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강 /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19:26-30)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본문: 창세기 19:26-30

영국의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습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공부하는 이유는 그 참혹한 전쟁의 역사를 직면함으로써 오늘과 내일을 평화롭게 살기 위함입니다. 과거에 왜 전쟁이 일어났고 왜 인류가 그토록 많이 죽어야만 했는지를 공부하지 않으면 미래와 현재의 평화를 담보하기 어렵습니다. 역사는 반복되기에 인간은 미련해서 과거의 잘못을 답습합니다. 그래서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새롭게 하는 역사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역사의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양극단의 인생을 삽니다. 첫 번째 부류는 과거에만 매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과거 자신이 얼마나 잘나갔는지, 과거 조상이나 나라가 얼마나 위대하고 탁월했는지 그것만 자랑합니다. 어떤 나라는 조상이 남긴 역사적 유적만 가지고 자랑하고 그것으로 돈벌이하며 살아가고, 현재나 미래를 위해서는 투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과거에 잘났던 것만 자랑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을 "꼰대"라고 부릅니다. 또 한 부류의 극단적인 사람은 과거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현재와 미래만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도 위험합니다. 과거의 문제를 통해 배우지 않으면 오늘날 같은 문제가 일어났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롯과 그의 가정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일까요? 이 가정은 과거에만 매여 있는 자들입니다. 특히 소돔 성에 살았던 죄악된 도성, 그 과거에 매여 있는 나머지 미래와 현재를 준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서 결국은 실패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오늘 이 가정을 통해서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죄악된 도성을 향한 미련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통해서 예고하신 대로 소돔 성이 불탑니다. 하늘에서 유황과 불비가 내려서 그 성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비참한 현실입니다. 그 성이 한때는 탁월했고 사람이 많이 모였고 돈이 모였던 곳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흥했는데, 이제는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하나님은 롯과 그의 가족을 기억하시고,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가정에게 생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께 새롭게 부여받은 생명을 가지고 멀리 가서 믿음생활 새롭게 하고 잘 살면 됩니다. 그런데 예상치 않았던 일이 벌어집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창 19:26)

간단한 말씀입니다.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그런데 이 말씀 한 절만 따로 떼서 생각하면 하나님이 너무하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뒤만 잠깐 돌아봤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을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성경은 전체적인 맥락을 봐야 합니다. 창세기 19장 1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소돔 성이 망하기 전에 천사들을 통해서 롯의 가족에게 두 가지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창 19:17)

첫째는 "될 수 있는 한 멀리 도망가라, 산으로 도망가라"이고, 둘째는 "절대로 돌아보지 말라"입니다. 돌아보지 말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고개를 뒤로 돌이키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미련을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 성에 많은 물질이 있어도, 그 성에 두고 온 사람이 있어도, 그 성에 추억과 사랑의 모든 기억들이 아로새겨져 있어도 기억조차 하지 말라,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성은 죄악된 도성이니 절대로 돌아보지 말라, 미련을 갖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롯의 처는 하나님의 말씀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녀가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성 밖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롯의 처의 마음은 사실 소돔 성에 가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그 손목에 이끌려 나오기는 했는데, 마음은 소돔 성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산으로 도망가라, 뒤를 돌아보지 말라"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평생 동안 모은 재산이 저기서 불탄다고 하는데, 어쩔 수 없이 남편과 두 딸들을 따라 나서서 저 멀리 떠나가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소돔 성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사건은 그 당시 사람들뿐만 아니라 후세 사람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사람이 소금 기둥이 되었으니 전대미문의 사건입니다. 역사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사건입니다. 예수님도 이 사건을 자신의 종말론에서 인용하십니다.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눅 17:29-30)
"롯의 처를 생각하라" (눅 17:32)

