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강 / 타락한 도시 (19:4-11)

타락한 도시

본문: 창세기 19:4-11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환경이 주어지면 그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며 살아갑니다. 무더운 사막에서도 살아남는 동물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낙타입니다. 낙타는 등의 혹 덕분에 45일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않아도 버틸 수 있습니다. 사람의 지방이 온몸에 골고루 퍼져 있는 것과 달리, 낙타의 지방은 혹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사막을 횡단하며 걷다 보면 지방이 연소되고, 지방 1g이 연소될 때마다 물 1g이 생성됩니다. 혹의 지방이 물로 바뀌기 때문에 45일을 걸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동물원에 있는 낙타는 어떻습니까? 무더위에 동물원의 낙타는 목이 말라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처럼 열심히 걷지 않고, 동물원에서 주는 물과 먹이로 살아가니 이런 더위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걸어야 지방이 연소되고, 지방이 연소되어야 물이 생성될 텐데, 그 낙타는 동물원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환경이 좋으면 신앙생활을 잘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까? 환경이 좋아졌는데 오히려 신앙생활은 나태해지고, 연약해지고, 믿음은 퇴보합니다. 오히려 척박했던 시절, 환경이 좋지 못했던 때에 우리 믿음이 불같이 뜨거웠습니다.

고대 로마 시절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 신앙인들은 지하 카타콤에서 살았습니다. 예수 믿는 자라는 것이 발각되면 맹수의 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다가 맹수 앞에 끌려나가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들은 믿음의 절개를 굳게 지켰습니다. 기꺼이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공인된 후,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된 이후 교회는 타락했습니다. 교회 안으로 돈이 들어오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정거장이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교회는 급속도로 타락해 갔습니다. 같은 교회인데 기독교 공인 전과 후가 이토록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러한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해 버린 것입니다.

환경에 적응한 롯

오늘 본문의 롯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롯은 한때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였고, 그도 믿음의 결단을 했으며,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먼 믿음의 여정을 떠났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소돔성에 가서 그곳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타락해 갔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타락한 시대, 타락한 도시에 살면서 우리가 믿음의 절개를 굳게 지키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롯의 집에 두 분의 나그네가 오셨습니다. 그분들은 천사였습니다. 롯이 동분서주하며 열심히 음식을 만들었지만, 아내도 두 딸들도 동역하지 않아 빈약한 식탁을 제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식사를 마친 후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한바탕 소동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창 19:4-5)

원근 각지에서 사람들이 다 몰려들었습니다. 그 집을 에워싸고 소리칩니다. "그 사람들을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여기서 '상관하다'라는 표현에 쓰인 히브리어 동사 '야다(ידע)'는 '경험적으로 알다', 곧 성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는 집단 동성 성폭행을 하겠다는 말입니다. 은밀하게 동성애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 자리에서 집단으로 동성을 성폭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충격적인 광경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 때문에 소돔성을 심판하셨습니다. 소돔성의 극단적인 상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면을 살펴봐야 합니다. 소돔성이 처음부터 이랬겠습니까? 원래 처음부터 이런 악한 모습이었겠습니까? 우리는 그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소돔성의 정보를 상세하게 제공하지는 않지만, 실마리는 던져줍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창 13:12-13)

롯이 소돔성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소돔성을 평가하실 때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악하다'라는 형용사 히브리어 '라(רע)'는 '불편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소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롯이 소돔성에 처음 들어갔을 때, 무엇이 하나님을 그렇게 불편하게 했을까요? 그때는 물질 문제였습니다. 롯이 소돔성에 정착했던 초기에 왕들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소돔 지역의 맹주는 그돌라오멜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도시 국가의 왕들이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소돔성의 왕을 비롯한 몇몇 왕들이 배반합니다. 더 이상 조공을 바치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돌라오멜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다른 세력들을 규합해서 조공을 거부한 왕들을 쳤습니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돈 때문에, 물질 문제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불편하게 만드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나마 봐줄 만했고 이해할 만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조금 더 잘 살려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조공 문제로 서로 다투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죄의 성장, 사탄의 전략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잘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생존의 문제가 아닙니다. 먹고 살 만합니다. 부자가 되었습니다. 더 큰 부자가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더 잘 살려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소돔성에서는 농사도 잘 되고 목축도 잘 되어서 부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허무해집니다. 돈을 많이 만지니까, 부자가 되니까 허무해집니다. 그 다음 수순은 육체적 쾌락에 대한 탐닉입니다. 이성애가 아니라 동성애로. 처음부터 동성애가 공공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은밀하게 그들이 동성애의 쾌락을 즐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드러내 놓고 동성 간 성폭행을 공공연하게 자행하고 있습니다. 도시 전체가 음란의 소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죄가 처음에는 먹고사는 문제였다가, 자그마한 문제였다가, 이제는 더 커지고 더 커져서 감당하지 못할 수준까지 와버렸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모든 죄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사탄의 전략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따라하는 존재입니다. 얼마나 잘 모방하는지 모릅니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 13:31-32)

