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강 / 심판하시다-2 (3:16-19)

심판하시다-2 (창3:16-19)

현재 부산지방법원에 가정법원 부장판사로 재직 중인 천종호 판사는 1965년생으로, 우리나라 사법부에서 한 가지 의미 있는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청소년 재판, 즉 소년범 재판을 가장 많이 한 판사라는 기록입니다. 8년 동안 약 만 2천여 회의 재판을 진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나라 사법체계에서 소년범 재판에 허용되는 시간이 한 사람당 3분을 넘지 않기 때문에, 그 짧은 시간 안에 어떻게 하면 청소년들이 법정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깨닫게 할 수 있을까 몹시 고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냥 지나가버리면 자신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제대로 반성도 하지 않고 흘려버려서, 또다시 재범, 삼범하여 그 자리에 다시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섭게 꾸짖어서 다시는 이런 자리에 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별명이 '호통 판사'입니다. 호통을 치고 큰 소리로 꾸짖어서 다시는 그 자리에 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 언론 인터뷰와 책을 통해서 비행 청소년들의 상황을 밝혀내셨습니다. 여러 비행 청소년들의 불우한 환경, 그리고 돌봐줄 부모가 없는 환경이 그들을 범죄로 내몰았고, 결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비를 털어서 청소년 공동 주거지를 마련하셨습니다. 첫 번째 초범에서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청소년들 중에 공동 주거를 희망하는 아이들을 그곳에서 돌보고 양육하는 일을 앞장서서 하고 계십니다. 차가운 인간의 법정, 그 이면에 따뜻한 인간미가 함께 감춰져 있는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람의 법정에도, 아주 차가운 법정에도 이렇게 따뜻한 인간의 정이 흐르고 있는데, 하나님의 법정은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지난주부터 그리고 오늘까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죄 지은 자들을 심판하신 내용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그 이면에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하심이 함께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놀랍고 크신 은총의 혜택을 입고 살아가는 자인데, 그 사랑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은혜 받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여자에 대한 심판

우선 하나님께서 여자를 심판하십니다. 16절 말씀입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두 가지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1-1. 출산의 고통

우선 여자에게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더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총이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죄 짓기 전 임신과 출산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이요 은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죄를 지었고, 죄 짓고 난 이후에는 거기에 고통이 더해졌습니다.

여기 '고통'이라고 쓰여진 단어는 히브리어 '이차본(עִצָּבוֹן)'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고통을 겪다'라는 뜻이 있고, 두 번째 뜻으로는 '모양을 만들다', '모양을 형성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성이 출산할 때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겪어야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고통을 허락하셨습니까? 그리고 그 고통이 왜 죄 지은 당사자 하와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앞으로 올 모든 인류에게, 오늘 우리에게까지 자녀를 낳을 때 생명을 담보하는 그 엄청난 고통을 허락하셔야만 했을까요?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죄는 결론적으로 고통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 지을 때는 잘 모릅니다. 죄는 은밀하고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의 유혹을 받았을 때, 뱀이 그들에게 다가와서 유혹했을 때, 그들은 얼마나 달콤했겠습니까? 저걸 따먹기만 하면 내가 하나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그 기대와 열망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죄는 사람들에게 달콤한 유혹을 안겨줍니다. 죄 지을 때도 역시 그렇습니다. 하지만 죄의 결과는 비참하고, 결국은 우리 인생을 고통 가운데 몰아넣는 것입니다.

다윗과 밧세바를 생각해 보십시오. 밧세바와 다윗이 하나님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남편 우리아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둘이 음란의 죄악을 즐길 때 그들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죽었습니다. 다윗의 집에 칼이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그 이후에 겪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는 결국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조상 하와가 지은 그 죄의 결과가 오늘 우리의 몸에도 아로새겨져서, 결국 죄의 결과는 우리의 생명을 담보하는 고통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지금도 깨닫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죄의 은밀함과 죄악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한순간의 달콤함이 영원한 고통으로 우리에게 새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2. 가정의 갈등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두 번째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16절 말씀 하반절입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 '원하다', '다스리다'라는 말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원하다'라는 말은 여자가 남편을 주장하기를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즉 자기 뜻대로 남편을 주장하기를 갈망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스린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반면에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고자 원한다는 뜻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자기 마음대로 주장하기를 원하고, 남편은 아내를 다스리기를 원한다면, 이 둘의 충돌과 갈등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지은 여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심판은 결국 가정의 주도권 싸움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주도권 싸움은 지금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의 현장에도 오래도록 지속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백성들은 결혼 이후에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갈등하고 또 갈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래 가정을 창설하실 때는 이런 원리로 창설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돕는 배필'을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돕는 배필이 어떤 의미입니까? 서로 동등하게 마주 보는 존재 아닙니까? 마주 보면 상대의 약함이 보입니다. 나의 강함으로 상대의 약함을 보충해주고, 상대의 강함으로 내 약점을 보완해서, 서로가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도록 만든 것이 '돕는 배필'에 담긴 하나님의 원래 뜻이었습니다. 남편이 잘못하면 아내가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돕는 배필이요, 아내가 곁길로 가면 남편이 바로잡아주는 것이 돕는 배필입니다. 서로가 동등하게 상호 보완하는 관계가 돕는 배필, 죄 짓기 전의 가정입니다.

