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강 / 변명하는 아브라함 (20:9-18)

변명하는 아브라함

본문: 창세기 20:9-18

로마 황제는 수없이 많았지만,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는 황제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네로 황제만큼은 대부분 기억합니다. 난폭하고 포악하며 잔인하기로 악명 높았기 때문입니다. 서기 54년부터 68년까지 재위한 그는 재위 기간 내내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로마 대화재의 책임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뒤집어씌웠고, 붙잡힌 신자들을 원형 경기장에 풀어놓아 사자들의 먹이로 삼았습니다. 예수를 믿다가 당국에 적발되면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네로가 이토록 악행을 저지른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한 축은 바로 아첨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신하들은 그의 곁에서 끊임없이 아첨했습니다. "지금 하고 계신 일은 옳은 것입니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왕국을 다스려 주십시오." 네로는 자신이 하는 일이 당연하고 마땅한 줄로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네로에게 아첨했던 사람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페트로니우스입니다.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그는 시와 소설을 네로를 위해 썼고, 네로는 그에게 집정관이라는 벼슬까지 내렸습니다. 그가 집정관으로 재직하던 시절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네로 황제가 자작시를 써서 신하들 앞에서 발표했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 읽어 내려갈 때마다 신하들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박수를 치고 칭찬하느라 야단법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페트로니우스만은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상한 네로가 시 읽기를 멈추고 그에게 물었습니다. "왜 그대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가?"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만약 이 시를 호메로스가 썼더라면 저는 찬사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의 능력이 거기까지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황제께서 쓴 시라면 저는 찬사를 보낼 수가 없습니다. 출중한 능력과 뛰어난 잠재력을 가지셨으니, 더 정진하셔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길이 남을 걸작품을 남겨 주셔야 합니다." 네로는 흡족해하며 말했습니다. "신이 나에게 두 가지 선물을 주셨다. 하나는 나의 창조적 재능이고, 또 하나는 진정한 비평가 친구를 주신 것이다."

아첨도 이 정도면 거의 예술의 경지입니다. 그러나 아첨은 아첨의 대상이 되는 사람과 아첨하는 사람 모두를 파괴합니다. 그 안에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이 오가는 자리, 자신의 이익과 유익만을 위한 아첨이 어찌 건설적이겠습니까?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모두 파멸로 치닫습니다.

그런데 아첨만이 사람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변명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는데도 변명하고 거짓말합니다. 차라리 그 대상 앞에 무릎 꿇고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면 용서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데, 변명으로 일관합니다. 변명을 듣는 사람은 자괴감에 빠지고, 변명하는 사람은 거짓말하기 때문에 그 역시 온전치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변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변명은 아비멜렉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길을 가로막았고, 그 변명을 듣는 하나님을 초라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인생을 살고 있는지 함께 살피고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실 아비멜렉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거짓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걸림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강하게 책망하셨고, 아비멜렉은 하나님께 항변했습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하나님이 난처해지신 것입니다. 이제 아비멜렉이 본격적으로 아브라함을 만나 따져 묻고 있습니다.

불신자에게 책망받는 믿음의 사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느냐 내가 네게 무슨 죄를 범하였기에 나와 내 나라가 큰 죄에 빠질 뻔하게 하였느냐 네가 내게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행하였도다 하고" (창 20:9)

아비멜렉이 말한 "합당하지 아니한 일"을 공동번역 성경은 "차마 못할 짓"으로 번역했습니다. 점잖게 옮기면 "합당하지 아니한 일"이지만, 직역하면 "차마 못할 짓"으로 옮겨야 합니다.

