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생기 (창2:4-7)
미켈란젤로는 조각과 회화에서 탁월한 재능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특히 조각 분야에서 대리석이라는 재료를 능수능란하게 자유자재로 다루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대리석을 만지고 다루었고, 그를 후원한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데 메디치 덕분에 정원에는 값비싼 대리석이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대리석으로 자기가 원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에 힘입어 스물네 살 되던 해에 그는 위대한 작품 피에타를 만들어 냅니다. 피에타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이 금방 화면에서 뛰쳐나올 것 같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스물네 살에 이런 위대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위대한 조각가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그는 1501년부터 1504년까지 다비드상을 조각합니다. 다비드상은 높이가 5미터 이상이나 되고 무게는 6톤 이상이나 나가는 엄청나게 큰 대형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비드상을 만들었던 그 대리석을 이전부터 눈여겨보고 탐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501년에 이 작품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이 대리석은 1464년부터 어떤 조각가가 만들려고 접근하여 조각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대리석을 다룰 수준이나 실력이 되지 않아서 금방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로부터 11년이 지나서 1475년에 또 다른 조각가가 대리석을 가지고 조각을 시도했지만, 그도 역시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대리석은 임자 없이 주인 없이 나뒹굴고 있다가 26년이 지나서 150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임자를 만납니다. 미켈란젤로가 드디어 이 대리석을 가지고 위대한 다비드상을 조각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재질을 가진 대리석이라 하더라도 주인을 만나지 못하면, 다듬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아름다운 조각 작품이 탄생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대리석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을까요? 그는 재료에 대해서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질이 어떠한지, 어느 면을 깎고 어느 면을 덜 깎아야 아름다운 인체를 보여줄 수 있는지, 그리고 이 대리석을 조각하기에 어떤 도구를 쓰는 것이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지, 그는 모든 것을 환하게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의 재료를 가장 잘 알고 계셨습니다. 대리석이 미켈란젤로를 만나서 위대한 작품이 된 것처럼, 우리 인간도 하나님 손 안에 있을 때 위대한 피조물로, 아름다운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 창조의 재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어떤 재료를 사용하셨느냐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 재료를 사용하셨을까? 이 재료를 사용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빚으신 뜻과 의도가 무엇일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면 오늘 깊이 살피고 생각해 보시고,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빚으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함께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인간 창조 전의 상태
우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 직전에 그 상태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5절과 6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없었던 것을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오늘 이 말씀을 읽다 보면 창세기 1장 말씀과 충돌을 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 1장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을 나누시고, 비를 내릴 수 있는 준비도 이미 다 갖춰 놓으셨고, 초목도 다 만들어 놓으셨고, 채소도 돋아나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보면 비도 내리지 않고 초목도 채소도 없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1장과 2장이 충돌하는 것 아닌가 우린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렇게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모든 것을 다 시스템을 완벽하게 갖춰 놓으시고,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시스템은 있었으나 아직까지 시스템을 가동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어 놓으시고, 비를 내릴 준비도 하셨고, 초목도 만들어 놓으시고, 채소도 다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인간이 창조되어서 인간이 재배할 때까지 하나님은 인간 창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1-1. 동역자로 지으심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동역자이고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 세계를 인간의 손으로 운영해야 되기 때문에, 아직 인간이 태어나기 전, 인간이 창조되기 전 하나님은 하나님 뜻대로 하나님 마음대로 하나님의 손길대로 이 모든 것을 운행하지 않고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엿볼 수 있는 하나님의 귀한 마음은 인간을 배려하시는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인간을 건너뛰고 일한 적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실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바로에게 가게 하시고,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 한 번도 모세를 건너뛰고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가끔 모세가 하나님의 화를 돋구는 일도 있고, 모세가 불충할 때도 있고, 불순종할 때도 있고, 모세가 충동적인 성격을 부릴 때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오래 참고 또 기다려 주셨습니다. 왜 그러셨느냐 하면 하나님이 1장에서 말씀하신 '너와 나는 동역자라'는 이 말씀,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동역자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 동역의 길 때문에 길이 참고 오래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1-2. 