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병을 구우니
본문: 창세기 19:1-3
요즘은 전기차와 수소차가 등장하고 있지만, 여전히 세계 자동차 시장을 양분하는 두 나라는 미국과 독일입니다. 그러나 사실 미국과 독일보다 훨씬 이전에 자동차를 처음 상용화한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영국입니다. 영국은 1801년에 증기 자동차를 상용화했고, 1826년에는 증기 버스까지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영국 사회는 자동차를 반기지 않았습니다. 그때 영국의 주요 교통수단은 마차였고, 마차 업계에서 자동차를 환영할 리가 없었습니다. 자동차의 최고 시속은 약 30~40킬로미터였는데, 마차는 기껏해야 10킬로미터 정도밖에 속력을 낼 수 없었습니다. 마차업자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앉아서 망하겠다고 판단했고, 각종 여론을 주도하며 자동차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갔습니다.
1869년에 결정적인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시골길을 달리던 버스가 구덩이에 빠지면서 크게 흔들렸고, 버스에 타고 있던 한 승객이 밖으로 튕겨 나가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망자가 당시 영국에서 가장 촉망받던 여성 천문학자였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의 여론이 마차업자들 쪽으로 기울었고, 자동차는 위험하다는 인식이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결국 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시내에서 자동차는 시속 3.2킬로미터 이상을 달릴 수 없고, 시외에서는 6.4킬로미터 이상을 달릴 수 없다는 규정이었습니다. 더 황당한 것은, 자동차가 달리다가 마차를 만나면 무조건 일시 정지해야 하고, 마차를 보낸 다음에야 자동차가 움직일 수 있다는 조항이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자동차 업계의 기술자들은 모두 해외로 빠져나갔습니다. 자본도 유출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틈타 1885년 이웃 나라 독일에서 벤츠사가 세계 최초의 휘발유 자동차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900년대에는 미국의 자동차 전성기가 열렸습니다. 뒤늦게 영국이 자동차 산업을 다시 부활시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지금 영국은 세계 최대의 자동차 수입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혼자서는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술이 아무리 있어도 국가의 제도가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자본이 따라오지 않으면, 사회 분위기가 호의적이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어도 꽃피울 수가 없습니다. 혼자 하면 풍성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럿이 함께 동역하면 풍성해집니다. 만약 그 당시 영국에서 기술과 국가 제도와 사회 분위기와 자본이 혼연일체가 되었다면, 세계 자동차 판도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에서도 혼자 하는 일의 빈약함이 드러납니다. 함께해야 풍성해지는데, 혼자 하면 빈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역하는 자들입니까, 협력하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협력하지 않고 혼자 일을 감당하는 자들입니까? 이 말씀을 통해서 함께 깊이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롯의 영접, 남아 있는 하나님 사람의 흔적
아브라함의 집에 세 분의 나그네가 찾아오셨습니다. 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두 분은 천사들이었습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대화하시기 위해 남으셨고, 두 분의 천사들이 소돔 성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걷고 걸어서 저녁때가 되어 소돔 성문 앞에 도착합니다.
"저녁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창 19:1)
고대 사회의 성문에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파는 물품들을 가지고 와서 장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의 유력한 유지들이 성문 앞에 모여 있었습니다. 주로 해 그늘에 모여서 성의 중요한 일들을 의논했습니다. 유지들이 모여 있다 보니, 성 안에서 조용히 해결되지 않은 갈등과 분쟁들이 그 앞에 나와서 해결받으려고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문 앞은 상업의 요지이자 행정과 재판이 동시에 일어나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롯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롯은 어떤 자격으로 이 성문 앞에 앉아 있는 것일까요? 만약 그가 장사하는 사람이었다면 물건 파느라 정신이 없어서 두 명의 나그네를 못 보고 지나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유지로서 소돔 성을 이끄는 중요한 인사 중 한 사람으로 소돔 성문 앞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본문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녁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창 19:1-2)
롯의 태도를 한번 보십시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세 분의 나그네를 영접할 때와 똑같습니다. 달려나가 영접하고 엎드려 절하며 자기 집에 들어와 쉬고 주무시고 가시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롯에게 아직까지 하나님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문에는 장사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 성의 유지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사람도 그 성에 나타난 낯선 두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누구 하나 그 사람들을 붙들고 "우리 집에 들어와 쉬었다 가십시오,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데, 오직 유일하게 롯 한 사람만이 아브라함처럼 달려나가 엎드려 절하고 영접하며 나그네를 모셔 들어갑니다. 이 사람에게 아직까지 하나님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롯도 한때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롯도 아브라함과 함께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서 하란으로,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 땅으로 함께 다녔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의 길을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다니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경험하고 몸으로 체험하고 느꼈던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물질을 좇아서, 돈을 쫓아서 소돔 성에 와 있습니다. 탈락했습니다. 그런데 죄가 그를 뒤덮고 있지만, 물질을 쫓아서 살아가는 그의 인생에 탐욕이 그늘지어 있지만, 그러나 그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니 여전히 과거에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흔적이 여기에서 발견됩니다.
