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창6:14-22)
우리 교회가 이달의 책으로 선정하고 함께 읽은 책이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입니다. 이어령 씨가 쓴 책인데, 이분은 시대의 지성이라 불리며 탁월한 문장력을 지닌 분입니다.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고 서울 올림픽 개회식과 폐회식의 총괄 기획을 맡았습니다. 이화여대에서 교수로 30년 동안 봉직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글쓰기의 표본으로 여겨질 만큼 글을 잘 쓰시는 분인데, 사랑하는 딸을 먼저 하나님 품에 보내고 난 뒤 그 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쓴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책의 내용은 읽을수록 눈물 나고 가슴 아픈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딸이 어릴 때, 이어령 씨도 젊었을 때, 딸이 저녁마다 아버지의 서재 앞에서 서성이곤 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신경이 곤두서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누가 얘 좀 치워라. 내가 지금 원고 마감에 쫓기고 있는데, 애가 여기서 돌아다니게 하지 마라." 그러면 어머니가 와서 딸을 안고 건넌방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돈을 벌어서 테디베어 인형을 사주고 바비 인형을 사주고 승용차를 태워서 좋은 사립학교에 보내면 그것이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딸이 떠나고 난 이후에 생각해보니, 딸을 가슴에 품고 끌어안고 하루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고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해주며 잘 자라고 해주지 못했던 것이 그토록 후회될 수 없었습니다. 그 딸은 잘 자랐습니다. 공부도 아주 잘했습니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조기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로스쿨을 졸업했습니다. 캘리포니아주의 검사가 되었습니다. 성공 가도를 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훗날 딸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어느 교회에서 간증하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습니다. 간증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나는 시험을 볼 때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려서 도망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깜짝 놀랐습니다. 딸이 공부를 좋아하는 줄 알았습니다.
시험을 보면 항상 일등을 하고, 항상 최우등상을 받았고, 항상 남들보다 앞서 있었기에 딸이 공부를 좋아하고 즐기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딸의 고백은 달랐습니다. 아버지가 워낙 유명한 분이니까 혹시 시험을 망쳐서 아버지에게 폐가 되고 누가 될까 봐 두려웠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그 딸은 복음 안에서 이 모든 앙금을 다 해결하고 먼저 하나님 품 안에 안겼지만, 남아 있는 자의 상념과 눈물과 후회는 그대로 가슴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나와 함께 공존하는 것들을 너무 모를 때가 많습니다. 평생을 함께 살아왔지만 내 남편을, 내 아내를, 내 자식을, 가족을 정말 모를 때가 있습니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정말 너무너무 몰랐구나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그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제야 후회가 밀려오고,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보냈어야 했는데, 더 깊이 더 많이 알았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우리 마음에 가득 차오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이러하고 믿음의 시간도 역시 그렇습니다. 평생을 신앙생활 했는데, 과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안다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성령은 또 어떤 분이신지, 평생을 믿음 생활하고 교회 다녔는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나는 제대로 알고 있는지, 깨닫고 있는지, 우리 스스로에게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런 후회를 막기 위해서, 시간만 있으면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에 대해서,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계속 설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도 방주 이야기인데, 사실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이야기이고 교회 이야기입니다. 방주를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닫고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알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깊이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역청으로 칠하라
14절 말씀입니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역청을 칠하라고 하셨습니다. 역청은 방주에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방수의 기능을 담당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고생해서 큰 방주를 지었는데 물 위에 뜨기는 떴으나 물이 들어와서 방주가 침몰해 버린다면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든 것이 허사가 되고 헛수고가 되지 않겠습니까? 역청을 잘 칠해서 방주가 물 위에 떠다니는데 물 한 방울 들어오지 않도록 방수 기능을 잘 담당하게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1-1. 속죄의 의미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한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칠하다'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의 '칠하다'라는 단어는 '카파르(כָּפַר)'를 사용합니다. 카파르라는 단어의 원뜻을 살펴보면 '속죄하다', '사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청을 칠하는 것과 속죄하는 것, 사죄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페인트 칠하듯이 역청을 칠하는 것과 우리 죄를 속죄하고 사죄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출애굽 시절에 양을 잡아서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립니다. 