겨자씨 비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작고 작은 겨자씨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지고, 그 말씀이 자라고 또 자라서 큰 나무가 됩니다. 그 나무에 열매가 맺힙니다. 그 나무 가지에 새들이 깃들입니다. 나무 그늘에는 사람들이 쉬게 됩니다. 성장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들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살지 않습니다. 작은 것부터 실천해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큰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일확천금을 꿈꿉니다. 한 방에 부자가 되고 싶어 하고, 한 방에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사탄은 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가져다가 모방했습니다. 악은 죄의 씨앗을 뿌립니다. 죄인 듯, 죄가 아닌 듯, 죄와 악의 경계가 모호한 미묘한 씨앗을 뿌립니다. "먹고사는 문제인데,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서 하는 일인데, 이게 왜 죄가 되느냐." 사람들은 그래서 그 죄를 붙잡아 버립니다. 작게 시작합니다. 그런데 점점 커집니다.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소돔성 전체가 음란의 도시, 음란의 소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사탄이 하나님을 따라하는 전략입니다. 따라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는데, 사탄은 이렇게 세상을 정복해 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탄이 죄의 씨앗을 뿌리지 못하도록 눈을 부릅뜨고 지켜야 합니다. 소돔성은 죄가 자라기에 적합한 환경이었습니다. 그 성에는 의인이 없었습니다. 기도하고 부르짖는 자들은 있는데, 살아내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범이 없습니다. 모델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성에 죄가 떨어져서 자라고 열매 맺기가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의 적용: 가정과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이런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좋은 모델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돌아보면 소돔성과 얼마나 유사한지 모릅니다. 한국전쟁 이후 이 나라는 전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습니다. 한 끼 먹는 것이 소망이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가난했습니다. 밥만 굶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부자가 됩니다. 이제 먹고사는 건 걱정할 게 없습니다. 거기서 멈추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더 잘 살려고, 더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 집이 생겼는데 더 넓은 집으로, 차가 생겼는데 더 좋은 차를 타려고 합니다. 이제는 나만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내 자녀, 그 자녀의 자녀까지 3대, 4대가 잘 먹고 잘 사는 것, 창고에 돈을 가득 채워 놓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이제는 허무해집니다. 그 다음 수순은 육체적 쾌락입니다. 이성애를 넘어 동성애까지.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동성애는 유럽 나라의 문제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동성애의 큰 파도가 이 나라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겨내야 합니까?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동성애자들이 광장을 점령하고 시위하고, 동성애 퍼레이드를 벌이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소수자임을 내세웁니다. 교회와 신앙 단체들이 그들을 혐오한다고 프레임을 씌웁니다. 핍박받는 소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무작정 반대만 해서 어떻게 그들을 이기고, 이런 프레임을 깨고 뚫어내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적극적으로 신앙 공동체를 아름답고 영향력 있는 공동체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우리 가정을 한번 보십시오. 신앙인의 가정이라고 다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드러내고 말을 못 해서 그렇지, 각 가정마다 얼마나 고통받는지,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있는지, 얼마나 힘든 일이 있는지, 그 과정에서 썩어 나가는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성경의 가정 원리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이 보니까 엄마, 아빠가 불행합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다투기만 합니다. 즐겁지 않습니다. 부모가 한 남자와 한 여자로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자연스럽게 보여주면 학습될 것입니다. "성경의 원리대로 부모님이 사셨더니 이렇게 행복하구나." 자녀들이 그것을 보고 그대로 배울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싸웁니다. 다투고 싸움하고 갈등하는 대부분의 문제가 돈 문제입니다. 물질 문제 때문입니다. 들여다보면 먹고 살 만한 가정들입니다. 하루 세 끼 먹고 사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툽니다. 자나깨나 돈 때문에 다툽니다. 자녀들이 그 이야기를 다 듣고 자랍니다.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어떤 생각을 할까요? "나는 나중에 커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 자기도 모르게 물질이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마음이 자녀들 마음속에 자리 잡습니다. 그들이 성장해서 돈을 많이 벌 때까지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내가 부자가 되어서 결혼해야지. 그래야 이렇게 싸우지 않지. 그래야 이렇게 불행하지 않지." 자녀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비록 남들보다 조금 가져도, 비록 좀 덜 가져도, 예수 잘 믿고 믿음 생활 잘하고 말씀 안에서 살아가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 자녀들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우리 집이 그렇게 부자는 아니어도 우린 행복하구나. 부모님이 사랑하시고, 나를 아껴주고 사랑하시고,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지금 이 동성애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 이 나라와 이 민족과 이 땅이 이런 지경이 된 것은 우리가 가정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을 스스로 지켜내지 못했고, 행복하게 만들어 가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자녀들 보는 데서, 자녀들 듣는 데서,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온통 돈 타령이라면, 자녀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성장하겠습니까?

