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 태초에 하나님이 (1:1-2)

태초에 하나님이

본문: 창세기 1장 1-2절

1. 근원을 묻는 인간

철학의 역사를 다룬 철학사 책을 펼치면 제일 첫머리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의 고대 자연 철학자들 이야기입니다. 그들 중에 탈레스라는 사람은 우주의 근원 아르케(ἀρχή)를 물이라고 표현했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고 표현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의 근원을 불이라고 표현했고, 그 이후에 엠페도클레스는 물, 불, 공기에 흙을 추가해서 사원소설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한 우리 시대의 눈으로 보면 사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들의 주장이지만, 기원전 6세기와 5세기를 살았던 그들이 우주의 근원과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탐구했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그들의 주장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과 탐구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하는 질문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평상시에는 이런 질문이 우리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별 생각 없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커다란 문제 없이 그냥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커다란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우리가 인생의 극복할 수 없는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그제서야 우리는 원인과 본질에 대해서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운전을 할 때 차가 아무런 문제 없이 그냥 굴러가면 차의 원리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다가, 똑같은 문제가 계속 반복되는 일이 벌어지면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이런 질문을 가지며 차의 원리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동안 전 세계가 전대미문의 위기에 부딪쳐서 큰 어려움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세계 석학부터 시작해서 많은 평범한 사람들까지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일에 직면하게 되었을까, 인류 공동의 문제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는 아주 중요한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세상 가운데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가 창세기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창세기는 하나님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매뉴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매뉴얼을 펼쳐 보아야 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이 어떤 원리로,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지 원리를 다시 찾아보고 근본부터 돌이켜서 살펴보면 원인을 발견하고 처방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창세기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인간의 본질과 근원과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깨달아 알기를 원합니다.

창세기는 성경 66권 가운데 제일 첫머리에 있는 책입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표현하신 하나님 사랑의 대서사시라고 한다면, 그 사랑의 편지 첫머리를 어떤 말로 쓰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도 사랑의 연애 편지를 써 보신 분들은 다 기억을 하시겠지만 첫마디를 뭘로 쓸까 밤새도록 고민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도 아마 창세기 1장 1절을 어떤 말로 쓸까 굉장히 고민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고민하시다가 드디어 첫마디를 기록하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떤 느낌으로 읽고 받아들이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별 생각 없이 그냥 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펼치기만 하면 가장 먼저 만나는 첫 번째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 하시면서 성경을 통독하신 분들은 항상 창세기부터 시작하는데, 창세기 1장 1절을 펼 때마다 이 구절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우리에게 그다지 큰 감동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선포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이 말씀의 주어가 누구로 되어 있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의 주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천지는 하늘과 땅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 온 우주,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삼라만상을 다 일컫는 말입니다. 물론 이 속에는 나와 같은 우리 인간 존재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이 주어입니다. 성경은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해서 요한계시록 끝까지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인 되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이 세상의 물질이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인이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첫 장 첫 절을 기록하시면서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론과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선포하신 첫 번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세계 창조와 운행의 원리는 하나님이 주인 되심의 원리가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온 우주의 주권자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살아가야 우리 인생이 행복해질 것입니다.

