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 /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4:9-12)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4:9-12)

조지 뮬러(George Müller)는 1805년부터 1898년까지 93년을 살아간 사람입니다. 그는 독일 태생이었고, 세무공무원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어린 시절이 굉장히 부유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린 시절은 유독 탈선과 방황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는 술을 끊지 못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에도 길거리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임종조차 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랬던 그가 우여곡절 끝에 할레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고, 대학에서 우연한 기회에 찾아간 학생들의 기도 모임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그 이후에 완전히 달라진 삶을 친구들에게 보여주어서 사람들은 저마다 이 친구가 조지 뮬러가 맞느냐고 깜짝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단하고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서 유대인 선교 사역에 힘썼습니다. 그가 기도하고 꿈꿨던 대로 그는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되어서 런던을 떠나 브리스톨이라는 도시에 정착하는데, 그곳에서 그는 성도 여섯 명이 남은 교회를 목회하기 시작합니다. 성도가 여섯 명밖에 없었는데, 그러나 그는 마치 만 명의 교인을 섬기듯 뜨겁고 열정적으로 목회했습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전도하며 교회는 그의 기도와 열정,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불일 듯이 부흥하고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성장하여 사역이 본궤도에 오르고 있을 때, 그때 브리스톨에 전염병이 휩쓸어 닥쳤습니다. 사람들은 속절없이 죽어 나갔고, 부모를 잃고 갈 곳 없어진 아이들을 교회가 책임져야 된다는 사명감으로 그는 서른이 넘은 나이부터 시작해서 일흔이 될 때까지 약 사십여 년 동안 고아원 사역에 전념합니다. 사십 년 동안 고아원을 운영하면서 그는 돈 한 푼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아들을 키우고 양육할 재정으로 그 당시 영국 돈 150만 파운드를 사십 년 동안 지속적으로 부어 주셨습니다. 이 돈은 오늘날 우리 돈으로 환산해 보면 약 1,300억 원 이상이나 되는 거대한 거금입니다.

그는 사십 년 동안 약 만여 명 이상의 고아들을 길러 내었고, 기독교 학교를 일곱 개나 세웠습니다. 그 학교에서만 이천여 명이 넘는 기독교 인재가 배출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150여 명이 넘는 선교사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성도 여섯 명밖에 없었던 교회에 부임했고, 그는 목양하느라 수중에 돈 한 푼 없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엄청난 축복을 부어 주셨을까요? 그가 사심 없이 일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을 믿음으로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웃 사랑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해야 되는 일이 이웃 사랑임을 깨닫고 그 일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조지 뮬러의 숫자에 열광합니다. 5만 번 이상 기도 응답을 받은 사람, 1,300억 원이라는 돈, 만여 명이라는 고아들의 숫자, 일곱 개라는 학교의 수, 이천여 명이 넘는 인재들의 숫자, 150여 명이 넘는 파송한 선교사들의 숫자. 그런데 그 숫자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더한 축복도 부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심을 다해서 내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열정을 다하면, 하나님은 그 이상 혹은 그보다 더 넘치는 축복까지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는 오늘 읽은 말씀을 통해서 마땅히 돌보고 섬겨야 될 대상이 누구인가를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그 일을 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그 일을 하지 않았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크나큰 하나님의 심판도 함께 살펴볼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과연 우리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깊이 묵상하고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가인은 예배 드린 후에 동생을 살해합니다. 예배 드린 후에 어떻게 동생을 죽일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충격적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살인의 충동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가인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를 책망하시고 또 그에게 용기도 주셨습니다. 너 안에는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듣지 않습니다. 사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동생을 살해한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동생을 죽인 가인을 찾아오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하신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 줍니다.

1-1. 다시 주어진 기회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은 가인에게 다시 한번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실 때 바로 심판하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어떤 흉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참 좋은 분이십니다. 가인의 아버지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의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때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찾아오셔서 아담을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다시 한번 나와서 그 앞에 물으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참 좋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 짓고 하나님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할 때, 그때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즉결 처분을 내리지 않습니다. 찾아오십니다. 각종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을 통해서 회개하게 하시고, 환경을 통해서 들려주시고, 성경 말씀을 읽을 때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의 찔림을 주십니다. 그때 돌아와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노하심을 더디 하시는 하나님의 이 귀한 성품을 우리는 기만합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아 주시니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성품을 역이용해서 그 기간 동안 끊임없이 죄를 짓습니다. 기다려 주시겠지, 어제도 괜찮았는데 오늘도 괜찮을 거야, 이렇게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니까 내일도 또 짓자.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기만합니다.

