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 예배에 실패하다 (창4:1-8)
프랑스 대혁명은 믿음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전 인류에게 큰 선물을 안겨 주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인권이나 자유 같은 개념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태어났으니 이렇게 사는 것이라 생각하며 희망 없이, 소망 없이, 흘러가는 대로 끌려가는 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 이후로 자유와 인권과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온 세상 방방곡곡에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은 인류 사회의 변곡점이 되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 혁명의 아름다운 대서사시를 자신의 탐욕으로 가득 채우고 피로 얼룩지게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로베스피에르입니다.
로베스피에르는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서른한 살이었습니다. 정치적 경험도 거의 없는 사람이었고 의회 내 소수파인 자코뱅 클럽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혁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루이 16세가 자신의 전제 군주제를 내려놓고 왕도 법에 의해 통치받겠다는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이로써 혁명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원성이 있었습니다. 루이 16세가 문서에 서명하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그를 잡아 죽여 달라고, 그리고 그에게 부역한 여러 사람들을 함께 죽여 달라고 백성들의 원성이 있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이 백성들의 원성을 자신의 정치적 성장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는 원래 법률가였고 법을 전공한 사람이라 이 혼란한 시기를 틈타 혁명재판소를 세우고 자신이 혁명재판소장의 자리를 차지해 버립니다. 그리고 백성의 편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백성들을 선동합니다. 우선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그때부터 공포 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공포 정치 기간 동안 파리에서만 약 2천 600여 건의 사형이 집행되었고 프랑스 전역에서 16,500여 건의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위대한 선물인 프랑스 혁명, 자유 평등 박애의 이 위대하고 숭고한 인류를 향한 대서사시가 한낱 인간의 탐욕으로 피로 물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며 로베스피에르는 얼마나 악한 사람이었습니까. 잔칫집에 죄를 뿌리는 사람이 어디에나 있게 마련인데 이 사람은 그 정도가 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나옵니다. 그 살인 사건은 형이 동생을 죽인, 형제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더 경악하게 하고 더 심각한 문제는 예배를 드리다가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얼마나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 우리가 피조물 된 자의 의무로, 피조물의 권리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귀한 시간이 예배임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피로 얼룩지게 한 악한 사람 가인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예배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아닌 죄를 향한 욕망의 실체가 무엇인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를 함께 묵상하고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예배의 본질
먼저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냥 쫓겨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꼭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책망하시고 심판하실 때 하셨던 말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이 소망을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고 바꾸어 주었습니다.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쫓겨나는 와중에도 하와라는 이름을 줄 만큼 그들은 생명을 붙잡고 싶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쫓겨나서 가시덤불과 엉겅퀴로 얼룩진 땅을 밟고 먹고살아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대로 우리에게 자손이 태어날 것인데 그 자손을 잘 교육하고 양육하고 말씀대로 가르치면 그들이 장차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사탄의 권세를 파괴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런 소망을 아담과 하와는 마음에 품고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기대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를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지 모르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셨고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첫째 아들 가인이 태어났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 이어서 아벨까지 이 가정에 두 명의 자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그들에게 주어진 이 생명을 어떻게 키웠을지를. 얼마나 열심히 길렀겠습니까? 먹이고 입히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대로 이들을 말씀 안에서 잘 양육해야 했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그 시대에 실패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낙원의 땅을 잃어버리고 쫓겨난 존재가 되었지만, 너희는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무엇 때문에 실패했는지 어디에 걸려 넘어졌는지를 하나하나 상세하게 알리고 가르치며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 앞에서 사는 법을 일러 주고 또 세워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 지났습니다. 3절 말씀은 "세월이 지난 후에"라고 합니다. 얼마나 세월이 지났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몇 년이 흘렀는지, 얼마나 세월이 지나서 예배 드릴 수 있게 되었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지나서 그들은 어엿한 성인이 되고 직업을 가지게 됩니다. 가인은 아버지 아담이 가지고 있었던 농사라는 직업을 물려받았고 아벨은 목축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세월이 흘렀다는 말은 이제는 그들이 부모의 품을 떠나서 독립적인 신앙 인격으로 서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가 매년 세례 입교식을 거행합니다. 유아세례는 어린 시절 스스로 하나님께 신앙 고백을 하지 못할 때 부모가 대신 신앙고백을 하고, 사랑하는 이 자녀가 스스로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돌보겠습니다 하는 결단입니다. 입교는 이제는 스스로 내가 신앙고백을 합니다, 독립된 신앙 인격으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겠습니다 하는 결단입니다. 