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본문: 창세기 21:8-11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엉뚱한 선택을 하여 스스로 문제를 자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닌 것처럼 시작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문제를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일이 한 개인에게 일어나면 그 개인만 고통받으면 그뿐입니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가 이런 일을 벌이면 가장 큰 고통을 받는 것은 바로 국민입니다.
지금 이런 상황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2022년 9월 21일,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예비군 30만 명을 동원하여 전쟁터에 투입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발표 이후로 러시아 사회는 뒤집혔습니다. 올 초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전쟁은 러시아 국민에게 텔레비전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의 일이 아닌 바로 나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2,500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 예비군 중에 언제 누가 징집당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팔을 부러뜨리면 징집에서 빠진다 하여 자기 팔을 스스로 부러뜨리는 사람도 생겨나고, 러시아 곳곳에서 반전 시위가 일어나며, 인근 접경지역과 유럽으로 탈출하는 러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두 푸틴이 자초한 일입니다.
국내외적으로 출구가 없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사실 따져보면 이 전쟁은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본인 생각에는 빨리 끝날 줄 알았겠지만, 오히려 서방 세계를 자극하여 그들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게 되었고, 지금 푸틴은 사방이 막혀 있는 궁지에 몰려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 본인도 지금 후회가 되겠지만, 이제는 돌아갈 길이 없는 막막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아브라함도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큰 근심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이 근심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초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사명으로 '너는 걱정하라, 근심하라' 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문제로 인해 큰 걱정에 빠져 있습니다. 어떻게 풀어가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도 걱정과 어려움이 있지만, 사실 이 걱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기보다 내가 스스로 만든 문제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어떻게 풀어야 하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 해답을 찾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진 일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과 사라를 돌보셨고,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습니다. 그 결과 이삭을 주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행동을 따라 하셨다면, 아마 그 가정에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만족시킬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게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그 가정을 위해 일하고 계셨습니다.
그 가정에 이삭이 태어났고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 이 아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잔치가 열립니다.
"아이가 자라매 젖을 떼고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풀었더라" (창 21:8)
젖을 떼는 날이 왔습니다. 당시 문화에서는 서너 살 정도 되면 젖을 떼는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가 되면 부모는 큰 잔치를 베풉니다. 그 당시에는 의료 시설이 미미했고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영아 사망률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그래서 서너 살까지 키우면 이제는 큰 위기를 어느 정도 지나갔다고 여겼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에게 내보여도 되고,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간으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삭이 태어나 여기까지 올 때까지 아브라함과 사라는 얼마나 가슴을 졸였겠습니까? 불안하지 않았겠습니까? 노년 100세에 얻은 아들이 낳자마자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버리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그 시간 동안 혼신을 다해서 길렀을 것입니다. 기도하며 문제가 없도록 돌보았을 것입니다. 그 시간들이 다 지나서 이제는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시기가 온 것입니다. 큰 잔치를 베풀고 동네 사람들을 모두 초대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크게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누구보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삭을 놀리는 이스마엘
그런데 이 시간이 유독 불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바로 하갈과 이스마엘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는 이 시간이 전혀 반갑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회적 관습에 의하면, 본처에게 자녀가 없고 후처에게 자녀가 있으면 당연히 그 후처가 낳은 아들이 상속자가 됩니다. 아브라함의 본처인 사라에게는 오랫동안 아이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이 가정에 아이가 태어나지 않으면 이스마엘은 자연스럽게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됩니다.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이 자기 것이 될 터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의 배가 불러왔습니다. 시간이 지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가 태어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기를 아마 바랐을 텐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건강하게 3~4년을 지나 젖을 떼고 잔치하는 시간까지 와버렸습니다. 이제 하갈과 이스마엘은 상속자도 아니고 애매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마음이 몹시 불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마엘은 선을 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창 21:9)
여기서 '놀리다'라는 단어를 살펴보기 전에, 지금 이스마엘의 나이를 한번 따져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스마엘이 몇 살쯤 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이 86세 때 이스마엘을 낳았고, 13년 동안 이 아이에게 흠뻑 빠져서 살았습니다. 99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다시 부르시며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00세에 이삭을 낳습니다. 이삭이 태어날 때 이스마엘의 나이는 14세입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났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104세, 이스마엘의 나이 18세입니다.
