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 에덴동산 (2:8-17)

에덴동산 (창세기 2:8-17)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설계자가 있고 창조주가 있습니다. 건축물에도 설계하신 분이 있습니다. 설계자는 자신의 철학과 목적과 의도를 충분히 건축물에 담고자 합니다. 건축가는 설계자의 도면을 받아서 현실 공간에서 그 뜻대로 건축물을 만들어 갑니다.

우리나라 전통 가옥을 보면 '사이 공간'이라는 아주 특별한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간은 이를테면 툇마루 같은 곳인데, 집안에 있는 사람이 신을 신고 나가지 않아도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자신을 찾아온 손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바깥 경치와 풍경을 볼 수 있고 바깥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 집을 방문한 손님 입장에서도 신을 벗지 않아도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주인장과 담소도 나누고 차도 한 잔 나눌 수 있는 곳입니다. 그 사이 공간이 바로 툇마루입니다. 집안에 있는 사람과 집 밖에 있는 사람이 서로 겹쳐지는 그 사이 공간, 이것이 우리나라 전통 가옥의 아주 독특한 특징입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아파트 생활을 주로 하고 있는데, 굳이 아파트에서 사이 공간을 들자면 발코니를 들 수 있습니다. 밖에 나가지 않아도 발코니에 나가면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고 바깥 경치를 마음껏 느끼고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발코니 확장이 이제는 보편화되어서 발코니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옛날 전통 가옥을 설계한 사람의 설계 의도와 목적이 다 사라지고 무색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할 때면 주방장이 만들어낸 음식에도 저마다의 이유가 있습니다. 자주 가지는 않지만 인도 음식점에 가면 작은 종지에 레몬을 띄워서 내오는 그릇이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그 물을 들이키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손을 씻으라고 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도 음식의 특성상 손을 사용해야 되기 때문에 손을 씻고 소독하라고 주는 물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는 이유가 있고 창조주의 설계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장을 읽으면서, 그리고 오늘 2장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온 천지만물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뜻과 목적과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이곳에 두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귀한 목적과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발견하고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경작하며 지키라

우선 8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에 사람을 두셨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에덴은 어떤 곳입니까? 가장 완벽한 곳, 가장 아름다운 곳, 지상 낙원, 파라다이스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아름다운 에덴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두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그만큼 사람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과 아들 그리스도의 순종과 성령님의 거룩함의 형상을 본받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피조 세계를 맡기셨습니다. 대리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만 해도 너무너무 감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감격에 겨운데,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 두셨습니다. 가장 복되고 가장 아름다운 곳에 말입니다.

그 옛날 창세기에서 에덴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요? 하나님의 그 사랑하시고 극진하신 마음이 가장 잘 묻어나는 곳은 두말할 나위 없이 교회입니다. 왜 교회입니까? 교회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바꾼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온몸의 물과 피를 다 쏟아 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당하신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 고통을 당하시고 주님께서 바꾸신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난 이후에 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자, 그들에게 교회라는 공동체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다운 곳 아닙니까?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이 묻어 있는 이 교회를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맡겨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에 두시고 우리에게 교회를 맡겨 주신 것은 그냥 두신 것이 아닙니다. 목적이 있습니다.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사람을 두신 것도 목적이 있고 사명이 있습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두 가지 사명이 있습니다. 첫째는 경작하는 사명, 둘째는 지키는 사명이 그것입니다.

1-1. 섬김의 사명

여기 '경작하다'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아바드(עָבַד)'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노동하다, 땀 흘리다 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에덴동산에 대한 개념과는 너무 달라서 당혹스럽습니다. 에덴동산은 일하지 않아도 마음껏 먹고 마시고 놀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땀 흘려서 수고하지 않아도, 노동하지 않아도 에덴동산은 그래서 그곳이 파라다이스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에덴에도 경작하는 수고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거기 두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에덴동산에서 땀 흘려서 노동하고 수고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사명입니다.

그런데 '아바드(עָבַד)'라는 말에 숨겨진 의미가 있습니다. '섬기다'라는 뜻입니다. 누구를 섬긴다는 뜻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경작하고 수고하고 노동하여 땀 흘리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오늘 교회에 적용해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에 두신 이유는 교회에서 섬기라, 봉사하라, 일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나를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습니다. 집사요, 권사요, 장로요, 목사요, 그리고 성도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 달란트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뽐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에덴처럼 값진 교회를 주시고 우리를 여기에 두셨으니 너는 여기서 경작하여라, 수고하여라, 땀을 흘려라, 애써라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그 위대한 뜻에 여러분을 비추어 보십시오. 얼마나 수고하고 계십니까? 요리조리 피해 다니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는데 그 직분에 합당한 사명에 맞게 얼마나 성실하게 그 일을 감당하고 계십니까? 땀을 흘려야 됩니다. 노동해야 되고 경작해야 됩니다. 교회를 일구고 가꾸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영광 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이유입니다. 그 옛날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을 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1-2. 보존의 사명