불신자인 아비멜렉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아브라함에게 기대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 아브라함이 불신자에게 차마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이 자리가 의미심장한 이유는 믿음의 사람이 불신자에게 책망받고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음의 사람은 불신자에게 존경과 부러움과 찬양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로 제대로 살아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인 아브라함이 불신자 아비멜렉에게 이렇게 책망받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불신자에게 책망 받은 것은 지금이 처음이 아닙니다. 24년 전에도 그랬습니다.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창 12:18)

바로에게도 아브라함이 거짓말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고, 하나님은 그의 인생에 개입하셨으며, 바로가 깜짝 놀라서 아브라함을 불러 이렇게 책망했습니다. 24년 전에 이 굴욕과 모욕과 수치를 당했다면, 이제 24년이 지났으면 믿음이 성장하고 발전해서 다시는 이런 일을 행하지 않아야 정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책망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불신자들은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중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세상의 법칙과 논리대로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살면서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좀 다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신앙인이니까, 저 사람은 교회 다니니까, 저 사람은 나와 좀 다르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 꺼풀 벗겨 보면 똑같은 사람이라면, 그때 그들이 가지는 실망감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님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의 태도를 이렇게 규정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4-16)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정체성을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모인 교회 공동체를 가리켜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숨길 수가 없습니다. 산 아래 사람들이 다 쳐다봅니다. 산 위 동네에 잔치가 벌어졌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산 위로 올라가고 내려가며 음식을 만들고, 음식 냄새가 진동할 것입니다. 어떻게 숨길 수 있겠습니까? 산 위 동네가 불을 환하게 밝혀 놓으면 산 아래 사람들이 "저 위에서 무슨 일이 있나 보다" 하고 쳐다봅니다. 산 아래 사람들은 산 위 동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세상 사람들이 다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항상 오픈되어 있고 노출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산 위 동네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 예수님이 하신 말씀, 착한 행실—그 착한 행실을 보고 산 아래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산 위 동네에 사는 사람인데 산 아래 살고 있는 아비멜렉에게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아비멜렉이 볼 때 아브라함은 어떤 인간입니까? 자기 욕심에 따라 경우에 따라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사람 아닙니까? 산 위에 사는 사람이 저런 사람인 걸 아비멜렉은 이제 다 보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어리석으나 하나님께 지혜로운 선택

과거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제대로 살았습니다. 그때는 교회가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교회는 그냥 가만히 눈뜨고 보지 않았습니다. 나누어 주고 돌보고 섬기며 그들의 가난에 함께 동참해 주었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함께 베풀고 나누었습니다. 교회가 가난하니 목회자도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목회자를 보고 "저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청빈하다"고 말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청빈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가난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전도의 강력한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가난이 부끄러움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시설이 가난해서 제대로 설비를 갖추지 못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는 가난해도 주변 사람들에게 풍성하게 나누어 주었고, 목회자는 가난해도 나눔으로 청빈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한 세대 전, 조선시대 구한말에 이 땅에 오신 선교사님들 역시 그런 분들이 많았습니다. 에비슨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 귀에 익숙한 이름이 아닙니다. 에비슨 선교사는 원래 선교사가 아니었습니다. 영국에서 태어나서 캐나다로 이민 가서 살았습니다.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뛰어난 실력으로 모교의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한 바가 있어서 다시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의사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약학대학을 나와서 약대 교수로 살다가 의사가 되었습니다. 약에 대해서도 전문가이고 의료인으로도 전문가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많이 찾았겠습니까? 당시 토론토의 주지사가 그를 주치의로 고용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캐나다에 그대로 남았더라면 그에게는 부와 명예와 권력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이 1892년 어느 날 바뀝니다. 당시 조선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었던 언더우드가 캐나다를 방문해서 캐나다 사람들에게 선교 특강을 하고 설교한 후에, 에비슨과 개인적인 만남을 가집니다. 그리고 에비슨에게 부탁합니다. "당신 같은 유능한 인재가 조선에 필요합니다. 조선 땅에 와서 당신의 의술을 펼쳐 달라." 황당하지 않습니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에비슨은 단 한마디로 일축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서 생각하니 자꾸 그 말이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그 착한 눈망울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립니다. 견딜 수 없어서 의사직도 던지고 교수직도 던지고 조선으로 떠납니다.