상호적 언약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됩니다. 원래 언약은 상호적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맺은 동역의 언약은 하나님만이 인간을 건너뛰어서는 안 되고, 인간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일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예배드리는 우리는 과연 하나님 없이 일하고 계신 적은 없었습니까? 하나님께 모든 것을 결재 받고, 하나님께 여쭤보고 일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은 적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작은 일부터 시작해서 큰 일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건너뛰고 일해 버립니다.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 문제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 이 문제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저에게 말씀하시면 제가 이 문제 하나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엎드려 구하고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그냥 우리 멋대로 해 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문제가 생깁니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그때 좀 말리시지. 왜 하나님 그거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우리 멋대로 일해 놓고서는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언약은 상호적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건너뛰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건너뛰지 않고, 하나님을 통해서 일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비도 내릴 준비가 되어 있었고 초목도 준비하시고 채소도 준비하셨으면서도 인간이 창조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셨던 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흙으로 지으심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어떤 재료로 창조하셨는지 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은 인간을 땅의 흙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여기에 '흙'이라는 말은 아파르(עָפָר), 즉 먼지, 티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창조하셨다는 말을 읽어보면 '아, 우리 인간이 별것 아니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사실 창세기 1장까지만 보더라도 인간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처럼 느껴졌습니까?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죄를 미워하시는 성령의 거룩함으로 우리 인간을 다 함께 하시고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를 동역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복을 주셨습니다. 먹고 살 걱정 없게 해 주셨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인간은 하늘 꼭대기에 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거의 동급으로 느껴집니다. 그런데 인간 창조의 재료를 보니 먼지, 티끌, 아파르(עָפָר), 흙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흙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2-1. 겸손의 존재
첫 번째 의미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흙은 모든 동물들이 밟고 다니는 곳입니다. 사람도 다 밟는 곳입니다. 동물들의 배설물이 뿌려지는 곳입니다. 그것이 흙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것 중에 가장 낮고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것이 흙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눈과 우리 생각은 저 하늘 꼭대기에 가 있지 않습니까? 항상 우리는 상승지향적입니다. 성공해야 하고, 출세해야 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야 되고, 남들이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배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고, 불법과 탈법을 써서라도 사람들을 끌어내리고 내가 그 자리에 올라가야 되고, 우린 그렇게 항상 올라가고 싶은 욕망을 가집니다.
이런 인간의 욕망과 욕심을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지극히 높은 산꼭대기에 예수님을 데리고 갑니다. "여기서 나에게 한번 절하라. 그러면 저 아래 보이는 모든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사탄은 예수님을 그렇게 시험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시험을 매순간 던지고 있습니다. 높아지려는 욕망,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려는 마음. 그런데 기억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흙으로 만드신 것은 가장 낮고 낮은 겸손한 존재로 살라는 뜻이었다는 사실을.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옷을 입고 오셨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 모습을 성육신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예수님이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은 우리와 똑같은 흙의 존재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원래 자리는 높고 높은 하늘 보좌였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하늘 보좌 버리시고 이 땅에 흙과 같은 존재가 되어 내려오셨습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우리가 교만한 마음이 들 때마다, 내가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오르고 싶은 인간의 욕심으로 상승지향적인 욕구가 들 때마다 그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흙으로 지으셨다는 사실을. 나는 원래 흙이어서 가장 낮은 곳에, 동물들의 배설물이 뿌려지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나는 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2-2. 생명을 품는 존재
두 번째,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흙으로 지으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모든 것을 품고 생명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흙에 식물이 심겨지고 나무가 심겨지면 자라서 열매를 맺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흙은 그 식물과 나무를 품어 줘야 됩니다. 내치면 안 됩니다. 최선을 다해서 품어주고, 그리고 흙이 가지고 있는 모든 양분을 생명을 다해서 다 공급해 줘야 됩니다. 땅의 힘, 지력을 식물과 나무에게 공급해 줘야 나무가 열매를 맺을 것 아닙니까?
