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강 / 근심하시는 하나님 (6:4-6)

근심하시는 하나님 (창6:4-6)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은 「인어공주」, 「미운 오리 새끼」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중에 「눈의 여왕」이라는 작품도 있습니다. 이 책은 눈물과 사랑의 의미를 잘 표현하고 드러내 주는 작품입니다.

책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트롤이라는 악마가 있는데, 이 악마는 아주 특별한 거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거울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지 않고 왜곡해서 비춥니다. 흉측하게 보이게 하고, 삐딱하게 보이게 합니다. 어느 날 악마 트롤은 이 거울을 가지고 천사들을 골탕 먹이려고 하늘로 올라가는 중이었습니다. 부주의하게 장난 치다가 그만 거울을 깨뜨렸고, 유리 조각 파편이 산산조각 나서 지상에 있는 사람들의 심장과 눈에 박힙니다.

거울 파편이 심장에 박힌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온기를 상실합니다. 차갑게 변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바뀌고 변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아주 차갑게 변했습니다. 눈에 그 유리 조각 파편이 박힌 사람은 사람을 왜곡해서 보고 사물도 이상하게 보게 됩니다. 어느 마을에 살던 카이라는 소년의 심장과 눈에도 유리 조각 파편이 박혔습니다. 카이에게는 게르다라고 하는 아주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둘은 둘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유리 조각 파편이 카이의 심장과 눈에 박힌 이후로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이유 없이 트집 잡고, 이유 없이 게르다를 멀리하고 미워합니다.

영문을 알 수 없었던 게르다는 카이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두 사람은 갈수록 서먹한 사이가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의 여왕이 카이를 찾아와서 기억을 잊게 하는 입맞춤을 하고 눈의 여왕의 왕국으로 데려갑니다. "네가 여기를 벗어나고 기억을 찾으려면 내가 내준 얼음 조각 퍼즐을 풀어야 한다." 얼음 조각 퍼즐 퀴즈를 냅니다. 하지만 카이는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그 퍼즐을 풀 수가 없습니다. 고민하고 고민했지만 할 수 없어서 혼자 얼어붙은 강가에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한편 게르다는 카이가 갑자기 없어지자 놀라서 카이를 찾아다닙니다. 이리저리 수소문하며 천신만고 끝에 카이를 찾아서 눈의 여왕의 왕국에 도착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은 강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카이를 보고 게르다가 달려가서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게르다의 눈물이 카이의 심장에 흘러내릴 때 카이의 심장에 박혀 있던 유리 조각 파편이 녹아내립니다. 그제야 카이가 따뜻함을 회복하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자기를 찾아서 여기까지 온 게르다가 고마워서 카이도 눈물을 쏟아냅니다. 그러자 그의 눈에 박혀 있던 유리 조각 파편도 녹아내립니다.

안데르센이 이 동화를 통해서 들려주고자 하는 것은 눈물과 사랑의 힘입니다. 세상에 눈의 여왕처럼 권세를 가진 자들, 악마 트롤처럼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장난치는 자들, 그들을 맞서서 이길 수 있는 것은 사랑과 눈물밖에 없다는 것을 1845년에 이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사람의 눈물과 사람의 사랑이 이토록 강렬하다면, 예수님의 눈물은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 번 우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사망 권세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통분히 여기시고 쏟아내신 눈물, 곧 멸망당할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흘리신 긍휼의 눈물,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흘리신 눈물―예수님의 그 뜨거운 눈물이 오늘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이 아니었다면,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의 눈물과 분노의 눈물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누구도 구원 얻는 백성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근심이 나옵니다. 근심하시는 하나님, 고통 가운데 계신 하나님, 그리고 그 고통과 근심 때문에 눈물 짓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나는 과연 하나님의 근심거리인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가를 말씀에 비추어 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말씀을 통해 결단하고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용사와 명성의 시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취했습니다.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약함보다 강함을 추구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보다 자기 중심적인 삶을 추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것보다 인간의 나라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그들은 거침없이 빠져들어 갑니다. 예배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세속화되었습니다. 세상과 동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삶의 결과, 그 후손들의 비참함을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의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예배 공동체를 떠나 세속화되고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그들과 결혼합니다. 세상에 거룩이란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구별된 삶,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 그것은 전혀 딴 나라 세상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4절 말씀에서 살펴보아야 할 중요한 두 단어가 있는데, 용사라는 단어와 명성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용사라는 단어를 보면 라멕을 떠올립니다. 라멕은 가인의 후손입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예배 없이 하나님 없이 신앙 교육과 훈련 없이 살아가는 자들에게 힘이 최고의 능력이고 강한 것이 곧 미덕이 되는 세상, 그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로 군림한 사람이 라멕이었습니다.

