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랄에서의 아브라함
본문: 창세기 20:1-2
19세기 러시아의 생리학자 파블로프는 개의 소화 과정을 연구하던 중 의미 있는 발견을 합니다. 보통 개는 먹이를 보면 침을 흘리는데, 그가 연구하던 개는 먹이를 보지 않아도 침을 흘렸습니다. 연구원이 먹이를 가지고 오는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개가 침을 흘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파블로프는 발자국 소리가 아닌 다른 것도 실험해 보았습니다. 특정한 음악을 연주해 주고 먹이를 보여주는 과정을 몇 번 반복하자, 그 특정한 음악 소리만 나와도 개가 침을 흘렸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고전적 조건 형성 실험이라고 불렀지만, 우리에게는 '파블로프의 개'라는 말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실험을 통해 우리는 동물들의 본능을 접하게 됩니다. 동물들은 먹는 것과 생명의 위협에 본능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사람은 어떻습니까? 사람도 이런 부분에서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나 생명의 안전을 위협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동물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인들은 어떻습니까? 인생의 위기가 닥치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하다 보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경험합니다.
그러면 똑같은 문제,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우리는 한번 영적인 경험을 하고 학습을 했기 때문에 '기도하니까 되던데' 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시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다시 본능으로 돌아갑니다. 기도를 잊어버리고 자신이 원래 했던 방식대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그는 24년 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몸으로 경험했는데, 24년이 지나서 똑같은 상황이 닥치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모습을 살펴보고, 나는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된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네게브로 이주한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거기서 네게브 땅으로 옮겨가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창 20:1)
아브라함은 유목민이었습니다. 양과 소와 염소, 각종 가축을 많이 거느리고 동서남북을 다니며 목축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주셨고, 그는 그 땅 안에서 동서남북 어디를 가든지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가나안 땅의 남서쪽에 위치한 그랄 지방까지 내려갔습니다. 자신의 가축을 몽땅 데리고 풀을 뜯기기 위해 그곳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합니다.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창 20:2)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했고,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가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블레셋 왕을 뜻하는 일반 명사입니다. 이집트 왕을 바로라고 부르는 것처럼, 블레셋 왕은 아비멜렉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간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세금 때문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임자가 있는 땅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계절이 바뀔 동안 몇 개월을 머무르면서 엄청나게 많은 짐승 떼를 거느리고 풀을 뜯고 물을 마시는데, 세금을 받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 땅이 주인 없는 땅이 아니고 그랄 왕 아비멜렉의 지경이었습니다. 당연히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은 그곳에서 세금을 납부해야 했습니다.
고대 근동에는 세금을 떼먹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안전장치로 그들 중에 가까운 사람 한 명을 볼모로 잡아두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몇 개월 동안 그 땅을 사용한 사용료를 내기 전에는 볼모로 잡힌 사람을 데려갈 수 없다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누이라고 한 사라를 잡아둔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잠재적인 위협 세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미 그때 자기 집에서 기른 군사 318명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그 군사들을 거느리고 롯이 잡혀갔을 때 롯과 그의 가족과 소돔성의 사람들을 구출해서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창세기 14장의 사건이고, 오늘 본문은 창세기 20장입니다. 세월이 한참 지났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아브라함은 더 강성해졌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셔서 그는 더 부자가 되었고, 자기 집에 기른 318명의 군사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은 두려운 잠재적 위협 세력이었습니다. 지금은 여기 와서 목축만 하겠다고 하는데, 이 사람의 마음이 바뀌면 자기 집에 기르고 있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위협하면 어찌하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그의 가정에 가장 가까운 사람 한 명을 볼모로 잡아둔 것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아비멜렉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칭찬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사실 아브라함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같은 문제에 반복해서 넘어지다
2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창 20:2)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합니다. 자기 아내 사라를 왜 누이라고 했습니까?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이고, 사라의 나이는 89세입니다. 24년 전에 이와 똑같은 일을 이미 겪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사라의 나이 65세에 이런 사건을 한 번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믿음 생활의 초창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왔는데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굶어 죽을 것 같아서 아내 사라를 데리고 조카 롯을 데리고 이집트로 내려갔습니다. 이집트로 가다 보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내의 미모 때문에 아내를 빼앗기고 자기는 죽임당할까 봐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누이라고 하기로 두 사람이 공모했습니다.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여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창 12:12-13)
이렇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약속의 자녀를 주셔야 하는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니까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바로에게 나타나시고 바로를 책망하셨습니다. 바로는 깜짝 놀라서 아브라함을 불러 "네가 나에게 왜 이렇게 했느냐"고 책망하고, 당장 이곳을 떠나라고 합니다. 떠날 때 그냥 빈손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은금과 패물과 낙타와 암수 나귀와 노비를 잔뜩 딸려서 보냅니다. 빈털터리로 갔다가 부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성공한 사람으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잃은 것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의 조카 롯의 믿음을 잃었습니다. 롯이 이집트의 물질문명을 보고 그만 믿음을 잃고 그때부터 타락해서 완전히 파멸의 길로 가지 않았습니까? 그때 함께 딸려 들어온 노비들 중에 하갈이 있었습니다. 하갈이 일으킨 평지풍파가 아직까지 잠잠해지지 않았습니다. 가정의 심각한 문제가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런 일을 24년 전에 이미 아브라함은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에게 있는 두 가지 심각한 문제를 발견합니다.