두 번째 사명은 지키는 사명입니다. '지키다'라는 말은 '샤마르(שָׁמַר)'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이 말은 '보존하다'라는 뜻입니다. 온전하게 원형을 보존하다, 있는 그대로 원형을 보존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에 두시고 에덴의 원형을 보존하게 하셨습니다. 훼손하지 말라, 내가 이 에덴을 준 내 뜻을 온전히 잘 지켜서 그 뜻대로 계승시켜 나가라, 이 에덴을 파괴하지 마라. 하나님은 그렇게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교회에 적용해 볼까요? 교회의 원형과 교회의 본질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그 옛날 2000년 전 초대교회가 처음 생길 때나 지금이나,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고 알파고와 AI가 판을 치는 이 시대나 변하지 않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흘러가도 교회의 변하지 않는 본질, 그 한 가지는 하나님이 주인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본질은 결단코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주인 되는 것은 교회가 왜곡된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교회가 왜곡되기 시작했습니다. 권력이 들어왔습니다. 세속 권력이 교회를 집어삼켰습니다. 사람이 주인 노릇 합니다. 목회자가 주인 노릇 하고 교회에서 헌금 많이 하는 사람들이 교회의 주인 노릇 합니다. 세속화의 물결이 밀려 들었습니다. 물질만능주의의 세속주의가, 세상의 권력이 교회를 잠식해 갔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온몸을 다해서 그 교회 원형을 지키려고 했습니까? 우리는 몸을 다해서 막아 내서 교회의 본질과 원형을 지켜내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수단과 어떤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키라고 하신 교회의 사명을 지켜가야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넋 놓고 보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가 되는 사명, 이 교회의 원형을 지켜나가는 '샤마르(שָׁמַר)'의 사명을 우리는 능력으로 감당해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을 주신 것은 오늘 우리에게 교회로 주신 것과 똑같습니다. 경작하며 지키게 하신 것, 오늘 우리가 교회에서 땀 흘려 수고하고 교회의 원형과 본질을 지켜나가는 믿음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생명나무의 길

두 번째 하나님께서 에덴에 두신 것은 9절에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먹기에 좋은 것, 보기에 좋은 것들을 하나님은 에덴동산에 가득 두셨습니다. 그런데 아주 특별한 두 나무가 있었는데, 생명나무도 있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얼마나 많습니까? 수많은 학자들의 많은 논문도, 많은 글도 있습니다. 생명나무가 무엇인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무엇인지. 지금 우리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안다면 내가 그 열매를 먹지 않을 텐데, 생명나무의 열매를 안다면 나는 그 열매를 먹고 영생할 텐데, 사람들은 그런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에덴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아닙니까? 에덴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권능은 말씀으로 나타났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의 주권자이시며 동시에 말씀의 능력자이십니다. 말씀으로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에덴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

말씀을 잘 지키는 자는 생명나무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지키지 않고, 말씀을 어기고, 말씀을 거역하는 자는 선악과에 손을 들어서 따 먹는 자들입니다. 말씀을 잘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지키지 않고 손을 들어 선악과를 따 먹는 자, 말씀을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형벌을 예고하셨습니다.

16절과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2-1. 선택의 갈림길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생깁니다. 불편한 마음이 생깁니다. 생명나무만 두시지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두셔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손을 들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을 줄 다 알고 계셨던 것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악의 창시자가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방향을 바꾸어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 하나님이 동물과 식물을 지으신 것과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것은 그 근본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식물을 지으실 때 프로그램을 미리 심어 놓으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봄이 되면 꽃이 피고, 여름이 되면 수목이 우거지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고, 겨울이 되면 잎이 다 떨어집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동물들은 본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살라고 이미 그들에게 심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하나님과 동식물은 종속적인 수직 관계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동역자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넣어 주셨지 않습니까?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다스리도록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동역자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동역자로 존귀하게 대하셨습니다. 인격적으로 대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게 하시고 이 선택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선택을 하도록 하나님은 도움을 주십니다. 순종이 의미 있는 순종이 되기 위해서는 불순종을 극복할 때 그 순종이 의미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제거된 상태로 생명나무의 길만 가도록 프로그래밍되었다면, 우리는 로봇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 존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존재는 하나님의 심부름꾼 그 이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 선과 악 이 두 가지의 선택의 갈림길에 있었다는 것은, 앞으로 모든 인류와 지금 우리까지 우리는 이 선택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하고 살아오셨습니까? 선의 선택도 있고 악의 선택도 있고, 그 갈림길 가운데 항상 고민하며 살아오셨지 않습니까?

