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딸 (창6:1-3)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의 배경은 망망대해 위의 작은 포경선 피쿼드호입니다. 이 배를 이끄는 선장 에이허브는 남다른 사연을 지닌 사람입니다. 그는 과거에 흰머리고래에게 한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때부터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허브는 오직 흰머리고래만을 쫓아다닙니다. 그 고래를 잡아 죽이는 것이 자신의 인생 전부인 것처럼 여겼습니다. 대서양을 돌아다니고,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다시 태평양으로 전 세계 바다를 누비며 흰머리고래를 사냥합니다. 그 과정에서 죽을 뻔한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한 선원들까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지경이었습니다.
에이허브는 자기중심적이고 막무가내이며 광기 어린 집착을 보입니다. 하지만 배에는 그와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1등 항해사 스타벅입니다. 그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선원들의 권익을 대변합니다.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당신의 욕심 때문에 우리 선원들 전부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뜯어 말리고, 때로는 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에이허브는 막무가내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흰머리고래를 발견하고 작살을 쏩니다. 작살에 맞은 흰머리고래가 거대한 힘으로 배를 들이받습니다. 작은 배는 뒤집히고 선원들은 모두 바다에 빠져 수장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비극적인 결말입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선장 에이허브와 1등 항해사 스타벅, 이 두 사람은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도 항상 존재하는 두 세력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남의 말을 듣지 않으며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위기와 위험에 빠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마음이 따뜻하고 공동체를 위하는 스타벅 같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 읽은 하나님 말씀 본문에도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지 우리의 소속과 신분을 밝히고,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 삶의 방향과 의무와 의미는 무엇인지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두 계보의 사람들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도 나오고 사람의 딸들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우리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 말씀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이며 사람의 딸들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이해하려면 4장 후반부에 나오는 족보와 5장에 나오는 족보를 충분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1-1. 가인의 후손
4장 후반부에는 가인의 족보가 나옵니다. 가인은 살인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듭되는 회개 요구도 걷어찹니다. 에덴 동쪽 놋 땅으로 떠나서 거기에 성을 쌓았습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하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그리고 자손을 낳습니다.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신앙 교육을 하지 않습니다. 가인의 자손 중에 라멕이라는 사람이 태어나는데, 라멕은 참으로 특별한 기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과 공동체의 모든 질서를 다 파괴했습니다. 그는 살인자였습니다. 자신의 작은 상처 때문에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을 예사로 여겼습니다.
라멕은 또한 문명의 이기를 발전시켰습니다. 라멕의 자손들은 수금과 퉁소를 즐깁니다. 각종 기구로 문명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들이 바로 가인의 후손들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을 정리하는 핵심 단어는 '강함'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자들, 예배 없이 말씀 없이 살아가는 자들이 자신의 강함을 강조합니다. 강함을 드러내려 합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고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며 그 강함은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이 된다고 그들은 끊임없이 내세웁니다. 성경은 이런 가인의 후손을 '사람의 딸들'이라고 표현합니다.
1-2. 아담의 후손
반면,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의 계보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가인과 아벨을 주셨는데, 하나는 세상을 일찍 떠나고 하나는 하나님 앞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시 셋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셋을 하나님 앞에서 잘 길렀습니다. 믿음으로 양육했습니다. 그가 자라서 결혼합니다.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자녀를 낳아서 에노스라고 이름 짓습니다. 에노스는 '연약함'이라는 뜻입니다. 약해서 연약함이라고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존재인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셋의 신앙 고백이 아들의 이름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아버지의 신앙 고백대로 에노스는 신앙 공동체와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에노스 때부터 예배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담의 계보는 예배 공동체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이 아담의 계보에 속한 사람 중 대표적인 사람이 에녹이었습니다.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하려면 300년을 자기 부인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자신의 의지와 자신의 욕망을 다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서라고 하면 서는 그 생활을 그는 300년 동안 이어갔습니다. '낳고 살고 죽었더라'의 삶을 에녹은 믿음 안에서 잘 이루어간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들이 바로 아담의 자손이고, 성경은 그 아담의 예배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극단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은 예배 공동체를 잘 지키며 믿음 생활을 성실히 해가며 가인의 후손들을 예배 공동체로 인도해야 하는 사명과 의무가 있는 자들입니다. 이 사명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2. 보는 것의 위험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렇게 살았느냐. 그렇지 못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기에 동사가 세 개 나오는데, '보다', '좋아하다', '삼다'입니다.
2-1. 세 동사의 의미
'보다'라는 동사는 히브리어 '라아'(רָאָה)인데, 이것은 그냥 스쳐보거나 마음을 두지 않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세밀하게 관찰하고 마음을 담아서 면밀히 살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면밀하게 살폈습니다. 보는 것이 이렇게 되니까 그들이 그것을 보고 그다음 좋아하게 됩니다.
