돕는 배필 (창 2:18-25)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와 철학자이자 작가인 시몬 드 보부아르, 이 두 사람은 각자의 영역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는데, 바로 계약 결혼을 발표한 일입니다. 두 사람은 대학 교수 자격 시험을 앞두고 사랑에 빠졌고, 시험 결과 사르트르가 수석, 보부아르가 차석을 차지합니다. 그 후 1929년에 계약 결혼을 발표했습니다.
계약의 조건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서로 사랑하되 상대방이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을 이해하고 용납한다. 둘째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셋째는 경제적인 것은 스스로 알아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계약 조건에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계약이 발표되자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지성인들 사이에서 찬반 논의가 벌어졌습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전통적인 결혼관과 가족관을 해치는 행위이며, 지성인들이 어떻게 이런 결정과 행동을 할 수 있느냐고 비판했습니다. 반면 찬성하는 사람들은 결혼과 가정에 대한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며, 역시 지성인들답다고 환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찬반 양론의 두 부류가 모두 동의하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얼마나 가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관계는 곧 끝장나게 될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1929년에 이루어진 계약 관계가 사르트르가 세상을 떠난 1980년까지 이어졌습니다. 무려 51년 동안이나 그들의 계약 관계가 계속된 것입니다. 물론 사르트르의 여성 편력도 있었고, 보부아르가 다른 남성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으나 그들의 계약 관계는 51년 동안이나 이어져 왔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사람들은 이들의 결혼 생활을 다시 재평가합니다. 51년 동안 이어졌으니 성공한 결혼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두 사람의 결혼이 성공한 결혼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결혼의 모델이 됩니까? 이 두 사람은 그들이 생각한 결혼관과 가족관을 '계약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51년 동안 지속해 왔습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우리도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관, 결혼관이 있습니다. 물론 내가 생각한 대로 결혼 생활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저마다 생각한 대로 그 과정을 성실하게 이루어 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아주 중요한 것이 빠져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어떻게 보고 계시느냐"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첫 번째 가정을 세워 주신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정을 어떻게 세워 가기를 원하시는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과 결혼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으로 우리 가정을 한번 비추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가정은 하나님께서 최초로 디자인하신 그 모습대로 살고 있는지, 혹시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혹시 그 문제가 하나님께서 원래 디자인하신 모습대로 살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닌지, 지금이라도 고칠 의도는 없는지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가정을 대입하고 살펴보시며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돕는 배필의 의미
먼저 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한가운데 아담을 두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혼자 사는 것이 별로 좋지 않게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지 않게 보셨다는 말이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자녀들 중에 30대 후반이 되고, 40대가 되고, 50을 바라보게 되어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자녀를 보면 부모의 가슴이 타들어 갑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해서 아이 낳고 행복하게 잘 살아야 되는데, 왜 우리 자식은 저렇게 살아야 되나 걱정이 머리끝까지 올라옵니다.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들이 느끼는 '보시기에 별로 좋지 않은 모습'처럼 하나님도 그런 느낌이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혀 다른 의미로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게 보셨습니다.
19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대자연을 아담에게 맡겨서 통치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그의 동역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일을 혼자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일하는 아담을 하나님이 가만히 지켜보고 계시니, 사고의 확장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그 문제를 뛰어넘어 갈 동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간혹 자기 독선과 교만과 아집에 빠질 때도 있는데, 혼자 있다 보니 그것이 독선인지 아집인지 아무도 그에게 알려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라고 아무도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자기만의 세상에 갇히기 쉽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돕는 배필을 짓겠다고 결정하셨습니다.
1-1. 에제르 케네그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돕는 배필'이라는 의미와 우리가 지금 관습적으로 생각해 왔던 '돕는 배필'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특별히 우리나라와 동양 문화권에서 '돕는 배필'은 우리가 생각하는 사고방식에 갇혀 있습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이 주가 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부가 됩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은 우리나라 동양 문화권에서는 주로 남편이 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은 아내가 됩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주종 관계가 있는 것을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합니다. 남편이 주가 되고 아내가 부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주종 관계가 형성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돕는 배필의 관계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그런 의미로 돕는 배필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돕는 배필'의 원어 의미는 '에제르 케네그도'(עֵזֶר כְּנֶגְדּוֹ)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에제르'(עֵזֶר)는 '도움', 즉 신적인 도움을 의미합니다. '케네그도'(כְּנֶגְדּוֹ)는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동등하다', '마주 보고 바라보다', '반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돕는 배필로 여자를 세우셨다는 말은 서로 동등하게, 아담이 여자를 동등하게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제대로 잘 살피고 바라보면 그 사람의 약함이 보입니다. 그 사람의 약점이 보이고 부족한 부분이 보입니다. 잘 살펴보면 내가 가진 강점으로, 내가 부여받은 달란트로 그 사람의 약점과 단점을 채워 주게 됩니다. 서로 제대로 살펴보지 않으면, 서로가 다른 방향과 다른 데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 사람이 어디가 약한지,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능히 살펴보면 그분의 약점과 단점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동등한 눈높이에서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살피고 바라봐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돕는 배필을 지으신 것입니다.