18살이면 이제는 아이가 아니라 청년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이삭을 데리고 놀린다고 합니다. 그냥 아이들끼리 놀면서 별명 부르고 짓궂게 장난치며 서로 뒤엉켜 싸우면서 놀리고 웃고 우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18살짜리 청년이 4살짜리 아이와 같은 정신연령으로 놀지 않습니다.
이제 '놀리다'라는 단어를 히브리어 원어에서 찾아보면 '차하크'(צָחַק)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조롱하다', '희롱하다'라는 뜻인데, 이 말이 쓰인 용례가 놀랍습니다.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창 39:17)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보디발의 아내가 보디발에게 요셉을 모함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당신이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기 위해서 이 집에 들어왔다'고 말하는데, 여기 '희롱하다'라는 단어가 똑같이 '차하크'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성적인 의미가 짙게 드러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놀리는지라'라는 말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대상으로 부적절한 성적 행위를 시도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런 상황을 사라가 보았습니다.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지금 이것을 그냥 그대로 두고 볼 수 있는 일입니까? 그냥 아이들끼리 놀면서 놀리고 웃고 장난치는, 그냥 넘어갈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상황입니다.
아무리 불쾌하고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마엘은 선을 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만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스마엘은 큰 상실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살았지 않습니까? 태어나자마자 13년 동안, 이삭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사랑이 온전히 자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아이에게로 고스란히 옮겨갔습니다.
이제는 상속자도 아닙니다. 원래는 아버지의 재산이 모두 자기 것이었습니다. 믿어 의심치 않을 만큼 자기는 아버지의 유일한 적자이자 상속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태어나자마자 적장자의 자리를 내어놓아야만 했습니다. 아버지의 것이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닙니다. 이런 불편한 상황이 그에게 상실감을 안겨주었고, 이런 상황을 만들어간 것입니다.
사라의 요청과 아브라함의 근심
이제 사라가 이것을 가만히 보고 있겠습니까? 절대로 가만히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창 21:10)
당시 사회적 관습에 의하면 본처는 후처에 대한 처분권이 없습니다.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남편뿐입니다. 그래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 언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이 여종과 여종의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의 정체성이 종이었는데, 그 종이 낳은 아들이 자신이 장자인 줄 알고 자신이 상속자인 줄 알고 내 아들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데, 이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것이냐고 강력하게 남편에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라의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왜 일찍 정리하지 못했을까? 이삭이 태어나기 전, 이삭을 임신했을 그때부터 정리하고 내보냈으면 되었을 것을 말입니다. 한 밑천 뚝 떼어서 서운하지 않게, 힘들지 않게, 섭섭하지 않게 멀리멀리 내보냈으면 되었을 것을 왜 그냥 두었을까요?
아마 아브라함과 사라는 낭만적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두 아이가 공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약속의 자녀 이삭과 불순종의 자녀 이스마엘이 함께 공존할 수 있겠습니까?
