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강 / 희망을 보다 (3:20-24)

희망을 보다 (창3:20-24)

우리 교회가 이달의 책으로 함께 읽고 있는 책이 『이어령 80년 생각』이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 보면 이어령 선생의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창조성이 아주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단연 압권은 1988년 서울올림픽입니다. 그분은 서울올림픽 개회식과 폐막식의 전체를 총괄하고 기획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보통 다른 나라에서 올림픽 개막식이라고 하면 그 나라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 최상의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전체적이고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통해서 세계인들에게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위엄과 위상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이어령 선생은 달랐습니다. 그는 침묵과 여백을 선택했습니다. 광활하고 넓은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 굴렁쇠를 굴리는 한 어린 소년을 등장시켰습니다. 그 소년이 화면에 등장하고 약 1분 동안 올림픽 주경기장을 굴렁쇠를 굴리면서 뛰어다녔습니다. 전 세계인들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1분 동안 숨죽이고 이 어린아이가 뛰어다니는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세계인들은 큰 감동을 느끼고 신선함을 느꼈습니다. 어떤 다른 올림픽 개회식에서도 볼 수 없는 장면이고 역동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어령 선생에게 질문합니다. 어떻게 이런 기획과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고. 이때 그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깊은 답변을 합니다. 1970년대 초에 그분이 프랑스를 방문했는데 그때가 성탄 즈음이었습니다. 동네 어귀마다 성탄절 포스터가 붙어 있는데 포스터에 주제가 "이들에게는 노엘이 없다"라는 주제였습니다. 1950년대 우리나라 한국전쟁이 끝나고 고아들의 참상이 그 포스터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전쟁고아가 얼마나 비참합니까?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유럽, 전 세계인들이 대한민국을 기억하는 이미지가 바로 전쟁과 가난이었습니다. 1970년대 이어령 선생이 프랑스를 방문했을 당시에는 전쟁이 끝나고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세계인의 머리 속에는 한국이란 가난한 나라, 전쟁고아가 넘쳐나는 나라로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이 각인을 깨고 싶었습니다. 1981년 9월 30일, 이날은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서울!"이라고 외친 날입니다. 그날 태어난 아이들을 수소문했습니다. 그중에서 건강하고 밝게 잘 자란 아이, 1988년 당시 8살이 된 윤태웅 어린이를 발굴했습니다. 이어령 선생이 당시 8살 난 윤태웅 군을 안고 있습니다. 이 어린아이에게 굴렁쇠를 굴리는 연습을 시켜서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 내세운 것입니다.

희망의 생명만큼 더 강렬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말기암 환자들이 자신의 집에 화초를 키우고 꽃을 키웁니다. 꽃이 생명처럼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희망의 끝자락을 붙잡습니다. 전쟁 통에 있는 사람들이 그 통에도 태어난 아이를 보면서 이 다음 세대는 더 이상 전쟁이 없고 행복한 아이의 해맑은 웃음을 보며 그들은 또한 희망을 가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꿈꾸고 희망을 붙잡고 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에도 아주 절망적인 상황인데 그럼에도 희망이 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온갖 나무 중에 낙원인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납니다.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더 이상 에덴을 경험할 수 없고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에서 쫓겨난다는 것, 절망과 낙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도 여전히 희망이 존재합니다. 그 희망은 사람이 만든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고 사람이 붙잡은 희망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생이 아무리 절망적이고 괴로울지라도 그 안에서 희망을 붙잡고 새 소망을 가지고 일어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생명의 사명

2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라." 원래는 여자라 했습니다. 남자는 이쉬(אִישׁ), 여자는 이솨(אִשָּׁה)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에덴에서 쫓겨나는 그때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불렀습니다. 왜 하필 이때였을까요? 이름을 지으려면 각종 동물과 식물의 이름을 지을 때 그때 이름을 짓든지, 그렇지 않으면 조금 더 편안한 곳에서 이름을 짓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내쫓으시는 바로 그때 그들은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고 바꾸어 불렀습니다.

