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강 / 당대에 완전한 자 (6:7-10)

당대에 완전한 자 (창6:7-10)

1517년 10월,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제1조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하신 것은 신자의 전 삶이 돌이켜야 함을 명령한 것이다." 회개를 촉구한 선언이었습니다. 당시 일개 사제에 불과했던 루터가 로마 가톨릭 전체를 향하여 던진 회개의 메시지였습니다.

종교개혁은 16세기에 일어났지만,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 약 400여 년 동안 교회는 서서히 타락하고 변질되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347년에 흑사병이 시작되어 약 3년간 창궐했고, 그 결과 당시 유럽 인구의 약 3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사회적 법규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목회자가 시신을 거두어야 했기에, 흑사병으로 죽은 자를 거두는 과정에서 그 병이 목회자에게도 전염되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도 속절없이 생명을 잃어야만 했고, 결국 이것이 목회자의 권위가 실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전까지 중세 유럽 사회는 목회자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하나님과 거의 동급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시신을 만지더니 일반인과 똑같이 흑사병에 걸려 죽어갑니다. 사람들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목회자와 우리가 별다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구나, 똑같은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3년이 지나 흑사병이 끝나고 나자 교회는 목회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족한 인원을 충원하기 위해 누구든 아무나 목회자로 세웠습니다. 신학 교육은 생각지도 않았고, 그다음 문제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예배를 라틴어로 진행했는데, 고전어를 배우지 않은 사람들, 신학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라틴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고전어를 외워서 예배를 집전해야 했습니다.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들어서서 인문주의가 유럽 전역을 강타했고, 평신도 중에도 그리스어, 히브리어, 라틴어에 정통한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고전어를 알지 못하는 목회자가 마치 앵무새처럼 외워서 집전하는 예배가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였겠습니까? 교회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종교개혁이 출발했고 시작되었으며, 종교개혁자들의 결과물이 개혁교회였습니다. 개혁교회의 핵심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전통의 권위보다 성서의 권위가 앞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천 년 이상이나 전통의 권위에 순복하며 사람들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교황의 말이 성서의 권위보다 우선시되고, 교회가 지금까지 붙잡고 살아왔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보다 더 우위에 있는 이런 웃지 못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그런 모든 전통의 권위에서 자유하고 해방되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권위로 돌아가야 한다고 천명한 것입니다. 둘째는, 성서는 성서로 해석한다는 원리였습니다. 이것도 지금 볼 때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철학으로, 역사로, 문학으로, 자신의 경험으로, 교회 전통 위에서 성경을 해석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천명하고 성서는 성서로 해석한다는 원리를 세웠습니다. 이 두 가지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렴됩니다. 근원으로 돌아가자,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하는 것이 개혁교회였습니다. 그 당시 개혁교회는 루터를 중심으로 여러 종교개혁자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세속화의 파도를 잘 견디고 막아낸 방파제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개혁교회의 후손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개혁교회 후손들로서 과연 우리를 위협하는 세속화의 거대한 바람 앞에 어떻게 이 세속화를 견디고 이겨내고 있느냐 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물질만능주의라는 세속화의 물결이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세상은 동성애가 마치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심각한 독소 조항들이 많이 침투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런 거대한 세속화의 바람 가운데 교회를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 위에 새롭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다시 한번 고민하고 생각해 봐야 할 때입니다. 오늘 그 해답을 노아를 통해서 찾고자 합니다. 노아가 살아갔던 세상은 참으로 혼탁한 세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예배 공동체를 뛰쳐나왔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용사가 되기를 원했고, 명성을 얻기를 원했으며,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물질문명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1. 쓸어버림과 한탄

그런 세상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물과 하나님의 한탄이 계속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여기 나오는 이 말씀 중에 이율배반적인 두 단어가 있습니다. '쓸어버리되' 그리고 '한탄함'이라는 단어입니다. 쓸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냐, 한탄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냐, 이 두 단어가 충돌합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쓸어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께서 희망을 두고 계셨던 예배 공동체가 와해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속화되었습니다.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은 예배 공동체를 다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이제는 예배드리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논리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쓸어버리고 심판하는 것이 지극히 지당하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렇게 쓸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한탄하고 계셨습니다. 나함(נָחַם), 슬퍼하고 눈물짓고 계셨습니다.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고민하고 계셨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험악하고 흉악한 자식이라 하더라도, 내가 이 자식을 호적에서 파버릴까, 나와 모든 인연을 다 끊어버릴까 몇 번이고 고민하고 밤새워 한탄하지만, 부모는 놓을 수 없는 것이 자식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계속해서 붙들고 있어야 할 명분을 찾습니다. 내가 이 아이를 놓지 않아야 할 명분이 무엇인가?