라멕은 두 아내를 불러 놓고 자신이 사람을 죽이고 살해한 것을 자랑합니다. 창세기 4장 23절입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살인을 정당화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후손들의 삶의 질서였습니다. 가장 강한 자가 대우받는 세상, 가장 강한 자가 우대받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세상, 가장 강한 자 라멕이 자신의 상처 때문에 소년과 사람을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 사람―그런 사람을 세련되게 일컫는 단어가 용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가인의 후손들에게 용사들은 라멕 한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용사였습니다. 그 용사라면 용사 중에 용사, 용사들이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은 명성입니다. 용사로서 최고의 이름을 내고, 용사로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명성을 얻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왜 그들이 명성을 원했을까요? 수금과 퉁소를 부는 사람들이 용사로서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 명성을 얻은 사람 앞에 와서 그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며 기뻐하며 "당신이야말로 가장 강한 사람 중에 강한 자입니다" 이렇게 불러주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용사가 되고 명성을 얻고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고, 사람들이 그 앞에 와서 노래 부르고 그 이름을 높여 주기를 갈망했습니다. 이것은 중독성이 있습니다. 여기에 도취되면 빠져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목사님,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오늘의 세상도 약육강식의 세상 아닙니까? 일등이 되지 못하면 아무도 인정받을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 자녀들이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도록 기도하고, 그들에게 '부모 세대는 이렇게 살지 못했지만 너희야말로 용사가 되라, 너희는 명성을 얻는 자가 되라, 많은 사람이 너희들 앞에 와서 너희의 이름을 높여 주는 자가 되라'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왜 죄가 됩니까?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따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심각한 죄가 됩니다. 왜 죄가 되느냐, 하나님 없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조상 되는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에 성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배제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이 자기가 최고가 되고 용사가 되고 명성을 얻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라면, 이것은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에게는 심각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영광 돌린 다윗

이 모든 것을 다 아는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08편 5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주의 영광이 온 땅에서 높임 받으시기를 원한다고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다윗의 일생을 한번 반추해 보십시오. 그도 한때는 용사였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후에 그는 가는 곳마다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사울의 군대 장관이 되었습니다. 여인들이 노래 불렀습니다. 소고 치며 북 치며 노래 부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다윗의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용사 중의 용사였고, 명성을 얻은 사람이었고, 사람들이 그 앞에 나와서 손뼉 치며 박수치며 그 이름을 찬양하고 높여 주었습니다. 교만해지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광야로 가서 훈련시킵니다. 15년 이상이나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사울을 피해 다니며, 그는 하나님과 단독자로서의 15년의 인생을 훈련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왕이 됩니다. 그는 특별한 왕이었습니다. 다른 세상의 왕들과는 달랐습니다. 목자 정체성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목자는 자기 마음대로 양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않습니다. 목자는 목자장에게 물어봐야 됩니다. "목자장이시여, 오늘은 이 양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서 풀을 먹일까요? 오늘은 이 양들을 어디로 데리고 가서 물을 먹일까요?" 목자는 항상 목자장에게 물어봅니다. 목자장은 하나님이시고 목자는 다윗이고 양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 앞에 여쭈었습니다. "이 전쟁을 할까요, 말까요? 하라고 하시면 어떻게 전쟁해야 되겠습니까? 이 백성들의 영혼이 다치지 않도록, 육체가 다치지 않도록, 재산을 보호하도록 하나님 어떻게 하면 이들을 잘 살피고 보호할 수 있겠습니까?" 목자로서 항상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양 떼들을 마음대로 끌고 다니고 자기 욕망을 위해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가 왕이 되었지만, 그의 인생은 주께 영광 돌리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2-1. 에노스(אֱנוֹשׁ)로서의 인간

