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앞을 떠나서 (창4:13-17)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은 모차르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 있는 '슈티프츠켈러 장크트 페터'라는 긴 이름을 가진 식당입니다. 이 식당은 민물 게요리와 비프스테이크로 유명하고, 성탄 시즌이 되면 아름다운 성탄 장식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803년에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가 방문했다고 전해집니다. 첫 번째 기록이 803년이니 아마 이보다 훨씬 이전에 이 식당은 개업했을 것이고,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803년 우리나라는 통일신라 시대였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1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 식당은 면면히 이어져 왔고,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가까운 나라 일본에 가면 교토에 찹쌀떡 가게가 있는데, '이치와'라고 불리는 가게입니다. 이 가게는 1022년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 주인이 스물다섯 번이나 바뀌어 25대 주인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딱 천 년 된 가게입니다. 우리나라는 유럽이나 일본처럼 천 년 이상 된 식당이나 가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은 1904년에 서울 종로에서 문을 연 '이문설렁탕'이라는 음식점입니다. 이 가게는 아주 유명해서 초대 부통령인 이시영 박사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 선생님도 자주 이용했던 곳입니다.
가게가 백 년을 넘어서, 천 년을 넘어서 이렇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맛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맛이 변하면 사람들이 발걸음을 끊어 버릴 것입니다. 맛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변하지 않아서 이런 가게가 지금까지 살아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맛으로만 유지되기는 어렵습니다. 주인에게 뿌리 깊은 운영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 가게를, 이 식당을 운영할지 뿌리 깊은 철학이 있어야 흔들리는 세파에, 변화무쌍한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 더 붙이면,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때로는 유연하게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열린 마음도 아주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서 운영하는 식당이나 가게가 이렇게 한 곳에 오래도록 뿌리박고 백 년 혹은 천 년 이상 운영되고 있는데,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진실되게 우리의 믿음을 간직하고 유지하고 있습니까? 때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상황과 자신이 처한 형편에 따라서 하나님 앞을 떠나기도 하고, 다시 오기도 하며, 이런 일이 수없이 많이 반복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올바르지 않고, 함께 믿음 생활하는 믿음의 백성들에게도 덕을 세우는 모습이 결코 아닐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면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난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 앞을 떠난 가인이 어떤 벌을 받았는지, 하나님 앞을 떠난 가인의 마지막 비참한 종말이 어떠한지 이 모습을 살펴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해야 할 이유를 함께 깨닫고 은혜받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가인의 네 가지 항변
가인은 살인 충동을 느낄 때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동생을 살인한 이후에도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두 번이나 기회를 주셨습니다.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의 회개 요구를 철저하게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를 심판하셨는데, 하나님의 심판은 두 가지입니다. 땅이 더 이상 효력을 내지 않을 것이다. 또한 너는 이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심판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심판을 가인은 어떻게 수용하는지가 문제입니다. 어떻게 수용하고 있을까요? 13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가인은 하나님께 받은 심판을 자신의 죄벌로 수용하기가 너무 무겁고 어렵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적반하장 아닙니까? 그는 살인자입니다. 동생을 죽인 사람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찾아와서 회개를 요구하셨는데, 그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심판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그 죄벌을 자기가 지기엔 너무 무겁다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가인은 조목조목 하나님의 죄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는 것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1-1. 즉각적인 심판
1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첫 번째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이 지면에서 쫓아내셨기 때문에 나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서 볼 단어는 '오늘'이라는 말입니다. 가인은 이 '오늘'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나 즉각적입니다. 하나님, 나에게 어떻게 이렇게 즉각적으로 심판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서 서운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서도 수용하기 어려운 가인의 항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전에 그에게 기회를 여러 번 주시지 않았습니까? 기다리셨지 않습니까?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의 회개 요구는 자기 편에서 철저하게 무시해 버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오늘 바로 심판하시는 것에 대해서 서운함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 마음에 합한 행동을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죄를 범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회개할 시간과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만약 그 기회를 붙잡지 않고 놓쳐 버리면, 하나님 인내의 임계점을 지나고 나면, 하나님의 심판은 오늘 당장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때 가서 후회해 봐야 무엇하겠습니까? 그때 가서 하나님을 원망해 봐야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죄짓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또한 죄를 범했더라도 하나님께서 회개를 요구하시면 그때 그 기회를 붙잡는 것이 아주 지혜로운 사람의 태도입니다.
