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입하시는 하나님
본문: 창세기 20:3-8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거의 완벽하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설계대로 우리가 살아가기만 한다면, 하나님이 정하신 수명까지 사는 데 큰 문제가 없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인간의 장기 중에 뇌와 심장은 대단히 중요한 장기입니다. 뇌와 심장은 우리 몸이 운동하지 않아도 24시간 계속 작동합니다. 작동하면 에너지가 필요하고, 에너지를 소모하면 열이 발생하며, 열이 발생하도록 그대로 두면 체온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체온을 낮추기 위해 땀샘을 통해 땀이 분비되는데, 하루 종일 한 발짝도 걷지 않아도 우리 몸에서 하루에 약 400ml 정도의 땀이 분비됩니다.
이토록 하나님은 정교하게 우리 인체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잘 관리하고 운동하고 좋은 습관을 가지면 건강한 육체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몸을 함부로 혹사하고 함부로 사용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면 외부의 개입이 불가피해집니다. 의사를 찾아가야 하고, 약을 투약해야 하며, 심할 때는 수술까지 받아야 합니다. 사실 약을 먹어 몸이 좋아지고 수술에서 회복이 되면 그 또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것은 외부의 개입 없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모습 그대로 우리 몸을 잘 관리하고 지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개입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의 위기, 하나님의 개입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인생에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개입은 아브라함에게 은혜입니다. 그러나 더 좋았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개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따라서 아브라함이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불가피하게 아브라함의 인생에 개입하셨습니다. 왜 개입하셨는지, 하나님이 개입하신 이유와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목축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양과 소와 염소, 짐승들을 데리고 동서남북을 다니며 목축업을 하는 유목민이었습니다. 하루는 아브라함이 양 떼를 이끌고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그랄 지방까지 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24년 전과 똑같은 거짓말을 합니다.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아브라함은 24년이 지나고 나서도 영적 교훈을 얻지 못하고 여전히 거짓말로 일관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계시되어 있는데 그 하나님의 때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 때에 맞춰 사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큰 구원 계획이 망쳐지게 될 위기에 처합니다. 결국 아비멜렉에게 자기 아내 사라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입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데려간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편이 있는 여자임이라" (창 20:3)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문에 아비멜렉의 꿈에 현몽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꿈에 현몽하셔서 이런 말씀을 하실 때 아비멜렉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말씀 중에 깜짝 놀랄 만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죽으리니"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힌네카 메트'(הִנְּךָ מֵת)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 말은 "너는 보라, 죽어가는 너를"이라는 말로 옮길 수 있습니다. 현재분사형을 사용해서 생생한 현장감과 직설적 표현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보라, 죽어가는 너를!" 아비멜렉은 사실 이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세금 문제 때문에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 아비멜렉은 그 가정에 가장 중요한 사람 한 사람을 볼모로 잡아 두었을 뿐입니다. 그것도 아브라함이 자기 누이라고 했기 때문에 데려왔을 뿐인데, 이제 와서 자기 누이가 아니고 아내인 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이것 때문에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입에서 "힌네카 메트", "너는 보라, 죽어가는 너를"이라는 말씀을 들어야 할 정도로 그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사실 아비멜렉은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대답하되 주여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그가 나에게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 (창 20:4-5)
두 가지 말로 항변합니다. 첫째, 저는 이 여인을 범한 적이 없습니다. 둘째, 부부가 공모해서 서로 여동생이고 오빠라고 한 것이지 저는 그것을 모르고 그냥 데려왔을 뿐입니다.
우리는 아비멜렉의 말을 들으면 마음이 공감됩니다. 사실 우리라 하더라도 누구 편을 들겠습니까? 당연히 아비멜렉은 잘한 것이고 아브라함이 잘못한 것 아닙니까? 아비멜렉은 그 당시 사람들의 관습대로 그렇게 행동했을 뿐입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엄하게 모진 말씀까지 하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이 편파적이시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편만 드시는구나, 아비멜렉이 억울하다는 것을 우리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을 협박하듯 이렇게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구원의 큰 그림
우리는 아비멜렉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으나, 하나님 편에서 이 상황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지금 하나님이 하고 있는 일은 원대하고 아름다운 구원 사역을 이루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역사를 한번 그 소스로 올라가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두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죄가 들어옵니다. 뱀을 통한 죄가 들어와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 죄를 짓습니다. 노아 시대에 가면 죄악이 관영해서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 홍수 심판을 통해서 세상을 쓸어버립니다.