100가지를 다 잘못했다 하더라도, 단 한 가지만이라도 내가 이 아이를 붙들고 있을 수 있는 명분이 있다면 나는 이 아이를 붙들고 영원토록 함께 가겠다는 마음이 부모의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이 부모의 마음이 오늘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납니다. 쓸어버리는 것이 상식이고 논리적이나, 하나님은 쓸어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한탄하고 고민하면서 세상을 쓸어버리지 않을,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을 단 하나의 이유를 지금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고 또 찾고 눈여겨 살펴보셔서, 하나님은 세상을 쓸어버리지 않을 이유를 발견하십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2. 은혜를 발견한 노아

2-1. 마차 헨의 의미

우리는 이 말씀을 원문을 통해서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의 뉘앙스를 그대로 보면, 하나님이 능동적이고 노아가 수동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읽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마차 헨(מָצָא חֵן)이라는 말 때문입니다. 마차 헨은 마차(מָצָא)와 헨(חֵן)의 합성어입니다. 마차는 '찾다, 발견하다'라는 뜻이고, 헨은 하난(חָנַן)이라는 명사가 변형된 것입니다. 하난은 호의, 자비, 은혜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호의와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했다는 의미입니다. 누가 발견했습니까? 노아가 어디에서 발견했습니까? 하나님의 눈에서 발견했습니다. 영어 성경 NIV를 보면 아주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는데, "노아가 하나님의 눈에서 호의를 발견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노아가 신앙생활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신앙생활, 예배 공동체가 완전히 와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예배 공동체를 뛰쳐나갔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을 주목해서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하나님의 얼굴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와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육체를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하나님의 눈을 보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하는 말이 어떤 의미입니까? 이것은 구약의 전통적인 표현 가운데서 우리가 찾아야 하는데, 전통적인 구약의 표현은 하나님의 손과 하나님의 얼굴을 구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편 기자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2-2. 하나님의 손과 얼굴

하나님의 손은 하나님의 선물과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은혜가 그대로 들려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어린 사람, 이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은 하나님의 손을 사모합니다. 하나님 손에 있는 부귀와 영화와 권능과 건강과 물질을 저에게 주십시오. 하나님 뒷짐 지고 계시지 말고, 하나님의 손에 있는 모든 것을 펴서 저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건강이 필요합니다. 출세하고 싶습니다. 우리 자녀들, 우리 자식들 다 잘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모든 선물 보따리를 풀어서 나에게 달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하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선물 보따리 풀어서 주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로, 하나님의 얼굴로 만족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은혜가 되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나에게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됩니다.

시편 기자, 특별히 다윗은 하나님의 얼굴로 만족한다는 말을 여러 번 합니다. 고라 자손의 시에도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말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시편 42편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고라 자손의 시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갈망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얼굴을 갈망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찾고 또 찾는다고 고백합니다. 믿음이 성장하고 신앙이 깊은 자들의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했다는 것은 그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같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노아 당시 사람들은 출세하고 싶었습니다. 용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명성을 얻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만연한 사회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손을 구했지만, 하나님의 손이 그들에게 선물을 주지 않자 그들은 세상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래서 힘을 과시하고 강한 자가 되기를 원했고, 그들은 라멕처럼 용사가 되기를 원했으며, 명성을 얻어서 물질문명을 구축하고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결이 다르고 질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것 아무래도 상관없어도 좋으니, 저는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얼굴을 찾고 싶습니다. 이것이 노아가 행한 깊이 있는 신앙생활이었습니다.

2-3. 신앙의 결론, 은혜

그 결과 그가 하나님의 눈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에서 발견한 것이 하나님의 호의,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의 결론이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적으로 보면 그는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도 아니었고, 미련하게도 예배 공동체를 끝까지 지키며 다 나가버려도 그와 그의 가정만 하나님 앞에 가정 예배를 드리며 믿음의 제단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바보 같은 존재였고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생활의 마지막 결론이 은혜였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는 사도 요한의 그것과 굉장히 흡사합니다.