1-2. 하나님의 얼굴
두 번째 가인이 하나님께 항변하는 이유입니다. 14절입니다.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그는 두 번째로 자신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가인은 하나님과 행복한 한때를 보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인과 아벨과 함께 예배드릴 때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거하셨습니다.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이 죄짓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 죄 짓고 나서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심판을 받고 난 이후에 그의 마음의 불안이 감지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하나님의 낯을 뵐 수 없게 되었구나, 하나님이 나를 떠나게 되었구나. 그는 그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가지고 있는 이 불안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없게 되었다는 이 불안은 누가 주는 것입니까?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에게 심판하실 때 단 두 가지만 말씀하셨습니다. 땅이 효력을 발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유리하는 자가 될 것이다. 두 가지만 말씀하셨지, 내가 앞으로 내 얼굴을 네게 보여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죄 짓고 나니까 지레짐작으로 자기 스스로, 이제 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끝나 버렸구나 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렇게 멀어지게 만듭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버렸습니다. 누가 그들에게 말한 적도 없는데 그들은 스스로 숨어 버렸습니다. 죄가 우리 속에 들어오면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멀어집니다. 그래서 죄가 이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내가 너의 얼굴을 보이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이제는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끝장났구나 하고 생각하는 불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더 살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가장 행복한 상태가 어떤 상태냐 하면, 다윗이 그의 시편에서 고백했습니다. 시편 24편 5절과 6절입니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하나님께 복을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까?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시편, 특히 다윗의 시편을 보면 하나님의 손과 하나님의 얼굴이 반대 개념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손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부귀와 권능과 영광과 능력이 있지 않습니까? 믿음이 어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모든 선물과 부귀와 영화와 힘과 능력을 나에게 그대로 주십시오. 제가 구하고 또 구하오니 하나님 손에 있는 것 제게 다 주십시오. 하나님 손에 감춰진 그 선물을 제게 주시면 좋겠습니다. 믿음이 어린 사람은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성장하고 뿌리가 깊이 내리고 나면 하나님 손에 있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있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말은 하나님 존재 자체로 내가 만족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해서 내 마음이 편하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찬양함으로써 내가 행복하고 기쁜 것,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우리 인간의 실존은 아무리 많은 복과 영화와 권세를 가져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의 존재 자체로 그제서야 우리의 영혼은 기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가인은 죄 짓고 나서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고 난 이후에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존재 불안을 느끼고 그것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1-3. 책임 전가
세 번째 그가 하나님께 항변하는 이유입니다. 14절입니다.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가인이 말한 이 말의 양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내가 지금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고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셨기 때문에 내가 주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고, 나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 성찰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인은 살인자 아닙니까? 동생을 무자비하게 죽인 사람 아닙니까? 하나님의 회개 요구를 두 번이나 걷어 찬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자기가 잘못한 것은 살피지 않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지 않습니다.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런 악한 사람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가인을 비난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자신이 하는 행위와 자신의 삶은 돌아보지 않고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을 하나님께 전가하다니 참 악한 사람이로구나. 그런데 사실 살펴보고 돌아보면 나도 다를 바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지 않습니까?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 내 인생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그런데 그 문제를 돌이켜 보며, 더 깊이 살펴보고 성찰해 보면 나 때문에 일어난 문제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상당 부분 내가 잘못 판단했기 때문에, 내 탐욕으로, 내 정욕으로, 내 교만으로 결정했기 때문에 나는 오늘 이런 어려움을 겪는 일이 상당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을 마치 욥처럼, 자신을 마치 요셉처럼 착각합니다. 욥과 요셉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들은 죄 없이 고난당한 사람들입니다. 천상에서 하나님이 사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종 욥을 보았느냐? 그처럼 의롭고 정결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사탄이 말합니다. 하나님, 울타리를 주셔서 그렇지 한번 쳐 보십시오. 분명히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생명 외에 네게 다 맡긴다. 그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는데 억울한 고난을 당합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욥과 동일한 사람입니까?