교회는 또 어땠습니까?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복받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받습니다. 그런데 그 복이 돈 많이 버는 복이었습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됩니다." 강단에서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외쳤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까? 성경에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는 말이 나옵니까? 그러면 예수 잘 믿고 순교한 분들은 저주받은 것입니까?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된다는 거짓된 복음, 가짜 복음을 강단에서 가르쳤고 교회가 선포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돈이 있어야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적어도 성도라면 부자가 되어야, 돈이 있어야 믿음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답지 않은 교회를 다녔던 젊은 세대들이 교회에 실망하고, 기성세대에 실망하고, 예배당을 뛰쳐나갔습니다.

이 지경인데 우리가 동성애만 반대한다고 해서 그들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가정다운 가정을 세워가야 합니다. 교회다운 교회를 세워가서 우리 교회가 이 시대의 대안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성장하고 자라나는 아이들이 이 교회가 행복하고, 하나님의 공동체가 이런 공동체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해줘야 합니다. 가정을 그런 가정으로 세워줘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가정도 세우고, 교회도 세우고, 공동체도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래야 이런 시대적 아픔과 병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반대만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서 반대만 한다고 어떤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살전 5:6-8)

"정신을 차리라"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우리는 낮에 속한 자들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정신 바짝 차리고, 사탄이 죄의 씨앗을 뿌리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공동체와 교회공동체를 하나님의 아름다운 공동체로 빚어가고 세워가야 합니다. 그래야 10년 뒤, 20년 뒤에 희망을 바랄 수 있습니다.

악에는 악으로 대항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롯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창 19:7)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합니다.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 롯은 그 집의 주인입니다. 집에 온 손님들에게 이렇게 악행을 행하려 하는데 말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 롯의 말이 충격적입니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창 19:8)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진심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흥분한 군중들을 달래기 위한 말이라 하더라도, 롯은 두 딸의 아버지입니다. 한때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악에는 악으로 대항해서 이겨낼 수 없습니다. "형제들아 이 악을 행하지 말라" 해놓고서 자기가 말하고 자기가 행하는 이 악이 더 큰 악입니다. 어떻게 두 딸을 내어주겠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사탄과는 타협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사탄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절대 선밖에 없습니다.

롯이 믿음의 사람이었다면 이런 순간에 기도해야 옳았습니다. 엎드려서 간절하게 기도하고, 결단하고, 대문 앞에 나가서 그들을 꾸짖어야만 했습니다. 몽둥이에 맞아 죽더라도, 돌에 맞아 죽더라도 순교를 각오하고 죽어버려야 옳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값진 죽음입니다. 간절하게 기도하고, 그들을 설득하고, 선포하고, 꾸짖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악을 더한 악으로 타협하고 있습니다.

롯은 왜 절대 선인 기도를 하지 못했을까요? 평소에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기도가 생각나지 않은 것은 그가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적인 위기 상황에 기도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평소에 큰일이나 작은 일이나 기도하기 시작하면, 이런 상황에 당연히 기도부터 합니다. 기도하고, 엎드리고, 담대해지고, 결단하고, 그들에게 나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으니까, 평소에 기도생활이 철저하게 무너져 내려 있으니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 믿음의 밑천, 밑바닥이 다 드러나는 법입니다. 평소에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큰일부터 작은 일까지 기도하고 하나님께 여쭈고 엎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큰일이 있을 때 기도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권위는 삶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반응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창 19:9)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소돔성 사람들의 롯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 반응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롯이 권위가 없습니다. 그의 말이 소돔성 사람들에게 전혀 먹히지 않습니다.