그런데 죄 지은 이후에는 그 가정이 주도권을 놓고 끊임없이 갈등하고 또 다툽니다. 이것은 불행한 가정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서로 갈등하고 주도권을 가지려고 한다면, 서로가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한다면, 둘 다 주인을 내려놓는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의 진정한 주인이신 하나님께 모든 결정을 맡겨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가정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래야 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는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 가정의 주인으로 모시고, 나는 주님만 섬기겠습니다. 남편의 말도, 아내의 말도 그 가정의 주인 노릇을 하며 주권을 가질 수 없고, 주님의 말씀만 가정의 주권이 되는 그 행복한 가정이야말로 하나님의 심판의 저주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 2절 말씀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여기에 '마음을 같이 하고 같은 사랑을 가지라',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결혼한 부부가 심하게 다툽니다. 목사에게 찾아옵니다. 목사가 묻습니다. 두 사람에게 서로 사랑하느냐고. 뜨겁게 사랑한다고 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그런데 왜 다툽니까? 왜 갈등하고 왜 심하게 싸울까요? 자기 사랑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자기 주장대로 사랑을 강요하고, 아내는 자기 주장대로 또 남편을 주장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갈등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두 사람의 사랑을 내려놓고 '같은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 '같은 사랑'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같은 사랑을 가져야 그제야 그 가정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주신 심판을 피하고 그 심판에서 자유롭게 되는 길, 그 길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같은 사랑으로 가정을 세워가는 믿음의 공동체로 새롭게 태어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3. 심판 속에 남겨진 은총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이렇게 심판하시면서도 남겨두신 은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그 이면에 반드시 남겨두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여자에게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더하셨지만, 자녀를 생산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지는 않으셨습니다. 자녀를 낳도록, 계속해서 자손이 그 자손을 낳고, 후손이 후손을 이어가도록 하나님은 자녀 생산은 그대로 두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뱀을 심판하실 때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후손을 낳아야, 그 자녀가 또 자녀를 낳아야, 앞으로 오실 메시아께서 사탄의 모든 권세를 파괴하시고, 그리스도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주권이 온전히 주인 되는 나라를 세워 가실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심판 중에도 하나님의 긍휼을 잃지 않으시고, 자녀를 낳아서 결국은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이어 가시고, 그 약속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의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때로는 책망하실 때가 있습니다. 심판하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견책하시고, 징계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것을 다 쓸어버리고 돌아갈 가능성까지 막아버리는 하나님의 징계가 아닙니다. 살펴보면 남겨진 하나님의 은총이 있습니다. 그 놀랍고 귀한 은총을 우리가 찾고 발견하고, 그 은총에서부터 시작해서 다시 하나님 나라를 차근차근 세워 가는 지혜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하와에게 주신 이 심판과 남겨진 은총을 통해서 우리에게도 그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2. 아담에 대한 심판

그다음 하나님은 아담을 심판하십니다. 17절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2-1. 노동의 심판

노동의 심판입니다.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다. 앞으로 열심히 일해야 먹고 살 것이라는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였습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서도 노동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기 전 에덴동산에서도 하나님은 노동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죄 짓기 전에 에덴동산에서 땅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 지은 이후에도 수고하여야 땅의 소산을 먹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죄 짓기 전이나 죄 지은 이후나 똑같이 노동이 있다면, 이것이 왜 심판입니까?

