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17-26)
조지 프레더릭 와츠(George Frederic Watts)라는 사람은 영국의 미켈란젤로라고 불릴 정도로 회화와 조각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는 여왕이 수여하는 남작 작위를 두 번이나 거절할 정도로 사회적 욕망과 세속적 출세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 중에서 1886년에 그린 '희망'이라는 작품이 대표작입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어떤 여인이 지구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하프처럼 보이는 악기를 가지고 있는데, 그 악기의 이름은 리라(λύρα)입니다. 그런데 악기의 줄이 다 끊어지고 한 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한 줄 남은 악기를 최선을 다해서 연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앞을 보지 못합니다. 흰 붕대가 눈을 감고 있습니다. 여인은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이고, 남루한 옷차림입니다. 여인을 보면 도대체 이 여인에게 희망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힘겨워 보입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여인 뒤편에서 아주 희미한 별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 별빛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실 작가는 이 그림을 발표하기 전에 갓 태어난 딸아이를 잃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딸아이가 세상을 떠나고 난 이후에 절망과 낙심과 슬픔 가운데 있다가,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신 빛이 곧 자신에게 희망이 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을 통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붙잡아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그림을 그려 발표했습니다.
그림이 발표된 이후에 비평가들의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지도자들은 이 그림을 무척 사랑했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의 집무실에 그림의 복제품을 걸어두고 항상 희망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1959년에 설교를 통해서 이 그림과 작가를 소개하며,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퇴임 이후 자서전 제목을 이 그림에서 착안하여 '담대한 희망'이라고 지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악한 세상을 살고 있는데,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상과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과연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희망보다는 절망을, 소망보다는 낙심이 훨씬 더 가득한 이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읽은 하나님 말씀을 보면 인간의 추악함과 죄악과 악함이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끝자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희망이 빛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희망으로 붙잡게 하시는지 다시 한번 말씀 앞에 서서, 악한 세상 절망 가운데서도 다시 희망을 붙잡는 믿음의 백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회개 없는 새출발
가인은 하나님의 회개 요구를 걷어차고, 세 번이나 회개를 요구하셨지만 하나님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으로 갔습니다. 성을 쌓았습니다. 하나님과 철저하게 단절하고 이제는 혼자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이 짧은 한 절 속에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가인이 에덴 동쪽 놋 땅에 가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지었습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의 뜻은 '시작하다', '다시 출발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그가 아들의 이름을 '다시 시작하다', '출발하다'라는 뜻으로 지은 것은 그의 마음의 결심을 대변합니다. 그는 살인자 아닙니까? 동생을 무참하게 죽인 사람입니다. 동생을 죽이고 나서 그는 죄의식과 죄책감 가운데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이제 그는 그런 인생을 정리하고 다시는 과거 같은 생활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새출발하고 싶은 간절한 의지를 그의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지음으로써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가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지었다고 해서 새출발이 가능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시고 "그래, 너 이제 새출발하더라.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지었으니까 너는 새출발하기에 내가 축복하며 박수 쳐 주마" 하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새출발은 회개하지 않으면 결단코 불가능합니다. 회개해야 새출발할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그에게 세 번이나 회개할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회개 요구를 철저하게 거절한 그가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지었다고 해서, 그가 거주지를 바꾸었다고 해서 어떻게 새출발이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죄를 지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사탄의 꾀임에 빠져서 죄 가운데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길과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떤 발버둥을 친다 하더라도 새출발은 불가능합니다. 집을 바꾸고 차를 바꾸고 옷을 갈아입고 이름을 바꾸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산다 할지라도 새출발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다 알고 계시고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하나님 없는 곳으로 가겠다고 생각하고 에덴 동쪽 놋 땅에 가서 성을 짓고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 하고 새출발하겠다고 결단한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어떤 일이 있든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했다면 회개하고 다시 한번 새출발할 수 있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1. 이중성의 문제
동시에 이 짧은 말씀이 주는 두 번째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짓고, 그리고 성의 이름도 아들의 이름과 함께 에녹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 아들을 지극히 사랑한다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성을 쌓았는데 성의 이름을 아들의 이름과 똑같이 만들지 않았습니까? 이중성입니다. 그는 동생을 죽인 사람입니다. 아벨을 죽였습니다. 들에 있을 때 무참히 돌로 쳐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것 알면서도 자신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가슴을 찢으며 슬퍼할 일입니다. 생명을 경시한 것입니다.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이 낳은 아들은 끔찍이 아끼고 사랑합니다.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할 정도로 그는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이율배반입니다. 혐오스럽고 역겹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정치를 싫어합니다. 정치 혐오에 많은 사람들이 빠져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 정치는 효능감이 있는 것입니다. 좋은 정치는 세상을 바꾸지 않습니까? 좋은 정치인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새로운 세상을 약속해 줍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 우리가 정치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의 이중성 때문입니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국민들에게는 한없이 엄격한 그들의 이중성이 우리를 신물 나게 하고 힘겹게 만듭니다.