'좋아하다'라는 의미는 '바하르'(בָּחַר)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 단어는 그냥 마음에 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마음을 결정하고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나는 이쪽을 선택하겠다"고 결정했다는 뜻입니다. 마음을 결정하면 그다음 행동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 아닙니까? '취하다', '아내로 삼다'라는 말은 '라카흐'(לָקַח)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보고, 좋아하고, 삼는 것은 바로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보는 것이 무너지면 좋아하고 삼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 하나님의 아들들은 보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 성도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 쓰면서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교회 공동체는 듣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보는 것보다 듣는 것,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기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말씀을 듣기보다 보는 것에 탐닉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아름다움을 보았을까요? 그 아름다움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가인의 후손들의 강함을 본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은 힘이 최고였습니다. 라멕이 자신의 상함으로 소년을 죽이고 자신의 상처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들의 강함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말초적인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문명의 이기로 각종 기구를 만들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퉁소로 풍악을 울리고 문명을 발전시키고 인간의 말초적인 감정을 끌어올리는 것을 아름답게 본 것입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니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비루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우리 부모 세대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서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라고 했는데, 나는 돈도 없고 명예도 없고 권력도 없습니다. 풍류와 멋을 즐기는 재능도 없습니다. 문명을 발전시키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가인의 후손을 보니까 그들은 힘이 있습니다. 권력이 있습니다. 물질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멋이 있습니다. 아름답게 장식하고 그들은 힘을 과시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그 모습을 사모하고 사랑하게 되었고 예배 공동체를 뛰쳐나왔습니다. 여기서 '아내로 삼았다'는 말은 결혼 관계만 단순하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공동체를 뛰쳐나와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과 동화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예배 공동체를 지키며 그 자리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그 자리를 뛰쳐나와서 세상과 동화된 이 슬프고 아픈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2-2. 삼손의 실패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성경은 잘못 보아서 패가망신한 사람 이야기를 여러 사람 들려줍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삼손입니다. 삼손은 나실인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중에서 그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는 포도주와 독주를 입에 대지 않습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보는 것 때문에 패가망신합니다.
사사기 14장 1절과 16장 1절입니다.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삼손이 가사에 가서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하나님의 아들인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딸들을 봅니다. 가사의 기생을 봅니다. 그의 눈이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있지 않습니다. 그의 눈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있지 않습니다. 그의 귀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를 향하여 열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사사가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시선을 빼앗기고 눈이 빼앗겨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사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 자신 혼자만 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큰 위기에 빠졌습니다.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허브 한 사람 때문에 그 선원들 전체가 바다에 빠져 수장된 것처럼, 삼손 한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큰 위기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인 하나님의 백성들, 우리 믿음의 다음 세대인 청년 세대들은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 청년 세대들이 과연 보고 느끼고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배드리는 자리이며 하나님의 아들답게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선이 다른 데로 흩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3. 지극히 선한 것
세상에 가장 선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1장 10절입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이 시대 가장 선한 것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 이 시대 젊은 청년들은 돈이 있으면 선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절대적 가치와 절대적 진리는 이제는 없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돈이 있으면, 권력이 있으면, 그리고 멋진 남자가 있으면, 아름다운 여성이 있으면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선을 찾기 위해서 나는 영혼도 팔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과연 지극히 선한 것이 권력이고 물질이고 아름다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입니다. 3대, 4대가 부자로 사는 집안을 본 적이 있습니까?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하고 영원한 물질은 없습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때 권력을 가졌지만 그 권력은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입니다. 그냥 보였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도 어떻습니까?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고 멋진 젊음을 자랑하지만 10년, 20년이 지나면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고 허리가 굽고 머리에는 흰머리가 나지 않습니까? 우리 육체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토록 변함없는 강함이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이 영원토록 변함없는 강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연약하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가장 강한 분이었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망 권세를 피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 세상의 사망이나 죽음의 권세가 가장 강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야말로 가장 강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물질을 주시는 분임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돈에 따라 이리 쓸리고 저리 쓸려 다니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지으시고 물질의 주인이 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물질의 주인이 되시는데 물질의 부산물인 그것만 쫓아다니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물질도 주시고, 하나님이 구원도 해주시고, 부활의 능력을 허락해 주시는데 가장 강하고 가장 능력 있는 분이 하나님 아니십니까?
우리가 예쁘다고 따라다니는 여성들, 멋지다고 따라다니는 남성들, 그들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세상의 아름다움과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요 영원한 가치입니다. 하나님은 영존하시고 영원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한데, 이 지혜는 하나님 한 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는 지혜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4. 본을 보이는 삶
오늘 우리 자녀 세대들에게, 우리 청년 세대들에게, 이 땅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예배 공동체를 굳게 지키고 가장 귀한 가치가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려면 우리 기성세대가 본을 보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처럼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15절과 1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학벌도 아주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핍박하고 사람들이 그를 사람 취급하지 않아도, 그가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어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귀한 분, 가장 강한 분 하나님을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배같이 그가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세상에서 가졌던 것은 다 배설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삶의 모범을 그렇게 보여주고 살아갔습니다. 그렇게 살아갔기에 성도들에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강력하게 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 세대가, 믿음의 기성세대가 우리 청년 세대들에게, 교회 공동체의 어린 학생들에게, 가정의 자녀들에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야말로 강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만 붙들고 하나님의 아들들답게 살아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그렇게 살아갔다면 우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그렇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권할 수 있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
하나님의 희망은 가인의 후손에 있지 않습니다. 가인의 후손은 이미 하나님을 떠나서 예배 공동체를 떠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희망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신앙 교육을 하며 하나님 안에서 뿌리 깊게 살아가는 자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요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예배 공동체를 박차고 나가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이 가슴 아파하시고 하나님이 실망하십니다.
