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 / 죄의 결과 (3:7-13)

죄의 결과 (창3:7-13)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각인된 최악의 정치 스캔들 중 하나입니다. 1972년 당시 닉슨은 미국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재선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닉슨과 그의 참모들이 상대편 민주당의 전국위원회 사무실을 도청한 사건이 바로 워터게이트 사건입니다. 워싱턴에 소재한 워터게이트 호텔에 그 사무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건을 워터게이트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건은 우연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처음에는 닉슨을 비롯한 참모들이 무시하고 모른 척했습니다. 언론이 취재를 시작하고 FBI가 조사를 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서로 발뺌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는 시점이 되자 서로의 뒤통수를 치고, 각자도생을 위해 서로를 고발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닉슨의 개입 여부였습니다. 참모들이 알아서 그 일을 했는가, 아니면 닉슨이 주도했는가, 닉슨이 알았다면 어디까지 알았는가를 밝혀내는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이자 핵심이었습니다. 닉슨의 도덕성이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닉슨은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수사망이 좁혀져 오자 그의 핵심 참모 중 한 사람이었던 홀드먼을 해고해 버립니다. 홀드먼의 해고 이후 그는 꼬리자르기에 성공하여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엉뚱한 데서 사건이 터집니다. 그의 비서실 수석 참모였던 버터필드라는 사람이 닉슨은 자기 사무실에서 일어난 모든 대화를 녹음한다고 발표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원은 닉슨의 사무실에서 일어난 모든 녹음 테이프를 제출하라고 결정했고, 결국 그 테이프에서 닉슨이 여기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재선에 성공했지만 스스로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게 됩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 가장 중요한 교훈은 악의 종말, 곧 죄의 결과입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서로를 지켜 주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죄의 결말에는 권리도 없고, 그 결말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는 지경까지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 말씀에서 에덴에서의 죄의 결과도 역시 같이 심각하고 슬프며 참담한 결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죄짓지 않고 살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죄가 얼마나 참담한지 깨닫고, 죄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기를 결단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 영광의 상실

먼저 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아담과 하와가 손을 들어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에 그들은 이런 결과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악과를 먹고 나면 하나님과 같이 될 줄 알았습니다. 뱀이 그렇게 그들을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웬걸요, 선악과를 따 먹고 나니 오히려 자신들의 눈이 밝아져서 벌거벗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죄 짓기 전이나 죄 짓고 난 이후나 그들은 역시 똑같이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죄 짓기 전에는 자신들이 벌거벗고 다니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죄 짓고 난 이후에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고 있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눈이 밝아졌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죄 짓기 전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했습니다. 죄 짓기 전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신 창조의 원형 그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 당신의 형상으로 지으셨지 않습니까? 창조 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짓고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 세계를 인간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권을 받아서 온 세상 만물을 관리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보기만 해도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아담과 하와의 몸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죄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죄가 들어오면 하나님의 영광은 떠나고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인간의 육체, 별 볼 일 없는 흙으로 빚어진 육체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나면 인간은 그야말로 고깃덩어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비참한 인간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하면서 신앙의 선배들을 보면 그분들은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무학의 분들인데, 그분들의 삶을 보면 빛나는 영광을 우리는 경험하고 보게 됩니다. 그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신앙의 정절을 잘 지켜 살았기 때문에, 죄가 없는 그들의 영혼은, 죄로부터 멀어진 그들의 영혼과 그들의 몸은 너무너무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비싼 명품으로 몸을 치장하고 있지 않아도, 좋은 차를 타지 않아도, 넓은 집에 살지 않아도, 권력과 권세를 가지고 누리지 않아도, 우리는 감히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믿음의 백성들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치장하고 있어도, 비싼 차를 타고 다녀도, 넓은 집에 살아도, 능력과 권세를 한손에 쥐고 있어도, 그가 죄 지어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사람을 우리는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얼굴에 행복이 없습니다. 마음속이 피폐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건물이 좋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교회가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아내고 성도들 각자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붙잡고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 저 교회는 보기만 해도 은혜가 되는 교회,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숨 쉬고 있는 교회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나면, 죄가 교회에 들어오고 성도들이 다 죄짓는 데 여념이 없으면 교회는 분열하고, 서로가 질투하고 질시하고, 사분오열되고 다 갈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콘크리트 건물만 남은 교회가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교회,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사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죄짓지 않아서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어야 합니다.