권위는 언제 생기는 것입니까? 키가 크고 덩치가 좋고 목소리가 크면 권위가 있습니까? 억대 부자가 되고 엄청난 재벌이 되고 부귀 권세를 다 가지고 있으면 그가 권위 있는 사람입니까? 그런 것은 먹히지도 않습니다. 진짜 권위는 그분의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꼬부랑할머니가 되었다 하더라도, 작은 목소리로 "이제 그만해라" 한마디만 하더라도, 그분의 삶이 존경받을 만한 삶이었으면 모든 사람이 그 앞에서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삶이 존경받을 만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롯이 지금 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먹히지 않습니다. "네가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사람들이 얼마나 롯을 우습게 봅니까? "너나 나나 똑같은 죄인 아니냐. 우리는 네가 한 짓을 다 알고 있는데, 너도 죄짓는 거 내가 다 알고 다 봐왔는데, 지금 와서 왜 우리를 가르치려 드느냐. 너는 그렇게 가식적이고 거짓된 행동을 하지 말라. 꼴 보기 싫으니 더 이상 그런 말 하지 말라." 그가 지금까지 소돔성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한마디 결정적인 말을 하는데 그 말이 먹히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생을 돌아봐야 합니다. 비난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작정하고 중요한 말을 내뱉는데 그 말이 먹히지 않으면, 지금까지 내가 잘못 산 것입니다. 소돔성 사람들도 물론 잘못하고 있으나, 롯이 지난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 장면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안을 밝히십시오

이제는 제어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이 문제를 누가 해결합니까?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고 문 밖의 무리를 대소를 막론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헤매었더라" (창 19:10-11)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천사들이 눈을 어둡게 한 것입니다. 이 모습은 소돔성 심판의 예고편입니다. 하나님은 소돔성을 심판하시기에 앞서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패턴입니다. 한 번에 심판하지 않습니다. 두 천사를 보냈습니다.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있습니다. 두 천사에게 살려달라고 무릎 꿇고 빌어야 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살 테니 부디 이 성을 멸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티끌과 재 가운데 앉아서 회개할 테니 제발 이 성을 멸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야 하는데, 이들은 영안이 어두워져 있습니다. 두 천사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육의 눈은 얼마나 밝은지 모릅니다. 성적인 눈, 육의 눈은 밝아서 그들의 촉수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서 육의 눈이 민감하지 않습니까? 돈 되는 것 쫓아다니고, 사람들이 좋다 하는 것 따라다니고, 육의 눈은 한껏 발달해 있는데, 영안은 어두워져 있고 가리워져 있다면 심판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금식은 왜 하는 것입니까? 육의 욕망을 절제하고 제어함으로써 영을 밝게 하려는 시도입니다. 끊어낼 것 끊어내고 육의 욕망을 줄여야 영안이 밝아집니다. 거기에 우리의 살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 사람들은 육은 활발하게 활동하는데 영이 어두워져서 심판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불행이 우리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의 눈을 환히 밝혀 보고, 믿음 생활을 잘하고, 심판을 면하고, 우리 공동체를 적극적으로 밝게 만들어가는 하나님의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탄은 죄인 듯 죄가 아닌 듯 죄의 씨앗을 뿌리고, 나중에 죄가 큰 나무가 되어 열매를 거두기까지 죄를 성장시켰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상대하지 못했습니다.

정작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겨자씨부터 나뭇가지,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야 했건만, 우리는 거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가 가정과 교회를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적인 영향력이 미치는 자리로 세워가기를 원하오니, 주여, 우리를 축복하여 주옵소서. 가정 공동체를 천국으로 만들어 가고,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답게 세워가기를 원하오니, 아버지 하나님 함께하여 주옵소서.

참된 권위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권위를 만들어 낸다고 하셨사오니, 영향력 있는 삶,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 이 삶을 통하여 결정적인 순간에 권위자가 되게 하옵소서. 영의 눈 밝히 떠서 심판을 면하기를 원합니다. 육을 죽이고 영을 살려서 하나님 앞에서 바른 인생으로 살아가기 원하오니,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