우리가 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통해서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고, 그들을 품어 내고 열매를 맺도록 힘쓰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세월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길게는 70, 80 그 이상을 살았는데 과연 나를 통해서 얼마의 생명이 열매를 얻었는가?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품어 왔는가? 나는 얼마나 많은 존재에게 든든한 밭이 되었는가? 나는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섬기고 그들을 살리고 내가 가진 양분을 다 주어서 그들이 열매 맺도록 도와주었는가?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흙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존재 의미인데, 하나님의 창조 설계인데 과연 나는 그렇게 살아왔는가?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밭이 되고 흙이 되어야 됩니다. 부모는 자녀를 품어 줍니다.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나쁜 자식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품어주고 그들에게 부모가 가진 모든 것을 다 공급해 줍니다. 왜냐하면 그 자식이 부모라는 흙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흙들의 모임 공동체입니다. 흙들이 모였으니 교회는 좋은 밭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이 교회 안에는 병든 나무가 와서 심겨지면 빨리 소생하고 살아나야 됩니다. 사람들이 교회 와서 많은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흙들이 모여서 좋은 밭이 되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지난 64년의 교회 역사를 보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우리 교회에서 생명을 얻었는가?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우리 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누리고, 그들의 귀한 열매로 공동체를 기쁘고 행복하게 했는가? 교회의 교회 됨을 돌아보셔야 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자신을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내가 밭이다. 내가 흙이다. 나에게 뿌리를 내려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생명을 주겠다. 최선을 다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너에게 공급해 주겠다." 우리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지 않습니까?
주님의 별명이 무엇입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붙여준 별명,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해서 이 별명을 지었지만, 역설적으로 이 별명은 예수님의 사역을 가장 잘 드러내는 별명이 되었습니다. 세리와 창기, 누구도 품어 주지 않았습니다. 다 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품어 주셨습니다. "나에게 와서 쉬어라." 세리와 창기들이 예수님이라는 좋은 밭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 교제하셨습니다. 함께 즐기고 함께 마시고 그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세리 마태가 있었고, 예수님은 여리고 성의 세리장 삭개오도 품어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내쳐진 사람, 아무도 품어 주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 주님은 그들을 다 품어 주셨지 않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따르는 제자라고 하면서, 우리가 예수님 닮고 싶다고 찬양하고 노래하면서 왜 우리는 사람들을 품어 주지 않습니까? 그들의 못난 모습도, 그들의 약한 모습도, 그들의 죄인 된 모습도, 흙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다 품어주고 용서하고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살려 줍니다. 흙과 같은 존재는 그런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반면 콘크리트 같은 존재도 있습니다. 콘크리트에는 씨앗 알갱이 하나 같다 놓아도 그 작은 씨앗 하나 자랄 틈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부모라고 다 같은 부모가 아닙니다. 자식을 학대하는 부모도 있고, 죽음으로 내모는 부모도 있습니다. 교회라고 다 같은 교회가 아닙니다. 생명이 자라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교회도 있습니다. 목회자라고 다 같은 목회자가 아닙니다. 부디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섭리대로 흙 된 사명을 잘 감당하시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흙의 한계와 생기
그런데 흙은 한계도 있습니다. 흙의 한계가 무엇일까요? 흙은 영원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집니다.
3-1. 흙의 한계
과거 학교 다닐 때 찰흙 공작을 해보신 경험이 있을 겁니다. 찰흙으로 뼈대를 만들고 노끈으로 테를 감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다가 찰흙을 붙입니다. 동물의 모양도 만들고 사람의 모습도 만듭니다. 마른 후에 예쁜 색을 칠합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이 만든 찰흙 공작을 뒤에다가 전시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습니다. 한두 달 지나고 나서 내가 만든 찰흙 공작을 만져보면 바스러집니다. 손에서 다 묻어서 다 흘러내립니다. 왜 그럴까요? 물기가 말랐고 빠져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흙으로 빚어졌기 때문에 50, 60, 70, 80 인생을 살다 보면 아프고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연약한 우리 인생이기 때문에 모세의 기도, 시편 90편에서 인생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편 90편 6절입니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는도다"
우리 인생, 흙과 같은 인생을 풀로 비유했습니다. 아침에 꽃이 피어 아름답게 피어 있다가도 저녁이 되면 시들고 말라 버리는 풀과 같은, 이 흙으로 지어진 인생, 우리는 우리 육체에 목숨을 걸면 안 됩니다. 육체에 우리의 소망을 두면 안 됩니다. 우리 육체는 흙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아프고 늙고 병들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육체 속에 담겨 있는 영혼입니다.
사람들은 육체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늙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이 육체를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할까? 어떻게 하면 이 육체가 좋은 것을 먹고 사람들에게 존귀함을 받을까? 그런데 그것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육체 속에 담겨 있는 영혼의 가치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신 생기이기 때문입니다.