2-2. 좁은 길의 선택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다 일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선택하면 이것이 선한 길이다, 이 길 끝에는 영광의 열매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 길, 악의 길을 선택하면 너는 망하고 너는 책임을 져야 될 것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너무나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두 갈래길 가운데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들이 악한 길을 선택할 때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제재하지 않으셨습니다.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올라왔습니다. 기근이 있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을 막아 세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한 길이 무엇이고 악한 길이 무엇인지 아브라함은 이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말씀하셨고, 그 땅에서 너는 나의 약속을 기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어기고 내려가는 아브라함, 하나님은 제지하지 않습니다. 그 길 끝에 어떤 결과가 있을지 누구보다도 아브라함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자기 화를 못 이겨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쳐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지팡이를 꺾지 않습니다. 그냥 그대로 두셨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한지 모세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밧세바 사건에서 그 많은 그 은밀한 죄를 저지를 때도 하나님은 개입하지 않습니다. 선한 길이 무엇이고 악한 길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다윗에게 이미 하나님은 다 일러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길과 악한 길의 그 과정과 결과를 다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선을 선택하거나 악을 선택하거나, 선택도 우리의 몫이고 결과와 책임도 우리가 져야 됩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개입하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선한 길은 어떤 길입니까? 좁은 길 아닙니까? 예수께서 가신 그 좁은 길 아닙니까? 좁은 길로 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주님이 이미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좁은 길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그 길은 엄청나게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 끝에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걸어갔던 길, 그 주님께 예수님께서 가셨던 그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길과 세상의 길 가운데서 지금도 갈등하고 있습니다. 이 좁은 길로 가야 생명의 길인 줄 알면서도 사실 그 길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손짓하기 때문입니다. "이 넓은 길로 와라, 이 화려한 길로 와라" 그 길 가운데서 우리는 아직도 갈등합니다. 그 옛날 에덴동산의 사람들이 생명나무의 길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길 사이에서 갈등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선택이 이렇게 가혹한 것인데, 하나님 차라리 생명나무의 길만 남겨 두시지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창조하셨습니까?

2-3. 인격적인 관계

그런데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자녀를 키우면서 해답을 얻습니다. 자녀를 기르다 보면 자녀에게 부모가 "너 이 길만 가야 돼"라고 해서 자녀가 그 말을 듣는 연수가 지극히 짧습니다. 몇 살 동안 그 말이 먹힐까요? 서너 살만 되면 먹히지 않습니다. 그 이후부터 부모는 자녀에게 선과 악의 길만 일러줄 뿐입니다. "너는 이 길을 선택해야 해, 이 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야, 이렇게 가야 네가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데 악의 길로 가면 파멸의 길이다, 멸망의 길이다, 그 길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길이다." 다 일러주고 선택은 자녀의 몫으로 남겨둬야 됩니다. 그것이 부모가 자녀를 인격적으로 대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가슴 졸이며 걱정하며 염려하며 매일 하나님 앞에 기도할 뿐입니다. 내 자녀가 선의 길을 선택하기를, 내 자녀가 생명나무의 길을 선택하기를.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관점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도 가슴 졸이며 지금도 기도하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 지금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가 생명나무의 길을 걸어가기를 하나님은 지금도 누구보다도 바라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창조물로 이 땅에 지음받은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우리를 보내시면서, 그 옛날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던 것처럼 생명나무의 길을 걷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선택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어떻게 응답해야 되겠습니까? 당연히 우리는 생명나무의 길, 그 좁은 길, 협착한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와 디자인을 기억하시고 생명나무의 길, 말씀 순종의 길을 걸어가시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흘려보내는 강

세 번째 하나님께서 에덴에 두신 것은 강이었습니다. 10절에서 14절까지 말씀을 보겠습니다.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 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에덴동산에 강이 있었습니다. 그 강은 에덴동산 전체를 적셨고 사방으로 뻗어나가서 퍼져나갔습니다. 강은 어떤 의미입니까? 강은 곧 생명을 주는 젖줄입니다. 고대 문명은 강을 중심으로 다 발원했습니다. 강이 이르는 각처에서는 생명들이 살아납니다. 사람들은 강가에 집을 짓고 삶의 터전을 마련합니다. 강에서 물을 대서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강이 없으면 물이 없으면 사람들은 살 수가 없습니다.

