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강 / 농담으로 여겼더라 (19:12-16)

농담으로 여겼더라

본문: 창세기 19:12-16

적응이라는 말은 양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더운 날씨나 추운 날씨에 적응하는 것은 이롭습니다. 빨리 적응해야 기후변화에 대처할 수 있고, 적응해야 삶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 부조리나 불평등의 문제는 적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부조리하다고 느꼈고, 처음에는 부당하다고 느꼈는데 유별나게 저항해서 무엇 하겠느냐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이 가만히 있으니까 나도 그냥 가만히 있어야겠다고 잠자코 있다 보면,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적응해 버리고 맙니다. 처음에는 불평등하고 부조리하다고 느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그렇게 인식하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1662년 영국의 찰스 2세가 왕이 된 이후에, 지금 생각해 봐도 이상한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이른바 '난로세'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부자증세인데, 부자들이 큰 집을 짓고 방이 여러 개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난로세를 부과했습니다. 요즘 환율로 계산하면 난로 하나당 1년에 약 63만 원 정도로 세금을 매겼습니다. 그런데 이 세금을 발표하자마자 조세 저항에 직면합니다. 사람들은 소극적으로 대항했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방문을 열어줘야 집에 들어가서 난로 개수를 세고 세금을 부과할 텐데, 사람들이 이런저런 핑계로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난로세는 폐지되었습니다.

1696년 영국의 윌리엄 3세는 창문세를 신설했습니다. 역시 같은 맥락으로, 부자증세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런데 창문세는 난로세와 달리 밖에서 보면 창문 개수를 셀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금을 부과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표시로 집에 벽돌로 창문을 막아 두고, 합판으로 창문을 막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여전히 세금 부과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그마치 150년 동안이나 이 세금이 유지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창문을 막고 지내면서, 그렇지 않아도 영국의 날씨가 우중충하고 햇볕 보기가 힘든데, 오랫동안 어두운 집에 살면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고 전염병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50년 동안 욕하면서 세금을 냈습니다.

이웃나라 프랑스에서는 영국에서 창문세로 짭짤한 수입을 거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루이 16세가 창문세를 신설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루이 16세의 실정이 있었지만,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결국 루이 16세는 시민 재판에 넘겨져 처형됩니다. 저항한 사람과 저항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이토록 큽니다.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그건 아니라고 말해야 되는데, 영국 시민들은 가만히 있다가 150년 동안이나 부당한 세금을 내고 말았습니다. 프랑스 시민들은 달랐습니다.

영혼을 위한 중보의 사명

죄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식으로 대응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합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면에 또 어떤 사람들은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습니다. 유별나 보일까 봐 그러다 보면 롯과 롯의 가정처럼 불행한 일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소돔 성에 두 분의 천사들이 왔습니다. 롯은 그 두 분의 천사를 가정으로 영접했고 무교병을 대접했습니다. 저녁이 되자 소돔 성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막을 수 없게 되어서 두 천사가 그들의 눈을 일시적으로 멀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막을 수가 없게 되었고, 이제는 소돔 성의 심판이 임박해졌습니다.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창 19:12-13)

드디어 소돔 성에 온 두 사람이 그 목적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성을 멸하리라." 그런데 더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이 두 천사가 성을 멸하기 전에 롯에게 "너의 가족과 너에게 속한 사람을 이끌어 밖으로 끌어내라"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주지 않는데, 롯과 롯의 가족에게는 한 번 더 기회를 줍니다. 무엇 때문에 이 성이 멸망당하는데 롯과 롯의 가족은 이토록 챙기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창 19:29)

아브라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만 생각하면 롯을 그냥 그곳에서 멸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기도하고 있었는지, 아브라함이 롯을 얼마나 극진하게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다 알고 계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생각하면 롯과 그의 가족을 한꺼번에 멸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롯과 롯의 가족이 이렇게 기회를 얻었는데, 우리는 이것을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궁극적인 차원에서, 본질적인 차원에서 과연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구원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구원이 어떤 개념입니까?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우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해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구주로 영접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나와의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래야 구원이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지금 롯과 롯의 가족, 두 딸과 아내, 이들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까? 그들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했습니까? 자신이 죄인 됨을 인정하고 고백했습니까? 그런 것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 본질적인 차원에서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문에 이들에게 한 번 더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예들이 많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여리고 성의 라합과 그의 가족입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수 6:25)