3-2. 생기를 불어넣으심
7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흙으로서는 그냥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미켈란젤로가 피에타상을 만들고 다비드상을 만들었지만 거기까지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사람이기 때문에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에 생기, 하나님의 생기인 네샤마(נְשָׁמָה)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살아 움직이는 생령, 네페쉬 하야(נֶפֶשׁ חַיָּה)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생기를 부여받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온기가 우리 속에 호흡으로 불어넣어졌을 때 우리는 드디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건 세상 모든 만물이 똑같은 이치입니다.
그 옛날, 먼 옛날 벳새다 들녘에서 한 어린아이가 예수님에게 자기 도시락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어머니가 예수님 말씀 들으러 간다고 하니까 "이 도시락을 배고프면 가서 먹어라" 하고 주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가 도시락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가 예수님께서 하루 종일 설교하시는 모습을 보니까, 예수님이 얼마나 배가 고프실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서 듣기만 해도 배가 고픈데 우리 예수님 얼마나 배가 고프실까? 주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비쩍 마른 어린아이의 도시락이 예수님의 손에 올려졌을 때 거기에 예수님의 온기가 닿았고, 예수님은 그것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을 때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남자만 5천 명, 여자, 노인, 어린아이까지 수만 명이 벳새다 들녘에 모여든 사람이 그것을 먹고 배불렀습니다.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비쩍 마른 한 아이가 가져온 도시락에도 주님의 온기가 닿으니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데, 우리 같은 하나님의 걸작품 인간이야 말해서 뭐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온기가 우리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면, 하나님의 호흡이 오늘도 나와 함께 하고 있다면 우리는 놀라운 역사를 만드는 하나님의 주인공, 위대한 걸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 과연 나는 하나님의 온기, 하나님의 호흡으로 살고 있는가? 하나님의 호흡은 성령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움직이고 있는가?
3-3. 죽음의 의미
우리가 여기까지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창조를 보면 죽음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창조가 흙과 하나님의 생기의 결합이라고 하면, 죽음은 흙과 하나님의 생기의 분리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셔서 우리는 생령이 되어서 거룩한 영으로 움직이게 되었는데, 그런데 죽음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육체가 바스러지고 사라지는 것을 죽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진짜 무서운 죽음, 정말 두려운 죽음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다윗입니다. 시편 51편 10절과 11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이 이 시를 언제 지었습니까? 밧세바와의 죄를 짓고 나단 선지자가 그에게 찾아와서 "바로 당신이 이런 악한 사람입니다" 이 책망을 받은 후에, 하나님께 엎드려 통회하면서 눈물로 침상을 적시면서 지은 시가 바로 이 시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한 말,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주께서 흙과 같은 나라는 존재에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는데, 이것을 거두어 가시면 그것이 바로 죽음임을 다윗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비록 간음죄도 짓고 살인죄도 지었고, 십계명 가운데 세 가지 죄나 지었지만 하나님, 제발 나에게서 성령은 거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거두시면 그때부터 저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사오니 주여, 성령은 거두지 마십시오" 간절하게 구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망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사울입니다. 사울도 한때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난 이후에 미치광이가 되어서 그가 얼마나 불안정한 삶을 살았는지 다윗은 직접 자기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엎드려 간구하고 통회자복하며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과연 인간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어떤 재료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호흡을 불어넣어 주신 그 의미와 이유가 무엇인지 깊이 살펴보았습니다. 흙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겸손하게 살고, 모든 생명을 포용하고 심겨 주는 이들에게 열매 맺게 도와주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흙의 한계를 인정하시고,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살아 숨 쉴 때 그제서야 우리는 살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함께 아름다운 믿음생활 해 가시는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흙으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생기를 우리에게 불어넣어 주셔서 살아 움직이는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흙으로 지음 받아서 겸손하게 살아야 했지만 언제나 교만하게 남을 짓누르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흙으로 지음 받아 사람을 포용하고 생명을 살리는 존재가 되어야 했건만, 콘크리트 같은 바닥으로 한 존재도 한 생명도 살리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용서하여 주옵소서. 부디 겸손하게 하여 주시고, 부디 사람을 포용하고 생명을 살리고 열매 맺게 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생령이 되게 하셨는데, 우리는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성령을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성령과 함께 동행하며 죄짓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거룩한 인생을 살아서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대로 살아가는 복된 인생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