하와(חַוָּה)라는 이름의 뜻은 생명입니다. 성경은 그 생명을 해석하기를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명사입니다. 생명, 생명의 유업을 이어받을 자라는 뜻이고, 이 말은 동사 하바(חָוָה)에서 왔는데 "생명을 이어가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심판의 자리에서 이들에게 한 가지 힌트를 주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그 놀랍고 무서운 심판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습니까? 그걸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줄 알고 아담과 하와는 힘을 합쳐서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책망하시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그들은 한 가지 소망과 희망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뱀을 심판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심판하실 때 하나님은 여자에게 임신과 출산의 고통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유업을 이어가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희망의 자락이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붙잡았습니다. 그렇구나,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희망이고, 희망은 이제 우리의 사명이로구나. 비록 지금 우리가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지만 에덴에서 나가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바로 생명을 이어가는 일이로구나. 생명을 이어서 우리의 후손이, 여자의 후손이 악한 사탄의 머리를 밟아서 그들을 이기고, 우리는 실패했지만 더 이상은 실패가 없도록, 더 이상은 사탄에게 노예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야 되는구나. 그들은 그것을 사명으로 붙잡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단했습니다. 그 결단의 증표와 의미로 여자의 이름을 하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지어준 것입니다. 이제부터 그들은 에덴에서 쫓겨나면 자녀를 낳는 일에 힘을 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은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뜻은 생물학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의미가 이 속에 잘 내포되어 있습니다. 자녀를 낳았다고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믿음 안에서 잘 길러가야 됩니다. 비록 우리는 에덴에서 실패했지만 우리가 낳을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여자의 후손이 되어서 뱀 곧 사탄의 권세를 이기는 자로 우리가 길러내겠다. 영적인 산 자의 어머니가 되고 영적으로 산 자의 아버지가 되겠다. 이 결단을 아담과 하와가 이 자리에서 한 것입니다.

1-1. 영혼 구원의 사명

오늘 이 결단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가져다 줍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른 여타의 어떤 이유를 가지고 온다 하더라도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영혼 구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구제 사역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구제 사역의 마지막 종착 목적은 영혼 구원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들은 세상의 빛이다, 세상의 소금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되는 이유도 결국은 영혼 구원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도하는 그 영혼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이 자리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신 말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우린 그걸 붙잡고 살아갑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납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너희가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되라, 너희가 모든 산 자의 아버지가 되라,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목적을 위해서 얼마만큼 준비되어 있습니까? 우린 그 목적을 위해서 얼마만큼 성실하게 노력하고 달려 왔습니까? 신앙생활을 수십 년 동안 했는데, 오랫동안 교회를 섬기고, 오랫동안 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있었는데, 내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수 없다면, 그렇게 준비되어 있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서 "예수님이 누굽니까? 나에게 예수님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할 때 덜컥 겁이 난다면, 그런 건 목사님들만 하는 일이고 교회에서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가 신앙생활 잘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서 그 뜻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발을 통해서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을 지키고, 누구를 만나든지 진리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는 영적인 실력을 갖춰야 됩니다.

신앙생활 하는 이유가 장로 되고 권사 되고 교회에서 존경받고 인정받기 위해서 신앙생활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훗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서 "너는 무엇 하다가 왔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우물쭈물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면, "나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는 것이 내 뜻인데 너는 과연 누구에게 얼마만큼 진리를 증거했느냐? 교회 안에도 여전히 구원받아야 될 사람이 넘쳐나고, 세상에는 말할 것 없이 구원받아야 될 사람이 넘쳐나는데, 너는 너의 입술로 얼마나 복음을 전하다 왔느냐?"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1-2. 초대교회 일곱 집사

초대교회에는 일곱 집사님들이 계셨습니다. 일곱 집사님을 초대교회가 세운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재정 출납입니다. 구제 사역입니다. 사도들이 재정을 출납하고 구제하는 것이 힘이 부쳤기 때문에 집사님들 세워서 구제하고 재정을 출납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은 그 일에만 특화된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분들의 공통 분모는 모두가 다 말씀을 증거하는 탁월한 능력을 갖고 계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설교한 내용을 한번 보십시오. 어떤 사도들이 설명한 것보다 더 깊이 있고 더 탁월했습니다.