이것이 정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 자기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내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강함 앞에 엎드립니다. 나는 연약한 에노스(אֱנוֹשׁ)이기 때문에, 연약한 에노스가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며 무릎을 꿇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당시 이 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했습니다. 그들이 흙으로 빚어진 연약한 에노스임을 잊어버렸습니다. 에노스를 잊어버리고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흙으로 빚어진 한 줌의 흙덩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강함을 자랑합니다. 흙이 아무리 강해 봐야 얼마나 강하겠습니까? 찰흙으로 단단하게 뭉쳐 놓아도 시간이 지나면 바스러지는 것이 흙의 운명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다 경험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전도서 1장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짧은 1절 말씀에 헛되다는 말이 다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얼마나 많은 것을 누렸는지 보십시오. 대저택도 지었습니다. 성전도 짓고 왕궁도 지었습니다.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는 지혜도 받았습니다. 그 놀라운 지혜로 세상 모든 왕국을 다스렸습니다. 고대 근동의 최고가는 왕이 되었습니다. 멀리 스바의 여왕이 그의 지혜를 듣기 위해서 그와 함께 할 정도로, 많은 은과 금과 패물을 가지고 그에게 와야 할 정도로, 그는 대단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방 결혼도 했습니다. 믿지 않는 왕의 딸들과 결혼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이 우상 천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에 말년이 되어서 자신의 그런 행적을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그의 말 한마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제서야 자신이 다시 에노스임을 깨닫게 됩니다.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흙으로 빚어진 존재인데, 나는 나의 강함을 믿고, 내가 용사이고 명성을 가진 자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자가 되는 걸 갈망하고 살아갔던 이 연약한 에노스가 이제 다시 돌아보니 그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인생이 연약한 인생이고 에노스라는 인생임을 깨달아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으니 내 자식만큼은 용사로, 명성 있는 자로,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자로 살라"고 그렇게 교육하고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남을 밟지 못하면 네가 밟힌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 위에 군림해야 한다고, 피를 봐서라도 너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고, 우리가 자녀들을 그렇게 가르쳤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예배 공동체를 떠난 사람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주신 한계

그렇다면 에노스인 우리 존재가 어떻게 하면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설계하실 때 인간의 한계를 명확하게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이 완벽한 낙원이라고 한번 생각해 본다면,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그곳에 두셨는데, 그때 한계를 명확하게 하셨습니다. 그때 인간의 한계가 선악과였습니다. 선악과라는 한계 안에서 인간은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것 다 해도 좋은데 선악과 명령을 지켜야 된다. "이것 먹는 날에는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니 이것 절대로 먹지 말라." 선악과는 인간이 선을 넘지 않는 하나님의 마지노선이었습니다. 그걸 먹는 순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끝장 나고 맙니다.

선악과 명령을 지켜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허락된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선악과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것만 없으면 내가 행복할 줄 알고, 그것만 제거하면 내가 가장 행복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될 줄 알고, 뱀의 꾀임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제거하고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선악과를 따 먹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비참한 결말 아닙니까?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마에 땀이 흘러야 하고, 해산하는 수고를 감당해야 하는 인간의 비참한 노동의 시작이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한 것 아닙니까?

3-1. 예배라는 한계

가인과 아벨에게 하나님은 한계를 지어 주셨는데,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예배 드리면서 너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예배 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력함과 약함에 무릎 꿇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않는 가인을 책망하시는 하나님 그 앞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으로 가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완전하게 단절하고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한계가 무엇입니까? "너는 여기까지야" 하나님이 지어 주신 한계가 무엇입니까? 인간에게는 그 한계와 우리가 넘어갈 수 없는 선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것만 없으면 나는 가장 행복할 텐데, 내 인생의 이것만 해결되면 나는 정말 행복할 텐데." 그런데 생각을 한번 바꿔 보시기 바랍니다. 해결되지 않은 그 문제 때문에,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숙제 때문에, 나는 지금도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예배 드리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3-2. 바울의 가시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이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사람들은 그 가시가 안질인지 간질인지 또 다른 발작인지 어떤 것인지 여러 가지 설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가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있는 것은 복음 전도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육체의 가시가 떠나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구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삼이라는 숫자는 하늘의 숫자입니다. 하늘에 닿을 만큼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그제서야 깨닫습니다. 내 육체의 가시가 여기에 머물러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는 것이 은혜로구나. 그때부터 바울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떼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나에게 은혜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특별한 은총임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안전장치라는 것을 그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 또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믿음의 자리를 지키라고 주신 기도의 자리, 예배의 자리를 지키라고 주신 하나님의 안전장치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4. 하나님의 한탄과 근심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과 결혼하여 낳은 자녀가 용사가 되고 명성을 얻게 되는 것, 하나님은 어떻게 보셨을까요? 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여기 '보셨다'라는 단어는 지난주에도 살펴본 단어입니다. 라아(רָאָה)라는 동사입니다. 그냥 스치듯이 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면밀하게 제대로 깊이 있게 자세히 들여다보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신 것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드러나는 현상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한 것을 보셨습니다. 용사와 명성이 있는 자들이 저지르는 세상의 죄악. 세상에는 용사가 넘쳐나고 명성이 있는 자들이 많이 생겼지만, 그러나 세상은 죄악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이 전부 다 악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습니까? 이 땅에 이미 죄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더 절망적인 것은 사람들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모두 다 악한 것뿐입니다. 사람들 마음에 계획하는 것이 전부 다 악한 것뿐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마음에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계획하는 것이 악하다면 그 악한 계획은 반드시 밖으로 표현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세상에 악했는데 사람들 마음에 계획하고 생각하는 것조차 악하다면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희망 없는 세상을 어떻게 하실까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희망을 두고 창조하신 이 세상이 지금 악한 것도 하나님이 견디기 힘든데, 사람들 생각도 계획하는 것까지 다 악하다면 이제 하나님에게 남은 선택은 한 가지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 그 선택은 심판입니다. 철저하게 심판하고 완전히 뿌리 뽑아서 이제는 다 없던 걸로 해버리자, 하나님 그렇게 결정하시지 않겠습니까? 지금 당장 심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으리만큼 그 당시 이 세상은 악이 충만하고 관영한 세상이었습니다.