1-2. 기다림에는 끝이 있다

그런데 기억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기다림과 노하심을 더디 하시는 성품은 반드시 끝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심판의 사례들이 있습니다. 그중에 두 가지만 한번 떠올려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악이 관영한 도시가 되었다는 것을 아시고 그 성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이 성을 한번만 굽어 살펴 달라고, 이 성에 의인 오십 명이 있으면 심판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하겠다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하나님과 기도하며 씨름해 나갑니다. 사십오 명, 사십 명, 삼십 명, 이십 명, 십 명까지. 하나님은 그 기간 동안 심판을 유예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기다려 주시다가 결국은 그 성에 의인 열 명이 없음으로 인하여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비를 내려서 그 성을 결국은 심판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고 기회를 주셨지만 돌이키지 않았을 때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방인들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즉결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앗수르를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두 번이나 주셨습니다. 첫 번째 기회는 요나를 통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보내셨습니다. 기원전 8세기경입니다. 요나가 가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이 성이 무너질 것이다. 왕으로부터 시작해서 백성들까지 모두가 요나가 전하는 하나님의 심판 소식을 듣고 다 통회하고 자복했습니다. 옷을 찢고 재 위에 앉아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심판을 유예하시고 돌이키셨습니다.

그런데 채 백 년이 되지 않아 앗수르는 다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는 기원전 7세기의 선지자 나훔을 보내십니다. 하나님은 나훔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훔서 1장 3절입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는 이시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이 말씀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잘 보시면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신다 했는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나훔을 통해서 앗수르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나는 노하기를 더디 한다, 백 년 동안 너희를 기다려 주었다, 그런데 또 이렇게 죄 짓고 다시 악을 행하면 나는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고 심판할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앗수르는 나훔의 이런 경고를 곧이 듣지 않습니다. 결국 앗수르는 기원전 612년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처참하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우리 백성들은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기회가 있을 때 붙잡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고 돌아올 시간을 유예해 주시고 여러 가지 상황과 방법으로 깨닫게 하고 알려 주실 때, 그때 지혜로운 자는 돌이켜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는 심각한 지경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2. 돌봄의 책임과 의무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번째 의미입니다. 이 말씀의 두 번째 의미는 마땅히 사랑하고 아껴야 될 대상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1. 샤마르의 의미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실 때 "네 아우 아벨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네 아우 아벨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너의 아우가 바로 네가 돌보고 책임져야 될 대상이라는 것을 한 번 더 명확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가인에게 아벨은 어떤 존재입니까? 동생 아닙니까? 부모님이 부재하면,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시면 동생을 형이 돌봐 줘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돌보지 않고 돌로 쳐서 죽이는 이런 어마어마하게 큰 죄를 저지른 가인에게 하나님은 그렇게 질문하신 것입니다. 너는 네가 책임지고 돌보아야 할 대상을 오히려 죽였으니 이 죄가 크도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마땅히 돌봐야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마땅히 돌봐야 될 대상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이 질문을 듣고 가인은 이렇게 뻔뻔하게 대답합니다. 9절 하반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여기에는 아주 심각한 가인의 죄성이 드러나 있습니다.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여기서 '지키다'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샤마르(שָׁמַר)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 단어의 뜻은 '사랑과 애정으로 보살피고 돌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한 것으로 보아서 가인은 당연히 동생을 샤마르 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동생을 샤마르, 사랑과 애정으로 지키고 돌봐야 된다는 것을 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범죄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서 당연히 이 동생을 내가 샤마르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하지 않는 그의 이 악함을 우리는 어떻게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에게 샤마르 해야 될 대상이 누구입니까? 마땅히 지키고 마땅히 돌봐야 될 대상이 누가 있습니까? 당연히 우리 자녀, 사랑하는 가족, 섬기는 부모님들, 일가친지들, 나와 혈연관계 있는 사람들이 일차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우리가 지키고 돌보고 사랑과 애정으로 섬기고 계십니까? 샤마르 하고 계십니까?