18절 말씀입니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하나님의 심판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응답하시는 심판입니다. 죄 짓기 전에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없었습니다. 즉 하나를 심으면 하나를 얻습니다. 열을 노력하면 열 가지를 얻습니다. 백을 심으면 백을 얻습니다. 내가 수고하고 땀 흘리고 노동하고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 에덴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죄 짓고 난 이후에는 백을 심어도 열을 얻을까 말까 합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 때문입니다. 땀 흘리고 수고하고 애쓰고 발버둥치고 노력해도, 그러나 내가 땀 흘린 만큼, 애쓴 만큼, 분투한 만큼 얻어 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죄 지은 인간에게 내리신 아주 무서운 심판입니다.

2-2. 복의 원형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주신 이 심판을 보면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과연 복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복의 원형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복은 일확천금이 아닙니다. 벼락부자가 되는 것이 결코 복이 아닙니다. 진짜 복은 에덴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하나를 심으면 하나를 얻고, 열을 심으면 열을 얻고, 내가 노력하고 땀 흘리고 수고한 만큼 하나님이 우리의 땀과 수고를 인정하시고 그대로 되돌려 주시는 것, 그것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복 중의 가장 위대한 복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28편 2절 말씀입니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이것이 복입니까? 사람들은 이것을 복이라고 인정하기 싫습니다. 내 손이 수고한 대로 먹고 누리는 것이 복이라면, 나는 그런 복은 싫습니다. 나는 열을 심으면 천만, 백만, 십만을 얻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128편의 기자는 성전에 올라가면서 이 노래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 돌아보니 내 손이 수고한 대로 먹는 것이 복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임을 이제야 깨닫고 다시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갑니다. 나를 비롯해서 우리 가족, 믿는 지체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백성들이 수고한 대로 거두고, 땀 흘린 대로 그 대가를 누리게 해달라고, 그렇게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간구하며 기도하고 있는 장면이 시편 128편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악한 사람들은 이것을 절대로 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확천금으로 벼락부자 되고 싶어 합니다. 주식을 사고 이것이 백 배가 되어서 큰 부자가 되고, 부동산을 사고 이것이 엄청나게 올라서 삼대, 사대가 먹고 배부를 만큼 되는 것, 이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살아 보십시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언론 보도를 보십시오. 역사를 보십시오. 과연 그것이 복입니까? 과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땀 흘림에 진정한 대가가 없는 것이, 과연 그것이 진정한 복입니까?

큰 물질이 주어지면, 이것은 우리가 경계하고 당황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락해 주셨을까? 혹시 그 안에 사탄의 미묘하고 복잡한 시험이 들어 있지는 않을까? 그것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상실되거나, 우리 자녀의 믿음이 떨어지지는 않을까? 우리가 지금까지 믿음생활 잘 해오고 있었는데, 이 물질 때문에, 이 돈 몇 푼 때문에 우리 가정이 자손대대로 망하지는 않을까? 우리는 그것을 오히려 더 경계해야 합니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주신 그 복의 원형입니다. 경작하고 지키게 하시고, 수고한 만큼 얻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는 것, 그것이 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굴의 잠언처럼 항상 이렇게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잠언 30장 8절과 9절입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더 아름다운 잠언이 있습니까? 아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마옵시고, 꼭 필요한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할까, 가난해서 도둑질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렵습니다. 하나님, 저를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마옵시고 꼭 필요한 것만 허락해 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간구하며 기도해야 할 제목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아담에게 허락하셨던, 심판하셨던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저에게는 너무나 고되오니 이것만 제거해 달라"고, "제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열심히 섬기고 주를 위해서 열심히 분투하고 일할 테니, 하나님, 제가 수고하고 노력한 대로만 먹게 해달라"고, 그리고 "우리 자녀들 공부시키고, 우리 자녀들과 함께 행복하고, 그들과 함께 아름답게 하나님 잘 섬기게 해 달라"고, "에덴의 원래 복의 원형을 회복하는 우리 가정이 되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은 탐욕이고, 더 이상은 하나님이 원하시지도 않습니다. 꼭 기억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3. 존재의 본질을 깨닫게 하심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이렇게 심판하셨지만, 아담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그에게도 남겨두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있었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 흙을 파고, 땀을 흘리고, 땅의 소산을 먹어야 한다고 하나님은 흙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처럼 보이나,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그에게 주신 놀라운 은총입니다.