1-2. 반대의 의미
두 번째 의미는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갈 때는 강하게 반대해 줘야 됩니다. 브레이크를 밟아 줘야 됩니다. 도둑질하는데 망보는 것은 돕는 배필이 아니지 않습니까? 잘못된 길로 달려가면 그 길은 사망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길입니다. "그 길로 가지 마십시오"라고 말해 주어야 됩니다. 아담이 사명을 감당할 때 자기 혼자 독선과 교만과 아집과 고집에 빠져서 그 길을 완전히 닫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을 때, 그때 하와는 "그건 틀렸습니다"라고 말해 줘야 됩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돕는 배필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면 이 돕는 배필의 의미를 우리 가정에 한번 적용해 보십시오. 우리 가정은 돕는 배필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충실하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가정의 공평과 평등이 이루어져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주종 관계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동역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인격적으로 우리 인간을 대우해 주셨습니다. 동물을 다루듯이, 식물을 다루듯이 하나님은 사람을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동역자로 창조해 주셨는데, 하물며 가장 사랑하는 가정의 남편, 가정의 아내를 대하는 우리가 어떻게 주종 관계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가정은 서로 동등하게 서로를 바라봐야 됩니다. 서로의 약함과 서로의 약점을 살피고, 내가 가진 것으로 저 사람을 채우고, 내가 가진 장점으로 저 사람을 세워 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진실로 동등하게 여길 때 그 아름다운 동역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정이 과연 동등하고 평등한 인격적인 관계인가, 혹시 그러지 못하다면 우리는 이것부터 고쳐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을 주셨는데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 가정은 건전한 비판이 살아 있는가 질문해 보셔야 됩니다. 창조를 위한 파괴가 살아 있어야 됩니다. 건전하게 "당신의 모습이 잘못된 것이다"라고 가감없이 말해 줄 수 있어야 됩니다. 어떤 가정을 보면 가부장적인 가장의 권위가 살아 있는 가정이 있습니다. 남편의 말이 하나님의 말보다 더 우선하는 가정이 있습니다. 어떤 말도 남편의 말을 넘어서지 못하는 가정이 있습니다. 정상적인 가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돕는 배필은 반대가 자유로워야 됩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완전한 분이시지만 사람은 허점투성이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쓰러지고, 잘못된 길로 갈 때도 있습니다. 그때 이렇게 세워 줘야 되고 지적해 줘야 됩니다.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공동체, 이 공동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돕는 배필로서의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우리 가정을 살펴보시고, 우리 가정 모두가 돕는 배필로서의 말씀을 충실하게 지켜 나가는 믿음의 가정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한 몸의 원리
21절과 22절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저는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흙에서 창조하시고, 하와를 창조하실 때는 아담의 갈빗대를 필요로 하셨을까? 왜 그렇게 하셨을까? 여러분들은 궁금한 적이 없으셨습니까? 그런데 깊이 묵상해 보면 하나님의 그 깊은 속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너희 두 사람은 다른 몸이 아니라 한 몸이다"라는 것을 말씀하고 싶으셔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두 사람은 한 몸입니다. 두 사람은 원래부터 한 몸이고, 한 몸의 공동체 의식과 한 몸의 연대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그것 때문에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를 통해서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되는 부부로서의 가정생활은 연대 의식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한 몸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중요합니다. 내가 배가 고프면 상대방도 배고프고, 내가 하기 싫은 일은 상대도 하기 싫고, 내가 기쁘면 상대도 기뻐야 합니다. 서로가 행복하기 위해서 결혼했는데 한 사람만 독단적으로 기쁘다면 그 결혼은 반쪽짜리가 아니겠습니까? 한 사람만을 위한 가정은 건강한 가정이 아닙니다. 한 사람만 영광 받고, 한 사람만 기뻐하고, 한 사람만 즐거워하는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공동체 연대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가정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입니다.