2-1. 주인 됨을 부정하는 세상

그런데 과연 우리는 하나님을 온 우주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데 어떻게 전쟁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일어나는 수많은 전쟁들, 그 가운데 대부분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서 빚어진 전쟁입니다. 더 많은 자원을 차지하고 더 많은 땅과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남의 나라를 침략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우습게 여깁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데 어떻게 이 땅의 빈부격차가 지금도 여전히 이렇게 크나큰 차이로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돈이 많은 부자들이 어찌하여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위하여 나눔을 실천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인이신데 내가 이 물질의 주인이고 내가 온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임을 인정한다면 세계의 자연 파괴 현상이 왜 일어나겠습니까? 전대미문의 재앙이 일어난 것도 인간의 무분별한 자연 파괴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자연의 영역이 있고 인간의 영역이 따로 있는데, 인간이 탐욕을 부리며 그로 인해서 자연이 살아가야 할 삶의 터전을 무분별하게 훼손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이 지구의 남은 땅을 남겨놓지 않고 끊임없이 개발을 하면서 자연을 무분별하게 독식했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자기가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인정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이렇게 비일비재하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2-2. 주인 됨을 인정할 때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면 우리에게 얻는 바가 굉장히 많습니다. 하나님 한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우리 인생의 주로 인정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겁내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9절을 보시겠습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사도 바울은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로마 당국은 바울이 활보하고 다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에게 될 수 있으면 어떤 올가미라도 뒤집어 씌워서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백하지 않습니까? 나는 매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은 매이지 아니하였다고. 바울은 사람 앞에서 떳떳하고 당당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 두려워하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겁내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유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자유인이다. 그런데 사실 그 속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사람들은 자유롭게 살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디엔가 매여 있습니다. 물질에 매여서 돈을 쫓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고, 권력에 매여서 권력을 쫓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인간관계에 매여서 사람을 따르며 그 사람을 자기 인생의 보스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시간을 다스리지 못하고 항상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유인이라고 착각하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올가미와 사슬에 자기의 목이 걸려서 매여서 살고 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한 분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돈만 열심히 쫓아가야 하는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내가 돈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어떤 조직에 충성하기 위해서 그 조직을 열심히 섬기고 살았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어떤 누군가 사람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불행한 인생이 아닙니까? 사도 바울처럼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우리는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거나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2-3. 주인을 바꾸는 삶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의 본질은 주인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 자리에 있던 내가 내려오고, 그 주인 자리에 원래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 1절에서 이렇게 선포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생활의 유일한 목표이자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주어 자리에 놓고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럿 등장합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입니다. 창세기 45장 5절과 7절을 보시겠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구절을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5절과 7절의 주어가 누구로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어 아닙니까? 사실 요셉은 열 명의 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려 갔습니다. 나중에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나서 곡식을 사러 온 형제들이 자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그 옛날 팔아버린 당신들의 동생 요셉임을 드러내자 형들은 두려워서 떨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에 사로잡힌 형들에게 요셉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애굽에 판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권능의 손으로, 전능의 능력으로 나를 먼저 이곳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어로 놓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원한이 사라집니다. 그랬더니 원수 맺는 일이 없었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생의 주어가 되면 바로 우리에게는 이런 돌이킬 수 없는 크고 아름다운 축복이 우리 인생에 자리 잡습니다.

성경 전체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주인 되심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이렇게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가장 중요한 원리이고, 지금도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가장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원리 안에 우리 인생의 행복이 숨어 있습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한 분을 우리 인생의 주어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어가 되면 우리 인생의 행복은 더할 나위 없이 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3. 창조하신 분의 책임

또한 오늘 1장 1절의 말씀이 주는 숨은 의미,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책임성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 온 삼라만상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신 하나님은 창조 이후에 책임도 지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실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으로 배워 왔지 않습니까?

사랑의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 창조만 하시고 그냥 내팽개쳐 두시겠습니까? 나는 창조했으니 살아가는 건 너 멋대로 해라, 네가 알아서 각자도생하고 살아가라. 하나님은 결단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셨으면 반드시 책임지십니다. 이 땅의 부모가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면 이 땅의 부모는 자녀가 성년이 될 때까지 책임을 져야 됩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 자는 것, 앞으로 공부하는 것까지 끝까지 부모는 책임의 의무가 있습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부모는 뼈를 깎는 고통을 통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서 돈을 벌고 일해서 자녀들을 돌보고 책임져 주어야 합니다. 하물며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 세상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을 만들어 놓으시고 책임지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은 책임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책임지시는 하나님께 왜 구하지 않습니까? 자녀는 부모께 구해야 됩니다. 아버지, 어머니, 절 낳으셨으니 절 책임져 주십시오, 저를 인간답게 살게끔 도와주시고, 제가 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당당히 요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도 하나님께 그렇게 요구할 수 있습니다. 강하게 간구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인생의 수많은 어려움과 난관을 만났는데, 인생의 크고 작은 파도를 만날 때 왜 창조주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책임진다고 하시는데, 책임지시는 하나님, 지금 나에게 이런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해방시켜 주십시오, 책임져 주십시오. 우리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새벽 아직도 날이 밝기 전, 미명에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 당신을 이 땅에 보내셨지 않습니까? 보내신 하나님께서 나를 책임져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신 것 아닙니까? 예수님도 기도하셨는데 우리는 무슨 배짱으로 기도하지 않습니까? 세상이 뒤죽박죽 돌아가고 내 인생에 환란과 핍박과 어려움과 고난과 여러 가지 문제들이 닥치면 그때 책임지시는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천지만물과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찾아와 주시고, 내가 너를 돌보고 책임지마, 반드시 주께서 도우시는 귀한 역사를 누리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4. 창조 이전의 상태