예수님이 종말의 때를 예고하시면서 짧지만 강하게 하신 말씀,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엇을 기억하라는 말입니까? 죽음의 도성, 죄악의 도성을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린 롯의 처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자리를 다시 돌이켜서 그 길로 가려는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여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이 원망하고 불평했습니까?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하나님은 그들의 원망과 불평을 다 들어주셨습니다. 목이 마르다 하면 반석에서 물을 주셨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다고 원망하면 하늘에서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습니다. 배가 고프다 하면 하늘에서 만나를 주셨습니다. 날씨가 더워서 견딜 수 없다고 말하면 구름 기둥으로 해를 가려 주셨습니다. 사막의 저녁에 너무 춥다고 말하면 하나님께서 불 기둥을 세워 주시고 그들을 따뜻하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다 견뎌 주셨습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하나님이 참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화나게 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한 가지, 그것은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말이었습니다.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민 14:4)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셨을까요? 그냥 단순한 원망으로, 단순한 불평으로만 받아들이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아니하겠느냐" (민 14:11)

하나님은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을 당신을 멸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당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멸감을 느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 말을 하나님 당신을 모욕하는 말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왜 이것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욕하는 말이 될까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베푸신 모든 구원 계획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습니까? 우선 지도자 모세를 세우셨습니다. 그를 바로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게 열 가지 재앙을 행하셨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자들은 죽음의 사자가 다 건너갔습니다. 이 사건은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사건을 예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해서 구원해 놓았더니 하나님 앞에 감사하다는 말은커녕 "우리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죄악된 자리, 430년 동안 종으로 살며 애굽의 우상을 섬기던 그 자리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하나님이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것을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롯의 처를 한번 대입시켜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롯의 처와 그의 가정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와 생명을 주기 위해서 지금까지 한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옷을 입고 내려오셨습니다. 두 천사와 함께 내려오셨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에서 식사하시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곁에 남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셨습니다. 여섯 번이나 숫자를 바꾸어서 기도해도 하나님은 다 수용해 주셨습니다. 두 천사를 소돔 성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억지로 롯의 가족의 손목을 이끌고 그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산으로 도망가라" 하면 열심히 도망가고,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데, 롯의 처의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돔 성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그들을 이토록 아끼고 사랑해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하신 일을 다 헛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화가 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한번 적용시켜 보십시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서 이 자리에 오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하여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 아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셨습니다. 죄가 없는데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아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 죄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아들을 내어 주시고, 아들은 아버지께 순종하시고, 그래서 우리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죄의 종으로 살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크고 놀라운 경륜으로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입으로 하는 말이 "나는 죄악된 도성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껏 우리를 건져서 구원해 놓았더니 내 마음은 죄의 자리에 가 있습니다. 죄의 쾌락을 즐기던 그 시절을 그리워합니다. 여전히 그 시절을 잊지 못하고 내 마음과 생각은 거기에 매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행위를 참지 않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유리 방황했습니다. 롯의 처는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죄악된 도성을 그토록 사모하면 하나님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으실 것입니다. 진실로 지혜로운 자는 죄의 자리를 철저하게 끊어내는 사람입니다.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속에 죄의 생각이 올라올 때면 이것이 하나님을 모욕하고 멸시하는 행위임을 깨닫고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화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입니다.

믿음의 시선이 머무는 곳

이제 영적인 상상력을 좀 발휘해 보십시오. 롯의 처가 소금 기둥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소문이 나지 않겠습니까? 근방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 사람이 소금 기둥이 될 수 있을까?" 구경 왔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카메라가 없어서 그렇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겠습니까? 온몸에 전율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고, 만져보기도 하고, 소금 기둥이 되었다는데 진짜 짠맛이 나는지 입에 대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비가 내려서 그 소금이 다 녹아서 사라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었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그 자리에 롯의 처의 소금 기둥을 보러 갔다면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합니까? 우리가 진짜 봐야 하는 것은 롯의 처의 눈빛이 머무는 자리입니다. 그녀의 눈길을 한번 따라가 보십시오. 상상해 보십시오.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처의 눈빛이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소돔 성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소돔 성은 이제는 흔적도 없습니다. 다 불타 버렸습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유황과 불비가 내려서 다 태워 버렸습니다. 기껏 해서 하늘에서 내리는 유황과 불비로 불타 없어질 그 성 쳐다보다가 이 지경이 되었다는 것, 소금 기둥이 되어서 인생을 망쳤다는 것, 그것은 우리에게 굉장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보느냐, 내 눈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현주소를 설명합니다. 마음이 가는 곳에 눈빛이 머물지 않습니까? 지금 어디를 보고 계십니까? 정말 내 마음이 향하는 곳이 어딥니까? 불타 없어지고 사라져 버릴, 아무것도 없이 다 사라져 버릴 소돔 성과 같은 허무한 곳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세상 가치가 아닌 하늘의 가치를 갈망하고 소망해야 합니다. 세상의 불로 태운다 할지라도 타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 그 도성을 우리는 소망하고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오늘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하시고, 우리 믿음의 눈을 뜨게 하시려고 우리를 믿음생활 하게 하시고, 성경 읽게 하시고, 하나님 백성 삼아 주신 것입니다. 부디 오늘 우리가 어디를 보는지, 무엇을 보는지가 우리 믿음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때를 놓친 순종