하나님은 다시 노아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 두 번째 창조 명령을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흩어져야 되는데, 노아의 후손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시날 평지에 모여서 바벨탑을 쌓고 "우리가 여기서 흩어짐을 면하자" 공모합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셨습니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그들을 다 흩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때부터 셈 족속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점찍어 두셨는데, 그의 가정에 자녀를 오랫동안 주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에게 힘이 있을 때, 사라에게 힘이 있을 때 자녀를 주면 자기 자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힘이 떨어지고 사라의 경수가 끊어지고 난 다음에야 그에게 자녀를 주겠다고 하나님은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제 곧 아브라함에게 자녀가 날 바로 그때, 아브라함의 이기심으로 그의 자기 중심성으로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이 망쳐지게 된 것입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가보면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 구원 사역으로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렸던 인간의 행복과 인간의 구원이 새롭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 첫 출발의 자리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는 그 출발의 자리에. 그런데 아비멜렉이 사라를 데려가 버렸습니다. 만약에 아비멜렉이 사라를 범하기라도 한다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엉망이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것 때문에 불가피하게 아브라함 그리고 아비멜렉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아비멜렉에게 꿈에 나타나시고 이렇게 개입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과정을 통해서 보면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배워야 합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 계획을 가로막는 어떤 일이 있어도 참지 않는 분이십니다. 사실 아비멜렉은 아무런 잘못을 한 적도 없지 않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자기는 그냥 일상적으로 일을 했을 뿐인데,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걸림돌이 되는 자리에 서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힌네카 메트, 너는 보라, 죽어가는 너를"이라고 강하게 말씀하신 만큼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 계획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막는 자, 하나님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는데, 거기에 의미 있는 사람이 세 분 나옵니다. 1장 1절을 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을 통한 구원 계획을, 자의는 아니었으나, 가로막았던 아비멜렉을 하나님은 책망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원대한 구원 계획을 이루어 가려고 하는데, 다윗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한 인간 사울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를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심판하셨습니다.
다윗의 왕국을 계속해서 괴롭히는 한 민족, 한 나라가 있었습니다. 블레셋입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 그 민족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주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기시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반드시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넘기리라 하신지라 ...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 (삼하 5:19, 25)
왕이 되고 난 후에 블레셋 때문에 다윗이 괴로워했습니다. 하나님께 묻습니다. 내가 블레셋을 치리이까? 올라가라 반드시 너에게 승리를 줄 것이다.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을, 다윗을 통한 구원 계획을 가로막는 블레셋까지도 하나님은 이렇게 철저하게 심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전도하시고 구원 사역을 이루어 가시고, 십자가를 향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데 주님의 십자가 구원을 가로막는 악한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강하게 책망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마 12:34)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 23:33)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교양 있는 예수님이, 훌륭한 인격을 가진 예수님이 어떻게 이렇게 엄중한 말씀을 하실 수 있는가? 구원 계획을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을 가로막는 사람들, 특별히 그들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아니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서기관, 율법학자, 대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가로막아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이토록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을 가로막는 어떤 자라도 가만히 눈 뜨고 보지 않는 분이십니다. 우린 이런 상황을 통해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가로막는 자인가, 우리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마 이런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목사님, 그래도 제가 성도로서 신앙생활을 수십 년 했는데, 교회 중직 기고 교회를 잘 아는 사람인데, 전도하고 구원하는 데 도움이 되면 됐지 구원 계획을 내가 어떻게 가로막은 적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 깊이 지난날 우리의 삶과 우리의 행실을 한번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새가족으로 등록하시는 분들 중에 연세가 드신 어르신들이 등록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그분들에게 여쭙습니다.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좀 일찍 오셨으면, 조금 더 일찍 하나님 가족이 되셨으면 신앙생활 좀 더 재밌게 하고 성도끼리 교제도 나누고 참 좋았을 텐데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그러면 대다수의 분들이 이런 대답을 하십니다. "젊을 때 예수쟁이들한테 사기를 당해서, 상처를 입어서, 교회도 멀어졌고, 예수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 믿는다고 하는데 나는 교회 다닌다고 해서 그냥 다 믿었는데, 뒤통수 치고 사기치고. 그 사람들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그런데 이제 나이 들어서 인생의 황혼이 다가오니 이제 정말 나도 신앙을 가져야 될 때가 되어서 지금 오게 된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사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믿음의 길을 가로막는 일이 훨씬 더 많습니다.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교회도 모르는 사람들은 몰라서 가로막을 일도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알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잘못 예수 믿고 잘못 신앙생활 하는 것 때문에 믿음의 길을 가로막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가 제대로 서지 못하면, 교회가 교회 같지 못하면, 그 인근 주변의 그 교회 소문이 잘못 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로 발걸음을 하겠습니까? 나는 하나님 믿는 사람인데, 내 일터에서, 내 직장에서, 내가 만나는 인간관계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면 어떻게 그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전도의 도구가 아니라 복음 전파에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목회자를 비롯해서 중직들, 결정을 하는 자리에 있는 자들입니다. 결정 한 가지 잘못하면, 내 혈기대로 결정해 버리면, 그 잘못된 결정 하나가 복음 사역에 걸림돌이 되는 예가 얼마나 많습니까?