2절을 보시겠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여기 이 절에 아주 중요한 세 단어가 나옵니다. 첫째는 혼돈, 두 번째는 공허, 세 번째는 흑암입니다.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이 땅의 상태입니다. 혼돈했고 공허했고 흑암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시기 이전의 상태였기도 했고, 오늘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면 우리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전 우리의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의 여정을 한번 쭉 돌이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기 전, 내가 인격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접하기 전 우리의 상태가 어땠습니까? 우리는 혼돈스러웠고 공허했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4-1. 혼돈: 방향의 상실

혼돈이 왜 생깁니까? 무엇 때문에 혼돈됩니까? 우리가 혼돈스러운 이유는 목표와 방향이 불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어디를 향해서 나아가야 할지 방향이 불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목표가 없으면 사람들은 자기 감정대로 행동합니다. 화가 나면 화를 냅니다. 누구와 부딪히면 가서 멱살잡이를 합니다. 그걸 쉽게 합니다. 돈이 생기면 돈도 자기 마음대로 써 버립니다. 목표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감정의 노예가 되고 감정의 동물처럼 살아갑니다. 스스로 생각해 봐도, 정신 차리고 생각해 보면, 내가 왜 이렇게 살까, 나는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살까, 주변 사람들이 보면 저 사람의 인생 참 혼돈스럽다고 생각할 만큼 우리 인생은 목적과 방향을 상실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목표가 분명히 생긴 인생은 다르게 살아갑니다. 시편 123편 1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순례자가 성전을 향하여 노래하며 성전 계단 위를 올라가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주께 향하나이다. 나의 눈이 주님을 향하여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분의 시선은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성전을 향하여 그 시선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상황은 어떨까요? 상황이 편할까요? 상황이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123편 4절을 보시겠습니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안일한 자의 조소, 교만한 자의 멸시가 시인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방으로 핍박과 싸움을 당해서 주변에 그를 괴롭게 하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환란과 고통과 고난의 세월을 지금도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시선은 하늘을 향하여 있고 시인의 발걸음은 성전을 향하여 있습니다. 혼돈스러운 상황이라면, 이 시인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하지 않았다면 그는 누구를 향하여 달려갈까요? 당연히 그를 향하여 교만한 자의 질투와 질시를 보내는 사람들, 그를 향하여 핀잔을 하고 손가락질을 향하는 사람들, 그를 향하여 달려갈 것입니다. 멱살잡이 할 것입니다. 주먹다짐을 할 것입니다. 화를 낼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방향이 달랐습니다. 그의 유일한 인생의 목표와 방향은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한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온전한 새 창조를 이루어 주시면 우리 방향이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을 향하게 됩니다. 창조 이전의 상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상태, 혼돈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의 온전한 새 창조를 행하셔서 우리가 영원히 어떤 일이 있어도 시선을 잃지 않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2. 공허: 채워지지 않음