세월이 지났다는 말은 가인과 아벨이 이제는 독립된 신앙 인격으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단독자로 서기 전까지 아담과 하와는 그들에게 예배를 드리는 방법을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는 이렇게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은 예배를 기뻐하신다고 잘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이제 이들은 직업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독립된 신앙 인격체로 단독자로 예배 드립니다. 그런데 이 예배가 이런 심각한 문제를 가져올 줄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1-1.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3절에서 5절 전반절을 보시겠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궁금해집니다. 하나님은 왜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는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고기를 좋아하신다고. 하나님께서 제물로 짐승을 태워서 드리는 제사를 좋아하시니까 하나님은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다고. 그런데 이것은 예배도 오해한 것이고 하나님도 오해한 것입니다. 레위기의 제사법을 보면 짐승을 잡아 태워 드리는 번제도 있지만 곡식을 가루로 곱게 빻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떤 직업의 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든지 그 현장을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농사 짓는 사람은 곡식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목축하는 사람은 짐승을 잡아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어떤 예물을 어떤 종류로 가지고 나오든지 그것을 문제 삼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거부하셨는가?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정답을 알려 주지 않습니까? "아벨과 그 제물은", "가인과 그 제물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제물 앞에 사람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제물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예배드리는 자의 신앙 인격이고 그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받기를 원하시지 제물을 받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의 주인이십니다. 이 세상 만물이 모두 하나님 것인데 우리가 하나님께 나오면서 양 천 마리를 가지고 나오든 양 만 마리를 가지고 나오든 그게 하나님께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 헌금 봉투에 물질을 얼마를 넣어서 가지고 오든 그것은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바라고 원하시는 것은 천하보다 귀한 나라는 존재,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것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말씀에서 아벨을 아벨의 제물보다 앞에 두고 있고 가인을 그의 제물보다 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1-2. 아벨의 믿음
아벨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면서 자신의 전 존재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그의 예물에 마음을 담았습니다.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목축을 했습니다. 경험이 없습니다. 그런데 양이 새끼를 낳았습니다. 양이 새끼를 낳을 때 그 첫 새끼를 받는 아벨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많이 떨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가 저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하나님, 이 양이 첫 새끼를 잘 낳도록 하나님이 지키시고 돌봐 주시면 제가 이 받은 첫 새끼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겠습니다. 간절하게 기도하고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이 한 번도 받아보지 않은 양의 첫 새끼를 떨리는 손으로 받았습니다. 아무런 문제 없이 첫 새끼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것이 어찌 그렇습니까?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않습니까? 양의 첫 새끼를 부모를 위해서 드릴 수도 있고 수고한 자신을 위해서 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벨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양의 첫 번째 새끼, 자신이 수고하여 농사짓고 목축한 그 첫 새끼를 하나님께 온전히 올려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믿음, 더 나은 제사, 의로운 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더 나은 제사,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그 예물에 담아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영을 받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전 존재를 받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드리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 드리지만 사람은 그 사람의 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지, 영과 진리로 나와 있는지, 아니면 몸은 나와 있는데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심지어 부부라도 상대의 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그 특별한 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아벨이 기쁨으로 드리는 경건한 예배를 하나님은 열납하신 것입니다.
가인은 거기에 실패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영과 진리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전 존재를 드리며 나와 있는지 우리의 예배를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예배의 감찰자
또 한 가지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기억하고 깨달아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감찰하시고 평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예배 드리십니까? 그리고 예배 드리고 돌아가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예배 드리고 돌아가면서 당연히 오늘 내가 드린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내가 드린 예배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십니까?
예배를 받고 받지 않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심령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에 나는 너의 예배는 받고 너의 예배는 내가 받지 않겠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는 물리치시고 아벨의 예배를 받으신 것처럼, 똑같이 예배 드려도, 똑같은 장소에서 우리가 함께 예배 드려도,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개별자로,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예배를 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 하면서 수천 번의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단 한 번도 나는 너의 예배를 받은 적이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당혹스럽겠습니까?
