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 빛, 질서, 채움 (1:3-25)

빛, 질서, 채움

본문: 창세기 1:3-25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성장합니다. 성장하다가 황금 같은 장년기를 보냅니다. 그런데 그 시간은 길지 않고 굉장히 짧습니다. 그 황금의 기간을 보내고 나면 나이 들고 늙고 병들고 그리고 죽어 세상을 떠납니다. 이것은 누구나 겪는 인생의 생로병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발달 과정을 완전한 발달 과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발달 단계를 보다 더 세분해서 나눕니다. 1943년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의 발달 단계를 심리적 욕구의 단계로 다섯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그 첫 번째 단계가 생리적 욕구이고, 두 번째는 안전의 욕구입니다. 세 번째는 애정과 소속감의 욕구이고, 네 번째가 존경의 욕구이며, 다섯 번째가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매슬로우는 이러한 인간의 발달 단계 과정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생리적 욕구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으면, 그 사람은 몸은 성장할지언정 정상적인 인간의 발달 과정을 겪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애정과 소속감의 욕구 단계에만 머물러 있고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사회화가 덜 된 사람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발달 과정은 서양의 학자들만 말한 것이 아니고, 동양에서도 역시 비슷한 사고가 존재했습니다.

공자는 논어 위정 편에서 역시 사람의 발달 과정을 이렇게 나누고 있습니다. 열다섯이 되면 지학(志學)해야 하고, 서른이 되면 이립(而立)해야 하며, 마흔이 되면 불혹(不惑)해야 하고, 쉰이 되면 지천명(知天命)하고, 예순이 되면 이순(耳順)하며, 일흔이 되면 종심소욕(從心所欲)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열다섯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뜻을 품지 못하고, 서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으로 바로 서 있지 못하고, 마흔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세상일에 흔들려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사람은 큰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학자들이 이렇게 인간의 발달 단계를 나누는 것을 우리는 보면서 참 지당한 말씀이라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적인 발달 단계도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고 있는데, 신앙생활하는 사람의 영적 발달 단계 중에 가장 획기적인 단계는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과 하나님을 만나고 난 이후의 달라진 삶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사건을 다루고 있으나, 사실 우리 인간에게 적용시켜 볼 말씀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새 창조 이전에 우리의 인생은 흑암과 혼돈과 공허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는 흑암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공허에서는 채움으로 변화됩니다. 그런데 가끔 믿음 생활을 잘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도 아직까지 이런 변화를 확실하게 겪지 못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는 믿음 생활한다고 했는데, 수십 년 신앙생활하고 있는데 확실하게 변화되었는지, 확실하게 창조 이전의 단계에서 창조 이후의 단계로 넘어갔는지, 우리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서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흑암에서 빛으로

하나님의 창조는 첫째로 흑암에서 빛으로의 창조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3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 1:3)

하나님께서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는 그 첫날에, 하나님의 첫 번째 말씀이 "빛이 있으라"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빛이 있으라" 말씀하심으로 흑암이 물러났습니다. 흑암은 어둠과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빛이 조금 있고 어둠이 훨씬 더 많은 어둠이 아니라, 흑암은 빛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빛이 없는 삶은 어떻게 됩니까? 빛이 없으면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흑암 가운데 있어서는 어떤 일도 시작해 볼 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암흑천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태초 첫날에 빛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이제부터 내가 일하겠다, 빛을 창조하심으로 이제는 내가 특별한 일을 하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요한복음 1장 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여기는 생명이라는 말과 빛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생명은 누구입니까? 빛은 또한 누구입니까? 요한이 말하는 생명, 요한이 말하는 빛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빛이 되시고 예수님께서 생명이 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면, 창조 이전에 우리의 상태는 예수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흑암이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저마다 열심히 일을 합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일을 하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 생명을 만나기 이전, 빛 되신 주님을 만나기 이전 우리의 삶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린 열심히 수고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수고했고 돈도 열심히 벌었습니다. 땀도 열심히 흘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맺은 열매를 한번 보십시오. 그 열매 가운데 과연 생명을 살리는 열매가 있었는지, 그 열매 가운데 정말 창조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가 있었는지, 그 열매는 모두 다 나를 기쁘게 하는 열매 아니었습니까? 그 열매는 모두 다 나의 영광을 위한 열매 아니었습니까? 사실 그 열매는 사람을 살리는 열매라기보다도 사망의 권세에,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이 기뻐하는 열매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 생명 되신 주님, 빛 되신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창조 이후에 우리가 맺은 열매는 다릅니다. 생명이 있는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께서 생명이 되시고 예수께서 빛이 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1.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