요셉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요셉을 훈련시켜서 애굽의 총리로 세우신 것은 애굽과 고대 근동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애굽에서 잘 길러 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요셉을 훈련시켰습니다. 그는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으로 가서 노예의 삶을 살았고, 죄수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죄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와 요셉을 동일하다 할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모든 문제는 나에게서 비롯된 일이 대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사십 년 이상이나 담배를 피웠는데 어찌 건강이 좋을 수 있겠습니까? 내 건강에 나쁜 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합니까? 성적으로 방종하고 방탕한 삶을 살면서 가정이 어떻게 온전하리라 기대할 수 있습니까? 나로부터 일어난 문제 아닙니까? 자세가 바르지 못하고 항상 불편하게 앉아 있으면 허리에 통증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고난이라는 말을 너무 쉽게 입에 올립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지고 당하신 그 고난을 어떻게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비교할 수 있습니까? 우리 죄 때문에 당하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고생입니다. 오늘 가인처럼 자신은 살인자요, 하나님께서 주신 회개의 기회를 두 번이나 걷어찬 사람이면서 이 모든 문제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문제라며 하나님께 책임 전가하고 있는 추악한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 살았습니다. 제 교만과 저의 정욕과 저의 탐심으로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다시는 제가 그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시면 이제 제가 새출발하고 새 인생 살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은유를 부어 주지 않겠습니까? 은혜를 허락하지 않겠습니까? 거기서부터 새롭게 출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자기를 돌아보고 성찰하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가인처럼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이제는 멈출 때가 되었습니다.
1-4. 존재의 불안
네 번째 가인이 하나님께 항변하는 이유입니다. 14절입니다.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의 마음속에 심각한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그가 동생을 살인한 그대로 누군가가 나를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이 굳이 그를 심판하시지 않아도 그의 마음속에는 죄책감과 죄의식과 자책감 때문에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고,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요셉을 애굽으로 팔아버린 형들이 어땠습니까? 그들은 요셉의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넣었다가 애굽으로 팔아버렸습니다.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생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현실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두려웠습니다. 동생이 우리에게 앙갚음할까 봐 겁이 났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을 다 해결했습니다. 사랑으로 감싸 안아 줍니다. 형들과 형들의 가족과 자녀들과 아버지까지 다 애굽으로 모셔 와서 극진히 섬겼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시 한번 불안해졌습니다. 이제는 거짓말까지 합니다. 창세기 50장 16절 17절을 보십시오.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함에 요셉이 그들이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거짓말입니다. 만약에 야곱이 정말 이렇게 말씀하려고 했다면 요셉에게 직접 했을 것입니다. 굳이 요셉 없이 형들에게만 말한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자 이제는 방패막이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형들이 요셉에게 거짓말한 것입니다. 죽은 아버지를 빙자해서.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요셉은 통한의 눈물을 흘립니다. 너무 가슴 아파 눈물을 흘립니다. 형들에게 아직까지 죄책감과 죄의식이 남아 있었던 것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큰 잘못을 저지르고 나면, 죄를 짓고 나면 사탄이 우리를 참소하지 않습니까? 너 네가 뿌린 대로 그대로 거둘 거야. 너 앞으로 살면서 반드시 너보다 더 독한 사람을 만날 거야. 앞으로 네가 하는 일이 잘되나 두고 보자. 끊임없이 사탄이 우리를 참소하고 괴롭게 하는 것을 그 마음속에 느끼고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 때문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인처럼 우리는 호소합니다. 누군가 나를 만나면 나를 죽일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 하나님이 주신 표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을 것이다. 그리고 가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이 표가 어떤 표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에게 확실한 표시를 주어서 사람들에게 보복당하는 것을 면하게 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읽으면서 하나님께 배신감을 느낍니다. 하나님, 가인은 살인자 아닙니까? 누군가가 정의의 이름으로 그를 쳐 단하면 하나님 그냥 모르시는 척하면 되지 왜 가인의 편을 들어 주십니까? 왜 살인자의 연명을 이렇게 하나님은 보호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그렇게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사랑은 가인 한 사람만을 위한 사랑이 아닙니다. 모든 공동체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왜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됩니까? 살인이 또 다른 살인을 낳으며 그 살인이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살인은 또 다른 살인을 낳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해꼬지해서 내가 기분 나쁘고 화가 나서 그 사람에게 보복하면 나도 보복을 당하고, 그 보복은 죄의 연쇄 반응의 고리를 만들어 냅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공동체 전체가 살인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은 또 다른 원수 갚음을 부르고, 보복은 또 다른 피보복을 부르는 것이 세상의 법칙 아닙니까? 누군가가 멈춰 세워야 합니다. 누군가가 거기서 끊어 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공동체가 살인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은 가인을 보호하심으로 공동체도 보호하신 것입니다.