오늘 이 시대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 밖으로 나간 젊은이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심층 조사를 했는데, 왜 교회를 나가느냐고 그랬더니 그들이 종교지도자, 목회자들의 이중성과 중직들의 이중성에 신물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목회자가 강단에서 전하는 말씀과 그들의 삶이 다르고, 교회 중직들의 말과 그들의 행위가 다르고, 자신의 부모가 교회에서 하는 행동과 가정에서 하는 행동과 말이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역겨우며 지긋지긋한 이중성이 있는 교회 생활을 더 이상 할 수가 없다고 세상으로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 아닙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삶이 단순해야 됩니다. 겉사람과 속사람이 일치되어야 됩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알려 주신 말씀, 그 말씀을 붙잡고 세상 가운데 나가서도 그대로 살아 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제대로 된 진리의 말씀이라면, 우리가 아멘 했다면 교회 안의 삶과 교회 밖의 삶이 일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6절과 2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라"
바울이 수많은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전도했습니다. 바울이 강단에서 전한 말씀의 양이 엄청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그가 전한 말씀대로 그가 제대로 살지 못해서 그가 오히려 하나님께 버림받을까 봐 그는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이 전한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그대로 살려고 발버둥 치고 애쓰고 힘썼다고 주장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목회자는 강단에서 전한 말씀대로 살아야 되고, 교회 중직은 배운 말씀대로 실천하고 살아야 되고, 가정의 부모는 교회 안에 행동과 교회 밖의 행동과 가정에서의 행동이 일치되어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인을 욕합니다. 이중인격자라고, 이율배반이라고. 그러나 사실 우리도 가인처럼 똑같이 이중성을 가지고 역겹고 혐오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다면, 우리가 가인을 비난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주께서 주신 말씀대로 그 말씀 붙잡고 진리의 말씀 오직 한 길을 걸어가시는 하나님의 자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가인 후손의 삶
이제 성경은 가인의 후손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설명합니다. 가인이 에녹을 낳고, 에녹이 그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은 또 다른 자손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에게 포커스가 집중됩니다. 라멕입니다. 라멕의 인생은 그 사람만의 인생이 아니라 가인 후손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멕의 인생은 가인의 자손들의 삶을 그대로 잘 보여줍니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라멕은 아내를 둘을 두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정의 설계와 가정의 원리를 무참히 파괴해 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가정을 만들어 주셨는데, 하나님이 설계하신 가정의 원리는 한 남자와 한 여자입니다. 이것이 가정의 원리요 가정의 기초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돕는 배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제르 케네그도(עֵזֶר כְּנֶגְדּוֹ), 서로 동등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같은 방향을 바라봅니다. 나와 네가 같은 자리에 서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감당하는 것이 가정의 최초의 원리입니다. 서로 반대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않으면, 그 말씀대로 살아가라고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서로 격려하고 서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대해 주어야 됩니다. 반대의 길을 가면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되는 것이 부부의 사명입니다. 아담은 하와를 보고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렇게 아름다운 가정이 세워졌는데, 가인의 후손 라멕은 가정을 파괴합니다. 한 남자에 두 여자를 두었으니 비정상적인 가정이요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옛날 조선시대처럼 우리 윗선대 어른들처럼 대놓고 두 집 살림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마음이 어떻습니까? 요즘 이 세상은 조금만 눈을 돌리면 성적 유혹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가정의 창조 원리를 철저하게 지키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더없이 사랑하고, 서로가 돕는 배필의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사랑의 공동체의 역할을 가정 안에서 세워 나가면, 가정에서 성장하고 자라는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보고 이 가정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태초의 가정의 원형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몸은 함께 지내고 있으나 그러나 사실 마음은 다른 데 있는 가정이라면 자녀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가인의 후손들의 가정이 이렇게 파괴되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은 그때뿐만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 수없이 많이 파괴되고 깨어져 나가는 가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2-1. 생명 경시와 교만
또한 라멕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살인한 사람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그는 살인했습니다. 아주 사소한 이유입니다. 자신의 상처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사소한 상함 때문에 소년을 죽였습니다.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주 자랑스럽게 자랑합니다. 두 아내를 모아놓고 자신의 상처로 인해서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상함으로 인하여 소년을 죽였다고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성령의 거룩하심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라멕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것은 라멕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닙니다. 올라가고 올라가고 또 올라가 보면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가인의 후손들의 전형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가인이 예배를 드렸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으로 이주하고 하나님과 담을 쌓고 성을 쌓았습니다. 그런 예배 때문에 하나님께 마음이 상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예물은 받지 않고 아벨의 예물을 받으신 것, 그것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질투심에 동생을 죽였습니다. 예배 때문에 마음이 상한 자, 그는 더 이상 예배 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담 쌓은 그가 어떻게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예배 드리지 않으면 가정의 신앙 전승과 신앙교육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신앙교육이 일어나지 않고 예배가 없는 가정의 참담한 모습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똑똑히 목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가정의 파괴가 일어나고,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고 함부로 살해하고 손에 피를 묻히고도 전혀 민망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는 흉악한 라멕의 모습이 예배가 사라진 가정, 신앙교육이 사라진 가정에서 일어나는 비참하고 무서운 모습입니다. 오늘 이 모습이 우리 후손들의 미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누가 감히 장담하겠습니까? 이미 세상은 가정이 해체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일상적이고 상식화되어 버려, 전혀 그것을 민망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죄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넘쳐나고 있습니까? 가인의 후손들, 라멕 같은 사람들이 오늘 이 시대에 거리를 활보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멕은 하나님께 죄책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저 가인은 죄의식은 가졌는데 라멕은 하나님을 조롱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셨을 때 그 모습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죄책감이 없습니다.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미안함도 없습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까? 이들에게 어떤 희망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오늘 이 시대에 무엇이 희망입니까? 이런 악한 세상에서 말입니다.