1-1. 수치심과 자기 분열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게 하고, 죄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우리 자신을 보면 부끄러워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고 임시방편으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만들었지만, 그런다고 자신의 수치심을 가릴 수 있습니까? 어쩔 수 없어서 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가렸지만, 그렇다고 수치심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수치밖에 없습니다. 그 부끄러움의 수치가 남으면 그 다음에는 자신의 인격의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내가 왜 그런 죄를 지었는가, 내가 왜 그 일에 연루되어 있는가, 나 스스로도 나를 이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극단적인 자기 분열이 일어나고 자기 스스로를 해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 시절에 한 유명한 광인이 살았습니다. 이방인들이 모여 사는 거라사 지방에 가면 한 미치광이 광인이 있었는데, 성경은 그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쇠사슬로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고. 사람들이 그를 잡아다가 쇠사슬로 꽁꽁 묶어 두었는데 괴력으로 쇠사슬을 다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만났습니다. 그에게 군대 귀신이 들려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있는 군대 귀신을 다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군대 귀신에 사로잡힌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경로로 죄를 짓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에게서 사라집니다. 그에게도 수치심이 들어옵니다. 그 수치심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 빈틈으로 악한 영이 자리 잡습니다. 악한 영은 또 다른 영을 데리고 들어옵니다. 그렇게 해서 모여진 영들이 군대의 귀신처럼 그의 몸과 영혼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 인격 자체를 말살하고 파괴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습니까?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수밖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이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수밖에, 주님을 만나는 그 외에는 자기 스스로 그 족쇄에서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해 줍니까? 군대 귀신을 사람이 어떻게 내쫓아 줍니까? 주님의 능력이 아니라면 불가능합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습니다. 그 전날 밤 어둠을 틈 탄 뒷골목에서 잠시나마 죄의 낙을 누릴 때, 그녀는 자신이 이러한 수치를 당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발각되고 그녀는 그 다음 날 백주대낮에 여러 사람들이 모인 그 광장 한가운데 부끄러운 모습으로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녀를 죽이려고, 돌을 치려고 손에 큰 돌을 하나씩 들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저 돌에 맞아서 죽겠지 하는 두려움보다 그녀에게는 수치심이 더 견디기 어려운 공포입니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이 자리에서 죽고 싶은데, 너무 부끄러워서 살 수 없는 지경에 예수님이 그녀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잎과 같은 위로 그녀의 몸을 가려 준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사랑의 옷을 그 여인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만약 그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만약 그 여인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돌에 맞아 죽었을 것이고, 억지로 살아났다 하더라도 그녀는 수치심 때문에 자기 분열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에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죄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그 수치심이 나를 너무 괴롭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힘들게 한다면, 사람 앞에 나가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마시고 주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이 문제를 다 내려놓고 주님께 다 맡기면, 주님만이 내 인생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2.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

또한 죄는 나 자신의 인격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도 파괴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그 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날'은 '욤(יום)'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정관사 '하(ה)'가 붙어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하욤(היו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그 날"이라고 표현했는가 하면, 바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그 순간, 그 날 하나님께서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체하지 않으셨습니다. 결코 미루지 않으셨습니다. 그 순간, 그 날 바로 내려오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수치심 때문에 그 빈자리로 악한 영이 틈 탈까 봐, 하나님은 그것이 가련했고 그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악한 영이 틈 타기 전에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그들을 구원하고 건지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오셨다면 아담과 하와가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저희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그 나무 열매를 우리가 따 먹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고 용서해 달라"고 엎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숨는다고 숨길 수 있습니까? 피한다고 피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다 지으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짓고 살게 하시고 창조하신 창조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창조의 주인 앞에서 우리가 어디에 숨는단 말입니까?