5-1. 육신이 됨
하나님의 실망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하셨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원래 사람은 육체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영이 더 이상 그들과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특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순종과 성령의 거룩하심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흙덩이에 불과했던 인간에게 하나님은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살아 움직이는 거룩한 영적 생명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육체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으로 사는 것입니다. 밥 먹고 산다고 다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이 살아야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임을 확인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있음을 언제 느끼십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은 예배드리면서 우리가 살아있음을 확인합니다. 찬양하며 내 영이 기뻐하며 하나님과 소통하고 호흡하며 우리의 살아있음을 확인합니다. 기도하며 내가 하나님께 내 답답한 마음을 아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며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받습니다. 말씀 들으며 내 영이 살찌며 내가 또한 살아있는 존재임을 확인합니다. 밥만 먹고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진정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은 예배드리는 자리에서만 확정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예배 공동체를 박차고 나와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을 좋아하고 그들과 동화되는 인생을 산다면, 하나님은 그들을 보실 때 "이제는 나의 영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살아 있으나 산 자가 아니로구나"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살아있으나 산 자가 아니라는 것,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성경은 이런 자들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무엘상 2장 12절과 17절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엘리는 제사장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제사장의 아들들이니까 사람들이 볼 때는 그들이 신앙 교육 잘 받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인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 예배를 멸시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멸시하는 자들, 예배 공동체를 박차고 나간 자들, 그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멀쩡하게 살아 숨 쉬는 자들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산 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블레셋과의 전쟁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나갑니다.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며 승리할 줄 알고 언약궤를 메고 갔습니다. 전쟁은 지고 언약궤는 빼앗기고 그들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멀쩡했던 두 아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어서 돌아왔다고 생각했겠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이미 그들은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육신에 호흡이 붙어 있으나 호흡이 붙어 있지 않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죽은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산 자입니까? 살아있는 것 같은데 죽은 자들입니까? 이 땅의 청년들,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예배 공동체를 굳게 지키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하나님 앞에서 산 자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5-2. 백이십 년의 유예
그러나 하나님은 이들에게도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한 번 더 기회를 주십니다. 3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들의 날이 백이십 년이 된다는 뜻이 어떤 말씀입니까? 혹자는 사람들의 수명이 969세, 930세까지 되었다가 이제는 수명이 줄어들어서 120년으로 한정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도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았고 야곱도 147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육체가 된 인간에게 심판 유예의 기간을 120년 동안 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즉각적이지 않습니다. 반드시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항상 우리에게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아담에게도 그랬고 가인에게도 세 번의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배 공동체를 박차고 나간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도 그들이 육신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셔서 "120년의 시간을 줄 테니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 공동체를 박차고 나간 이들에게 다시 돌아올 시간이 바로 120년의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노아 같은 사람에게는 이 기간이 전도해야 할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방주를 120년 동안 지었습니다. 노아가 산꼭대기에서 방주를 지을 때 사람들이 가서 물어봤을 것입니다. "뭣 하는 겁니까?" "돌아오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예배의 자리로 빨리 돌아오셔야 됩니다. 회개하고 돌아오십시오." 전도하고 또 기다렸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까지, 우리의 육체에 호흡이 있을 때까지 이 기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심판 유예의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었다가 예배 공동체를 떠난 자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과 은혜와 긍휼의 기간이고, 여전히 예배 공동체를 지키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들을 다시 돌이키고 돌아오게 해야 할 전도의 기간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예배임을 깨닫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예배라면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것도 예배라는 걸 깨닫습니다. 사탄은 예배를 방해하기 위해서 각종 방해 공작을 벌입니다.
과거 로마 시절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 네로 황제와 도미티아누스 황제를 통해서 그들은 예수 믿는 사람을 압제하고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배드리지 않으면 살아있으나 죽은 존재이기 때문에, 영혼의 호흡을 위해서, 그들이 살아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지하 카타콤으로 숨어 들어가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조상들도 그랬습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시기, 공산정권 치하 시기에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치를 지켰습니다.
오늘 우리가 여러 어려움과 시험의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사탄은 또 다른 전략으로 이렇게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여러분들에게 예배는 어떤 의미입니까? 오늘 이런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배 공동체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 우리는 하나님께 어떤 요구를 받고 있습니까?
부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 공동체를 지켜나가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살아가시고 결단하시며, 여전히 아직 돌아오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 전도하고 기도하시는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