이제 롯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롯은 지금 소알 성에 몸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고 싶을까요? 그래서 앵 소돔 성이 지척에 있습니다. 고개만 들면 소돔 성이 보입니다. 불타 없어져 버렸습니다. 아직까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릅니다. 몇 날 며칠이 지나고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고개만 들면 소금 기둥이 되어 버린 아내가 서 있습니다. 그 주변에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있습니다. 그 성에 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롯이 소알에 거주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 거주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주하였더니" (창 19:30)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롯의 두 가지 문제를 발견합니다.

첫 번째 문제는 그가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통해서 "될 수 있는 한 멀리 도망가라, 산으로 도망가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천사들에게 매달려서 설득합니다. "도망가다가 죽을 것 같습니다. 제발 저에게 가까운 성 소알에 머물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소알 성에 머물기가 두려워서 산으로 그냥 올라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즉각 그 말씀에 순종해서 멀리 멀리 떠나야 했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이제야 산으로 도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타이밍을 철저하게 어기고 살아가는 어긋난 인생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뒷북치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버지 말씀이 주어졌을 때 즉각 순종해야 그때와 타이밍을 잘 맞추어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 전체가 꼬이고 얽히고 설킵니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전 12:1-2)

전도서는 누가 기록했습니까?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인생 말년에 이제 하나님 나라 가기 전에 전도서를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가 청년의 때 어떻게 살았습니까? 아버지 다윗이 그에게 "하나님 말씀대로 잘 살아야 된다, 힘써 대장부가 되라"고 명령해 주었지만, 그 원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후궁과 처가 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눈만 뜨면 다른 결혼입니다. 이방 여인들이 우상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 우상을 솔로몬이 더 열심히 섬겼습니다. 한때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통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이었지만, 우상 숭배자로 청년의 때를 낭비하며 살았습니다. 이제 인생 말년이 다가오니 "내가 잘못 살았구나"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청년들에게 부탁합니다.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노라 말하기 전에 너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

인생은 때가 있는 법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어릴 때,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넣어주고 가르쳐 주고 일러주고 해야 하는데, 그 시기, 그때를 다 지나고 나면 나중에 가서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이 말 저 말 못 해 주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들여다보면 우리의 영적 게으름이 바로 그런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지금 조금이라도 움직일 힘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섬김과 봉사의 삶을 감당해야 하는데, 건강하고 무엇이든 열심히 할 수 있을 때 그때는 아무 일도 하지 않다가, 늙고 병들고 아무 낙이 없어질 때 그때 후회해봐야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 인생 길게 산다 해도 백 년입니다. 그런데 그 백 년 중에 하나님 일할 수 있는 건강한 시기가 몇 년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때는 저마다 자기 오락을 즐기고 자기 낙을 즐긴다고 바쁩니다. 솔로몬처럼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후회합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타이밍을 놓치면 항상 뒷북치는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때를 지키며 살고 있습니까? 그때를 지키며 후회하지 않는 인생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회개하지 않은 자의 두려움

롯이 잘못한 것 두 번째는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롯과 그의 가족을 가장 환대해 줄 사람이 다른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살려달라고 하지 않아도 조카이고, 이제는 두 딸과 함께 살 길이 없으니 살려달라고,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이제는 삼촌과 함께 하나님 잘 섬기며 살겠다고 부탁하고 가야 했는데, 하지 않습니다.