공존의 가능성은 딱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거듭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그 은혜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저는 원래 이방 여인이고 저는 원래 여종이었는데, 그런데 이 하나님 믿는 가정에 와서 살다 보니 하나님이 너무나 좋습니다. 내 아들이 장자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은혜의 장막 아래 머물게 해 주십시오.' 이 고백 밖에는 이들이 함께 공존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입니까? 이스마엘은 전혀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이스마엘은 이런 아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갈도 이런 상황을 그냥 보고만 있습니다. 말리지도 않습니다. 이런 상황을 뒷짐 지고 한 발 빠져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사라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내보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공을 받은 아브라함에게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창 21:11)
'매우 근심이 되었더니', 여기서 '근심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라'(יָרַע)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근심하다', '걱정하다', '염려하다'라는 뜻에 더하여 '깨어지다', '산산이 조각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자기 영혼이 걱정하다 못해 다 부서지게 된 것입니다. 염려하다 못해 영혼이 다 박살날 지경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된 것은 누구 탓입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근심하는 것이 사명이니 걱정하라'고 주셨습니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돌아보고 살펴보면 아브라함이 전부 다 자초한 일입니다. 걱정하고 근심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어떤 일도 되지 않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이런 상황을 본인이 만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초한 세 가지 실수
뿌리부터 한번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첫째, 기근 때 이집트로 내려간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와 롯을 불러서 하란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가나안 땅에 기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기근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에 부르신 것이 확실하다면, 하나님께 여쭙고 기도해 보아야 옳았습니다. '하나님, 왜 약속의 땅에 기근이 찾아옵니까? 왜 우리는 이렇게 기근 때문에 시달려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약 그렇게 물었다면 하나님이 답을 알려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마디도 하나님께 묻지 않고 이집트로 내려가 버립니다. 이집트에 내려가면서 거짓말하지 않습니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바로가 아내를 데려갑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바로에게 혼을 내고 아내를 찾아주셨습니다. 바로는 아브라함에게 실망감을 표현했지만, 하나님이 두려워서 그에게 은금과 패물과 노비와 가축을 다 줍니다. 그때 딸려온 노비 중의 한 사람이 하갈 아닙니까?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이라고 가정해 보면, 만약 아브라함과 사라가 한 번이라도 하나님께 기도했더라면,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엎드려 구했더라면, 이집트에 내려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거짓말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하갈은 아예 그의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아서, 하나님께 여쭙지 않아서, 그저 입에 풀칠하기 위해 이집트에 내려간 것이 이 가정의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지금 걱정하는 것, 근심하는 것, 내 영혼이 부서질 정도로 골몰하는 이 많은 문제들, 이런 문제는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내가 만든 문제인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욥과 같은 순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문제인 경우가 거의 다입니다. 기도하지 않아서, 그때 그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아서, 그 순간 하나님 앞에 내가 바로 서지 못해서, 그 순간 내가 한순간 잘못 판단하고 잘못 생각해서 지금 이 상황이 된 것입니다. 누구 탓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겠습니까? 원망해 본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
둘째, 하갈을 취한 일입니다. 하갈이 자기 집에 있다 하더라도 하갈을 취하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하갈을 취해버렸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창 16:3-4)
10년 후에 하갈을 취합니다. 10년 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냥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자녀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도 할 만큼 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니 나도 내 방식대로 해보겠다' 하고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점이 굉장히 묘합니다. 창세기 15장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의기소침해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밖으로 데려가셔서 하늘의 뭇별을 보여주셨습니다. '저 하늘에 별과 같이 너의 자손을 많아지게 하겠다. 바다의 모래같이 너의 자손을 번성하게 하겠다.' 그래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짐승을 잡아 반으로 쪼갰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타는 횃불이 되어 그 쪼개어진 짐승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만약 내가 너와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이 짐승들처럼 쪼개어져도 좋다'라는 일종의 자기저주 언약을 하나님이 맺으셨습니다.
그 약속 이후에 뒤돌아서서 창세기 16장에 가서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하시고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 따로, 나의 스케줄 따로, 자기 방식대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누구 탓을 하겠습니까? 이제 이런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시시때때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주일날 말씀을 통해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를 내려주시고, 성경 읽을 때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시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다 배제합니다. 잊어버리고 행동하지 않습니다. 결단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방식대로 해버립니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자기 방식대로 낳아버린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일해버립니다. 일종의 사고를 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로 태어난 아들이 이스마엘 아닙니까? 이제 근심이 됩니다. 어떻게 해결합니까? 이것은 누가 만든 일입니까? 전부 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벌인 일 아닙니까?
