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강 / 근심하지 말라 (21:12-13)

근심하지 말라

본문: 창세기 21:12-13

지난 8월 30일 구소련의 정치 지도자였던 고르바초프가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1985년 54세의 나이로 소련공산당 서기장이 되었습니다. 이전의 최고 지도자들과는 달리 원고 없이도 즉석에서 연설을 자주 했고, 자신이 생각한 것은 뚝심 있게 끝까지 밀어붙이며 함께하는 지도자였습니다. 여러 가지 업적을 남겼지만 그중 대표적인 것이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라고 불리는 개혁 개방을 처음부터 일관되게 끝까지 밀어붙여서 결국 성공으로 이끈 것이었습니다.

그가 개혁개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소련이 외부에서 볼 때는 미국과 필적할 만한 초강대국이었지만 내부에서 볼 때는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만약 이대로 가만히 두면 시간이 지날수록 가난은 가중되고 결국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개혁 개방을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개혁개방을 하면서 그는 여러 가지 위험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개혁과 개방을 통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40년간 지속되었던 동서냉전이 끝났습니다. 핵전쟁의 위협도 사라졌습니다.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자 경제가 좋아졌습니다. 우리나라도 소련과 수교를 하고 우리나라 기업이 소련 땅에 진출하여 일터가 생겨났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던 놀라운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면도 있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이 15개 나라로 분리 독립되고 소련은 과거의 러시아로 축소되었습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은 고르바초프가 소련을 팔아먹었다고까지 혹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가 그때 결단하지 않았더라면 세계평화가, 그 당시의 안전과 질서가 가능했겠습니까? 역사를 만든 위대한 인물들은 결단하는 사람입니다.

결단이라는 것은 양단 간의 결단이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얻기 위해서 나머지 99가지를 포기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그 중요한 한 가지를 얻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나머지를 다 버려도 이 한 가지를 가지는 것이 가치 있기에 결단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근심 중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결단을 요청하십니다. 결단해야 근심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결단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아브라함은 주저하고 망설이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 큰 일이 벌어졌습니다. 사라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화가 불같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 여종과 여종의 자녀를 내쫓으라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럴 만하지 않았겠습니까? 이제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근심이 됩니다. 자기 영혼이 파괴될 만큼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이 근심은 사실 아브라함이 만든 것입니다. 그가 이집트에 내려갔고, 하갈을 취했고, 이스마엘을 낳았고, 이스마엘이 자라서 장성할 때까지 18년 동안이나 그를 제대로 기르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그 근심을 끝내도록 아브라함에게 권면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창 21:1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근심하지 말라 하십니다. 근심 때문에 너의 인생을 망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들을 때 아브라함이 아마 기대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더러 근심하지 말라고 하시는구나. 그럼 하나님이 그 나머지는 알아서 다 해 주시는 건가? 하나님이 하갈을 찾아가서 그의 꿈에 나타나셔서 사라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씀해 주실까? 이스마엘에게 찾아가서 그를 따끔하게 꾸짖으시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책망해 주실까? 사라에게 나타나서는 네가 이 가정의 안주인인데 하갈을 품고 이스마엘을 품어서 가정의 분열과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넓은 마음을 가지라고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지 않을까?

나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어도 이제는 걱정과 근심 없이 모든 식구들이 한 지붕 아래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아마 아브라함은 일말에 그런 기대를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건 오산이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입장 정리가 다 끝나 있었습니다. 이어서 하시는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라가 하는 말을 다 들으라고. 사라가 너에게 이른 말을 그대로 다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보내라는 말입니다. 근심하지 않으려면 끊어내고 결단해야 근심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근심하지 않으려면 결단해야 너는 이 근심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단호한 입장 정리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어떻게 부르고 계십니까? "아이"라고 부르십니다. "아이"는 히브리어 나아르(נַעַר)입니다. 소년이라는 뜻입니다. 아들이라는 말이 히브리어에 분명히 있습니다. 벤(בֵּן)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너의 아들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고 이스마엘을 가리켜 아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떨지 몰라도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스마엘을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 아브라함의 아들로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하갈은 또 어떻습니까? "네 여종"이라고 하나님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의 아이를 낳아준 여자이니 너의 아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갈이 아브라함의 아내가 되고 이스마엘이 그의 아들이라면 하나님이 왜 정리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여종이고 여종이 낳은 아이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분명히 입장 정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이게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 일입니까? 하나님이 좀 넓게 생각해서 그냥 살게 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단호하게 끊어내라고 하시는가?

1. 시간이 지워주지 않는 죄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데도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죄는 시간이 아무리 많이 지나도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세상이 말하는 죄, 사회가 말하는 죄는 범법자를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법을 어기는 자, 사회 일반 통념과 관습과 도덕과 윤리를 벗어나서 행동하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죄인은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모든 사람입니다.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이 다 죄를 범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몸에서 날 자라야 네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한 번만 말씀한 게 아닙니다. 여러 번 말씀하셨고 다양한 방식으로 일러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따로, 자기 행동 따로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신에게 주어졌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죄를 지은 것입니다. 결국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죄입니다.

