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강 / 노아에게 이르시되 (6:11-14)

노아에게 이르시되 (창6:11-14)

한자 들을 청(聽)은 여러 글자가 조합되어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들을 청을 자세히 살펴보면 귀 이(耳), 임금 왕(王), 열 십(十), 눈 목(目), 한 일(一), 마음 심(心)이 모두 한 글자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 의미를 파악해 보면, 잘 듣는 것은 임금님의 귀와 같아서 열 번 보는 것과 같고, 마음의 분심이 일어나지 않고 한 마음으로 집중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한 글자 속에 이토록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듣는 것은 인간관계의 기본이요 소통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듣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그저 귀로만 듣는 것이겠습니까? 그 사람의 행위 언어도 살펴야 하고 눈빛도 살펴야 합니다. 집중해서 들어야 그분이 정말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한순간이라도 놓치면, 제대로 집중하지 않으면, 그분이 진정 말씀하고자 하는 바를 우리는 제대로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듣는 것이 이토록 중요하고 소통이 중요하다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는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은 사람입니다. 노아를 둘러싼 환경은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악한 환경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부패하고 타락하고 패역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과연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소통하고 교제할 수 있는지, 나는 진실로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누리고 있는 자인지 우리 모습을 함께 돌아보겠습니다.

1. 부패한 세상

창세기 6장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이 짧은 구절에 '부패하다'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나옵니다. 성경에 같은 단어가 계속 반복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이 '부패하다'라는 말의 원어를 보면 '샤하트(שָׁחַת)'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 샤하트라는 말은 '변질되어 못 쓰게 되다', '악취가 나다'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 비싼 음식이라 하더라도 변질되면 냄새가 나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곁에 두기도 역겹습니다.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 당시 사람들의 행위가 이토록 샤하트, 곧 변질되어서 악취가 나서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창조의 목적대로 사람들이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창설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의 원리를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예배 공동체를 모두 파괴해버렸습니다. 그들은 용사가 되기를 원했고 명성을 얻기를 원했으며 사람들 사이에 인기를 얻고 물질 문명을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은 경홀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런 인간들의 모습이 샤하트,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2. 심판의 선언

이런 인간을 보고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작정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것을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멸하겠다'는 말씀을 다각도로 살펴봐야 합니다.

2-1. 심판의 유예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멸하겠다는 말씀이 지금 당장인지 아니면 시차를 두고 이루어지는 말씀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심판 예고는 반드시 시차를 두고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기회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작정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과 혼인관계를 맺을 때 "나의 영이 영원히 그들과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날은 120년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은 120년의 심판 유예 기간을 작정하셨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 심판의 패턴이 원래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멸하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이것은 돌이키면 용서하겠다는 뜻입니다. 너희들이 지금이라도 돌이키면 나는 얼마든지 너희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하나님의 놀랍고 극진하신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어떤 나라와 어떤 민족도 하나님은 멸하겠다고 말씀하시고 바로 그 즉시 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그 120년의 기간은 노아에게는 사명의 기간이요, 그들을 회복시키고 전도해야 할 기간입니다.

2-2. 샤하트의 이중 의미

또 한 가지 '멸하겠다'는 말의 원어적 의미가 중요합니다. '멸하다'라는 단어도 역시 '샤하트(שָׁחַת)'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11절과 12절에 '부패하다'라는 말도 샤하트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멸하다'라는 말도 역시 샤하트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같은 단어가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어에 따라서 '부패하다'가 되기도 하고 '멸하다'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주어가 되거나 물건이 주어가 되면 '부패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샤하트가 하나님을 주어로 하면 '멸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의 부패와 인간의 타락을 하나님은 그냥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개입하셔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똑같은 단어 샤하트가 사람에게는 '부패하다'라는 뜻이 되고 하나님이 주어가 되면 '멸망시키다'라는 뜻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죄와 인간의 타락을 그냥 좌시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개입하셔서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2-3. 자유의지의 책임

우리 인간은 그러므로 자유를 조심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아주 특별한 선물을 주셨는데, 바로 자유의지였습니다. 동물과 식물과 달리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주시고 인간을 존중하시고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받은 자유의지를 인간은 한없이 남용하고 오용했습니다. 자기 멋대로 사용했습니다. 죄짓는 자유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줄 알고, 내가 내 몸으로 어떤 행동을 하건 어떤 짓을 하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착각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어마어마한 죄가 되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언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말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우리 신체 기관 중에 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롭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자유가 하나님께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인 인간을 함부로 저주하고 참소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출애굽 여정 가운데 그들이 가장 많이 한 것이 원망과 불평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을 때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고기도 마음껏 먹고 마늘과 부추도 마음껏 먹었는데 지금 이 광야에서 굶어 죽게 생겼다"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백성의 영적 지도자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그들에게 심지어 돌을 들어 치려고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그 모든 원망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원망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나, 하나님께 받은 육체를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백성들을 참소하고 저주한 것에 대해 하나님은 당연히 그들의 원망에 개입하셨습니다. 나의 몸이라고, 내 입이라고 내가 마음대로 함부로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적인 선물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세상 사람들은 성을 함부로 사용합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이 나에게 있지 않느냐고. 지금 우리나라는 간통죄까지 폐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음행하는 자를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8절을 보십시오.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마음대로 사용하면 이런 엄청난 재앙에 직면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나는 너를 존중한다"라고 대접하시고 대우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육체로, 하나님께 받은 자유의지로, 그 자유를 오용하거나 남용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내 육신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입니다.