양을 잡아서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바르면 죽음의 세력과 어둠의 세력이 우리를 침범하지 못하고 그 안에 있는 자들이 모두 안전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 말씀을 무시하고 양을 잡아서 피를 바르지 않고 있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느 집이든지 죽음의 사자가 들어가서 장자의 생명을 취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방주에 역청을 칠하고 속죄하고 사죄하라는 뜻은 이 방주 안이라는 공간이 안전한 공간이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안전하듯이, 방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칠해져 있고 우리가 그 안에 있어서 안전한 곳이라면, 이 방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교회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볼 때, 교회의 본질이 도대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여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피 흘리신 십자가 보혈을 선포해야 하고, 우리 믿음 생활하는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오직 이것만 붙들고 살아가야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를 감당하고 의지하며 믿음 생활을 하는 성도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교회를 다니면서 믿음 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감싸 주신 공동체로 생각하고 여기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바른 교회 공동체가 아니라 세속화되어 세상의 것들을 발라서 교회를 더 아름답고 더 멋지고 사람들 보기에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모습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회개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출애굽 시절에 바로의 궁전이 으리으리했을 것입니다. 바로의 신하들의 집도 고관대작의 집이라서 엄청난 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양을 잡아서 피를 바르지 않았습니다. 속죄의 피가 카파르, 칠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그 집에 마음껏 드나듭니다. 그래서 그 집의 장자 생명을 취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민족 노예의 집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허름한 집입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집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 죽음의 사자가 들어올 수 없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그 집을 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을 잡아서 그 집을 칠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의 능력이 그 집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죽음의 사자가 감히 얼씬도 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가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교회가 크기를 자랑하고 재정을 자랑하고 넓이를 자랑해야 할 것이 아니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 자랑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는 가장 안전한 공동체가 됩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를 안전하다고 여길 수 있는 이유는 이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이 가득 차고 넘치기 때문입니다.
1-2. 세속화 극복
또 하나, 역청을 칠하라는 이 말씀은 세속화의 거센 물결을 이겨 내고 견뎌 내라는 뜻입니다. 방주가 창일한 물 위를 떠다녀야 합니다. 물이 새지 않도록 방주의 안팎을 역청으로 꼼꼼하게 칠해야 합니다. 그래야 물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교회 역시 이런 것을 미루어 살펴본다면, 세상의 거대한 세속화의 파도가 교회 곳곳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교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열심히 역청을 칠하는 존재들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성도들의 삶의 현장이 세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한 주 내내 세상에서 일하다가 일주일에 한 번 교회 와서 예배드립니다. 세상과 교회를 왔다 갔다 하며 살고 있습니다. 교회도 역시 세상의 한가운데 발을 딛고 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거대한 세속화의 물결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세상은 물질로 대표되는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경쟁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경쟁에서 일어서지 않으면, 남을 짓밟지 않으면 내가 언젠가는 짓밟힐 것이라는 불안감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지위와 명예가 세상의 최고 가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 교회의 가치는 다르지 않습니까? 십자가와 헌신과 희생과 사랑의 가치입니다. 서로 섬겨주는 가치입니다. 내가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을 돌려대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입니다.
우리가 정신줄 놓고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살아가다 보면 세상에 살고 있는 관성을 교회에도 그대로 가지고 들어옵니다. 물질이 세상에서 최고이기 때문에 교회도 물질이 최고가 되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용사와 명성을 가진 자로 사는 것이 최고이기 때문에 교회도 출세하고 성공하라고 사람들에게 부추기고 가르칩니다. 세상에서 경쟁에서 일등 되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교회도 경쟁에서 일등 되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가르칩니다. 잘못된 것 아닙니까? 역청을 제대로 칠하지 않아서 세속화가 교회에 들어와서 이미 그 교회는 침몰하는 교회가 되고 만 것입니다.