첫째, 그는 같은 문제에 여러 번 넘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얼마나 성장했습니까? 그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존귀한 한 가정의 아버지에서 열국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이스마엘 한 사람에게 빠져서 13년 동안 이스마엘만 바라보고 살다가, 이제는 열국의 아버지가 되어서 온 세상을 섬기는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되었고 성장했습니다.
사라는 또 어떻습니까? 원래 그녀의 이름이 사래였습니다. 공주요 왕비였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던 사래가 사라가 되어 열국의 어머니가 됩니다. 믿음이 일취월장하고 성장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와 독대도 해주셨습니다. 소돔성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의 조카 롯의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고, 여섯 번이나 숫자를 바꾸어서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다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롯과 그의 가정에게 한 번 더 기회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정도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가까워졌고 그의 믿음은 성장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오랜 기간 훈련받았습니다. 24년 동안 훈련받아 왔습니다. 물질 문제도 이제는 괜찮습니다. 롯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소돔 땅으로 떠났지만,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지킵니다. 물질 문제에서 자유해졌습니다. 자녀가 없어서 걱정했지만, 그 자녀 없는 것 때문에 오히려 아브라함은 성장하고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훈련되지 않은 한 가지, 이 한 가지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습니다. 안전에 대한 염려, 불안입니다. 낯선 곳에 가면 그는 유독 안전에 대한 불안을 느낍니다.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그는 그만 거짓말을 해버렸습니다. 24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역시 똑같았습니다.
다른 건 다 되는데, 다른 건 다 성장해서 이제는 하나님 앞에 괜찮은 믿음의 사람이 되었는데, 유독 이 문제 한 가지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그의 인생 문제가 되었고, 이 문제 때문에 사탄은 그의 약점을 보고 집요하게 공략합니다. 다른 건 다 되는데 한 가지가 안 되면 사탄이 그 한 가지 문제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습니다. 넘어질 때까지, 쓰러질 때까지 그 문제를 집요하게 공략해서 그 사람을 파멸시키려고 합니다. 사탄이 얼마나 집요한지 모릅니다.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왕상 11:1)
솔로몬 왕이 다윗의 아들 아닙니까? 우리가 잘 아는 지혜로웠던 위대한 왕 솔로몬이 이방의 여인, 이집트 바로 왕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왜 솔로몬이 이방의 여인과 결혼했을까요? 정략결혼이었습니다. 전쟁을 하기 싫어서, 그 당시 최고의 강대국이 이집트였기 때문에 이집트의 딸을 데려오면 적어도 이집트와는 전쟁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의 딸이 그냥 들어옵니까? 그 딸이 이집트에서 섬겼던 우상과 함께 시집 옵니다. 그 우상을 자기 혼자만 섬깁니까? 이스라엘의 다른 백성들에게 전파합니다. 그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을 함께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날수록 이스라엘에 이집트의 신들이 갈수록 늘어납니다. 이집트 신전이 늘어났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이 늘어났습니다.
솔로몬의 믿음에 약한 고리는 평화로 위장된 타협이었습니다. 그는 전쟁하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할 만하면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의 아버지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이방인과 맞서 싸워, 전쟁할 때는 용감하게 전쟁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겉으로는 평화를 내세우면서 자신의 안전에 위협이 되는 어떤 일도 하지 않습니다. 이방인과 손을 잡고, 이방의 우상이 들어와도 못 본 척합니다.