사도 요한이 인생 말년에 자신의 신앙 여정을 거의 다 마쳐 갈 즈음에 자신의 인생에 대한 결론을 이렇게 내렸습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도 요한의 인생의 결론입니다. 자신의 믿음 생활을 평생 동안 한 대사도, 늙은 노사도의 마지막 결론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서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형제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에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사도 중에 첫 번째 순교자가 그의 형제 야고보였습니다.

우리는 야고보를 사도 중에 첫 번째 순교자라 하여 추앙하지만, 형제를 잃은 요한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올라갔지만, 인간적인 슬픔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요한과 베드로에게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교회를 힘껏 섬겼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섬겼습니다. 눈물로 섬겼습니다.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핍박이 불어닥쳤습니다. 성도들이 다 흩어집니다. 물론 흩어진 성도들이 사마리아에 가서 교회도 세우고 안디옥에 가서 교회도 세웠지만,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가 흩어진다는 것, 교회의 영적 지도자인 사도 요한에게는 자신의 심장이 갈갈이 찢겨지는 고통이었고 아픔이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도 중에 가장 오래까지 살았습니다. 밧모 섬에 유배당합니다.

그곳에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그 모진 핍박을 온몸으로 겪어내야만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것이 어떻게 성공한 인생입니까? 사람의 눈으로 보면 형제를 비참하게 잃었고, 교회는 사라지고 흩어졌으며, 그는 늙은 노사도의 몸으로 여전히 구류되고 여전히 밧모 섬에 유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성공한 인생입니까? 하나님의 손에 있는 어떤 부귀와 영광과 권세는 하나도 가지지 못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가 인생 말년에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됩니까?

노아처럼, 사도 요한처럼, 우리 믿음의 윗세대 어른들도 일제강점기, 공산치하, 보릿고개, 수많은 어려움을 경험했지만, 일군 가재도구 재산 하나 없어도 하나님 나라 가기 전에 그의 인생의 고백은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였습니다. 이 고백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됩니까? 믿음이 어린 자의 눈으로는, 아직까지 세속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의 눈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아는 적극적으로 믿음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 결과 그의 인생의 마지막 고백이 은혜로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호의를 발견했습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의 믿음의 마지막 결론, 그가 발견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호의요, 축복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노아를 마지막 희망으로 붙잡은 이유입니다. 세상이 악해져 가고, 세상 모든 것이 미쳐 돌아가고,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의 이 악함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보시고 "너야말로 나의 마지막 희망이다" 하십니다. 단 한 사람,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타락한다 하더라도 오늘 내가 하나님의 마지막 희망의 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내가 너를 보니 이 세상을 쓸어버리고 싶다가도 다시 눈물 흘리고 다시 한탄하며, 내가 너를 통해서 다시 이 세상을 일으켜가고 세워가겠다"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새로운 구원 사역의 회복이 우리를 통해서, 우리 가정을 통해서, 나를 통해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의인과 완전한 자

성경은 노아를 또 다르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노아의 족보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사람이 의인이 될 수 있습니까? 사람이 당대의 완전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흙으로 빚어진 연약한 인간이, 노아도 똑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의인이 될 수 있으며 어떻게 당대의 완전한 자가 될 수 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너무 나가신 것은 아닌가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단서입니다. 그의 믿음의 조상 에녹도 역시 그랬습니다.

65세에 아들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가 완전했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완전해지고자 하고 우리가 의인이 되고자 하면,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하면 됩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자기중심적인, 자기 주도적인 인생을 내려놓고, 하나님 주도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은 나의 모든 욕망과 생각과 욕심이 내려지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인생을 따라가면 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간단합니다. 그런데 이 간단함이 속속들이 더 세세하게 들어가면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신앙생활의 기초를 접하게 됩니다.