4-1. 한탄과 근심의 의미

그런데 하나님은 의외의 선택을 하십니다. 선택을 망설이고 계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근심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곧바로 심판하실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곧장 심판하지 않으시고 한탄하고 근심하고 계셨습니다. '한탄하다'는 나함(נָחַם)이라는 동사를 씁니다. 슬퍼하다, 눈물 짓다, 아파하다라는 뜻입니다. '근심하다'는 아차브(עָצַב)라는 동사를 쓰는데, 몸과 마음이 심히 고통 가운데 있다라는 뜻입니다.

마치 하나님을 사람처럼 표현했습니다. 자식 문제 때문에 한탄하고 근심하는 부모처럼, 우리가 자식 문제가 있으면 남들에게 드러내놓고 말할 수 없어서 혼자 잠 못 이루는 불면의 밤을 세우면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고 한탄하고 근심하는 부모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문제 때문에 한탄하고 근심하심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 때문에 근심하는 불면의 밤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졌을까? "연을 끊어 버릴까? 이제 모른다고 할까? 이제는 완전하게 내쳐 버릴까?" 고민하다가도 "그래도 내 자식인데" 몇 번의 생각이 반복되며 또 반복되며 한탄하고 근심하는 부모처럼, 하나님도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한탄하고 근심하셨는지 모를 정도로 하나님은 염려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입니다. 무엇 때문에 근심하십니까? 누구 때문에 걱정하시고 누구 때문에 한탄하십니까? 바로 사람들 때문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생령이 되게 하신 사람, 그 사람이 이렇게 죄짓고 하나님 앞에 살지 못할 때, 하나님은 곧장 심판하지 않으시고 지금도 심판을 유예하고 미루고 계시고, 한탄하고 근심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내가 꽤 괜찮게 살아서 아무런 문제가 없어서 이 땅의 심판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지금도 심판을 고민하시며 한탄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악이 관영하는 것과 사람들 생각하는 것이 모두 다 악하고 계획하는 것이 다 추악한 것을 하나님 보고 계시기에, 하나님은 지금도 한탄하고 근심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4-2. 예수 그리스도의 해결

하나님이 이렇게 한탄하고 근심하셨기 때문에,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근심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종결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근심을 안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걱정과 근심을 해결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기억하고 깨달아야 할 것은 "그럼 나는 하나님의 근심거리인가?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면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근심하실까, 아니면 기뻐하실까?"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한번 내세워 보시기 바랍니다. 과거에 내가 잘했던 모습을 내세우지 말고, 앞으로 내가 회개하고 변화되어야 할 미래를 내세우지 마시고, 오늘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나를 보신다면,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셔서 지금 내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 내가 행동하는 모든 것을 보신다면, 하나님께서 한탄하고 근심하시지는 않을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시면 하나님 어떻게 하실 것 같으십니까? 하나님의 근심이 된다면, 하나님의 한숨이 된다면 우린 돌이켜야 됩니다.

5.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스바냐 3장 1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남유다 말기, 나라와 백성들의 마음은 반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친바벨론이냐 친이집트냐. 왕실도 반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바벨론에 설 것이냐 이집트에 설 것이냐. 선지자들이 말합니다. "바벨론도 아니고 이집트도 아니고 하나님 편에 서야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이 백성의 미래가 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도 왕도 종교 지도자들도 하나님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망해 갔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말하지 않습니까?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이 말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라는 뜻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용사가 되고자 하는 욕망과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과 그로 인해서 사람들의 칭송을 받고자 하는 욕망을 다 들어내고,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며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과 찬송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 마음에 누가 주인으로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계신지 계시지 않은지는 하나님이 알고 내가 압니다. 주변 사람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세상을 향한 탐욕과 명예와 용사와 명성으로 가득 차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하나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으로 채우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신다면,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너야말로 나의 기쁨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근심거리가 되지 마시고, 하나님의 한탄거리 하나님의 걱정거리가 되지 마시고,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셔서 하나님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는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