우리가 돌아가면서, 예배 드리고 돌아가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 수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평가자가 되어서 예배를 평가합니다. 설교자를 평가하고 기도하신 분의 기도 내용을 평가하고 찬양대를 평가하고 교회 환경을 평가하고 교회 시설을 평가합니다. 평가 항목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나는 별 몇 개를 주겠다 평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평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지금까지 왔지 않습니까?
지금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평가하신다면 나는 얼마나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를 평가받을 수 있겠는지, 과연 내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것인지, 가인의 예배처럼 나는 너의 예배를 받지 않겠다 거부하시지는 않을지, 지금껏 내가 드리는 모든 예배가 과연 하나님 앞에 얼마나 올려진 예배가 되었을지 심각하게 돌아보셔야 됩니다. 우리는 교만하게도 내가 평가하는 것은 즐기며 잘해 왔지만 내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와 아벨의 예배를 감찰하시고 살펴보시고 선택적으로 수용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는 방법입니다. 부디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모든 예배가, 우리 자신을 잘 살펴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아름다운 예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1. 가인의 분노
하나님께서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았는데 가인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분하다 하는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라(חָרָה)라는 단어를 씁니다. 맹렬하게 분노가 올라오다라는 뜻입니다. 안색이 변했다는 말은 나팔(נָפַל)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얼굴이 땅으로 떨어지다라는 뜻입니다. 분노가 치밀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지 않습니까? 사람을 직접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이 분노를 해소할 곳을 찾습니다. 그런 모습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예배를 거절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예배를 피드백 하셨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돌아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 예배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서부터 걸려 넘어졌는지, 준비하는 과정이 잘못되었는지, 예물이 잘못되었는지, 마음이 하나님 앞에 제대로 드려지지 못했는지 자기를 돌아보고 발견했다면 하나님께 회개해야 됩니다. 그래도 발견하지 못하겠다면 하나님께 여쭈어 봐야 됩니다. 하나님, 제 예배가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무엇 때문에 제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까? 알려 주시면 고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정상입니다.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로부터 문제를 발견해야 문제 해결이 쉽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합니다. 하나님께 분노를 품습니다. 그 분노를 해소할 대상을 찾습니다. 동생 아벨이 분노 해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가인은 예배의 기본을 온전히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레위기에서 말씀하신 번제나 소제의 기본이 무엇입니까? 완전히 태워지는 것이고 완전히 가는 것입니다. 번제를 드릴 때 짐승이 다 태워져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린 번제가 됩니다. 타다가 말면 그 예배는 무효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되어서 예배 드리고 나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져야 됩니다. 욕심도 사라지고 정욕도 사라지고 미움도 사라지고 모든 것이 다 사라져야 되는데, 가인은 자신의 욕심과 인간성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원망, 형제를 미워하는 그 원망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예배를 거꾸로 드린 것입니다.
