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의 계보 (창5:1-32)
덴마크의 인상주의 화가 아나 앙케르에게 어머니는 언제나 기댈 수 있는 언덕이요, 힘들고 마음이 상할 때 피할 수 있는 넓은 그늘이었습니다. 앙케르는 덴마크 최북단 어촌 마을에서 육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은 여관을 운영하며 어촌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갔기에 여섯 자녀를 키우기에도 빠듯한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막내딸 앙케르에게서 미술에 대한 뛰어난 재능과 소질을 발견하게 됩니다.
앙케르가 살던 시대에는 여성이 학문을 익히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미술 공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에는 가정 형편이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앙케르의 어머니는 큰 결단을 내립니다. 사랑하는 막내딸을 멀리 프랑스 파리로 유학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너는 내가 끝까지 지지해 줄 테니 가서 네가 원하는 바를 마음껏 펼쳐보아라." 이 격려에 힘입어 앙케르는 파리에서 당대의 거장들과 함께 배우며 성장하여 마침내 덴마크를 대표하는 위대한 인상주의 화가가 되었습니다. 덴마크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손꼽히는 여성 화가로 이름을 드높이게 된 것입니다.
앙케르는 어머니 덕분에 위대한 화가가 되었음을 늘 가슴에 새기고 어머니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그 그림을 보면 앙케르의 어머니가 당시 북유럽의 평범한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기도하는 자세, 평온하면서도 강인한 인상이 인상적입니다. 앙케르의 어머니는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푸른 방의 어머니'라는 작품에는 항상 책을 읽는 어머니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아흔 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앙케르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세 가지가 뇌리에 남습니다. 기도하는 어머니, 책 읽는 어머니, 성실하신 어머니." 그녀는 가는 곳마다 이 세 단어로 어머니를 자랑하고 되뇌이곤 했습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도리입니다. 그런데 부모 세대인 우리 어르신들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까?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될 터인데, 그 이후에 우리 자녀들은 어머니를, 아버지를, 우리 부모를 어떤 단어와 이름으로 기억할 것 같습니까? 좋은 이름, 좋은 단어, 하나님의 백성다운 이름으로 기억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읽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담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부모 세대가 어떻게 살아서 자녀들에게 귀감이 되어야 하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가는 그날까지 믿음의 삶을 경주하며 달려가야 하는지를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5장 1절에서 3절 말씀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1. 아담 계보의 의미
아담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는 이 본문은 하나님의 천지창조, 그중에서도 사람의 창조, 그리고 아담이 백삼십 세에 셋을 낳은 이야기까지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1절에서 3절을 자세히 보면 빠진 것, 생략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가인과 아벨 이야기입니다.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떠올리면 부모인 아담과 하와의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사랑하는 두 아들이 피비린내 나는 비극을 빚었습니다. 아벨은 형이 던진 돌에 맞아 세상을 떠나 먼저 하나님 나라로 갔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계속되는 회개 요구에 응답하지 않고 홀로 에덴 동쪽 놋 땅으로 가서 성을 쌓았습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하고 예배 공동체를 떠나 스스로 살겠다며 떠나버린 것입니다. 부모와도 단절하고 살았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으로 간 아벨을 향한 그리움과 마음의 고통이 부모에게 얼마나 절절했겠습니까? 동생을 죽인 가인에 대한 원망과 안쓰러움이 부모에게 어찌 없었겠습니까? 그 이후로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더 살아가야 했는데, 그 길고 긴 세월 동안 두 부모는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 가슴 아픈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아담과 하와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자녀 교육이 어찌 부모 뜻대로만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는 믿음생활 잘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며 기도하고, 결단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며 자녀를 그렇게 길렀는데, 자녀는 머리가 굵어지고 성장하면서 부모의 뜻대로, 부모의 소원대로 살지 않습니다. 자기 멋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 갈 길로 살아갑니다. 가인처럼 에덴 동쪽 놋 땅에 가서 하나님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자녀도 있고, 아벨처럼 속절없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자녀도 있습니다.
1-1. 실패 속의 새 시작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는 실패한 인생입니까? 우리도 아담과 하와처럼 자녀 농사를 망치고 자녀를 잘못 길러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지 못해서 실패한 인생입니까? 많은 부모님들이 그것 때문에 염려하고 자신을 살 가치 없는 존재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입장이 되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권능과 영광이 사람에게 집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순종과 성령의 거룩하심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창조의 완벽한 걸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선악과 명령을 어깁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에덴동산에 더 이상 있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작품이 실패한 것입니까?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아담과 하와는 결단합니다. 나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 아버지가 되겠습니다. 자녀 교육을 잘 하겠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동생을 죽입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실패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동물과 식물과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동식물은 정해진 대로 움직이게 창조하셨지만, 인간에게는 완전한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로봇처럼 하나님께 무조건 예배하도록, 무조건 무릎 꿇도록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할 가능성까지 인간에게 주셨는데, 그 이유는 강요된 예배, 복종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싶은 마음까지도 억누르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가장 귀한 예배이고 가장 인격적인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여백을 두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위대한 모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사건, 그리고 가인과 아벨 사건 이후에 낙심하여 세상의 모든 운행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셨고, 여전히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셨습니다.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금까지 당신의 일을 성실하게 이어가고 계십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런 하나님의 성품과 본성을 본받아서 가인과 아벨의 참혹한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여기 나오는 세 단어가 중요합니다. 낳고, 살고, 죽었더라. 이 말은 일상생활을 영위했다는 뜻입니다. 한 아들은 세상을 떠나고 한 아들은 하나님 앞을 떠났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는 낳고 살고 죽는 삶, 일상생활을 여전히 이어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 백성들도 우리 자녀의 삶의 여하와 상관없이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믿음생활하고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가는 태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낳고 살고 죽는 삶은 아담의 아들 셋에게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6절에서 8절 말씀입니다.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아담의 아들 셋도 낳고 살고 죽는 삶을 반복합니다. 창세기 5장 아담의 계보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낳음과 살아감과 죽음입니다.