단번에 심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천사들은 기뻤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그냥 심판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냥 심판하실 것이었다면, 이렇게 천사를 보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천사를 보내서 살펴보게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냥 하늘에서 유황불과 불비를 내리면 그만인데, 하나님께서 굳이 두 천사를 보내서 살펴보게 하시는 것은 이 성을 지금 당장 멸망시키지 않을 명분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그 성에 하나님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그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 전체를 보더라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단번에 심판하시는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선악과 금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감히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악과 금지 명령을 어긴 아담과 하와를 바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찾아오셨습니다. 한번 이야기나 들어보려고, 왜 그랬는지 변명이나 한번 들어보려고 오셨습니다. 한때 하나님과 아담과 하와가 얼마나 좋았습니까? 동식물의 이름을 짓게 하셨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에덴동산을 함께 다녔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에게는 하나님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이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 3:8)
숨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피해서 숨었습니다.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숨은 곳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나타나라고, 대화하고 싶다고, 네 속에 있는 탈락했지만 하나님 사람의 흔적을 보여 달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여전히 숨어서 소리칩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스스로 마지막 기회를 걷어차고 말았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려는 마음을 가져 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 지러 가시기 전, 제자들을 다 불러 모은 자리에서 예수께서 한 사람 한 사람 발을 씻어 주십니다. 유다의 발도 씻어 주셨습니다. 가롯 유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주님은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유다야, 한때 너도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고 사랑하는 열정이 있었지 않느냐? 한때 너도 나의 제자였지 않느냐? 함께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고자 하는 비전과 마음으로 함께 도모하고 열심히 살았지 않느냐? 그런데 지금 너의 마음속에 나를 팔려는 마음을 가졌는데, 네 죄 가운데 가려져 있는 하나님 사람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으면 그걸 가능성으로 붙잡고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라." 우리 주님은 바로 그런 마음으로 유다의 발을 씻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어떻습니까? 지금 이 상황이 견디기가 곤란합니다. 불편합니다. 빨리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습니다. 어서 나가서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버리고 싶습니다. 유다는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찾아오신 예수님을 유다는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다는 그 시간이 지나고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포기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끝까지 찾으십니다. 한때 신앙공동체의 사람들이었고, 우리가 사랑하는 믿음의 백성들이었는데, 우리는 그들이 세상으로 떠나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을 보며 이제는 안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고 천사도 보내시고 기도하시고 그곳에서 하나님 사람의 흔적을 찾고자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셨으니 우리도 포기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기도하고,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한때 믿음의 사람이었으나 떠나 있는 사람들, 그분들의 이름을 부르고 함께 기도하시는 하나님의 백성,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롯의 식탁, 무교병밖에 없는 가정
이제 롯이 두 천사를 영접했는데, 천사들의 반응은 완곡하게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르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찍이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 (창 19:2)
이렇게 해도 롯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간청합니다. "우리 집에 오셔서 쉬었다 가십시오." 그런데 문제는 그 가정의 식탁입니다.
"롯이 간청하매 그제서야 돌이켜 그 집으로 들어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창 19:3)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워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롯의 가정에 무교병밖에 없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 가정의 식탁과 비교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세 분의 나그네를 모시고 먼저 발 씻을 물을 내어 드렸습니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 모셨습니다. "여기 쉬고 계십시오" 하고 아내에게 달려갔습니다. 사라에게 부탁했습니다. 고운 가루 세 스아로 떡을 만들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는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하인들에게 갖다 줍니다. 송아지를 요리해 오라고 말합니다. 엉긴 우유와 치즈와 각종 먹거리를 다 상에 차려서 드렸습니다.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상을 차려 드리고, 아브라함은 곁에 서 있었습니다. "더 부족한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풍성한 식탁을 대접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와 하인들이 혼연일체가 되어서 대단한 식탁을 준비해서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롯의 가정에는 무교병밖에 드릴 것이 없습니다. 무교병이 어떤 음식입니까? 누룩을 넣지 않고 발효시키지 않은, 그야말로 밀가루 덩어리를 그대로 구워 낸 음식 아닙니까? 한마디로 아무 맛도 없습니다.