라합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말씀 듣고 마음이 움직였고, 믿음이 생겨났고, 그리고 실천했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두 정탐꾼을 숨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라합의 아버지는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의 가족들도 하나님과 어떤 관계 형성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라합을 생각하셔서 그의 아버지와 그 가족들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통해서 내가 할 일과 하나님이 하실 일을 구별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닌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구원을 위한 기회는 제공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롯과 그의 가족을 특별하게 사랑해서 간절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그 성에서 이끌어 내셨지 않습니까?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 사랑하는 가족들, 내 친구들, 일가친지들, 이름만 생각해도 눈물이 나는 그들을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그 영혼을 위해서 중보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분별력을 잃어버린 시대

이렇게 롯과 그의 가족은 아브라함의 기도 덕분에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바쁘게 움직여야 되지 않습니까? 먼저 롯이 찾아간 자들은 롯의 사위가 될 두 사람이었습니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창 19:14)

가족들은 지금 함께 있으니 예비 사위들에게 찾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을 멸하실 것이니까 얼른 떠나라"고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히브리어 동사 '차하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비웃다'라는 뜻입니다. 그냥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드러내놓고 노골적으로 비웃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이 두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만약에 롯이 소돔 성문 위에 올라서서 소돔 성 사람들을 다 불러 놓고 "이제 곧 이 성이 멸망할 것인데 빨리 성을 빠져나가시오"라고 말했더라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이 두 사람의 반응과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웃었을 것입니다. "이상한 소리하지 마라. 지금 우리가 이렇게 멀쩡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이 성이 망한다니 무슨 말이냐"고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사람들은 롯을 비웃었을 것입니다.

마치 과거의 노아홍수 시절에 노아를 손가락질하고 비웃었던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될 것이다."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산꼭대기에서 열심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노아를 미친 노인네 취급했습니다. 방주의 문이 닫히는 날, 누구도 방주에 타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소돔 성의 상황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비정상이 정상처럼 행동하고, 정상인 사람을 비정상으로 몰아붙이는, 공동체의 집단 논리에 매몰되는 현상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소돔 성은 지금 당장 망해도 아깝지 않은 성입니다. 그런데 소돔 성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소돔 성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성이 망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성은 당연히 망해야 될 성인데,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망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신천지 이단에 빠져 있다가 회심하고 돌아와서 간증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 분들의 이야기 속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고백이 있습니다. "제가 그 집단에 있을 때는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날 찾아와서 그건 이단이라고 말하고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해도 오히려 그 사람들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이만희가 보혜사라고 말하는 것, 그 종말론에 빠져서 144,000의 숫자에 들기 위해서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갖다 바쳐도 그 집단의 논리가 옳다고 여기고 있는 사람들. 그런데 이제 나와서 생각해 보니, 정상적으로 믿음 생활하면서 돌아보니 그때 제가 무엇에 씌인 것 같고 홀린 것 같고 바보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집단의 논리에 매몰되는 것일까요? 소돔 성 사람들은 왜 이렇게 어리석게 살고 있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분별력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참과 거짓,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나눌 수 있는 분별력이 이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소돔 성 사람들은 돈 벌 만큼 벌었습니다. 돈을 벌 만큼 벌고 나니까 이제는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는 것입니다. 동성간 성폭행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데도 그들은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습니다. 분별력이 사라진 사회였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고 말합니다. 이 세대, 가치관이 상실된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분별하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기준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어야 선악을 분별할 것 아닙니까? 법정에서 누가 옳은지 가리려면 법이 기준이 됩니다. 형법이나 민법을 가지고 놓고 누가 옳은지 누가 잘못되었는지를 분별하지 않습니까?