빌립 집사님을 보십시오. 초대교회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이 불어닥쳤습니다. 성도들이 그곳에서 믿음 생활 할 수 없었습니다. 빌립 집사님이 복음을 들고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사마리아 그 어떤 곳입니까? 기원전 721년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한 곳 아닙니까? 군대가 주둔했습니다. 혼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마리아 지역을 버렸습니다. 버림받은 땅, 사람들이 아무도 살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땅으로 통행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빌립 집사님이 복음을 들고 갔습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건물로서의 교회가 세워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그들을 구원시켰습니다. 온 성에 큰 기쁨이 가득 차고 넘쳤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소문이 났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달려왔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때 성령께서 다시 빌립 집사님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광야로 가라"고. 그곳에서 기득권을 주장하고 누리지 말고 다시 일어나 광야로 가라고. 광야로 그냥 내려갑니다. 갔더니 수레가 하나 있습니다. 그 속에 어떤 사람이 타고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였느냐면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관리 내시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재무장관 정도 되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거기 서서 책을 읽고 있는데 그 책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기록입니다. 빌립 집사님이 그걸 보고 "내가 당신에게 일러도 되겠느냐?" 그래서 거기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사도행전 8장 30절, 31절, 35절입니다.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습니다.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 맡은 관리 내시가 깜짝 놀랐습니다.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두 사람이 물에 내려가 세례를 주고 세례를 받고 구원 얻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역사 아닙니까?

우리는 이것을 실력이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실력. 우리 각자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희망을 붙잡는 것이 우리의 사명일 텐데,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희망을 희망으로, 사명으로 만들어가고 살고 있는가? 나는 어느 글에서부터 시작해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진리를 전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지금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고,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그 일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됩니다. 우리 모두가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를 만나든 그가 원하면 진리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와로서의 사명, 영적인 어미, 영적인 아비로서의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1-3. 가정의 영적 사명

가정은 어떻습니까? 가정에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자녀를 낳으면 그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돌보고 키워서 학교 보내고 장성하게 성장시켜 시집장가 다 보냅니다. 그런데 그건 세상에 믿지 않는 가정 부모도 다 하는 일입니다. 믿음의 가정은 달라야 되지 않습니까? 믿음의 가정은 우리 자녀들에게 말씀을 먹여야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야 됩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학교 어린아이들이 교회에 오지 못하고 온라인으로 예배 드리는 때가 있습니다. 가정의 부모가 일주일에 20분 남짓 되는 온라인 예배 틀어 주는 것으로 부모의 영적 사명을 끝이라고 한다면 부모로서의 직무유기입니다. 자녀들을 앉혀놓고 예배 드리자 하고 말씀을 먹이고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제대로 세워 놓아야 됩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강력한 믿음 위에 우리 자녀들을 세워 놓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께 무슨 칭찬을 받겠습니까?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부모가 아니라 영적인 어미, 모든 산 자의 어미, 모든 산 자의 아비로서의 역할을 생명을 걸고 감당해야 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는 희망을 보시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을 믿음 안에서 잘 감당해 내시는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죄 용서의 은혜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하나님은 아주 만족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내가 너희들을 완전히 멸절시키지 않겠다는 사인을 주셨는데 아담과 하와가 그 사인을 캐치하고 알아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기뻐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그 선물이 가죽옷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혔다는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2-1. 용서의 근원

첫 번째 의미는 죄는 용서받을 분에게 용서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하나님과 같아지기는커녕 눈이 밝아져서 그들의 몸이 벌거벗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급한 대로 무화과나무 잎을 따다 엮어서 치마를 만들었습니다.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그런데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파리가 마르고 말며 떨어져 버렸습니다. 수치가 다시 드러났습니다. 다시 무화과나무 이파리를 따다가 또 치마를 만듭니다. 그런데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수십 번 그렇게 해야 되는 일을 반복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스스로 지은 죄를 스스로 가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내가 지은 죄를 내가 용서할 수 있습니까? 내가 지은 죄를 내가 용서하고 내가 사면받을 수 있습니까? 내가 지은 죄는 나를 용서할 수 있는 분에게 가서 용서를 받아야 됩니다. 그래야 온전한 죄의 가려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용서받아야 진정한 죄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용서할 수 있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오셨습니다. 가죽옷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짐승 한 마리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짐승이 죽어 그 피의 대가로 사람의 부끄러움을 가렸습니다. 하나님은 짐승을 잡으면서 결심하셨습니다. 지금은 비록 짐승을 잡아 너희들의 부끄러움을 가리나 시간이 한참 지나면 내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낼 텐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가 너희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온전히 가려줄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깊고 깊은 속뜻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우린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굉장히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에덴에서 지었던 그 무지무지한 무서운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덮어서 가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2-2. 허물을 덮어줌