1-2. 영적 출산의 의미
그러면 여기서 낳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아담이 가인도 낳고 아벨도 낳고 셋도 낳았는데, 그 이후에 셋도 다시 에노스를 낳고, 아담의 계보에 계속해서 낳고 낳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아담의 계보만이 아니라 가인의 자손들도 역시 낳음을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장 18절 말씀입니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두사엘을 낳고 므두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하나님을 떠난 가인도 역시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 낳음이 의미하는 것은 그저 생물학적인 출생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가인에게는 예배 공동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을 떠나 그들의 자손들은 예배드리지 않고 가정의 질서를 파괴했습니다. 함부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낳습니다. 그것은 그저 생물학적인 낳음에 불과합니다. 영적인 낳음이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아담이 셋을 낳고 셋이 에노스를 낳는 낳음은 전혀 다른 낳음입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낳음이 존재했다는 뜻입니다. 예배 공동체인 가정에서는 예배를 통해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배 공동체의 낳음을 통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영적인 거듭남을 선물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담의 계보에서 일어나는 낳음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아담은 가인과 아벨에게는 실패했으나, 하나님이 새롭게 주신 선물 셋을 낳고 그를 믿음 안에서 영적으로 잘 길러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셋이 성장하고 자라 결혼하고 자녀를 낳으면서 자녀의 이름을 에노스라 부르며 연약한 존재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예배 공동체를 세워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때로는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때도 있으며 자녀 농사 잘못 지었다고 자책할 때도 있으나, 여전히 우리에게 일어나야 할 가장 중요한 영적 사건은 영적인 낳음이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낳음이 가정에서만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활발하게 일어나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영적으로 낳는 일입니다. 교회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은 영적인 낳음의 중요한 사역입니다. 목회자가 말씀을 먹이고 가르침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듭나는 것, 이것이 영적으로 낳는 일입니다. 일대일로 성경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직 거듭나지 못한 이들에게 말씀을 증거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백성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영적인 낳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혈통의 자녀가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사도 중에 영적 낳음을 가장 많이 한 사람입니다. 교회를 얼마나 많이 개척했습니까?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구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서신서에서 고백합니다. 디모데와 디도를 복음 안에서 낳은 참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성심껏 가르쳤기 때문에 그는 "내 아들"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 감옥에서도 오네시모를 가르쳤습니다. "갇힌 중에 낳은 아들"이라고 오네시모를 일컬었습니다. 바울은 혈통의 자녀는 없었지만 진실로 가장 많은 사람을 복음 안에서 낳아 믿음의 낳음을 이어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 가인과 아벨의 살인 사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가인의 계보가 아닌 아담의 계보를 통해 낳고 또 낳는 삶이 이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가정에서 자녀 문제 때문에 골몰하고 염려하며 걱정만 하지 말고, 교회 공동체에서 영적인 낳음을 계속해서 이루어가는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어서,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이 세상 어느 곳에서나 말씀을 먹이고 가르칠 수 있는 아담 계보에 속한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과의 동행
낳음이 있다면 그 다음에는 살아가는 것이 있습니다. 아담 계보의 두 번째 중요한 단어가 '살아가다'입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누구나 다 태어났으니 사는 사람이 있고, 그냥 살아가야 하니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은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삶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삶이란 어떤 인생입니까?
아담의 계보에서 한 사람을 특별히 지목하여 설명합니다. 가인의 계보에서 특정하여 설명하는 사람이 라멕이었다면, 아담 계보의 대표자는 에녹입니다.
2-1. 에녹의 삶
21절에서 23절을 보십시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은 육십오 세에 아들 므두셀라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삼백 년 동안 변함없이 한 가지 일이 있었으니,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었습니다. 동행이 무슨 뜻입니까? 함께 걷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고, 하나님과 함께 달려가고, 하나님이 멈추면 같이 멈추고, 하나님이 쉬면 함께 쉬고, 하나님이 먹으면 함께 먹고, 함께 눕고 함께 달리며 동행했습니다. 자그마치 삼백 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려면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필요합니다. 내 생각과 내 의지가 완전히 내려놓아져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오늘 달리기 싫습니다. 저는 오늘 여기서 쉬고 싶습니다. 하나님 혼자 먼저 가십시오. 저는 그 뒤를 따라가겠습니다. 오늘은 제가 먼저 가고 싶으니 하나님 좀 있다가 오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되기 쉬운데, 에녹은 삼백 년 동안 하나님이 달려가면 함께 달리고 멈추면 함께 멈추며 그 세월을 살았습니다. 쉽지 않은 인생입니다.