우리가 타락하면, 부패하면,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우리를 멸망시키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깨닫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4. 멸망의 선언

또 여기 '멸망하다'라는 단어를 보면 창세기에서 처음 나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을 창설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 금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들은 선악과를 하나님의 명령과 상관없이 따먹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하나님은 인간을 멸하겠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일 때도, 가인의 후손이 하나님을 떠나 살 때도, 물질 문명을 번성시키고 살아갈 때도 하나님은 멸망시키겠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당신의 입으로 직접 노아에게 인간을 멸망시키고 말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지금까지 참아오셨던 하나님께서 왜 하필 여기서 인간을 멸망시키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희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유일하게 붙들고 계셨던 희망은 하나님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배 공동체를 지키고 살아가는 것,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의 희망으로 붙들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배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예배 공동체가 와해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희망이 사라진 그 자리를 유지할 이유나 명분이 없어졌습니다. 단 한 사람 노아에게 120년의 유예 기간을 주셨지만, 이 기간 동안 예배 공동체가 다시 회복되지 않으면 하나님은 미련 없이 이 땅을 멸망시키겠다고 작정하시고 그 마음을 노아에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희망

이렇게 본다면 오늘도 여전히 하나님의 희망은 교회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희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교회가 다 하나님의 희망이 될 수 있는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희망인가? 거기에는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희망이 되는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입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여기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는 교회, 그 교회가 하나님의 희망이 되는 진정한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희망이 되는 교회가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교회의 머리로 자리 잡고 계셔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사람이 교회의 머리 노릇을 합니다. 그 교회에 30년, 40년 출석하신 분이 교회 모든 의사결정권을 좌지우지합니다. 교회 목회자가 교회 머리 노릇을 합니다. 교회 헌금 많이 내는 분이 교회 머리 노릇을 합니다. 이런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희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다 악해져 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유지해야 할 오로지 한 가지 명분이 필요하다면 교회가 하나님의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 교회가 바로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가정은 어떻습니까? 가정이 하나님의 희망이 되려면 역시 우리 가정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 되셔야 합니다. 돈 벌어 오는 사람이 가정의 주인이 아닙니다. 입시생이 가정의 주인이 아닙니다.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자가 가정의 주인 노릇을 하는 가정은 정상적인 가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인 되고 하나님께서 가정의 주인 노릇을 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순복하고 따라가야 그 가정이 하나님의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가정의 어느 누구도 믿음 생활하지 않고 나 혼자만 믿음 생활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을 보시고 지금 그 가정을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에 위로받으시고 자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노아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은 120년간 심판을 유예하시지 않았습니까? 노아 그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보시고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마음을 품으시지 않았습니까?

나 한 사람이 우리 가정에서 유일하게 믿음 생활을 하고 있으면 외로울 때도 있습니다. 이제 그만 포기해 버릴까,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 때문에 우리 가정을 지금껏 안전하게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너지면 이제 더 이상 이 가정을 하나님이 지켜주실 명분이 없습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나 때문에 우리 가정을 지키고 돌보고 계십니다.

4. 노아와의 소통

13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라는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당히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노아 시대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소통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땅이 부패했습니다.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했습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다 타락했습니다. 악취가 나고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과 소통하는 자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노아는 모든 사람들이 다 부패했는데 여전히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말씀하시고 노아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4-1. 핑계하지 않는 믿음

비결이 무엇입니까? 만약 노아가 이 자리에 있다면 우리가 노아에게 묻고 싶습니다. 비결이 무엇이냐고. 도대체 이런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우리가 노아에게 묻는다면 그가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비결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나는 핑계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악하고 다 타락해 가도 나는 하나님의 눈 속에서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를 발견했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하루하루 승리하며 살기를 원했다. 그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핑계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세상이 다 악하니까,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가니까, 나뿐 아니라 세상이 다 이렇게 악하게 돌아가니까, 나 혼자 별나게 예수 믿는 티 내고 살 수 없지 않느냐고. 우리 가정이 그렇고 직장이 그렇고 내 동료들이 그런데 내가 별나게 믿음 생활해야 되느냐고. 사람들은 그렇게 환경과 상황을 핑계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그 환경과 상황을 핑계한 적이 없습니다.

4-2. 사무엘의 모범

세상 분위기를 핑계하지 않은 사람들이 사무엘이 어린 시절에도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3장 1절에서 3절을 보십시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성전 안에 누웠더니."