아담과 하와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뿐만 아니고 구약의 선지자 요나도 역시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요나서 1장 3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뱃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이 짧은 1절 말씀에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저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 회개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그런데 그는 싫었습니다. 적국의 심장, 수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피했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갔습니다. 배를 타자마자 그는 가장 배 밑바닥에 내려갔습니다. 깊은 곳에 얼굴을 파묻었습니다. 잠들어 버렸습니다. 배를 타고 배 가장 깊숙한 밑바닥에 숨어 있으면 하나님이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망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바다를 창조하셨습니다. 풍랑을 일으켰습니다. 풍랑이 그를 깨웠습니다. 배 밑바닥에 있던 요나가 갑판 위로 끌려 나옵니다. 선원들이 제비를 뽑았습니다. 요나가 뽑혔습니다. 선원들이 그를 잡고 바다에 던집니다. 하나님은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 물고기도 창조하셨습니다. 이미 큰 물고기를 준비하시고 요나를 삼키게 하셨습니다.

어디로 피한단 말입니까? 아무리 배 밑바닥에 숨어 있어도 하나님은 그를 찾아내시고 건져내시고 물고기 뱃속에까지 들어가게 하시는 분, 창조주 하나님의 눈길을, 그 손길을 우리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의 눈은 피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눈길과 하나님의 손길은 우리가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도 역시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동산 나무 뒤에 숨어 버린 그들의 어리석음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2-1.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오셔서 의외의 질문을 하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몰라서 물으십니까? 하나님이 숨바꼭질하자고 물으십니까? 다 알고 계시는데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은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패턴 중에 결코 빠지지 않는 한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은 반드시 기회를 주십니다. 그냥 심판하지 않습니다. 돌아올 기회를 꼭 주십니다.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 심판의 패턴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여기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 질문하셨습니다.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붙잡아라. 지금 나와서 내 앞에 엎드리면 내가 너희를 용서하겠다"고 하나님은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죄짓는 것,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지었다면 그다음 사후 처리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 돌아와야 됩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질문하실 때,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돌아와 엎드려야 됩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놓치고 나면 그 다음 기회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가장 위대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줄 재산, 자신에게 돌아올 재산을 미리 받아 챙겼습니다. 먼 나라로 갔습니다. 친구와 함께 흥청망청 방탕하게 다 써 버렸습니다. 자신의 술 친구와 함께 재산을 다 탕진해 버렸습니다.

기근이 닥쳐왔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때 문득 그에게 아버지 집에 있는 품꾼이 생각났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품꾼이 많은데 그들도 나보다는 잘 먹고 나보다는 행복한데 내가 여기서 뭐 하는 짓인가, 내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아버지가 그를 환대한 장면이 누가복음 15장 20절, 23절, 24절에 나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아버지가 대단히 환대했습니다. 비록 형님은 동생을 환대하지 않았지만, 동네 사람들도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렸지만, 아버지 한 분이 그를 이렇게 환대하시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를 끌어안고 잘했다고 이렇게 세우시고, 살찐 송아지를 잡고 온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서 잔치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실 때, 그때 돌아가야 됩니다. 그런데 사탄은 우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돌아가면 너는 이제 큰일 날 것이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왔다.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너는 이제 건너왔다. 여기가 가장 안전하다"고 사탄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요나에게는 배가 가장 안전하다고 얘기했고, 아담과 하와에게는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으면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기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속삭였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계신데, 사탄은 여전히 우리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우리 발목을 잡고 있지 않습니까?