우리는 이런 인생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중세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굉장히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어려서부터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큰 기대를 가졌습니다. 법률을 공부해서 위대한 법률학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그를 카르타고로 유학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는 법률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고전을 공부했지만 그러나 마음을 뜨겁게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카르타고에서 마니교에 심취해 버렸습니다. 이교도의 사술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어떤 여인을 만났습니다. 사랑에 빠졌습니다. 동거합니다.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깊은 슬픔과 시름에 빠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아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더 빠져들고 심취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어둠 가운데, 흑암 가운데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밀라노에서 대주교로 활동하던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듣습니다.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의 마음속에 지금까지 고민했던 것들이 다 풀리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읽기로 결심합니다. 성경을 읽다가 어느 한 구절에 와서 그의 인생이 획기적으로 바뀌어집니다. 로마서 13장 12절에서 14절까지 말씀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2-14)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빠집니다. 지금까지 내가 입고 있던 옷이 어둠의 옷이었구나, 이제는 이 어둠의 옷을 벗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빛의 갑옷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되겠다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는 주님을 만나기 이전에도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해 보니, 하나님 만나기 이전에 했던 모든 일은 생명을 살리는 열매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기쁜 일이었고 어머니의 가슴을 후벼파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빛의 갑옷을 입고 빛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면서 그가 했던 수많은 일은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첫 번째 열매가 마니교의 교리를 반박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단의 사술에 빠져 들어가고 마니교 교리에 심취해 갔는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마니교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책을 냅니다. 두 번째 그의 열매는 고백록을 저술한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 당시 로마 치하에 살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세상의 가치와 향락에 빠져서 막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록을 통해서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 고백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서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위대한 기독교 고전의 명작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남긴 고백록을 읽고 눈물 흘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 후에 위대한 기독교 변증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진리의 집을 짓고 수많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1-2. 빛 가운데 거하라

빛 가운데 걸어 들어간 인생을 사는 사람,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말씀 4절을 보시겠습니다.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창 1:4)

하나님은 빛 가운데로 걸어가고, 흑암의 세력을 벗고, 빛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보고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제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싶습니다." 찬양도 하지 않습니까?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그런데 우리는 왜 빛으로 살지 않습니까? 어둠의 일을 벗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빛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서, 빛 되신 주님과 함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주 행복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2. 혼돈에서 질서로

두 번째, 하나님의 창조는 혼돈에서 질서를 만드신 창조입니다. 오늘 말씀 9절과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9-10)

14절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창 1:14)

오늘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창조는 혼돈에서 질서를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창조 이전의 상태가 어땠습니까? 어디가 바다인지, 어디가 땅인지 알 수 없습니다. 흑암 때문에 해도, 달도, 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후에 세상의 모든 물을 한 곳에 모았습니다. 바다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바다가 생기니 반대급부로 땅이 드러납니다. 질서가 생겨난 것입니다. 바다는 바다대로, 땅은 땅대로. 하나님께서 하늘의 광명체를 만들어 세우셨습니다. 해는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달과 별은 밤을 주관하게 하셨습니다. 이전에는 암흑천지였지만, 이제는 온 우주의 삼라만상이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 들어서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영광이요, 창조의 신비입니다.