오늘 소돔 성 사람들이 이렇게 망해가는 것은 이들에게 기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준이 없으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 4:6)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습니다. 기준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따라가는 논리를 뒤쫓아 간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 되는 것만 쫓아다니지 않습니까? 돈이 이 세상의 최고의 가치가 됩니다. 돈 벌기 위해서 그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도 버릴 만큼, 수십 년 지기 친구의 우정도 버릴 만큼 돈의 권세가 대단합니다. 세상의 기준은 오로지 물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은 말씀 아닙니까?

만약에 롯이 비록 소돔에 살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았다면, 그 말씀을 가지고 딸들과 아내를 가르쳤다면, 예비 사위들에게 "너희들이 우리 가정에 장가 오려면 하나님 말씀을 공부해야 된다"고 하고 그들을 앉혀 놓고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일러주었더라면, 그들에게 기준이 생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좌표가 되고 기준이 딱 되면, 지금 소돔 성의 이 상황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그들도 인지하고 알아챘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롯과 그의 가족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절대 기준이 사라진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좌표

우리가 중학교나 고등학교 다닐 때 수업 시간에 좌표를 배우지 않습니까? x축을 배우고 y축을 배웁니다. 좌표 평면에 x축과 y축을 놓고 원점을 잡습니다. 그리고 점을 찍습니다. 그러면 그 점의 좌표가 생성됩니다. 그 좌표가 생성되면 원점과의 거리를 잴 수 있습니다. 중심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중심에서 얼마나 가까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중심을 잡아주고 좌표를 잡아주는 것입니다. 중심이 있고 좌표가 있어야 그걸 기준으로 이 점이 얼마나 중심에서 멀리 가 있는지를 판단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좌표가 없고 중심이 없으면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지금 이 나라가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지, 지금 우리 가정은 제대로 살고 있는지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저마다 제각각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회를 상대주의 사회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렌즈로 세상을 봅니다.

우리는 어떤 렌즈를 가지고 세상을 봅니까? 하나님 말씀이라는 절대 기준을 가지고 오늘 이 세상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이 세상이 정상입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소돔과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 이 나라가 지금 당장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사람들은 죄악을 탐닉하고 물질을 쫓아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렌즈를 끼고 우리 가정을 보십시오. 제대로 살고 있는가? 정상적으로 우리 가정이 흘러가고 있는가? 하나님 말씀이라는 렌즈를 가지고 내 삶을 한번 반추해 보십시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사람들은 가끔 자기에게 질문하지 않습니까? "나 잘 살고 있는가?" 누구에게든 물어봅니다. 친구들에게도 "나 잘 살고 있는지 한번 확인해 달라"고, "니가 볼 때 나는 어떤지, 당신이 볼 때 나는 정말 잘 살고 있는지" 물어봅니다. 그런데 그때 잘 산다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잘 산다는 기준은 경제 활동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생활 잘하고, 인간관계 잘 맺고, 무병장수하고 잘 먹고 잘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거 다 빼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적용해 보면, 나는 정말 잘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말씀을 기준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본다는 것은 곧 말씀을 좌표로 삼아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으로 볼 때 우리 가정과 이 나라, 이 사회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을 잡아 줘야 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 비유가 나오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다가 먼 나라로 가서 다 써 버렸습니다. 그런데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잘못됐다는 것을. 그리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본문은 자세하게 말하고 있지 않으나, 이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로 돌아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멀리 갔지만 돌아올 수 있는 이유는 그 아버지가 좌표, 기준을 잘 잡아 줬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신앙 교육하면서 무엇이 그르고 무엇이 옳은지 제대로 가르쳐 줬기 때문에, 멀리 가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준이 없으면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뭘 잘못하고 있는 것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우리가 자녀들에게 말씀을 일러 주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신앙 교육을 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준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절대 기준이 없어서 소돔 성도 망하고 북이스라엘도 망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일이 우리 가정에는, 이 나라 이 민족에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영원한 것에 집중하라

이제 이런 지경이 되었는데 롯은 급하지 않습니다.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창 19:15-16)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실 급한 것은 롯이어야 됩니다. 롯이 다 급해서 두 딸과 아내의 손을 이끌고 성 밖으로 끌고 나가야 되는데, 오히려 롯이 지체하고 있습니다. 머뭇거립니다. 주저합니다. 그래서 두 천사가 급해졌습니다. 한 손엔 롯, 한 손엔 롯의 아내, 또 다른 천사는 두 딸을 양 손에 붙잡고 급하게 성 밖으로 이끌어 내었습니다.