셋째, 하갈과 이스마엘을 신앙으로 양육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갈은 이집트에서부터 그 집에 들어온 종이었기 때문에 20년 넘게 이 집에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은 태어나서 18년 동안 이 집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면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적어도 20년 이상이 있었다면, 그 시간 동안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보냈습니다.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내버렸습니다. 이스마엘이 이런 지경이 될 때까지, 이 아이가 이런 못된 행동을 할 때까지 아버지는 훈육을 하지 않았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그저 이 아이가 귀하고 귀해서 아이가 하자는 대로 그 아이에게 빠져서 살았다는 증거가 지금 이런 못된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갈은 또 어떻습니까? 하갈은 은혜를 입었던 여인입니다. 여주인의 학대를 견디지 못해 집을 나가 광야 생활을 전전할 때, 하나님의 사자가 하갈에게 나타난 적이 있습니다. '너는 돌아가서 네 여주인의 수하에 복종하라.'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여인입니다. 은혜를 한 번 입었던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그 말씀대로 순종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사라는 하갈에게 말씀을 가르쳤어야 합니다.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를 거듭나게 하고 길러내서, 이제는 이 가정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은혜로 그를 변화시켰어야만 옳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이 아이가 이렇게 삐뚤어질 동안 부모로서 어떤 일을 했다는 말입니까? 여주인으로서 하갈 한 사람 제대로 믿음으로 길러내지 못한 그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방인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배제하지 않습니다. 이방 여인 룻을 보십시오.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나오미의 집에 시집갔습니다. 시아버지도 죽고 남편도 죽고 시숙도 죽었습니다. 과부 둘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나오미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어머니가 죽는 곳에 내가 함께 죽으리니, 나로 돌아가라 말하지 마십시오.' 나오미가 그만큼 룻에게 신뢰를 얻었다는 것 아닙니까?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나오미는 룻에게 이렇게 신뢰를 얻었는데, 사라와 아브라함은 도대체 무엇하며 세월을 보냈습니까? 룻은 다윗 왕의 조상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됩니다. 이방 여인이라 하더라도 하갈을 사라와 아브라함이 제대로 훈련시키고 제대로 말씀으로 변화시켰다면, 그 여인이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되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세 번의 기회를 아브라함과 사라는 다 흘려보냈습니다. 기근 때문에 이집트에 내려가서 거짓말하고, 자기 방식대로 하갈을 취해서 이스마엘을 낳고, 20년 이상이나 그 가정에 하갈과 이스마엘을 키우고 데리고 있으면서도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이제는 그의 영혼이 부서지는 이런 심각한 지경에 다다랐습니다.
다시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서부터가 정말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되면 자포자기해버립니다. 이제는 감당이 안 되니까, 내 영혼이 산산조각 나서 다 부서지게 되었으니까 정신줄을 놓아버립니다. 포기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정신 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는 자를 절대 그의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이 광야에서 사울에게 쫓겨 다니다가 한 번 판단을 잘못해서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한 적이 있습니다. 가서는 안 되는 곳이었습니다. 가드 왕 아기스는 블레셋 사람, 블레셋 지경입니다. 가드는 그가 죽인 골리앗의 고향입니다.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가드 왕 아기스가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순간 두려웠습니다. '내가 잘못 들어왔구나.' 자기 발로 호랑이 굴에 걸어 들어간 것입니다.
그 순간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렸습니다. 살려달라고, 환란 가운데서 나를 건져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미친 척하고 그 자리에서 풀려났습니다. 놓임 받고 나서 지은 시가 시편 10편, 시편 34편입니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4:6-8)
'이 곤고한 자'가 다윗 아닙니까? 그가 잘못 판단해서 죽음 직전까지 갔는데, 그 순간 하나님 앞에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를 주셨고, 그는 그곳을 빠져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감사해서 이 시편을 지어 하나님께 올려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정신 바짝 차리고 다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의 자리로 돌아가고, 기도의 자리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실 것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것은 전적으로 그의 잘못입니다.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갔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이제는 포기하고 '나는 여기서 죽었구나' 하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합니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으나 주여 나를 건져 달라. 구원은 여호와께 있나이다.' 모든 것 하나님께 맡긴다고 구했습니다.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요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셨습니다.
판단 잘못한 다윗도 살리시고, 도망간 요나도 기도할 때 다시 손 내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지금 근심에서 우리 영혼이 부서질 지경이 되었다 할지라도,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고 다시 기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좋으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건져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깨닫습니다. 많은 근심 가운데 사실은 모든 것이 돌아보면 나의 잘못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 듣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행동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감화감동 주지 못하고 그들을 방치한 죄, 이 모든 것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근심과 고민의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지나간 것은 흘려보내고 지금이라도 다시 하나님 앞에 서기 원합니다. 다시 결단하고, 다시 말씀 앞에 서고, 다시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 무릎 꿇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지혜로운 백성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손 내밀고 기도할 때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오니, 그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오늘 다시 기도의 자리에 서는 자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