2-1. 영적 질서란 무엇인가

여러분들은 질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만약 여러분들에게 "여러분은 질서 가운데 살고 있습니까?"라고 질문한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 어떤 분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목사님, 저는 질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법과 질서를 잘 지키고 살고 있고요. 저희 집에 오시면 우리 집은 항상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습니다. 좋은 옷도 입고 있고 머리도 항상 단정하게 가꾸고 밖으로 나갑니다. 그러므로 저는 질서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렇게 대답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질서이지만, 그보다 더욱 본질적인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질서는 영적인 질서입니다. 다시 한번 질문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영적 질서 가운데 살고 계십니까? 이렇게 질문하면 "영적 질서가 뭡니까?" 아마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영적 질서는 하나님을 제일 꼭대기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의 최고 정점의 자리에 모시고 사는 것, 이것이 영적 질서입니다. 하나님을 내 마음 중심 가장 중요한 자리에 모시고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영적 질서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사십니까? 우리 가정에 하나님께서 주인 되어 계십니까? 이 질문 앞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공생애 생활을 하시던 중에 한 제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이렇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1절과 22절입니다.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 8:21-22)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떤 느낌으로 읽습니까? 주님은 참 인정도 없고 인륜도 없으신 분인가, 그런 느낌으로 이 말씀을 읽으시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최고 정점, 꼭대기에 누가 계시냐, 너희 인생의 주인은 누구냐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하나가 주님께 묻지 않습니까? "주님, 제 아버지를 장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결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의 아버지는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냐 아니면 죽은 너의 육체의 아버지이냐? 너는 죽은 너의 육체의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는 존재냐 아니면 내가 오늘 전하는 이 말씀을 따르는 존재냐? 너 결단하라! 너 인생의 최우선 순위를 분명히 하라! 우리 주님은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질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정점에는 누가 있습니까? 재산, 물질, 직장, 내 건강, 내가 추구하는 이상, 이런 것들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우리 인생에 제일 정상에 계셔야 됩니다.

2-2. 질서와 화평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3절입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4:33)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기록해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냈는데, 당시 고린도 교회는 굉장히 혼란스러웠습니다. 문제가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중에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가 은사 사용의 문제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가 넘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방언하는 사람들, 병 고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 예언하는 사람, 가르치는 은사를 가진 사람. 그런데 이런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있었습니다. 방언하는 은사끼리 모여서 "우리 은사가 최고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 은사가 최고다." 예언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은사가 최고다." 그렇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너희들에게 이 모든 은사를 주신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이신데 왜 다투느냐? 너희들이 다투는 이유는 하나님 한 분을 제일 꼭대기에 모시지 못하고, 하나님을 모시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냐? 너희 마음 중심에 과연 하나님이 계시기는 한 것이냐? 이렇게 질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 마음 중심에 계셨다면, 하나님께 받은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은사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각양 은사에 합당하게 행해야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화평의 하나님이시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말해야 옳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 마음 중심에 계시고, 하나님이 정점에 계시면 질서가 생기고, 그 질서는 곧 화평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다투고 분열이 일어나고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정점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주인 노릇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이 교회에서 "내가 이 교회 가장 많이 다녔어. 내가 이 교회에서 헌금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야. 내가 이 교회에서 뿌리가 깊어." 이러고 내가 주인 되려고 하기 때문에 교회의 분열과 다툼이 끊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주인 되시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질서를 잡아 주시면 그 질서는 곧 화평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정치판이 왜 매일 저렇게 시끄럽게 싸웁니까? 사람이 주인 노릇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정권을 잡으려고 하고, 그 정권이 곧 자신의 권력이 되고, 그 권력이 곧 돈이 되기 때문에, 사람이 권력의 제일 꼭대기 정점에 올라가려고 하기 때문에 정치판이 저렇게 매일 시끄러운 것입니다.

가정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우리 가정에 이것만 있으면 우리는 다툼이 없을 것이다. 돈이 많으면 다툼이 없을 것 같습니까? 가정의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면 가정에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까? 가정에 건강한 사람만 넘쳐나면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하나님이 주인 되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인 되시는 가정이 되어야 가정에는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가정에 하나님께서 주인 되셔야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나아가 보겠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우리 마음 심연 깊숙한 곳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항상 걱정이 있고, 염려가 있고, 분열이 있고, 다툼이 있고,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마음 중심에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자리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중심에 하나님께서 자리 잡아 계시고, 내 마음 중심에 하나님께서 주인으로 앉아 계시면, 우리 마음에는 절대로 분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돈이 인생의 주인이 되고, 건강이 인생의 주인이 되고, 내 마음 중심에 사람이 주인이 되면, 마음은 항상 갈등과 번민으로 가득 차고 복잡할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 중심에 혼돈에서 질서가 생기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정에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진실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중심에 좌정하시고,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 주권자로 모셔야 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공허에서 채움으로