엘리가 제사장으로 있던 시절, 그 당시 사람들의 핑계거리가 있었습니다.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핑계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엘리는 자기 처소에서 두 다리 뻗고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들보다 더 이전 세대를 살았던 사람들, 모세 시절, 여호수아 시절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임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상이 흔하게 보이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원래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힘쓰고 애써서 믿음 생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사무엘은 그런 시절을 핑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전 안에 누워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말씀을 구하고 간절하게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무엘상 3장 1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무엘은 하나님께 대답합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것을 보면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하는 것은 다 핑계거리입니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지어 엘리 제사장조차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단 한 사람,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간절함입니다.

4-3. 핑계를 버리라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소통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핑계거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바쁜 일상을 핑계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하나님 나에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하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나를 얼마나 간절히 찾았느냐? 네가 얼마나 간절히 나를 만나기를 원했느냐? 네가 내 앞에 사무엘처럼 엎드려 기도하기만 하면 내가 왜 너와 소통하고 싶지 않겠느냐? 네가 나아와서 기도하지 않으니까, 나에게 무릎 꿇지 않으니까, 나는 너에게 말하고 싶어도 말할 기회가 없구나." 하나님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노아는 상황을 핑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을 핑계하는 데 이미 고수가 되어 있습니다. 아이가 어려서, 아이가 입시생이라서, 자녀가 결혼해서 손자를 돌봐줘야 하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늙고 병들어서, 바쁜 일상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 여러 상황을 핑계합니다. 그런데 노아는 핑계하지 않았습니다. 주변 모든 사람들이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때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했고 하나님의 눈에서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노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귀한 소통의 축복이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5. 방주와 사명

14절을 보십시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아마 궁금하게 여기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방주가 노아만을 위한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방주는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대표로 준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를 위한 방주이지만 노아와 노아의 가정을 위한 방주이기도 합니다.

5-1. 나를 위한 십자가

십자가가 역시 그랬습니다. 십자가는 오고 오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오늘 나 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하고 위대한 선물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가 나를 위한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분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곳곳에서 십자가가 나 한 사람만을 위한 것임을 여러 군데서 입증합니다.

누가복음 1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시다가 삭개오를 만나신 사건이 나옵니다. 그때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며칠 전입니다. 아주 분주한 시절입니다. 모든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지고 십자가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여리고를 통과해서 지나가시는 길입니다. 원래 예수님의 계획에는 여리고에서 머무를 계획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만나십니다.

삭개오의 간절한 눈과 주님의 눈이 마주쳤을 때 차마 주님은 그곳을 그냥 지나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주님은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면서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달려가시는 그 위대하고 바쁜 발걸음 가운데 주님은 한 영혼 삭개오를 위해서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곳에서 그와 구원의 언약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내가 지금 몹시 바쁘니 나 십자가 지고 부활한 후에 다시 오마."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주님은 십자가를 향해 가는 발걸음을 멈추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가복음 14장에 보면 유월절 이틀 전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이틀 전, 예수님은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베다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시면서 그들의 영혼을 붙들어 주시고 위로하시고 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위대하신 사랑의 언약입니다. 지금도 우리 예수님은 나 하나를 위해서 온 세상 만물을 운행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노아를 위한 방주, 온 인류를 위한 방주이기도 하고 노아와 그의 가족을 위한 방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2. 사명으로서의 방주

그런데 이 노아를 위한 방주가 하나님의 선물인데 하나님은 직접 만들어서 노아에게 선물로 주지 않으시고 노아에게 네가 만들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라면 하나님이 뚝딱 만들어서 노아에게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노아더러 네가 직접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1, 2년 안에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려 120년 동안 수고하고 애쓰고 땀을 흘려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노아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방주를 준비했다고 오해해서는 곤란합니다. 구원은 이미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방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이미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방주는 120년 동안 지으면서 주변 사람들을 전도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입니다. 산에서 나무를 자르고 방주를 만들면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뭐하고 있습니까?" 노아가 말할 것입니다. "120년 뒤에 큰 홍수가 일어날 것인데 부디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 방주에 타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와 존엄성과 지위를 회복하셔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전도하는 도구로 방주를 지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120년 동안 성실한 믿음 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복음 전하고 전도하라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는 이미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지금 당장 이 세상을 떠나도 천국에서 눈 뜰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왜 우리를 오늘 살려두셨을까요? 왜 우리에게 호흡을 남겨두시고 이 땅을 살게 하시겠습니까? 돈 많이 벌어서 유산 많이 남기고 자녀들 잘 먹게 잘 살게 하려고 우리를 살려두셨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려두신 이유는 사명을 감당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아직까지 믿지 않는 영혼들에게, 아직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에게 나만의 방주를 만들어서, 내가 작은 노아가 되어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바를 성실하게 행하면서 그들에게 구원의 방주를 선물해 주라고 오늘 우리에게 남은 인생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토록 소통하고 싶어 하시는데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노아처럼, 사무엘처럼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을 깊이 살펴보시고 기도로 하나님과 소통하시고 나만의 방주를 열심히 지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