3. 희망의 시작
그런데 하나님은 완전한 희망을 닫지 않고, 마치 희미한 별빛처럼 희망을 열어 두고 계십니다. 25절과 26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담과 하와가 가슴이 무척 아팠습니다. 한 아들은 죽고, 또 다른 아들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 앞을 떠나 버렸습니다. 그들이 에덴동산을 떠나올 때 마음에 결단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고 바꾸어 불렀습니다.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되겠다, 모든 산 자의 부모가 되겠다. 이제 우리는 자녀를 낳아서 그들을 믿음으로 양육하고 제대로 세워 가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이 되도록 길러내겠다고 결단하고 에덴동산을 나왔지 않습니까? 하지만 자식 농사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잘 되지 않습니다. 한 아들은 둘째를 죽이고 그 큰 아들은 회개를 거부하고 하나님 앞을 떠나갔습니다. 비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누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 가정에 새로운 생명을 주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마음에 결단과 결심을 담아 아들의 이름을 셋이라고 짓습니다.
셋이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정초하다', '다시 기초를 쌓다'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결단했습니다. 이제 여기서부터 이 아들을 다시 붙들고 믿음 생활을 다시 하고, 그에게서 다시 믿음의 기초를 다시 쌓아 나가야 되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그 일이 셋의 후손을 통해서 이어져 가도록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이 아들을 양육하고 세워 가야 되겠다고 결단했습니다.
3-1. 예배 공동체의 탄생
아담과 하와의 결심대로 셋은 성장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믿음으로 성장했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셋이 성장해서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로 지었기 때문입니다.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사람'이라는 뜻과 '연약함'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자녀의 이름을 연약함이라고 지었습니다.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자녀의 이름을 강함이라고 짓지 않고 연약함이라고 지었습니다. 이것은 신앙고백입니다. 철저하게 믿음 생활한 셋의 신앙고백이 아들의 이름을 통해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흙으로 빚어진 육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빚어서 하나님의 생기를 코에 불어 넣어 주시고 생령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호흡이 없으면 시간이 지나면 바스라질 수밖에 없는 흙으로 빚어진 육체이므로 우리는 연약한 존재, 그 신앙고백을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부르면서 고백한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다 에노스 같은 존재들입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예배 드리는 것 아닙니까?
에노스 때부터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예배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연약한 자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손길과 하나님의 강함과 하나님의 능력을 듣기를 원하는 자리가 바로 예배 자리입니다. 이것이 역설적이게도 희망이 되었습니다. 예배 드리지 않는 가인의 후손들, 예배를 경시하고 하나님 앞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성을 쌓고 단절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 마음대로 성을 짓고 살아도 우리는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우리는 두 아내를 두어도 그들을 양육하고 그들을 멋지게 세워 나갈 만큼 부자로 살 수 있다고, 내 몸을 상하게 하는 자는 내가 그를 죽여서 나의 강함을 나타내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문명도 발전시켰습니다. 수금과 퉁소를 불어서 문명의 이기를 발전시키고 여흥을 즐겼습니다.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들어서 문명의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배 드리지 않았습니다. 신앙교육하지 않았습니다. 그 강함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하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내가 잘할 수 있으면 왜 기도하겠습니까?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연약한 에노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와서 엎드려 "하나님 저는 이것을 할 수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해결해 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 자들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마치 와츠가 희미한 별빛을 희망으로 본 것처럼, 태초에 하나님의 빛이 우리 인생에 희망이 되려면 우리 가정은 예배드리는 가정이 되어야 됩니다. 나는 연약한 에노스에 불과하나 예배드리는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희망이 꿈틀거리고, 예배드리는 이 교회에 하나님의 희망이 살아 숨 쉬고 있고, 어린아이들이 찬양하는 것, 찬양의 입술에 하나님의 희망이 함께 녹아 있음을 오늘 우리는 기억하고, 예배를 통해서 새로운 희망을 도모하고 꿈꿔 나가는 믿음의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