그런데 세상은 이렇게 험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마땅히 지키고 돌봐야 할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학대하고 방임하고 유기하고, 심지어 그들을 죽여 생명을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자녀가 부모를.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자녀, 우리의 부모님, 우리가 섬기고 마땅히 샤마르 해야 될 대상을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가인처럼 알고도 행하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서운 죄이기 때문입니다.

2-2. 돌봄의 확장

또 한 가지 우리가 샤마르 해야 될 대상을 확장시켜 나가야 됩니다. 과연 우리가 지키고 돌봐야 할 대상이 우리 혈연관계밖에 없습니까? 사랑하는 자녀, 가족, 일가친지, 부모님밖에 없다는 말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14장 29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입니까? 내 성중에 거하는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명령문 아닙니까?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기억해야 됩니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한 가지는 '배부르게 하라'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됩니다. 대충 먹다 남은 것 던져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넉넉히 먹고 배부르게 먹고 잘 되서 빠지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쓰고 남은 것 던져 주는 것, 그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요, 그리고 선대하고 최선을 다해서 섬기고 배부르게 해야 합니다.

조지 뮬러는 고아들을 돌보고 고아원을 세우고 그들을 위해서 사역하는 이 사십 년의 기간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붙잡았습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라면 그 힘들고 고생스러운 일을 왜 했겠습니까? 자신의 수중에 돈 한 푼 없습니다. 그런데 매일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 고아들을 먹일 밥이 없습니다, 먹일 빵이 없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섬기고 어떻게 돌봐야 됩니까?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들을 가르칠 교재가 없고 선생님이 없습니다, 선생님 봉급을 주지 못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크게 은혜 주시고 기름 부어 주시고 물질의 필요를 채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에 그 명령을 마음에 새기고 성실하게 일하는 그에게 하나님은 그 일을 뒷바라지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의무와 책임이 어디까지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마땅히 샤마르 해야 될 사람은 일가친지와 가족과 자녀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약자들에게까지, 고아와 과부들에게까지, 오늘 양산 시역의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과 일터와 우리 사회 곳곳에 소외된 자들, 그들에게까지 우리의 수고와 손길이 넓혀져 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책임이 거기까지여야 합니다.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되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2-3.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

이렇게 하는 자를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잠언 19장 17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이 표현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라고.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돈을 빌려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와 사회적 약자들, 어려운 자들을 돌보고, 하나님은 그들을 책임져야 될 의무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을 우리에게 위탁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일을 하면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빚진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은 그 빚을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 일생에 필요한 간절한 기도의 제목에 하나님은 응답하시고 기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우리 자녀의 자손들에게, 우리 일터와 삶의 현장에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로 함께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빚 갚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땅히 섬겨야 될 때에 섬기고, 마땅히 돌보고 마땅히 해야 될 대상들에 대해서 최선을 다해서 섬기고,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보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총과 은혜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이 우리의 삶에 가득 차고 넘칠 것입니다.

3. 가인에게 내린 심판

하나님은 모른 척하는 가인을 향하여 이런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

3-1. 다 알고 계신 하나님

이 말을 들었을 때 가인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 않았겠습니까? 이 말씀은 내가 네가 한 일을 다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너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구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네 동생을 죽였을지 몰라도, 나는 다 듣고 있고 다 보고 있고 다 알고 있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참 어리석은 것은 자기가 행한 일을 하나님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완전 범죄가 있을 수 있습니까?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다윗 왕이 밧세바와의 부정을 숨기기 위해서 그 남편 우리아를 전쟁의 최전선에 내세워서 적군을 시켜 죽입니다. 완전 범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죽은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맞이합니다. 백성들은 손뼉 치고 칭송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의 행위를 악하게 보셨습니다. 나단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그가 잘못한 일을 백성들 앞에서, 대신들 앞에서 낱낱이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고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결단코 숨길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3-2. 땅의 저주