멀쩡히 건물이 있다고, 우리가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리고 있다고 이 교회가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역청을 칠하지 않고 세속화의 물결을 우리가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면, 이미 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방향이 거꾸로 가야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진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세상의 가치를 전복시키고 세상의 가치를 뒤집어엎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그들에게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복음의 역사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보여주고 살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교회 공동체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이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역청을 열심히 칠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교회의 유일한 가치가 되고 있습니까? 세속화의 거대한 물결을 교회가 다 견디고 이겨내고 있습니까? 다시 한번 살펴보시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 언약을 세우리니
18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언약이라는 말이 여기서 처음 등장합니다. 성경이 기록되고 창세기 6장, 바로 여기서 처음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방주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2-1. 연합의 은혜
여기 언약은 '베리트(בְּרִית)'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 명사는 동사 '바라(בָּרָא)'에서 왔습니다. 바라 동사는 '묶다'라는 뜻입니다. 원래 둘이었는데 하나로 묶었다는 뜻입니다. 결혼도 역시 언약 아닙니까? 두 사람이 하나가 된 언약입니다. 원래는 둘이었지만 하나가 되어서 이제는 한 몸으로 한 가치를 보고 살겠다는 것이 바라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었다는 뜻은 이제 하나님과 노아가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공동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내가 가는 곳에 네가 가고 네가 가는 곳에 내가 가겠다, 우리가 함께 언약 공동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노아뿐만 아니라 믿음의 조상들, 그리고 우리와도 언약을 맺고 "너와 나는 하나다"라는 말씀을 끊임없이 하고 계십니다. 우리 편에서 보면 이보다 더한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나 같은 못난 인간을, 나 같은 썩어 없어질 죄인을 하나님은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내가 뭐라고, 내가 무엇이관대 하나님은 나와 하나가 되게 하시고, "내가 너를 결단코 놓지 않으리라, 내가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고 너와 함께하겠다"고 언약 백성이 되게 해주신 것은 은혜 중의 은혜라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 이 언약을 보면, 하나님은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나 같은 존재와 언약을 맺어서 하나님이 덕 보는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와 언약을 맺으신 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밖에, 나 같은 존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라고밖에 말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와도 언약을 맺으셨고 아브라함과도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루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자손을 준다고 약속하셨는데 아직까지 저에게 자손을 주지 않으시니까 저는 저희 집에서 기른 똘똘한 종을 내 후사로 삼겠습니다.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라는 종이 있는데, 이 종에게 내 유산을 다 물려주고 내 아들로 삼으면 안 될까요?" 하나님께서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데려다가 저 하늘의 무수한 별을 보여주십니다. "저 하늘의 별들처럼 너의 자손을 번창하고 많아지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부족하셔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는데, 짐승을 잡으라 하십니다. 짐승을 잡아서 반으로 쪼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사이를 지나가십니다. "만약 내가 너와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내가 이 짐승들처럼 쪼개어지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이유가 없는데, 쪼개어짐의 언약과 약속을 맺으신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창세기 15장 17절과 18절 말씀입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프라테스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하나님이 횃불로 임재하셔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시고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어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와 은혜입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특권과 권세를 허락해주신 것이 십자가 언약입니다. 방주 언약에서 쪼개어진 횃불 언약으로, 이제는 십자가 언약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귀하고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2-2. 언약 백성의 삶
그런데 언약은 상호적입니다. 함께 맺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노아와 방주 언약을 맺으신 것은 "내가 너와 너의 가족의 생명을 보존할 테니 너는 방주를 지어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횃불 언약을 맺으신 것은 "내가 너에게 자손과 땅을 약속하노니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게 살아가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십자가 언약을 맺으신 것은 우리가 그 은혜에 감격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삶을 보십시오. 생명을 살리는 언약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제 방주를 노아가 지어야 합니다. 방주의 크기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의 도량형으로 환산해 보면 길이가 무려 136미터나 됩니다. 너비가 22.5미터나 되고, 높이가 13.5미터나 됩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방주를 120년 동안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이 지어야 했습니다.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언약을 받을 때는 은혜이고 감사하지만, 그 언약의 당사자가 되어서 언약 백성으로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그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13년 동안 하나님과 단절하고 이스마엘의 재롱을 보느라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고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셔서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십자가 언약이 주어졌지만,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존재인지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성실하게 언약을 감당하며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약을 잘 지켜갈 수 있도록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과 27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힘들 때, 하나님과 묶여져 있으나 떨어져 나가고 싶을 때, 하나님과 함께하고 싶지 않을 때, 괴롭고 힘들 때, 언약 백성으로 살기 어려울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갈 바를 알게 하시고, 위로하시고, 언약 백성으로 살아갈 만큼 능력과 은총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 성령을 의지해서 언약 백성으로서의 바라 언약을 잘 지켜나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생명을 보존하라
또한 방주를 통해서 살펴보는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그곳은 생명을 보존하는 곳입니다. 방주 밖은 다 멸절되고 죽음이 넘쳐나는 곳이었습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으리라." 땅에 있는 것들이 다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 있는 것들이 다 멸절당하는 것이 방주 밖 세상입니다. 피 바른 방주 안에 들어와 있지 않으니, 역청을 바른 곳에 들어와 있지 않으니 그곳에는 생명이 멸절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방주 안은 생명이 보존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노아의 가족은 물론이고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다 생명의 보존을 받았습니다. 19절과 20절 말씀입니다.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이 말씀이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방주란 생명을 살리는 공간이라는 뜻입니다.