이전에도 기회가 있었습니다. 포로 되었다가 풀려났을 때, 그때 아브라함에게 돌아가야 했는데 돌아가지 않다가 이 지경이 된 것입니다. 이제는 진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돌아가지 않습니다. 산속에 들어가서 굴에 숨어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존심 때문이 아닙니다. 30절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롯이 소알에 거주하기를 두려워하여 두 딸과 함께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 거주하되 그 두 딸과 함께 굴에 거주하였더니."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두려워하여 굴에 거주하였다"입니다.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하면 세상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어깨 펴고 가슴 펴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세상 모든 것이 두렵습니다. 모든 것이 겁이 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회개가 일상이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말씀을 잘 듣게 되고, 하나님 말씀의 거울에 나를 비추어 봅니다. 그런데 잘못한 것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매일매일 일상이 회개입니다. 회개하면 죄의 권세에서 해방됩니다. 그러면 자유롭습니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았는데, 회개하고 용서받았는데, 누가 나를 정죄합니까? 자유로운 인생으로 세상 앞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두려운 법입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을 보십시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예배드려 버렸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오지 않았는데 예배를 해치워 버리고 블레셋과 전쟁하러 나갔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책망합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습니다. 남 탓으로 넘겨버립니다. 변명해버립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명령했는데 자기 눈에 좋은 것은 따로 감추어 두었습니다. 사무엘이 와서 또 책망합니다. 그런데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백성들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이 그를 버리십니다. 블레셋과 전쟁을 앞두고 꿈으로도, 선지자로도, 우림으로도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무당을 찾아가 버립니다.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누구도 그런 상대를 해주지 않습니다.

가인을 보십시오. 가인은 동생을 살해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제가 제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니 두렵습니다. 내가 동생을 죽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두렵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게 표를 주겠다"고 말씀하셔도 하나님 말씀 듣지 않습니다. 멀리 떠납니다. 에덴 동편 놋 땅에 가서 성을 쌓고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렸습니다. 두려워서, 세상 믿을 사람이 없어서, 회개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롯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되었는데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자는 모든 것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굴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사탄의 전략 가운데 치밀한 전략은 회개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성경 읽으면 마음이 찔려서 회개하지 않습니까?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합니다. 설교 듣고 말씀 들으면 찔려서 회개하지 않습니까? 설교 듣는 것, 예배 드리는 것을 방해합니다. 사탄의 이런 전략이 성공하면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세상이 두렵고 사람이 두려워서 자기만의 세계로 자기를 가두어 버립니다. 그러면 사탄이 얼마나 일하기 편하겠습니까?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에게 자기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회개하지 않으면 말입니다.

회개와 후회의 차이

그런데 우리는 회개할 때도 잘 해야 합니다. 회개한다고 하는데 그 회개가 회개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회개가 후회로 끝날 때가 많다는 말입니다.

회개와 후회는 무엇이 다를까요?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 3:7-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습니다. 열매가 무엇입니까? 회개하면 철저하게 돌이켜서 그런 삶을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지 않고 전혀 다른 삶을 살면 시간이 지나면서 당연히 열매가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후회하는 인생은 열매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와서 "나는 회개한다"고 합니다. 눈물도 흘리고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통회하고 자복하고 가슴을 쥐어뜯고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배당 문만 나서면 그대로입니다. 삶이 변하지 않습니다. 바뀌지 않습니다. 인생은 그냥 그대로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후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냥 시늉만 한 것입니다. 삶이 바뀌지 않는데 열매가 있겠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도 후회는 다 합니다. "그러지 말걸,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런데 진짜 후회가 아니라 회개가 되려면 바뀌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고치고 철저하게 바뀌어서 다시는 소돔과 같은 곳은 찾아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것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회개하는 인생은 당연히 열매가 맺힙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롯과 롯의 가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보여주신 것, 오늘 이제 여기서 들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후회로 끝나는 것입니다. 삶을 바꾸어서 진정한 회개가 되어서, 그 회개가 열매가 되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영광의 삶을 사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롯의 처와 같이 죄악된 자리에 미련이 남아서 소돔 성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은 모욕감을 느끼고 나를 멸시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내어 주시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아 내 주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무시하고 다시 죄 짓고 살았습니다. 아버지여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이 가 있고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이 믿음의 현실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롯의 처와 같이 불타버린 소돔 성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버지, 우리의 시선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우리의 때를 맞추며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타이밍과 나의 타이밍을 일치시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회개하되 진정한, 삶이 변하는 회개로 열매를 하나님께 올려 드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