므두셀라가 아버지를 기억할 때 무엇으로 기억했겠습니까? "내 아버지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이것을 기억하지 않았겠습니까? 앙케르가 어머니를 기억할 때 기도와 독서와 성실을 떠올렸던 것처럼, 에녹이 하나님 나라로 간 이후에 자녀 므두셀라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하나님과의 동행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실 때 "너희는 나와 동행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그 동행을 가르치셨습니다. 사십 년 동안 하나님이 그들을 인도하실 때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앞세우셨습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과 2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구름 기둥이 가면 이스라엘 백성들도 함께 가고, 구름 기둥이 멈추면 백성들도 함께 멈춰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달려가고 싶어도 구름 기둥이 멈춰 있으면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하고, 내가 멈추고 싶어도 구름 기둥이 떠나가면 그 길을 뒤따라가야 합니다. 사십 년 동안 이것이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의 약속이요 언약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끝까지 지켜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어땠습니까? 사십 년 동안 구름 기둥, 불기둥의 약속을 끝까지 지켜냈습니까? 그러지 못했습니다.
2-2. 끝까지 동행하기
민수기 25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싯딤에 그냥 머물렀습니다. 출애굽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 그들이 싯딤에 머무른 이유는 여자들 때문입니다. 구름 기둥이 멈추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싯딤에 머물러 버렸습니다. 구름 기둥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구름 기둥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자기들 멋대로, 자기 마음대로 멈춥니다. 그리고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큰 재앙을 불러온 큰 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되 끝까지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끝까지 동행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도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열왕기상 11장 9절과 10절 말씀입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솔로몬이 어떤 왕입니까? 기브온 산당에서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며 "주여, 듣는 마음을 내게 주소서, 지혜를 내게 주소서"라고 구했던 왕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귀하게 여기셔서 이전과 이후에 어떤 사람보다 그를 지혜롭게 하시고, 그가 원치도 구하지도 않았던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와 재물까지 완벽하게 주신 왕입니다. 그런데 그가 처음에는 듣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을 듣고 백성들의 마음을 들었지만, 후에는 돌이켜 변질되었습니다.
이방 결혼을 하기 시작합니다. 바로의 딸과 결혼합니다. 그 외에 수많은 이방 종족들과 결혼하고 그들과 화친 조약을 맺습니다. 전쟁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에는 이방 천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방의 각종 신상들이 백성들의 영혼을 좀먹고 갉아먹는 이방 신들의 천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솔로몬이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 어르신들이 그 옛날 과거의 믿음생활 잘한 것,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겼는지, 내가 주의 일에 어떻게 열심히 헌신했는지를 자랑하는 것은 지금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로 가는 그날까지, 호흡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우리 믿음이 변치 않고 흐트러지지 않으며 끝까지 충성하고 끝까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 정신이 온전하여 하나님을 모른다 하지 않도록, 내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충성할 수 있도록 저를 붙들어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의 자리를 성실하게 지켜나갈 수 있도록,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도록 간절하게 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기도하는 자를 에녹처럼 붙들어 주시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며 도와주실 것입니다.
자녀를 낳았다고 그냥 길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백 번 잔소리하는 것보다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자녀들에게 가장 큰 유익이 되고, 그들의 신앙 성장과 신앙생활에 가장 큰 지침과 이정표가 된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어른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비록 지금까지 우리 인생에 오르내림이 있고, 자녀들이 내 마음대로 뜻한 바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살아가면, 우리가 떠난 이후에라도 자녀들은 부모의 인생에서 동행을 보고 다시 돌아오는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3. 부활의 영광
이제 이렇게 살아간 자의 마지막이 어떻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우리는 에녹을 이 말씀 때문에 부러워합니다. 구약에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간 두 사람, 에녹과 엘리야를 우리는 부러워하고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부활 신앙을 알려주는 지침이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에녹과 엘리야를 부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도 이미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낳는 사역을 끊임없이 감당하고 믿음생활하며 하나님과 끊임없이 동행하면, 우리는 둘째 사망에 해를 당하지 않고 우리 영혼이 하나님 보좌 앞으로 인도함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보장된 천국 백성의 지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가인의 후손처럼 생물학적으로 자녀를 낳는 것만 반복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천국을 보장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아담의 계보에 속한 자가 되어서 낳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영적인 생명을 끊임없이 잉태하고 낳는 사역에 생명 다해 충성하시고, 에녹처럼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신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보좌 앞으로 에녹처럼 인도하시며 부활을 확실하게 보장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 믿음의 백성들이 아담의 계보에 속한 자가 되어 낳고 살고 부활의 영광으로 올라가는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