돌이켜 돌아가야 됩니다. 그래야 거기서부터 새로운 회복과 시작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두 팔 벌려 우리 인생을 기다리고 계시고, 돌아오기만 하면 살찐 송아지를 잡으려고 준비하고 계시는 영원한 아버지임을 깨닫고 기억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인간관계의 파괴

죄는 또한 세 번째로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이렇게 또 질문하셨습니다. "누가 너희들이 벗은 것을 알려 주었느냐? 혹시 내가 너희들에게 먹지 말라는 그 나무 열매를 먹은 것은 아니냐?"

그때 아담은 돌이킬 수 없는 대답을 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충격적인 대답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기회를 자기 발로 걷어찼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뻔뻔한 책임전가의 대답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담의 이 대답을 자세히 살펴보면 죄의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한 저 여자가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죄의 시초가 되고 하와는 죄의 전달자가 되고 아담은 죄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이 없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가 책임이 없습니까? 이렇게 피하고 싶을지언정 그는 죄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죄는 이렇게 모든 인간관계를 파괴합니다. 그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한 돕는 배필 하와에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이 여자가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와가 그의 대답을 듣는 순간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내가 돕는 배필인 이 사람 아담이 과연 내가 아는 아담이 맞는가?" 그들의 사이가 극단적으로 벌어져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 사람을 믿고 지금까지 지내왔던가?"

이 죄는 이처럼 인간관계를 파괴합니다. 닉슨이 홀드먼을 해고하고, 버터필드가 닉슨을 고발한 이런 비참하고 참담하고 허무한 일이 에덴동산에서도 일어나고 있고,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각자도생하고 자기만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손가락질하고 고발하는 이런 악한 일이 죄의 말로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1. 하와의 어리석은 대답

아담한테 마지막 차서 오신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했습니다. 이제는 돌아갈 기회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이제는 아담에게서 관심을 거두십니다. 여자에게 물으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자도 똑같습니다. 책임전가를 한 것입니다. 그녀도 역시 뱀에게 책임전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대답은 가장 어리석은 대답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사명은 모든 피조물을 관리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동물과 식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관리와 위탁의 사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동식물의 이름을 짓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동물을 가르치고 동물을 지도하고 동물을 관리해야 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와의 대답을 보십시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자신이 관리해야 될 동물보다 내가 못하다는 것 아닙니까? 동물의 꾐에 빠져서 영원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게 되었으니, 나는 동물보다 못하다고 말한 스스로의 확인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질서를 세워 주셨는데, 그 질서를 파괴하고 질서가 뒤집어지고 동물에게, 오히려 뱀에 빠져 넘어간 하와의 이 어리석음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은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관리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돈, 물질에 지배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나는 돈 때문에 망했다, 돈이 원수다, 나는 돈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가장 어리석은 대답입니다. 왜 돈을 관리하지 못합니까? 왜 물질을 우리가 스스로 관리하지 못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물질, 적게 벌면 적게 버는 대로, 많이 벌면 많이 버는 대로 우리 형편과 분수껏 관리하고 살아가야 되는데, 우리 마음에 탐욕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물질의 노예가 되고 종이 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하는 말, 모든 것이 다 파국에 이르고 나서 하는 말, "돈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돈이 나를 꾀므로 내가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어리석은 하와의 대답과 다름없습니다.

시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시간도 내가 관리해야 될 대상입니다. "시간이 없고, 시간에 쫓겨 다니고, 시간 때문에 못 살 것 같다." 이런 말을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관리해야 될 대상에게 왜 관리당하고 지배당하고 있습니까? 하와의 이 어리석은 대답처럼 우리는 이런 인생을 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유일한 해결책

죄는 모든 관계를 다 파괴합니다. 우리 자신의 인격을 파괴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파괴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끊어놓습니다. 모든 관계를 파괴하는 이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 14절 말씀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둘로 하나를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화평이 되셨습니다. 사람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굳게 붙잡으면 내 분열된 인격이 그 안에서 치유받고, 하나님과 나와의 끊어진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될 것입니다. 끊어진 인간관계, 망쳐버린 인간관계가 다시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다시 견고하게 새롭게 세워질 줄로 믿습니다.

이 귀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시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