사탄은 그의 약한 고리를 계속해서 파고들었습니다. 이제는 이집트의 바로의 딸뿐만 아니라 모압의 공주, 암몬의 공주, 시돈과 헷과 에돔의 공주들까지 다 들어왔습니다. 그들과 다 정략결혼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모든 왕들의 딸들을 다 아내로 삼아버렸습니다. 전쟁할 일이 없습니다. 평화로웠습니다. 나라는 부자가 되어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우상 천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왕상 11:9-10)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셔서 만류하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듣지 않습니다. 그의 약한 믿음의 고리. 그는 지혜로웠습니다. 세상의 어떤 왕보다도 지혜로웠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브온에서 그에게 나타나셨을 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줄까" 하셨을 때, 솔로몬은 "저에게 지혜를 달라"고 할 만큼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평화를 가장한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그 약한 고리를 사탄은 끊임없이 공략했고, 그것 때문에 그도 타락했고 이스라엘 나라도 우상 숭배의 나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오랫동안 신앙생활 했습니다.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하고,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일도 열심히 하고, 성경이 시키는 일은 열심히 감당하고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안 되는 것 한두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알고, 가족이 알고, 나와 가까운 사람이 아는 나의 인생 문제 한두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십니까? 남편이 알고, 부인이 알고, 자녀가 알면 그런 문제를 자주 지적할 것입니다. "그거 좀 제발 고치면 좋겠다"고. 그런데 기분이 나쁩니다. 그런 얘기 들으면 화가 납니다. "간섭하지 말라"고,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당신은 당신 할 일이나 잘하라"고 화를 내지 않습니까?
그것을 고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매일같이 거울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 앞에 담대하게 서야 합니다. 우리가 거울 앞에 서면 내 옷매무새가 얼마나 흐트러져 있는지, 머리가 얼마나 헝클어져 있는지, 화장이 잘 되었는지 잘못되었는지 금방 드러나지 않습니까? 그러면 고칩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 빗질을 하고, 화장을 새로 고치고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영혼은 왜 하나님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추지 않습니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6-17)
성경이 우리를 책망한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성령께서 내 마음에 책망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성령께서 나를 책망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큐티할 때 내 마음속에 깊은 찔림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성령께서 나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 책망을 받으면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거울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바르게 세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온전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온전하게 한다는 것은 부족한 것을 채워간다는 뜻입니다. 다른 건 다 되는데 한두 가지가 안 되면, 하나님 말씀 앞에 서면 성령께서 나를 책망하고, 나를 바로 세우고, 우리가 온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24년 전에 겪었던 문제에 똑같이 무너지는 이유는, 그가 매일같이 하나님 말씀 앞에 제대로 서지 않아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니까. 믿음 생활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바로 하지 않으면 영적 성장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성장이 의미하는 것은 내 약점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사탄이 나를 집요하게 공략하면 나만 무너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무너지면 우리 가정도 넘어지고, 나와 함께하는 가까운 사람도 영향을 받습니다. 솔로몬이 넘어지니까 솔로몬이 다스렸던 이스라엘 나라 전체가 우상의 나라가 되었지 않습니까?
부디 우리가 사탄이 공략할 빈틈이 없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약점을 우리가 가장 잘 아니까, 믿음 생활 성실하게 하고, 말씀 공부 열심히 하고, 말씀 묵상 제대로 해서 그 말씀 앞에 우리를 고치고 또 고쳐서, 하나님 앞에 쓰임받고, 똑같은 문제에 두 번 세 번 넘어지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때를 소중히 여기지 않다
두 번째 아브라함의 문제는 하나님의 때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하나님이 두 천사들과 함께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의 집을 방문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나그네 세 분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집으로 모셔다 드리고 최선을 다해서 대접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그 대접을 다 받으신 이후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년 이맘때에 너희 가정에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고 아들의 이름까지 이미 지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만약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토록 기다리고 그토록 바랬던 아이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그때부터 몸가짐을 조심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때부터 험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고, 위험한 곳에는 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기다렸던 아이를 허락해 주시고, 내년 이맘때 자녀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 1년 동안은 임신한 몸으로 어디를 가겠습니까?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지 않습니까?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조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는 일을 보십시오. 사라를 보십시오. 그랄 땅,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그곳까지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든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고자 하는 자녀를 믿지 않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생업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소중하게 여긴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난한 사람입니까? 먹고 살 만한 사람입니다. 이미 자기 집에는 군사들을 318명 이상이나 거느리고 있을 만큼 부자가 되었습니다. 굳이 아브라함과 사라가 가지 않아도 다른 목자들을 보내도 될 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자녀를 낳기 전에 이렇게 함부로 경거망동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당황스러우셨겠습니까?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아브라함이 자녀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과는 정반대로 행동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이 그랬습니다. 요셉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마리아였습니다. 그런데 소문이 들리기를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율법에 의하면 그 여인을 끌어내서 돌로 쳐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가만히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의 사자, 천사가 그에게 말씀합니다.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이니 겁내지 말고 데려오라"고.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해서 마리아를 데려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요셉이 평생 동안 감수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손가락질했겠습니까? 사람들이 동정녀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을 믿습니까?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누구도 그 사실을 받아들여 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손가락질 했을 것입니다. "저 바보 같은 게 누구 아이인지도 모르고 평생 동안 그 아이를 기르고 있다"고. 사람들이 얼마나 요셉을 비난하고 비웃고 손가락질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보다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때를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면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중심이었기 때문에 평생 동안 그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을 각오를 하고 그 여인을 데려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아이를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될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서 때를 말씀하시고 시간을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준비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 보면 넓고 큰 집에 그릇이 많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그릇은 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고, 나무그릇도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주인이 쓰기에 좋은 그릇은 금그릇, 은그릇이 아닙니다. 깨끗한 그릇입니다.