이제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가죽옷의 두 번째 의미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죄 가려짐을 받은 자로 우리는 타인의 죄를 들추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린 일만 달란트 빚졌다가 탕감 받은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들추어 얘기하기를 아주 좋아합니다. 모이기만 하면 뒷담화 하는 걸 즐겨 합니다. 저 사람은 잘못했고, 과거에 이랬고, 이런 행동을 했다고 사람들과 그에 대한 뒤의 이야기를 나누는 걸 굉장히 좋아합니다. 죄악된 본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가려 주시고 덮어 주셨다면 우리도 타인의 죄를 들추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노아와 그의 아들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홍수 이후에 노아가 포도 농사를 지었습니다. 포도농사를 짓고 포도주를 마시고 몸에 열이 나서 하루는 장막 안에 벌거벗고 누웠습니다. 잠들어 버렸습니다. 둘째 아들 함이 아버지가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나와서 형제들에게 다 발치고 알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던 첫째 셈과 막내 야벳은 옷을 가져다가 뒷걸음질 쳐서 들어가서 아버지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덮어주고 가려주고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렇게 악한 세상에서 우리가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허물을 가리고 죄를 덮어주는 따뜻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그들에게 희망을 찾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셨구나. 하나님이 나 대신에 짐승을 잡아서 죽이고 가죽옷을 만들어서 나를 입혀 주시는 것은 나에게 사랑을 표현하시는구나. 그들은 가슴 깊이 올라오는 죄 가려줌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도 그런 은혜를 입은 자로서 이렇게 악한 세상에서 희망을 찾고 발견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허물과 죄에 대한 책망을 덮어 주고 눈감아 주는 것이 필요할 줄로 믿습니다. 그 놀라운 회복의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먹고 살게 하심

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 말씀의 속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땅을 갈게 하신 목적과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먹고 살게 하시니라"라는 말이 숨어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죄 짓기 전에는 경작하되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백을 심으면 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 짓고 난 이후에 하나님은 아담을 심판하시면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서 너를 괴롭게 할 것이다. 평생토록 수고하여야 땅의 소산을 먹을 것이고, 이마에 땀이 흘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있으나 먹고 살게 하는 것을 하나님은 막지 않으셨습니다. 땀 흘려 수고하며 땅을 갈게 하시고 그들이 먹고 마시고 살게끔 하나님은 그 길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 오늘 우리 인생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희망이고 축복입니다.

돌아보면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 시절 경제가 언제 환하게 밝고 개인 적이 있습니까? IMF 외환위기가 그랬고, 그 이후에 수많은 크고 작은 국내 정세가 그랬고, 때로는 경제적 어려움과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끝모를 길고 긴 터널을 통과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상황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굶기지 않으시고, 지금도 살게 하시고, 지금까지 살아가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은총입니다. 땅을 갈게 하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생업을 주시고 일터를 주시고, 우리 자녀들 먹고 살게 하시고 그들을 공부시켜서 지금까지 길러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아무것도 없이 빈 들로 나왔습니다. 광야 40년 여정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셨습니다. 그들을 먹이고 그들을 입히고 그들을 돌보고 살게 하셨습니다. 에덴의 축복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부어 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것보다 더 가지고 싶고, 이것보다 더 누리고 싶고, 더 가지고 더 누리는 탐욕에 사로잡혀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땅을 갈게 하심으로 이만큼 먹고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면 하나님은 앞으로 우리 인생을 더 크게 길러 주시고 도우시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도 희망의 끈을 우리에게 항상 보여 주시는 분입니다. 부디 우리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생명이 하나님의 희망이었고, 죄 용서가 하나님의 희망이었고, 땅을 갈아 먹고 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희망이었습니다. 희망이 우리 인생에 가득 차고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에덴에서 쫓겨 나가는 아담과 하와에게도 하나님은 희망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한 번 실패했지만 두 번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희망을 붙잡았습니다.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고 짓고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되겠다고 결단했습니다. 주여, 우리에게도 생명을 살리는 산 자의 어미, 산 자의 아비의 역할을 감당케 하여 주옵소서.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먹이고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써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생명의 말씀으로 그들을 거듭나게 하는 믿음의 백성, 믿음의 아비, 어미가 되도록 주여 우리를 축복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오늘 우리는 다 죄 용서를 받은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용서받은 자들이 어찌 이웃의 허물을 들춰내고 살겠습니까? 주여,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도 죄를 용서하고 이웃의 허물을 가려 주는 놀라운 은총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땅을 갈게 하시고 생업의 유업을 이어가게 하시는 그 하나님, 오늘도 우리 직장과 일터에서 먹고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모든 것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서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