2-1. 하나님이 주인이심
그리고 21절과 22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아주 중요한 교훈이 숨어 있습니다. 주어가 누구로 되어 있습니까? 21절의 주어도 여호와 하나님이고, 22절의 주어도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가정의 주인이시라는 뜻입니다.
간혹 어리석은 부부를 보면 가정의 주도권 다툼을 합니다. 남편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고, 혹은 아내가 주도권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 주도권이 곧 나라는 존재의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헛된 싸움과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의미 없습니다. 주도권은 남편이나 아내가 가질 것이 아니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 다 내어 드려야 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를 취하시고, 그 갈빗대를 통해서 여성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디자인하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시기 때문에 모든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 됩니다. 그러므로 부부는 해야 될 것 한 가지, 서로의 동질감과 연대 의식 하나만 가지고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해야 됩니다. 그러면 가정이 행복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이 아내의 말을 무조건 따르는 가정, 그 가정은 보기에는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만, 결정적일 때 두 사람이 화합하지 못하면 그때 그 가정은 누구를 따라가야 됩니까? 힘센 사람입니까? 돈을 많이 벌어 오는 사람입니까? 경험이 있는 사람입니까? 말을 잘하는 사람입니까?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정의 최고의 권위가 되어야 됩니다.
가정의 확장이 곧 교회라고 한다면 교회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에베소서 1장 22절과 23절을 보십시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 머리를 지체로 하는 그 몸의 같은 지체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주인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되시고, 성도들은 교회의 지체들이 됩니다. 지체들끼리 주도권 다툼을 하는 것은 정말 쓸데없는 일입니다. 누가 더 잘났고, 누가 더 못났고, 누가 더 많이 가졌고, 누가 더 덜 가졌고, 누가 많이 배웠고, 누가 못 배웠고, 그것 때문에 주도권을 가지고 다투고, 그것 때문에 교회가 분열하고 서로 싸우는 것,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성도들은 한 몸의 동질성과 연대 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누군가가 고통받으면 내가 고통받는 것처럼 함께 아파해야 됩니다. 누군가가 경제적인 핍절함과 어려움 때문에 고통받으면 우리가 함께 연대해서 그 사람을 도와줘야 됩니다. 그래야 교회는 같은 교회 공동체로서의 목적과 의무를 잘 감당하는 공간이 됩니다. 머리는 그리스도가 되시고, 우리가 함께 동역하고 함께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가장 영광받고 가장 기뻐하실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답다는 것, 가정이 가정답다는 것은 머리가 그리스도이시고,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나 여러분들의 가정이나 모두가 이 원리를 잘 기억하고 지켜 나가시길 바랍니다.
3. 고백의 능력
2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아담이 고백을 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여자를 아담에게 데리고 왔는데, 아담이 소 닭 보듯 했다면 이 결혼은 성사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하와를 본 순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을 통해서 결혼이 성립되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정은 사랑을 속삭이고, 그 사랑이 신뢰가 되고, 그 신뢰의 바탕 위에서 결혼이 성사되었습니다.
결혼 전에는 달콤한 사랑의 노래로 서로의 믿음을 확인했다면, 결혼 이후에 가정을 가정답게 신뢰 위에 굳게 세우는 것은 우리의 고통과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은 곧 현실입니다. 직장 생활도 해야 되고, 가정에서 자녀도 길러야 되고, 그 이전에 얽히고설킨 여러 복잡한 관계들이 함께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면 삶이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남편이 직장에서 당하는 고통과 어려움들, 부인에게 와서 충분히 고백할 수 있어야 됩니다. 결혼 전에는 사랑의 고백이지만, 결혼 이후에는 내 마음에 일어나는 파도와 여러 가지 권태와 걱정과 관심과 아주 작은 문제까지도 다 함께 나눌 수 있어야 됩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고민을 하는지, 지금 나는 무엇 때문에 힘이 든지, 지금 나는 무엇 때문에 당신이 이렇게 원망스러운지 함께 나눌 수 있어야 됩니다. 대화가 사라진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 생활도 하나님과 우리 성도의 대화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기도는 곧 대화입니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 다 알고 계시면서 왜 기도하라고 하시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볼 때 지금 저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부모는 다 짐작합니다. 그런데 자녀가 사랑스러울 때는 자녀가 부모에게 와서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을 하나님께 토로하고 기도하고 알릴 때, 그때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깊어지고 더 끈끈해집니다.