제중원을 맡았습니다. 세브란스병원을 맡았습니다. 조선인 후배들, 후학들을 길러서 7명의 의사를 배출해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보잘것없는 세브란스병원을 의과대학으로 발돋움시킨 인물이 바로 에비슨이었습니다. 조선 땅에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변변한 약도 없었습니다. 전 국민 손씻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손만 제대로 잘 씻어도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건져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에비슨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됩니까? 만약 그분이 캐나다에 그냥 그대로 남았더라면 부와 권력과 명예와 그 자손과 그 자손까지 잘 먹고 잘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선택으로 이 조선 땅에 온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면 미련하고 어리석은 선택 아닙니까? 바보 같은 선택입니다. 우리라면 그렇게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 보면 그의 이 미련하고 어리석은 선택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강력한 전도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는 산 위에 있는 동네였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에비슨의 모습을 보고 감동받고 은혜받아, 오늘 그 사람들의 후손, 그 후손들이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가 된 것 아닙니까? 우리 믿음의 조상들, 선배들은 그렇게 헌신하며,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으나 하나님에게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서 그들은 다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교회를 비롯한 우리 자신의 문제는 너무나 잇속에 밝다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에 민감합니다. 손해 보는 일은 결단코 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과 거래할 때 손해 보려 합니까? 단 한 푼도 손해 보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얼마나 잇속에 밝은지 모릅니다. 교회가 손해 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점점 더 부자가 되어 가는데, 역설적으로 교회 주변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이것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설명할 길이 없지 않습니까?

오늘 이런 역설 가운데 우리가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교회가 미련하고 세상 앞에 지혜로운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지혜롭고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미련해야 그래야 우리가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을 길러 가는 것, 사람을 키우는 것은 상당히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한 생명을 제대로 길러 가는 데 돈이 얼마나 들겠습니까? 한 생명을 제대로 기르고 양육하고 돌보는 데 사람들의 수고와 정열과 시간과 에너지, 물질이 많이 투입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투자한 만큼 정확하게 산출되는 결과가 우리에게 보장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옛날 선교사들은 사람을 길러내기 위해서 학교를 세웠습니다. 병원을 지었습니다. 병원에 돈 되는 환자는 한 사람도 온 적이 없습니다. 학교에 똑똑한 학생들이 오지 못했습니다. 다 문맹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에 투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가장 바보 같은 짓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덕을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지나치게 잇속에 밝아서 나중에 우리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주려고 하십니까? 우리는 후손들에게 지나치게 잇속에 밝은 장사꾼 같은 모습만 보여주지 않습니까? 오늘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지혜롭고 세상 앞에 어리석어서,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 전도의 도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을 초라하게 만든 변명

이제 아브라함이 본격적으로 자기 변명을 하기 시작합니다.

"아비멜렉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하였느냐 아브라함이 이르되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며" (창 20:10-11)

첫 번째 아브라함의 변명입니다. "이곳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그랄 땅 블레셋 지방에는 미치지 못하니 내가 두려워서 거짓말했다는 뜻입니다.

그의 이 말은 하나님을 초라하게, 하나님을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편재(遍在)하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그랄 땅,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땅이라고 미치지 못한다면,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능력이 어디에나 미치고 있는 것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하란 땅에서 하나님이 그를 불러 주셨습니다. 하란 땅에는 믿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기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가 애굽에 가서 거짓말하고 위기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건져 주셨습니다. 애굽에 믿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은 믿지 않는 사람들 천지인 애굽에서도 역사하셨습니다. 소돔 땅에 318명의 집에서 기른 군사들을 거느리고 위기에 빠진 롯을 건지기 위해서 갔을 때, 그때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셨지 않습니까? 소돔 땅에도 하나님 믿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은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어떤 상황에서나 능력으로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몰라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면, 그는 참으로 바보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알고도 이렇게 말한 거라면, 그는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차라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무릎을 꿇고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두려워서 그런 거짓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더라면, 적어도 하나님의 영광은 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말하고 변명하느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말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온 세상 만물에 편재하시고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초라한 하나님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도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삼상 15:15)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다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눈에 보기 좋은 것, 짐승들을 남겼습니다. 양과 소, 살진 것들을 다 남겼습니다. 사무엘이 가서 따져 묻습니다.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그때 사울이 하는 말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 드리려고 양과 소, 살진 것들을 남겨 두었습니다."