두 번째는 공허입니다. 무엇을 공허라고 말합니까?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우리는 공허하다고 말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밥을 먹었는데 돌아서서 10분도 안 되어서 또 배고프다고 똑같은 양의 음식을 먹는다면 주변에 보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아마 그 사람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을 만나 봐야 됩니다. 뭔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능의 고장이 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육체적인 문제는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우리 영혼의 공허함에는 그렇게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물질을 가져도 가져도, 채워도 채워도 그래도 여전히 목마른 사람들, 사람들은 그를 오히려 부자라고 칭송합니다. 이런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알맞은, 올바른 소비를 한다고, 소비의 귀감이 된다고 사람들은 박수를 칩니다. 정상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는 큰 부자였습니다. 그의 곳간은 곡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농사를 지었고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는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헛간 곳간을 다 헐고 다시 새롭게 짓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창고에 풍년으로 거두어 들인 곡식을 다시 쌓아 놓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혼에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겁게 노래 부르자.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못 되게 보셨습니다. 그날 밤 그의 영혼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내가 네 영혼을 다시 찾을 텐데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우리는 영혼의 공허함으로 인한 탐욕을 스스로 멈춰야 됩니다. 우리 스스로 멈추지 않고 하나님께서 멈추시는 그날에는 우리 생에 큰 비극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밖에 우리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시편 84편 10절에 보면 고라 자손이 이렇게 노래하지 않습니까?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내 하나님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하나님 성전의 문지기로 있으면서 말씀으로 내 영혼을 가득 채우면 내 영혼의 허기가 사라집니다. 영혼의 굶주림이 말씀으로 가득 채워지면 세상의 부귀영화가 전혀 부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새롭게 재창조하셔야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정말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혹시 우리가 아직까지 창조 이전의 공허한 상태를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의 마음 심령 깊숙한 곳을 다시 한번 돌이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4-3. 흑암: 빛의 부재

세 번째 흑암입니다. 흑암이 무엇입니까? 왜 흑암의 상태가 계속됩니까? 흑암은 빛이 없는 상태를 흑암이라고 말합니다. 캄캄한 지하실에, 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지하실에서는 사람들이 물건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빛이 없으니까요. 곰팡이가 번식하고 피어도 사람들은 잘 느끼지 못합니다. 빛이 없으니까요.

우리 영혼이 바로 그런 상태입니다. 빛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빛 되신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에 임재하지 않으면 우리 마음속에는, 우리 영혼 속에는 죄가 성장하고 죄가 번식하고 죄가 자랍니다. 그래도 우리는 전혀 문제점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빛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심령 가운데 들어오면,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완전히 바꿔서 살아간 것처럼, 우리는 우리 심령 속에 말씀을 받아들이고 나면 새로운 재창조가 일어나서 우리는 이제는 더럽고 추악한 죄 가운데 빠져 살지 않습니다.

5. 새 창조를 향하여

여러분, 오늘 우리 자신들을 깊이 있게 다시 돌이켜 보시기를 바랍니다. 문제없다고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세상에는 문제투성이입니다. 크고 작은 위기들을 비롯해서 내 인생의 수많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혹시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달려가고 살아가고 있는데 나도 여전히 방향을 상실하고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혼돈 가운데 살고 있지는 않았는지, 혹시 나도 공허한 가운데 세상의 욕망을 채우고 채우고 그렇게 살고 있지는 않았는지, 빛 되신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내 마음 어두운 곳 한 구석에 죄의 온상이 싹 틔우고 열매를 맺고 더럽고 추악한 죄 가운데 달려가고 있지는 않았는지, 이제 우리가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새롭게 서서 결단해서 혼돈으로부터는 질서가 생겨나고, 공허로부터는 온전한 채움이 일어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그 장소에는 빛 되신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그 놀라운 창조의 능력이 우리 생에 가득 차고 넘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창세기 말씀, 계속해서 진행되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변화되고, 다시 한번 근원으로 돌아가고, 다시 한번 본질로 돌아가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 인생에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과 온 우주를 만드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주인이심을 이미 창세기 1장 1절에 선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창조의 원리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었습니다. 물질이 주인이 되었고 권력과 사람이 우상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버지여, 용서하여 주옵소서.

다시 한번 우리가 결단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 되시기를, 나는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고 하나님께서 혼자 나의 주어가 되시기를 함께 결단하오니 주여,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책임진다고 하셨는데 입을 열지 않았고 기도하지 않았던 우리를 회개합니다.

주님, 이제 새롭게 시작되는 날들 동안 간구하며 부르짖어 기도하게 하시고, 기도하는 것마다 하나님 앞에 응답되게 하시고, 응답되는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 성도들의 삶에 아름답게 열매 맺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살고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아버지여 용서하여 주옵소서.

다시 새롭게 되어 혼돈에는 질서가, 공허에는 채움이, 흑암에는 빛이 임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