이것이 왜 은총인가? 노동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에덴의 범죄의 본질은 교만입니다. 뱀이 하와를 그렇게 유혹했지 않습니까? "저것을 먹으면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의 욕망으로 선악과를 따 먹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에덴 범죄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처럼 높아지려고 했던 아담의 마음을 저 아래, 땅 아래로 낮추셨습니다. 너의 재료가 무엇인지 땅을 파고 노동하면서 너의 재료의 본질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재료가 무엇입니까? 흙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인간의 본질은 흙이고 먼지고 티끌입니다. 그냥 날아다니는 티끌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비로소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존재가 먼지와 티끌에 불과한 흙인 줄도 모르고, 감히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속아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고 교만을 일삼았던 인간의 죄를 하나님은 책망하시고, "너는 다시 너의 존재 본질을 찾아 회복하라" 말씀하시는 것, 이것이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일터에서 열심히 땀 흘려 일하다 보면 우리 존재의 한계를 절감합니다. 내 머릿속은 저 높은 곳에 올라가 있으나, 일터에서 일하다 보면 "나는 이것밖에 되지 않는구나, 내 능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구나"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열심히 일해도 저는 제 능력의 한계가 여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주십시오."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 때문에 더 이상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우리 인생이 흙을 파고 땅을 파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존재의 한계를 절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닙니까?

겸손하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의 장례를 많이 집례하고 치릅니다. 화장터에 가서 마지막 한 줌 재로 변한 그 모습을 보면 허무하기도 하고,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정말 이렇게 한 줌 재밖에 되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은 육체는 이렇게 한 줌 재로 변했지만, 그러나 그 영혼은 하나님께서 이미 하늘에서 받으셨구나 하며 감사하고 감동합니다.

그런데 그 한 줌 재는 바람이 불면 다 흩뿌려지고 다 날아가는 흙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미련을 내어 끝까지 붙들고 살려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서울대병원에서 종양내과 교수로 재직 중인 김범석 교수가 쓴 책이 있습니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라는 책인데, 그 책에 보면 말기암 환자들의 마지막 모습을 여러 이야기로 담아둔 내용이 있습니다. 그중에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분은 폐암 말기 환자였는데, 성격이 괴팍해서 아내도 다 떠나버리고, 자식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이제 마지막을 맞이해야 하는데, 가족에게 연락할 데를 찾다가 남동생 하나가 있다는 것을 찾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남동생에게 연락했습니다. 남동생이 병실에 왔습니다. 병실에 있는 사람들은 오랜만에 형제가 상봉하는 장면을 봅니다. 뜨겁게 부둥켜안고 울겠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동생이 형을 보고,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형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형, 왜 이렇게 되셨습니까?" 그런데 형이 따뜻하게 맞아줄 줄 알았는데, 동생을 보고 하는 첫마디가 "넌 내 돈 2억 갚아라! 너 내 돈 2억 갚아 봐라!" 아주 차갑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동생은 너무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고 병원에 알려왔습니다. "간병비는 제가 다 내겠습니다. 병실비도 제가 다 치르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형을 면회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지막 가는 길 아무도 없이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 "내 돈 2억 갚아라" 했던 그분.

그분에게 2억이 어떤 의미였겠습니까? 평생 동안 자기가 번 재산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전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돈 짊어지고 마지막 가는 길을 갈 수도 없는데, 자신의 존재 한계가 티끌과 먼지밖에 되지 않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동생 한번 부여안고 "이제 너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라" 그렇게 한번 해 주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우리 인생은 너무 미련해서 그렇게 홀연히 갈 줄 모르고, 물질 붙잡고, 관계 붙잡고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아담들에게 다시 너의 본질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흙을 갈고 땅을 갈면서 네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3. 심판 속의 긍휼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잃지 않으시고, 심판 중에도 남겨두신 그 은총을 우리 각자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그런 은총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너무 모질지 않게 주변 사람들을 대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추수할 때 추수한 곡식을 그냥 흘려두라고 하셨습니다. 고아와 과부가 그것을 주워서 먹고 살도록, 다 한 톨 남기지 않고 다 쓸어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남겨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나와 함께한 사람들, 이웃들, 가족들에게 너무 모질게 하지 마시고, 그들에게 돌아갈 길도 주시고, 돌아올 길도 주시고, 때로는 모른 척도 해 주시고, 때로는 사랑도 베풀어 주시는, 아 그 귀한 넉넉한 은혜가 주님을 닮은 우리 모든 성도들과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잃지 않으시고, 심판 중에도 따뜻함을 항상 가지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무자비하고, 우리를 책망만 하시고, 끝까지 몰아세우는 분으로 오해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주셨지만, 그러나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는 그 길을 열어 놓으신 하나님, 아담에게 노동의 심판을 하셨지만, 그러나 땅을 갈면서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하신 하나님, 오늘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 이웃들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우리를 마음 상하게 한 분들에게도 넉넉한 여유와 품어줄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