방주는 곧 교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을 죽이는 곳이 교회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인간의 감언이설과 인간의 경쟁과 인간의 말로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곳이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고,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3-1. 영을 살림
하나님은 사람을 영과 육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교회가 사람을 살린다는 뜻은 영혼을 살리고 육을 살린다는 뜻입니다. 영이 산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육이 아무리 풍성해도 우리 인간은 뭔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갈망이 있습니다. 해소되지 않은 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해소합니다. 우리의 영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경험해 본 사람은 아는 놀라운 비밀이고 역사입니다.
생명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 말씀을 내가 아멘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메마른 영이 다시 소성케 되고 다시 회복되고 말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로 힘이 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 말씀입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그것도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것이 말씀 사역 아닙니까? 주께서 말씀을 전하셔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려주셨습니다. 놀라운 역사로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해 주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하고 있다는 것, 교회 공동체에 있다는 것은 생명력 있는 말씀 안에 거한다는 뜻입니다. 전하는 저와 같은 목회자는 열심히 말씀을 준비해서 하나님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하고, 성도들은 그 선포된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살아내는 삶을 살아갈 때, 그때 우리의 영이 소성케 되는 역사를 경험할 것입니다.
3-2. 육을 살림
또한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교회라서 육체도 살리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4절에서 16절 말씀입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위선이라는 말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영혼을 살린다는 미명하에 가난하고 영적으로 힘들고 육체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돌보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운 시절, 교회 안팎의 어렵고 힘든 분들, 한 끼 식사가 없는 분들, 삶이 너무 캄캄하게 앞이 막힌 분들을 교회가 섬겨야 하고 교회가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의 생명을 살리는 교회가 되고 생명을 보존하는 방주 같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을 행하실 때, 벳세다 들녘에서 말씀 듣기 위해 온 사람에게 말씀만 전하고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지쳐 있는 것을 아시고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라간다면, 교회 공동체가 생명을 살리는 곳이 되어야 하고 육체와 영혼을 함께 책임지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4. 다 준행하라
노아는 이 모든 명령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라 언약에 기초해서, 하나님께 언약 백성으로서의 삶을 다 준행했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준행하였더라",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요.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신 이 바라 언약의 명령을 노아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준행했습니다. 역청을 칠하라는 명령도,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도,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하시는 명령도 노아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준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노아의 인생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홍수가 일어난 해는 노아가 600세 되던 해였습니다. 방주를 120년 동안 지었다고 한다면, 노아가 480세부터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500세 된 이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는데, 그러면 자녀를 낳기 전부터 노아는 방주를 지었다는 뜻이 됩니다.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혼자 지었든지, 그 아내와 단둘이 지었든지, 자녀들이 성장하고 자라서 방주 짓는 데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주려고 했다면 이미 방주 지은 지 40년이 훨씬 지난 후였을 것입니다.
120년 방주 인생 가운데 그는 삼분의 일을 혼자만, 그것도 외롭게 방주를 지어야만 했습니다. 예배 공동체가 붕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다 뛰쳐나갔습니다. 예배 공동체는 와해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용사가 되고 명성을 얻고 인기를 얻고 물질문명을 향유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자기 혼자 하나님 명령을 수행하느라 방주 짓고 있습니다. 미친 노인네라고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과 맺은 바라 언약에 기초해서, 나의 생명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서 그 명령을 성실하게 하루하루 120년 동안 잘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 나무 그늘 아래 그의 가족들이 생명을 얻었습니다. 많은 생명들이 다시 살리심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노아처럼 다 준행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교회를 통한 사명들, 나중에 몰랐다고 후회하지 말고, 이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사명들을 잘 깨닫고 노아처럼 다 준행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노아처럼 큰 나무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