롯은 왜 주저한 것일까요? 무엇 때문에 머뭇거리는 것일까요? 그 순간 롯에게 수많은 생각이 지나갔을 것입니다. 삼촌 아브라함을 떠나서 처음 소돔 성에 왔던 그날. 부자가 되려고 삼촌을 떠나서 왔던 그 순간. 전쟁 포로가 된 날. 포로에서 우여곡절 끝에 풀려난 날. 목축을 열심히 하고 농사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어서 소돔 성의 유지가 된 날. 장밋빛 미래를 꿈꾸면서 앞으로 더 큰 부자가 되려고 열심히 살아온 그 날들.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롯을 통해서 롯의 결정적인 두 가지 잘못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사라질 것에 집착했습니다. 잠시 후면 하늘에서 유황 비와 불비가 내릴 것입니다. 소돔 성과 자기가 지금까지 쌓아 놓았던 것을 다 태워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까워하고 있습니다.

진짜 아까워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롯과 그의 가족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구원을 향한 기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지금 당장 빠져나와서 다시 심기일전하고, 다시 믿음 생활 제대로 하고, 잃어버린 것 다 잊어버리고 다시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아야 되는데, 바꿀 수 없는 당신의 영혼의 문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내 구원의 문제가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붙잡지 못하고, 그는 썩어 없어질 것, 불타 없어질 것, 물질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 중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롯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영혼의 문제입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앞에 구원받을 수 있느냐,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눈감아도 천국에서 눈뜰 수 있느냐, 누구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의 문제가 가장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썩어 없어질 물질, 별것 아닌 것, 있다가도 없어지는 물질, 없다가도 하나님이 부어 주시면 엄청나게 부어 주실 물질, 그것만 따라 살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롯이 그런 어리석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롯의 문제는 심판을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종말 의식은 성령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별한 특징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요 16:7-8, 11)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는데, 심판은 바로 종말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 모든 임금들이 다 심판을 받은 것처럼 성령이 오시면 우리 마음에 종말 의식이 생기게 됩니다.

종말 의식이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가 지금 당장 이 세상을 떠나도 천국에서 눈뜰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종말 의식입니다. 종말 의식이 없는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 같습니다. 내가 돈을 많이 모아 놓았으니까 이 돈을 쓰면서 나는 영원히 산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하지 않습니다.

롯은 바로 종말 의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이 성이 멸망한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지체하고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있으니, 이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이 사람이 종말 의식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영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지금 당장 예수님께서 천사장의 호령 소리와 나팔 소리로 공중에 재림하실 수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이렇게 건강하지만 내일 눈 뜨면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우리는 이런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면 죄짓지 않습니다. 당장 하나님을 만나야 되는데 어떻게 함부로 죄짓고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당장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는데 함부로 죄를 짓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면 이웃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원수 맺지 않습니다. 오늘 당장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겠습니까? 사랑한다고 더 많이 말하고 사랑을 표현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롯은 종말 의식도 없고 하나님의 영도 함께하지 않는 인물이었습니다.

결론

롯의 이런 실패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 인생에 하나님 말씀이라는 절대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에 집착하지 말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영혼의 문제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종말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붙들고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롯을 통해서 많은 깨달음을 주시고 교훈 주셔서 감사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절대 기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절대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오니 아버지,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그 말씀을 렌즈로 세상을 보게 하시고, 우리 가정을 보고, 나 자신을 보고, 잘못된 것을 고쳐가게 하여 주옵소서. 썩어 없어질 것에 집착하며 살지 않도록 도우시고, 언제 하나님이 나를 불러 가셔도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