지금 이 식탁을 보면 우리는 몇 가지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롯의 가정이 손님을 접대한 경험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또한 밀가루를 반죽해서 빵을 만들어서 발효시켜서 드릴 만큼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심각한 사실은, 롯의 가정의 식구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때는 저녁입니다. 함께 가족들이 모여 앉아서 식탁을 나눠야 될 저녁에, 롯의 아내도 두 딸들도 두 딸들과 결혼을 약속한 예비 사위들도 한 사람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정 공동체의 저녁 식탁 교제가 사라졌습니다. 밖에 있어도 문제지만, 만약에 이들이 집 안에 있는데 나타나지 않았다면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롯이 혼자서 동분서주하면서 손님을 영접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장이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두 분이나 모시고 왔습니다. 그런데 아내도 나타나지 않고 두 딸들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동역이 전혀 되지 않습니다. 연합이 되지 않고 한 사람, 롯만 열심히 바쁘게 움직입니다. 결국 만들어서 대접하는 것이라고는 무교병밖에 구워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가정이 돈이 없습니까? 가난한 가정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먹고 살 만하고, 소돔 성의 유지입니다. 대단한 부자입니다. 분기점이 있었습니다. 부자가 된 뒤, 그가 아브라함을 떠나서 소돔 성에 돈 벌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왕들의 전쟁에 휩쓸려 들어갔습니다. 포로가 되었습니다. 롯과 그의 가족, 그리고 함께하는 소돔 성의 사람들이 다 끌려갔습니다. 아브라함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집에서 기른 318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가서 롯과 롯의 가족과 소돔 성 사람들을 다 구해 왔습니다. 빼앗긴 재물까지 다 찾아왔습니다.
그 이후로 롯은 거의 스타가 되었습니다. 소돔 성에서 유명한 인사가 되었습니다. 롯의 삼촌 덕분에 소돔 성 사람들이 다 목숨을 부지했지 않습니까? 잃어버린 돈도 물질도 가재도구도 사람도 다 찾아왔습니다. 그때 이후로 롯은 소돔 성에서 그 위치가 공고해졌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그곳의 유지가 된 것입니다. 하인도 있었을 것입니다. 먹고 살 만했고 구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어 드릴 것이 무교병밖에 없습니다.
동역의 원리, 풍성함의 비결
아브라함의 가정과 창세기 18장과 19장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가정이 부자라서 돈이 많아서 이렇게 대접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동역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아브라함과 부인 사라와 하인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함께해서 풍성한 식탁을 대접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동역의 원리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미 동역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1-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 1:1)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한 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한 분은 성부 하나님 한 분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만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들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은 뒷짐 지고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성령도 일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창조 시에 동역하셨습니다. 로고스인 말씀, 그 말씀이신 아들 예수님도 창조 시에 함께 계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는 삼위일체 동역의 결과물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역하셔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인간이 죄 짓기 전 에덴동산, 이 세상은 완벽한 세상 아닙니까? 충만한 세상 아닙니까? 하늘에는 새가 날고, 땅에는 동물들이 뛰어다니고, 바다에는 물고기가 있고,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입니까?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미 동역하셨기 때문에 풍성해진 것입니다. 한 분 하나님만의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구원 사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구원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뒷짐 지고 가만히 계시고 아들 예수님만을 땅에 보내서 "이제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죽어야 되겠다" 그렇게 보낸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3:16-17)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사건은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공생애의 첫 테이프를 끊는 일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출발한다는 출사표를 던지는 일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인간의 구원 사역을 위해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셨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성부 하나님께서 동행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비둘기같이 아들 위에 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함께 동시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구원을 위한 여정에 하나님도 성령님도 동행하고 동역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혼자의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성령님도 함께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구원이 가능해졌던 것 아닙니까? 