에덴동산에서 강이 흘러 나가서 모든 인근 각처를 적셨다, 그 땅들을 다 둘러 흘렀다는 것은 에덴동산이 생명의 발원지였다는 뜻입니다. 에덴에서는 강이 흘러 나왔습니다. 에덴에서는 모든 것이 다 가두어져 있는 곳이 아니라 흘러나가는 곳이었습니다.

3-1. 생명을 살리는 곳

그러므로 에덴은 오늘날의 교회와 똑같습니다.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곳이 되어야 됩니다. 교회는 끌어 모으는 곳이 아니라 교회는 흘려보내는 곳이 되어야 됩니다. 교회에서는 생명이 나와야 되고 교회에서는 강 같은 물이 끊임없이 흘러 나가야 됩니다. 그래야 교회다운 교회가 됩니다. 그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 옛날 에스겔 선지자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을 때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에스겔 47장 8절과 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바닷물이 살아난다고 하였습니다. 바닷물이 어떻게 살아납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야 바닷물이 살아납니다.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생물들이 다 살아난다고 하였습니다. 에스겔은 성전 문지방에서 조금씩 조금씩 흘러나오는 물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물이 흘러 나와서 사람의 발목을 채웠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더니 사람의 무릎에 올랐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허리춤까지 찼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니 사람이 능히 헤엄쳐서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습니다. 그 강이 흘러서 죽은 바다를 살리고 그 강이 흘러서 그 강이 이르는 모든 각처의 죽었던 생물들이 다 살아났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곳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3-2. 교회의 본질

그런데 남유다가 망할 때 바벨론에 포로로 이스라엘 백성들, 유다 백성들이 잡혀갈 때 그때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셨습니다. 정확히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군대가 와서 그 성전을 다 불태워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이방 군대들의 손에 왜 성전을 그냥 그대로 방치해 주셨을까요?

그 성전은 불타 마땅한 성전이었습니다. 성전 안에 살고 있었던 종교 지도자들, 그들은 좋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금은보화를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전 안으로 사람들이 갖다 바치는 금과 은과 각종 보석들, 먹을 것, 입을 것들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기는 했는데 나온 적은 없었습니다. 성전에서 생명을 살리는 물줄기가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골수를 뽑아 먹는 곳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그 성전은 존재 의미와 존재 가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타락한 제사장들, 거짓 선지자들이 난무하는 그 성전, 하나님은 그 성전은 불타 마땅한 성전이라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전에 있던 각종 금은 보석과 그릇들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그 그릇들을 다 옮겨서 이방 신전의 그릇들로 다 사용하게 해 버리셨습니다. 그 성전은 파괴되어 마땅한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새로운 성전의 비전을 보여 주겠다. 에스겔 선지자가 70년 포로 생활을 다 끝내고 돌아오면 이 성전에서 놀라운 생명을 살리는 물줄기가 흘러갈 것이다. 그 성전의 새로운 비전을 본 것입니다. 그 성전의 원형이 바로 에덴동산에서 흘러 나가는 강물이었습니다. 에덴에서 흘러 나가는 이 강물, 인근 각처 모든 생명을 살려내는 강물,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질이고 교회의 원형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지금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흘려보내는 교회입니까? 우리 주변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 덕분에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입니까? 생명수가 강같이 흘러넘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흘러넘치고 있는 교회입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끌어 모으는 건 잘 아는데, 가지고 오라고 하는 건 잘 아는데, 내보내지 못하는 교회라면 교회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면서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원형을 이미 처음부터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다 쏟아 내셨습니다. 옆구리에 창이 들어가고 손과 발에 못이 들어갔습니다.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흘리셨습니다.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우리는 그 피 값으로 구원받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몸에서 모든 것이 다 흘러 나왔기에 우리는 그 덕을 지금도 보고 누리고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흘려보내지 않습니까? 우리 가정이 교회라면 우리 가정에서도 흘러 나가야 됩니다. 우리 존재가 교회라면 나라는 존재에서부터도 자꾸만 흘러 나가야 됩니다. 사랑도, 미소도, 물질도 끊임없이 흘려보내고 나누어서 교회의 원형과 본질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맺음말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거기 두신 것들을 보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신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을 두셨습니다.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교회를 주시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일하게 하셨고, 교회의 본질과 원형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생명나무의 길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길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좁은 길, 생명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흘려보내는 것이 에덴의 본질이었음을, 또한 교회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귀한 말씀을 붙들고 마음에 새기고, 에덴동산을 기억하고, 하나님 뜻대로 최초의 설계자의 의도대로 살아가시는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