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제대로 결정하고,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음 사역을 위한 길인지, 지금 내가 내뱉는 말이,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원대한 구원 사역의 길인지, 나는 그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면밀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심히 싫어하십니다. 아무 상관없는 아비멜렉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네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알고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가로막는다면 하나님이 가만히 두고 보시겠습니까?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원대한 구원 사역에 동역자가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의 물줄기에 함께 올라 타고 가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 손들의 인생까지 확장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편이 되는 것이니까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원 사역의 동역자가 되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는지를 항상 면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걸림돌인지, 디딤돌인지, 하나님 편에 서 있는지, 아니면 반대편에 서 있는지를 정확하게 제대로 알고 분별하고 행동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과 은혜를 가득 받아 누리게 되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을 난처하게 만드는 삶
또한 두 번째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아브라함 편에서 보면 아브라함의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대단히 난처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때문에 아비멜렉에게 못할 말씀을 하셨지 않습니까? 아비멜렉은 억울합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하나님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그래서 하나님께 항변했습니다.
하나님은 항변한 아비멜렉을 달래십니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 (창 20:6)
사고 치는 자녀를 둔 부모들은 학교에 가고 선생님을 만나서 연신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한 번만 봐주고 용서해 달라고, 품어 달라고" 동네방네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이 자식의 못난 점을 용서해 달라고 빌고 다닙니다. 그런데 자녀는 잘 모릅니다. 자신의 행실이 부모를 얼마나 곤란하게 하고 난처하게 만드는지.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을 비굴하게 하고, 하나님을 난처하게 하고, 하나님을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은 이때까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미련하고 무모한 자식 때문에,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 때문에 하나님이 난처해지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망령되게 일컫는 죄입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 20:7)
'망령되게 하다'는 히브리어로 '샤브'(שָׁוְא)인데, '허무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허무하다는 말은 알맹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쭉정이라는 뜻입니다. 단단하고 뭔가 있을 줄 알고, 알맹이가 있을 줄 알고 기대했는데 껍데기만 있고 아무것도 없는 것, 그것이 '샤브'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볼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를 가까이했습니다. 그와 교제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거짓말쟁이입니다.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러면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허무하게 보지 않겠습니까? 뭔가 있는 줄 알았더니 그 하나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탄탄한 알곡이 있는 줄 알았더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버립니다.
불신자들은 믿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는 사람의 삶과 행동과 그들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는데, 아브라함을 통해서 본 하나님은 '허무한' 하나님입니다. 아비멜렉이 볼 때 그런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무한 하나님입니까?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실체가 있고, 하나님은 판단하시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곡 같은 모든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인데, 아브라함 한 사람의 잘못된 행실 때문에 하나님의 이미지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요셉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창 41:38-39)
바로는 불신자입니다. 애굽의 왕입니다. 그가 요셉을 보고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너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고. 불신자 바로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아무도 해공할 수 없었던 바로의 꿈을 해석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형제들에게 팔려서 애굽에 들어왔지만 한마디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성실하게 주인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습니다. 죄짓지 않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감옥에 갇혀 있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서 성실하게 자기 일을 감당합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있는 것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요셉을 볼 때 어떤 마음일까요? "대단한 하나님이시구나. 그가 믿는 하나님이 도대체 누구이길래 이런 고난과 이런 고통을 당해도 한마디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제대로 신앙하는가." 사람들은 요셉을 보고 하나님이 단단하고, 하나님이 알차고, 하나님이 알곡인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바로 요셉처럼 이런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입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변 사람들에게, 내 삶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허무하게 만들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이 허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망령되게 일컫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이 위선되고 거짓되기 때문입니다.
결론
오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인생에 개입하신 것을 보고, 개입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가장 좋은데 이런 상황을 만든 아브라함을 보고 우리는 다시 깨닫고 배웁니다. 하나님 안에서 구원의 역사를 방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않는 믿음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섭리대로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가 제대로 살지 못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대한 구원 사역을 이루어 가시고 그 구원 사역을 방해하는 어떤 자도 용납하지 않으시는데, 우리는 미련하게도 내가 모르고 알지 못하고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방해하는 자리에 설 때도 있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 원하오니 아버지 우리를 받아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허무하게 만드는 인생 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요셉같이 제대로 살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드높이는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크고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