창조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동역하셨고, 인간의 구원 사역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풍성한 생명과 영혼의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또 어떻습니까? 우리가 지금 가장 완벽한 교회라고 이해하고 그 교회를 본받으려고 하는 초대교회, 첫 번째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우리가 그냥 생각하기에는 베드로 한 사람이 그 교회의 대표였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그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주도해 가셨을 때, 그 교회는 기둥 같은 일꾼 세 분이 계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였습니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한 사람입니다. 열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열정 때문에 너무 앞서 가서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그걸 보완해주는 요한 같은 사람이 또 다른 기둥이었습니다. 요한은 사려 깊고 조용조용하고 사람을 잘 살피는 분이었습니다. 그 두 분만이 아닙니다. 야고보도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아니라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였습니다. 이 세 분이 함께 동역해서 교회를 이끌어 갔습니다. 여기 세 분뿐만 아니라 또 다른 사도들도 각자 맡은 자리에서 교회를 열심히 세우고 동역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가 풍성해졌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베드로가 한번 설교할 때 3천 명, 또 한번 설교할 때 5천 명, 교회가 날로 날로 부흥하고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사람이 많아지다 보니 갈등이 생겼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 사이에 서로 갈등이 생겼습니다. 원래 있었던 성도들과 흘러 들어온 교인들 사이의 갈등입니다. 과부들 사이에 구제금을 가지고 다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이제 사도들이 다시 집사님들을 세웁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행 6:2-4)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고, 또 다른 동역자들을 세웠습니다. 함께 일할 수 있는 분들, 재정을 잘 맡아 보고 교회 행정을 돌볼 수 있는 분들을 세웠습니다. 일을 분산시키고 동역자들을 세우니까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행 6:7)
말씀은 왕성해지고 사람들의 수는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풍성해졌다는 말입니다. 동역하니까 많아지고 풍성해지지 않습니까? 혼자 하면 롯의 가정의 식탁처럼 무교병밖에 내어 드릴 것이 없습니다. 함께해야 풍성해집니다.
결론
이런 맥락으로 보면 우리 교회는 동역하는 교회입니까?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일까요? 담임목사 혼자서 영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이끌어 가는 교회는 결코 건강하지 않습니다. 그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시면 그 교회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당회원 중심으로 교회가 흘러가면 그 교회는 건강할까요? 몇몇 사람들이 결정하고 나머지는 그냥 별생각 없이 따라가면, 그 교회는 결단코 건강하지 않습니다. 각자 맡은 자리에서 자기가 해야 될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면, 그때 그 교회가 정말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교회학교 교사는 교사의 자리에서, 구역장은 구역장의 자리에서, 상황을 핑계 하지 않고, 지금 이러한 상황 때문에 우리가 못한다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는 어떤 일로 동역할까?" 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 얼마든지 창조적인 생각이 샘솟듯 일어날 것입니다. 구역을 돌보는 일도, 어린 영혼들을 살피고 세워 가는 일도, 함께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동역한다면 교회가 얼마나 풍성해지겠습니까?
몇 사람만 이끄는 교회에는 무교병밖에 내어 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자기 분야에서 자기 일을 성실하게 감당한다면, 아브라함의 식탁처럼 풍성한 식탁을 제공하고 흘려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정은 어떻습니까? 가정에서 자녀들을 돌보는 일이 한 사람의 힘으로만 가능합니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부부가 함께 마음을 모아야 되고, 그것도 부족해서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 삼촌 고모, 어른들의 손길을 받아야 되고, 그것도 부족해서 교회 공동체의 많은 분들, 경험하신 분들이 함께 동역하고 도와줘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그 아이의 인생이 얼마나 풍성해지겠습니까?
우리가 함께하고 손을 잡고 동역하면 풍성한 식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풍성해지고 우리 공동체가 풍성해집니다. 부디 우리가 함께 동역하고,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어떤 일을 감당해야 될지를 깨닫고, 성실하게 맡은 바를 잘 감당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도, 우리 가정도, 우리가 사랑하는 이 나라와 세상도 풍성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성실하게 동역하고 합심하기를 원합니다. 롯이 혼자서만 동분서주했으나 그의 가정에 내어 드릴 만한 것은 무교병밖에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와 하인들과 함께 동역해서 풍성한 식탁을 대접할 수 있었습니다. 주여, 우리 인생이 풍성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정이 풍성해지고, 우리 교회가 풍성해지고, 이 나라와 민족이 풍성해지기를 원합니다. 주여,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각자 맡은 일을 성실하게 감당하도록 도우시고, 게을러서 한 발 뒤로 빼고 있지 않도록 도우시고, 상황과 환경을 핑계 하지 않도록 주의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