그의 이 말이 하나님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듭니까? 그의 이 말이 하나님을 얼마나 초라하게 만듭니까? 하나님께서 성경 어디에도 당신의 자녀들에게 많은 헌금을 하라고 말씀한 적이 단 한 군데라도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양과 소의 제사를 기뻐 받으신다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도 단 한 구절이라도 있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기뻐 받으시는 제사는 우리의 상한 심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우리의 마음 중심을 원하시는데, 지금 사울이 그렇게 거짓말함으로 하나님을 세상의 여러 잡신들 중 하나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변명은 곧 하나님을 초라하게 만듭니다. 사울도 차라리 사무엘 앞에 엎드려서 "내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용서를 구했더라면, 하나님께서 그의 용서를 받아 주시고 그의 인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삽니까? 회개해야 될 때는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순간, 그 변명은 하나님을 초라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 상처를 주게 됩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아브라함을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 어떤 마음이 드셨겠습니까? 불쾌하고 기분 나쁘고, 그리고 하나님 스스로가 얼마나 초라해지셨겠습니까? 이 변명을 듣고 있는 아비멜렉, 이제 나는 하나님 믿는 사람과 상종하지 않겠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여러 가면을 쓰고 사는 삶

그런데 아브라함의 변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또 그는 정말로 나의 이복 누이로서 내 아내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이 나를 내 아버지 집을 떠나 두루 다니게 하실 때에 내가 아내에게 말하기를 이후로 우리가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라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라 하였었노라" (창 20:12-13)

결혼한 지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수십 년이 지나서 이제 사라는 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저렇게 말하고 이곳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편한 대로 이런 곳에서는 아내라고 말하고 다른 곳에서는 누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 가지 얼굴만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보면 몇 가지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그랄 땅에 가서는 이 가면을 쓰고 있고, 또 다른 헤브론 지역에 가면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있고, 애굽에 가도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느 것이 진짜입니까? 누가 진짜 아브라함입니까? 누가 진짜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 우리도 이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교회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집사님인데, 가정에서는 아이들에게 호통이고 아내에게 막말을 하고 손찌검을 하는 나쁜 남편일 때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한없이 좋은 중직자인데, 직장에 가면 직장 상사로서는 함께 하기 어려운 사람일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마다 갖가지 가면을 가지고 이 가면 저 가면을 써가면서 자신의 신분과 정체를 숨기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어느 정체가 진짜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진짜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한 가지 얼굴만 가지고 사는 것은 불편한 일입니다. 한 가지 얼굴만 가지고 사는 것이 불편한 이유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가지고 살아간다면 세상에서 받을 불이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나 그 불이익은 눈에 보이는 불이익일 뿐,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채워주시고도 남을 믿는 전능하신 아버지라는 사실,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사는 사람들, 우리 예수님께서 이렇게 다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마 10:32-33)

무서운 말씀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시인하면, 우리가 아버지를 시인하고 예수님을 시인하면,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시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른 척하고 살면, 주님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모른 척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결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오늘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타산지석으로 삼고 반면교사로 삼기를 바랍니다. 변명은 하나님을 초라하게 만들고, 여러 가면을 쓰고 사는 삶은 결국 주님 앞에서 부인당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회개해야 할 때 철저히 회개하고, 한 가지 얼굴로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믿음의 백성으로, 우리 인생을 승리하며 나아가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지 다시 한번 우리의 인생을 돌아봅니다. 믿는 사람으로서 산 위에 있는 동네가 되어 산 아래 사람들에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되며 그들에게 영향력을 주고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때로 불신자들에게 책망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에 대하여 지혜롭고 세상에 대하여 미련하여 강력한 전도의 도구가 되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해타산을 따지는 어리석은 자로 살지 않도록 도우시고, 오로지 진리 가운데 살아가는, 손해 보기에 합당한 인생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변명으로 일관하여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실망시키는 어리석은 자 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회개해야 될 때 적절하게 회개하며 변명하지 않고 우리를 다시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믿음의 백성으로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