부부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걱정과 염려와 번민들, 이것들을 다 끄집어내시기 바랍니다. 함께 대화의 실마리를 풀어 가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그것이 잘 안 된다면 하나하나 한번 시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의 아픔을 함께 토로하고 나눌 때 그 아픔은 치료될 것입니다. 대화가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보듬어 주고 치료해 주는지 경험해 본 사람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서로 고백하는 가정을 한 가정으로 세우신 것은 좋은 말만 고백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고통도, 슬픔도, 아픔도, 고민도, 서로에 대한 원망도 함께 토로하고 고백할 때 그 고백 위에 신뢰가 다져질 것입니다.
4. 떠남의 원리
2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떠나야 진정한 결혼다운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는 것은 아담 대에 하나님을 떠나라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앞으로 이루어질 모든 가정에 대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 5절을 보시겠습니다.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부모를 떠난다는 의미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부모는 혈연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부모뿐만이 아니고 결혼 전에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사고와 가치관과 습관까지를 다 떠나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떠나지 않으면 결혼 생활은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만나서 또 다른 세계를 이루는 것이 결혼인데, 내가 갖고 있었던 가치관과 철학과 사소한 습관까지 나는 하나도 내려놓지 못하겠다, 하나도 포기하지 못하겠다,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온다면 문제와 갈등의 표면적은 훨씬 더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본질인 믿음, 하나님에 대한 신뢰, 이 한 가지만 제외하고 모든 것은 다 포기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결혼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떠남이 곧 결혼을 완성시킬 것입니다. 잘 떠나는 자가 아름다운 결혼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시면, 과거의 습관을 떠나지 못해서, 결혼 전에 가지고 있었던 인간관계를 청산하거나 정리하지 못해서, 결혼 전에 가지고 있었던 나쁜 습관들을 영원히 떨쳐 내지 못해서 결혼 이후에 가정의 위기를 맞는 가정들을 얼마나 많이 보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도 그런 위기 속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결혼도 역시 그러하고 신앙생활도 역시 그렇습니다. 믿음의 생활, 신앙생활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육에 매인 생활을 청산해야 됩니다. 과거에 내가 육에 매여 있을 때 가지고 있었던 습관과 사고방식들을 다 떠나야 신앙생활의 성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내실 때 하신 말씀,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그가 잘 떠났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40년 여정으로 출애굽 여정을 시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430년 동안 이집트에서 종살이할 때의 그 습관에서 떠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40년 동안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이집트에서 살면서 우상 숭배했습니다. 음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윤리적으로 제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그 습관을 광야에서 다 떨쳐 내라. 이것을 떨쳐 내지 않으면 너는 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여전히 출애굽 여정 가운데도 금송아지를 숭배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우상 숭배하고, 여전히 그들은 음행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이집트 고기 가마 곁에서 고기 구워 먹었던 때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지도자 모세를 돌로 치려 했습니다. 그런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떠나지 않는 자들, 이집트를 계속해서 그리워하고 있는 자들, 이들을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인도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 결혼 생활, 우리가 살아가는 가정은 과연 과거의 나에서 떠났느냐? 지금 나의 신앙생활은 과거의 육적인 생활에서 떠났느냐? 이것이 결혼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것이고, 이것이 신앙생활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것입니다.
5. 투명한 가정
25절을 보시겠습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하나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육체적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투명했다는 뜻입니다. "나의 모든 전 존재를 당신에게 다 보여줘도 저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지금 당신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서 내 생각과 내 과거와 지금까지 내가 계획하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들여다본다 하더라도 나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당신이 지금 내 마음속에 들어와서 내 심장이 어디를 향하여 뛰는 것인지 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투명하다는 뜻입니다.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투명해야 됩니다. 숨기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정은 항상 긴장과 촉박과 불안과 위기 가운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숨긴 것이 드러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내가 숨긴 것을 남편이 알 때, 남편이 숨긴 것을 아내가 알 때, 그 가정은 그 숨긴 것이 폭발적인 것임을 알 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숨기지 마시고,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대화하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이 투명해질 때 그 가정에 행복이 보장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 우리의 가정과 함께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잘하고 있는 것은 잘하고 있는 대로 발전시켜 나가고,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서 고통스럽더라도 고쳐 나가시길 바랍니다.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믿음의 가정을 물려주려고 한다면, 우리 자녀들이 만들어 가는 새로운 가정은 이런 가정이 되도록 자녀들에게 교육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가정을 이루어 가야 된다. 이렇게 함께 세워 나가야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태초에 가장 먼저 세우신 에덴에서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가정이다. 이렇게만 살아간다면 너희들은 행복할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 주는 부모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