하나님의 창조는 세 번째로 공허에서 채움으로의 창조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20절과 21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20-21)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시기 전 모든 공간은 텅 빈 공간이었습니다. 그냥 땅이 있었습니다. 바다가 있었습니다. 하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땅에는 나무가 자라고 그 나무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땅이 충만해졌습니다. 바다에는 물고기가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 하늘 공중에는 새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공허했는데, 온 창공과 세계가 채움의 공간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채움은 보통의 채움이 아니라 가득하고 충만한 채움이 되었습니다. 2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창 1:22)

충만하라! 번성하라! 하나님의 창조는 빈약한 충만이 아니었습니다. 가득한 충만이요 풍성한 번성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우리가 진실로 주님 안에 있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새 창조의 피조물이 되면, 우리 삶은 공허함에서 가득 차고 충만하고 번성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3-1. 공허한 인생의 비극

그런데 예수님 이전에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이전에 우리의 삶은, 먹어도 먹어도, 가져도 가져도,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인생, 그래서 항상 목마르고 배고픈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난 이후에 우리 삶은 충만한 인생이 됩니다. 그런데 가끔 믿음 생활에 영적인 느낌이 떨어지고, 영적인 충만함이 사라지고, 믿음 생활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린 다시 기갈과 공복감과 공허감을 느낍니다.

다윗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그것도 열두 지파를 통일한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왕비가 있었습니다. 후궁도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주변에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공허감을 느꼈습니다. 밧세바를 아내로 삼고 싶었습니다. 그 욕망에 사로잡히자 그녀의 남편 우리아까지 죽이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죄를 지었습니까? 그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 있지 못했을 때, 하나님 앞에 영적인 공복감과 영적인 공허감을 제대로 말씀으로 채우지 못했을 때, 그는 죄악으로 달려가고 말지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 혹시 굶주려 있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혹시나 텅 빈 영혼이지 않습니까? 사탄은 우리의 텅 빈 영혼에 미끼를 던집니다. 사탄은 그 틈을 절대로 놓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 깊숙한 곳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득 채워야 됩니다.

3-2. 자족의 비결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에서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 나는 풍부할 때도 궁핍할 때도 만족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어떻게 그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많이 가져서, 많이 누리고 있어서, 물질이 많아서, 건강해서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빌립보서를 기록하던 때에 막 감옥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예수님으로 충만했습니다. 말씀을 가슴에 가득 안고 있었습니다. 말씀이 가득 차 있으니 그는 하나도 공허감이 없었습니다. 충만한 그의 영혼으로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말씀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흑암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공허에서 채움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말씀이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에 과목을 내라 하니 과목이 났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은 모여서 바다가 되라 하시니 바다가 되고, 드러난 것은 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야 우리 인생의 흑암이 떠나가고 빛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가 제대로 서야 우리의 혼돈이 질서로 바뀌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공허함을 채워서 우리는 채움 가운데 자족하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디 하나님의 말씀 떠나지 마시고, 그 말씀 앞에 제대로 무릎 꿇고, 그 말씀 앞에 제대로 엎드려서, 말씀이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는 놀라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흑암이었고 혼돈이었고 공허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후에 그 흑암은 빛이 되었고, 혼돈에는 질서가 세워졌고, 공허에는 채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오늘 우리가 이 인생을, 하나님의 새 창조의 인생을 영원히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때로는 사탄 마귀가 다시 흑암으로, 다시 혼돈으로, 다시 공허로 우리를 끌고 가려 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 꾐에 넘어가지 않도록 도우시고, 언제나 빛 되신 주님, 우리의 질서를 잡아 주시는 주님, 말씀의 채움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 가운데 살아가고 달려가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옵소서. 우리가 주님 앞에 영원히 깨어서 진리의 말씀 가운데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