손님이 오셨는데 깨끗한 그릇으로 음식을 담아드려야 하지, 아무리 은그릇이라 하더라도 더럽다면, 세척되지 않은 그릇이라면 어떻게 그 그릇에 음식을 담아서 대접하겠습니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쓰임받으려면 준비된 깨끗한 그릇이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이 쓰시려고 해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행동하고 다닙니다. 내년 이맘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위험한 지역에 왜 가는 것입니까? 왜 거기 가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그르치려 하는 것입니까?
다윗을 보면 그가 광야를 헤매고 다닐 때 한 사람을 죽이고 싶은 살인 충동에 시달린 적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발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발에게 다윗이 심각한 모욕을 당했습니다.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군사 600명 중에 400명에게 칼을 차라고 명령합니다. 말에 올랐습니다. 한 사람을 죽이려고 400명을 거느리고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때 다윗의 앞을 막아선 여인이 있었는데,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이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삼상 25:30-31)
아비가일이 한 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이 땅에 왕으로 세우실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장차 왕이 될 인물 아닙니까? 장차 왕이 되실 분이 어찌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서 저 어리석은 사람을 죽여서 당신의 삶에 오점을 남기려 하십니까? 나중에 왕이 되어야 하는데, 누군가 문제를 삼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 사람을 죽였다, 이 말이 소문이 나면 당신이 왕이 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겠습니까? 부디 왕으로서 앞으로 큰일 할 사람인데 당신의 역사에 오점을 남기지 마십시오." 이 말이었습니다. 다윗이 이 말을 듣고 바로 그 자리에서 크게 깨닫습니다. 아비가일을 칭찬하고 말머리를 돌려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가끔 TV에서 청문회를 보면, 장관 후보자들, 총리 후보자들이 나와서 자신의 과거를 사과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들이 왜 지금 수십 년 전 이야기를 사과하는 것일까요? 수십 년 전 그들이 불법과 탈법을 일삼고 국민들 눈높이에 맞지 않는 행동을 왜 했겠습니까? 수십 년 전 그들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자기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될 줄 몰랐습니다. 만약 그들이 유명한 사람이 될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자기 이력 관리를 철저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막 살았습니다. 대충 살았습니다. 남들이 하는 것처럼 죄도 짓고 불법과 탈법을 일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유명한 사람이 되려고 하니 과거가 자신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것 때문에 망친 인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서 믿음의 자녀를 주시려고 하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어떤 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깨끗한 그릇이 되고, 우리가 준비된 그릇이 되어야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에서 자라나고 있는 자녀들이, 청년의 혈기로 이 세상 사람들이 다 하는 것처럼 "남도 하는데 나도 한번 해 보자" 하는 것은 위험한 행동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우리 가정의 자녀들을 어떻게 사용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지 않습니까? 깨끗한 그릇으로, 깨끗하고 정결한 그릇으로, 하나님이 언제 쓰셔도 부끄럽지 않을 그릇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부모 된 자로서 자녀들에게 그것을 잘 일러주고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백성,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그때를 기대하고 기약하고 소망하면서, 깨끗한 준비된 그릇으로 살아가시는 믿음의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같은 문제에 두 번 세 번 넘어집니다. 우리도 솔로몬처럼 믿음에 연약한 고리가 있어서 사탄에게 지속적으로 공격받습니다. 그때마다 후회하고 슬퍼하지만, 하나님 말씀의 거울에 우리를 비추어 보지 못해서 다시 넘어지고 쓰러지기를 반복합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부디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거울에 제대로 서서 바로잡고 고치고 온전하게 되어서, 이제는 같은 문제에 넘어지는 어리석은 자 되지 않도록 우리의 믿음을 바로잡아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때에 우리의 시간을 맞추어 가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정결하고 깨끗한 그릇 되도록 우리를 축복하여 주시고, 요셉처럼, 다윗처럼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