3-1. 말씀의 기둥

우리는 믿음 생활을 시작하면서 말씀과 기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수천 번도 더 들어왔습니다. 말씀이라는 하나의 축을 붙잡고, 기도라는 또 다른 축을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수없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되지 않습니다. 이 축이 흔들리거나 무너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말씀의 기둥과 기도의 기둥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의인이 될 수 있고, 완전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시대에는 기록된 말씀을 우리가 읽고 들을 때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능력을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 17절을 보십시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한다, 완전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부족한 하나님의 사람, 나 같은 부족하고 허물 많고 문제 많은 인간을 온전하게 해서 모든 하나님의 일을, 선한 일을 행하기에 완벽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부족하다고 느끼십니까? 온전하지 못하고 완전하지 못하다고 느끼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 공부를 많이 했고, 설교를 수없이 많이 들었고,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가 온전한 자가 되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붙들고 살아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피차 섬기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들을 때 얼마나 감미롭고 좋습니까? 그런데 섬기려 하지 않습니다. 섬김을 받으려 합니다.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와서 상대를, 이웃을 대접하고 섬기는 것을 결단코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섬김 받는 것은 좋아하는데, 섬기는 것,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단 한 절도 행하려 하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이 우리 귀에 머물 때는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입니까? 아름답지 않습니까? 감미롭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랑이 우리 삶으로 연결될 때는 뼈를 깎는 고통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내 가슴에 품고, 그의 어떠함이든지 내가 용납하고 살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온전하지 못한 이유, 우리가 아직까지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따로 있고 내 인생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내는 사람이야말로, 말씀을 붙들고 실천하는 교회야말로, 그런 가정이야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교회가 새로워지고 교회가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의미는 지금까지 교회가 가져왔던 비본질적이고 비성경적인 요소를 뼈를 깎는 고통으로 도려낸다는 뜻입니다. 되지도 않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것, 그것 다 포기하고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본질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아무리 고통이 따른다 하더라도, 우리 인생에 어떤 어려움이 따른다 하더라도 말씀 붙들고, 읽은 대로 은혜 받은 대로 살아가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노아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3-2. 기도의 기둥

두 번째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내 청구서를 던지는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육체와 영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의 욕망을 채우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먹고 살고, 성적인 충동을 채우는 것으로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 살아 있는 자가 되려면 내 영이 살아 있음을 확인해야 합니다. 영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가 기도의 자리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과 영과 영으로 소통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기 때문에, 내 영이 하나님과 소통하면서 나는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가 되고, 내 영의 갈망을 채우게 되고, 하나님과 함께 소통하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육체가 이끄는 욕망대로 끌려갑니다. 관성이 있지 않습니까? 육체가 원하는 욕망의 관성대로 끌려가면 그 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하게 되면 육체의 욕망이 이끄는 관성이 멈춰 서게 됩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인간의 육체와 똑같은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주님이 두려우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나에게서 돌려달라고.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님의 육체를 입고 오신 그 두려움이 주님을 엄습해서 주님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셨습니다. 세 번 기도하신 이후에 결단하십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도 기도하셨는데, 예수님도 기도하시면서 자신의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적 갈망을 따라 행동하시고 자신의 삶을 교정해 나가셨는데, 우리가 무엇이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이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 육체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속절없이 끌려다니고 죄의 종 노릇하다가 우리 인생이 끝마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2차 선교여행을 아시아의 중심 도시 에베소로 가고 싶었습니다. 거기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간절한 자신의 열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를 두고 간절하게 기도하는데 성령께서 그를 막아세우십니다. 사도행전 16장 6절과 7절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는지, 성령께서 그를 에베소로 가는 것을 막는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기도했으니까 아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에베소로 가서 복음 전하고 싶습니다. 가도 될까요? 간절하게 기도하는데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인간성이 굉장히 강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계획과 자신의 그림, 큰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을 두고 성령과 씨름합니다. 기도하면서, 간절하게 기도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가 굴복합니다. 9절과 10절을 보십시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드디어 인정했습니다. 그가 만약 기도하지 않았다면 자기 멋대로 에베소에 가서 복음을 전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자기 열심으로, 자신의 인간성으로 전하는 복음은 산산이 흩어지는 메아리가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하지 않는 복음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기도했고,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유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 그는 그곳에서 많은 동역자들을 만납니다. 디모데를 만나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났습니다. 그 길은 참된 길이고 행복한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말씀이라는 한 축과 기도라는 한 축을 붙잡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주의 놀라운 은혜가 우리 인생을 가득 채울 것이고, 우리도 노아처럼 당대의 완전한 자요 의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신앙생활 하셔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시고, 우리 믿음의 결론이 하나님은 사랑이었더라, 하나님은 은혜였더라,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