사탄이 노리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을 사탄의 휘하에 두면 공동체 전체가 죄로 오염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은 뱀을 통해서 하와에게 접근합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곁에 있는 남편에게 주매 그도 먹었습니다. 에덴동산에 단 두 사람이 있었는데 죄가 오염되었습니다. 공동체에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면, 살인이 들어오면 살인으로 공동체 전체가 오염됩니다. 사탄은 그래서 한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 때문에 가인을 보호하시고 공동체 전체를 살인의 죄에서 지켜 내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복음 전할 때마다 주님은 살해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렸지만, 사람들은 그 날부터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서 예수님을 치려고 시도했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받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실 때 로마 병사가 채찍으로 예수님을 내리칩니다. 살이 터져 나가고 뼈가 드러났습니다.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들어옵니다. 옆구리에 창이 들어옵니다. 온몸의 피가 흐르고 물이 다 빠져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하는 것이오니 하나님 꼭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주님께서 그렇게 부탁하셨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까? 앞으로 오는 모든 원한은 이 십자가 상에서 내가 달려 죽음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고, 원수 갚는 일의 마지막이 되겠다. 이제는 내가 여기서 종지부를 찍고야 말겠다 하시는 주님의 거룩한 결단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가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가인은 동생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는 살인죄를 매일같이 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 했는데, 우리는 크고 작은 죄를 항상 범하고 살아갑니다. 그때 사탄은 우리를 참소합니다. 그러고도 네가 신앙인이냐고, 그러고도 네가 교회 중직이고 직분자냐고 사탄이 우리를 계속해서 괴롭게 합니다.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그 표가 바로 십자가 아닙니까?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야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십자가 아래서는 정죄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사탄이 어떻게 우리를 참소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십자가의 능력 안에서 해방되고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누구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십자가 한 가지만 붙들고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은, 아무도 너를 해칠 권세가 없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아무도 너를 해할 자가 없으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네게 이 표시를 주는 것이니 너는 이것 가지고 당당하게 세상 가운데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위해서도, 공동체 백성을 위해서도 표시를 주신 것입니다.
3. 여호와 앞을 떠나다
우리가 만약 가인이라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사랑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 이 용서의 은혜를 허락해 주시고 표를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무릎을 꿇어야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인의 선택이 어땠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라." 하나님 앞을 떠나 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을 떠나서 그가 한 일이 또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성을 쌓아 버렸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표로는 내가 만족할 수 없습니다. 내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지키겠습니다. 성을 쌓고 내가 내 스스로를 지키겠습니다. 하나님과 이제는 완전히 담을 쌓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을 떠나서 이제 나는 내가 지킵니다. 이제 하나님 나에게 상관하지 마십시오. 이제 하나님과 나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편 놋 땅에 성을 쌓았고, 이제는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세 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살인의 충동이 일어날 때 그를 찾아가서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살인 이후에 하나님은 그를 두 번째 찾아가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살해 위협으로 두려워하고 겁내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은 찾아가셨습니다. 표를 주셨습니다. 아무도 너를 해할 자가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세 번의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기회를 다 거절했습니다.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편 놋 땅에 가서 성을 쌓고, 하나님과 담을 쌓아 버리고 이제는 홀로 살겠다고 결정했습니다.
가인이 이렇게 나오면 하나님은 가인을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역대상 1장 1절과 누가복음 3장 38절입니다. "아담 셋 에노스."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이 족보를 잘 보셔야 합니다. 아담, 셋, 에노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낳은 아들은 가인과 아벨 아닙니까? 아벨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 나라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가인은 아이를 낳았습니다. 가인의 아들은 에녹입니다. 그런데 가인과 에녹이 하나님의 족보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아담, 그다음 셋, 그리고 에노스로 바로 이어집니다.
누가복음 3장은 상향식 족보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 그리고 아담, 그 위 하나님까지 이어집니다. 에노스 그 위는 셋, 그 위는 아담, 그 위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가인과 에녹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가인과 그의 자손들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 버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가인과 그의 자손의 이름을 지워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세 번이나 기회를 줘도, 하나님께서 또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시고, 표를 주시면서 그를 위로하셔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앞을 떠나서 하나님과 담을 쌓고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가인과 그의 자손들을 하나님은 더 이상 보유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육체를 가진 인간인지라 죄를 짓습니다. 때로는 탐욕에, 때로는 교만에, 때로는 정욕에 넘어져서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엎드리고, 하나님 어찌하든지 이 앞에서 해결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그래야 희망이 있습니다.
가인처럼 여호와 앞을 떠나서 자기 스스로 살겠다고 발버둥 치면서 담을 쌓고 성을 쌓아 버리면, 그때는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우리 이름이 지워지고 말게 될 것입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어떤 죄를 지었든지 내 앞에서 해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온유한 부르심에, 하나님의 이 자비한 부르심에 응답하시고, 여호와 앞을 결단코 떠나지 않는 믿음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