 나 자신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열국과 이 나라와 한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