이제 하나님은 본격적으로 가인을 심판하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하나님이 그의 죄를 심판하시는데, 그는 이미 두 번의 기회를 걷어찼습니다. 살인하기 전에 살인의 충동이 일어날 때 하나님은 그에게 찾아와서 그를 책망하시고 달래셨습니다. 그때 한 번 걷어차고, 살인한 이후에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찾아오셨을 때 그때 다시 모른 척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시는데 땅에 대한 무서운 심판을 주셨습니다. 그는 땅을 밭 갈아서 먹고사는 농사꾼입니다. 그런데 땅이 그에게 저주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우리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셔야 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두 가지 심판을 구체적으로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무서운 심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농사꾼 아닙니까? 그런데 땅을 갈고 밭을 갈고 열심히 일해도 땅이 다시는 너에게 효력을 내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그에게 사망 선고나 다름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담은 죄짓기 전 에덴에서 농사 짓는 대로, 경작하는 대로, 수고한 것 그대로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 범죄 이후에 하나님은 그에게 심판하셨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비록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서 경작하고 최선을 다해서 일하면 이마에 땀 흘리며 먹고살 수 있게는 하나님이 그를 도우시고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마땅히 돌봐야 될 대상을 돌보지 않는 그에게, 마땅히 섬겨야 될 대상인 동생을 죽인 그에게, 하나님은 이제 어느 땅을 갈아도 밭이 더 이상 네게 효력을 내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인 사망 선고를 하나님은 그에게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그가 먹고살게는 해 주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태어난 사람을 살해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제는 너는 이 땅에서 더 이상 살아갈 가치가, 의미가 없는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 돌이키지 않는 자, 알고도 행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은 이렇게 엄하게 심판하셨습니다.

3-3. 땅을 차지하는 자

우리는 오늘 여기서 반대 의미를 다시 한번 살펴봐야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는 자는 누구인가, 이 땅에서 축복하고 이 땅에서 농사 지어서 백배의 축복을 받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분은 누구인가, 그럼 우리는 어떻게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야 하는가.

시편 37편 11절과 마태복음 5장 5절의 말씀이 거의 동일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시편 37편은 다윗이 지은 시이고, 마태복음 5장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 가운데 세 번째 복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의미 아닙니까?

여기서 말씀하는 온유의 개념이 무엇입니까? 온유는 길들여진 야생동물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따라 길들여진 사람, 그런 사람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지 뮬러는 돈 한 푼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아 사업의 영역은 날이 갈수록 확대되었습니다. 무일푼으로 시작했는데, 그가 온유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그들을 먹이고 그들을 돕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지경을 넓히고 또 넓히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복받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면 이 땅에서도, 우리 자손들에게도 하나님은 땅을 차지하는 놀라운 축복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형제를 미워하고 그를 내쫓고 자기 혼자 승자독식의 세계에 빠져 살려고 하는 자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밭을 갈아도 땅을 갈아도 앞으로 영원히 땅이 네게 효력을 내지 않을 것이다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비참한 저주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4. 유리하는 자의 비참함

두 번째 하나님이 가인에게 주신 심판은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농사를 짓느라 씨를 뿌리고 땅을 밭 갈고 열심히 농사지어도 땅이 효력을 내지 않으면 정착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등을 쳐서 먹고살 수밖에 없는 천하의 부랑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유리 방황하는 자, 유리하는 자를 생각하면 여러분은 어떤 말씀이 떠오르십니까? 시편 1편이 떠올라야 됩니다.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자입니까?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고 했습니다. 좋은 나무는 뿌리가 깊게 내려가는 나무입니다. 땅이 나무를 받아주고 용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짜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땅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우리가 살아가는 지경에서 뿌리 깊이 내리고 곧게 솟아올라서 많은 열매 맺으면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악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했습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유리 방황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순간은 자유로워 보입니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세상을 유람하기 때문에 한순간은 행복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가인 같은 사람의 인생은 열매 없는 불행한 삶을 살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가인 같은 인생을 택하지 마시고, 그런 인생의 길을 걸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실 때, 그때 기회를 붙잡고 돌이켜야 됩니다. 마땅히 샤마르 해야 될 때에 애정과 사랑으로 섬기고 돌봐야 될 대상을 가족뿐만 아니라 사회적 영역으로 확대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붙들고 깨닫고 기억하며, 부디 가인의 길을 걷지 않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