2-2. 죄가 문 앞에
하나님은 가인 마음속에 있는 살인 충동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6절과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예배를 피드백 해 주신 것처럼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이 충동을 사랑의 마음으로 책망하십니다. 어찌하여 안색이 변하며 어찌하여 분노를 하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책망하십니다. 너무나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신 두 가지 말씀이 가인에게 중요한 지침이 되고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죄를 마치 인격처럼 표현하셨습니다. 사람처럼, 동물처럼 죄가 어디 앞에 엎드려 있다는 뜻입니까? 우리 마음 문 앞에 엎드려 있다는 뜻입니다. 마음 문 앞에 딱 엎드려서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마음이 조금 열리면 즉각 들어가기 위해서 죄는 우리의 마음이 열리면 발을 먼저 집어넣습니다. 어깨를 밀어 넣습니다. 그리고 몸이 다 들어옵니다. 그리고 죄가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고 우리에게 주인 노릇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때부터 죄의 종노릇 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호시탐탐 죄가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악한 사탄 마귀가 지금도 우리의 마음 문 앞에서 우리 마음이 죄를 향하여 열리기를 기대하고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그 악한 사탄의 권세가 그 옛날 가인의 마음 앞에만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 우리 마음 문 앞에도 엎드려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되겠습니까?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께서도 우리 마음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문을 열어 달라고, 문을 열어 주기만 하면 내가 들어가서 너와 더불어 먹고 너는 나와 더불어 먹고 마실 것이라고. 문을 활짝 열어 달라고. 그럼 우리 마음 문 앞에는 죄도 엎드려 있고 예수님도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누구를 향하여 문을 열어야 됩니까? 누구에게 문을 열어 줘야 우리 인생의 문제가 해결됩니까? 명확한 사실 아닙니까? 예수님을 향하여 문을 열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향하여 문을 열고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 문에 들어와 계셔서 우리 마음속에 좌정하셔서 악한 사탄의 권세를 파괴하시고 그들이 더 이상 우리의 마음을 노리지 못하도록 그렇게 우리가 마음 문을 열어야 됩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지금도 우리 앞에는 선한 선택과 악한 선택의 기로가 놓여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것은 우리가 선택해야 될 문제입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선택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선택이 오늘의 나의 모습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후회되는 선택, 죄가 엎드려 있는데 죄와 손잡고 죄를 우리 마음 문에 팔짝 들인 선택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과거에는 그렇게 선택했다 하더라도 이제는 두 번 다시 그 선택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을 활짝 연 선택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아름다운 선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3. 죄를 다스릴 능력
둘째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신 것은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라는 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미 네 속에는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죄가 너의 문 앞에 엎드려 있지만 너는 더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보라, 그러면 너는 얼마든지 이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형제를 살인하고 싶은 살인 충동을 이길 능력이 네게 있는데 왜 사용하지 않느냐라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인을 어떻게 길렀습니까? 두 번 다시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 산 자의 어머니, 생명의 어머니로 하와가 길러 냈고 아담이 길렀을 것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그 피눈물 나는 고통을 자식에게는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이미 가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얼마나 많은 성경을 읽고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듣고 얼마나 많이 성경공부 했습니까? 우리 속에는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이 가득 차 있습니다.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그것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탄이 우리 마음 앞에 엎드려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여 쫓아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셔야 됩니다. 이미 우리에게는 그 능력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3. 예배자의 결단
이제 하나님은 가인에게 하실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택은 가인의 몫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가인은 불행한 선택을 하고 맙니다. 8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문을 열지 않고 엎드려 있는 죄를 향하여 문을 열고 자기 마음에 받아들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살인은 보통 살인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형제를 살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인을 악한 자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예배 드린 후에 돌로 형제를 죽일 수가 있는가, 형제를 살인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런 일은 오늘도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형제를 미워한 일이, 교회에서 정말 좋은 일을 하다가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교회 공동체 곳곳의 자리마다 봉사의 자리가 있습니다. 봉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봉사하다가 사람을 미워합니다. 나 저 사람 때문에 이 자리에 서기 싫다고, 나는 저 사람 때문에 이 교회 다니기 싫다고, 저 사람 내 눈에 두 번 다시 뜨면 그 이후에 두 번 다시 나오지 않겠다고. 찬양대 봉사하다가 형제를 미워하고, 교회학교 봉사하다가 사람을 미워하고, 예배를 드리다가 그 사람이 보이면 뒤로 돌아서 나가 버리는 일이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교회의 중직을 세우는 일, 아름다운 일입니다. 교회 공동체 일꾼을 세우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그 일을 하다가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하는 행위입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봉사를 하다가, 예배를 드리다가, 형제를 섬기고 찬양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등을 하다가 사람을 미워하는 일을 수시로 저지르고, 우리 마음속에 살인의 충동이 일어나는 것, 형제를 미워해서 마음으로 살인하는 일을 지금도 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본질이 중요합니다. 본질, 예배라는 본질을 가인이 지켰다면 형제를 미워하는 일을 멈출 수 있었을 것입니다. 봉사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사람이 나에게 힘들게 하는 것, 왜 거기에 우리가 마음을 빼앗깁니까? 가장 중요한 것,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것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배의 본질을 깨달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평가하고 살피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매일같이 하나님 앞에 진실한 예배자로, 성실하게 제대로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