이스마엘을 낳고 나서 13년 동안이나 이스마엘에게 푹 빠져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몸에 병이 든다든지, 가정의 재난 상황이 닥친다든지, 재산에 문제가 생긴다든지 하면 자신의 삶을 돌아봤을 텐데 회개하지 않고도 그냥 13년, 14년을 그냥 지나보냅니다. 그러면서 양심이 무뎌집니다. 그러면서 슬금슬금 이런 생각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다 잊어버리셨나? 이래도 되는가?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는가? 시간이 지나면서 죄에 대해서 무뎌집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계기가 일어납니다. 99세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삭 예고를 하십니다. 그리고 백세에 이삭이 태어납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삭을 주신 건 무엇 때문에 주셨습니까? 창세기 21장 1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돌보셨고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행위를 따라 그가 잘 살았기 때문에 그 보상으로 이삭을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함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 과정에 이삭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착각했습니다. 착시현상이 벌어졌습니다. 문제가 없었구나. 지금까지 이스마엘을 낳은 것, 이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구나. 이것을 영적인 착시현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그는 그냥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이스마엘과 함께 살아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죄를 미리 청산하지 않아도 자기의 인생에 아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기에 그는 이렇게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100년 전 죄도 반드시 기억하시고 그 죄 청산을 요구하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던 중에 아말렉을 만났습니다. 아말렉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그들 앞에 서서 그들을 죽이려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장도 하지 못했습니다. 모세와 아론과 훌이 황급히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손을 들고 기도하고, 젊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아말렉과 전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걸 기억하셨습니다. 저 악한 아말렉, 내가 이 땅에서 기억조차 못하도록 없애버리겠다고 그들의 죄를 하나님은 분명히 기억하시고 모세에게 일러주셨습니다.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적군으로부터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신 25:17-19)

모세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러서 천하에서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라고, 너는 절대로 이 사건을 잊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죄를 잊지 않으시고 그것을 죄라고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빨리 청산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청산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지 하고 붙들고 살다 보면 이런 심각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 사건을 통해서, 그가 극도로 근심하는 이 모습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죄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죄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고 죄 문제를 청산하지 않았는데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건강하고 자녀들 잘 되고 생업의 복을 받고 그냥 그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보다. 죄 문제 해결하지 않고 한쪽은 죄짓고 한쪽은 하나님 백성인 것처럼 하고 살아도 되는가 보다 생각하고 살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건 위험한 발상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것을 끊어내지 않으면 안 될 벼랑 끝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위기에 처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을 듣고 죄 문제를 빨리 청산하고 끊어내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2. 공존할 수 없는 선과 악

두 번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선과 악은 결단코 공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0)

바울은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여종의 아들과 자유인의 아들이 함께 유업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즉 선과 악이 공존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함께 공존해도 될 거라고 대충 생각했습니다. 함께 살아도 된다고.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과 바알을 섬기는 바알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도 별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별 문제 없을 거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 때문에 망한 것 아닙니까? 여호수아가 고별설교를 하면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수 24:14)

강 저쪽,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의 시절부터 그곳에서 우상을 만들고 섬기던 그 우상이 여호수아 시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 430년 동안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면서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섬기던 그들의 우상이 여전히 여호수아 시대까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고별설교하면서 이제 하나님 나라 갈 날이 가까이 오면서 이것을 정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실 터이니 빨리 정리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를 사랑했습니다. 그 앞에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결단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마음을 모으고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나고 그들은 다시 우상을 섬겼습니다. 바알 신앙에 빠져들었습니다. 사사시대가 지났습니다. 왕정시대가 시작되고 사울, 다윗, 솔로몬 시대까지, 분열왕국 시대까지 흘러갔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과 바알,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오랫동안 참고 기다렸지만 더 이상은 참아줄 수 없었습니다. 심판하셨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남유다가 심각하게 파괴당하고 멸망당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 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 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 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왕하 25:8-9, 13)

성전은 불탔고 성전에 있는 모든 기구들은 다 빼앗겼고 성도 다 불타고 없어졌습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이들의 국력이 약해서, 이들이 어리석고 미련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하나님과 우상이 함께 공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바알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겼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 정결하지 못했고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오래 참고 또 참고 기다리다가 결국은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그렇게 경고하시고 말씀하셨는데, 그 뿌리를 올라가고 또 올라가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를 만납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을 이 집에서 함께 공존시킬 수 있다는 그들의 헛된 믿음, 그 생각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를 하나님께서 그들의 역사의 종말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라를 걱정합니다. 정치를 걱정합니다. 정치인들을 염려합니다. 저런 식으로 정치해서 이 나라가 과연 안전하겠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진짜 걱정해야 될 것은 교회이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하고 있는 우리 자신입니다. 내 마음을 걱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혹시 두 주인을 섬기고 살고 있는 건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한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두 주인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력이 약해서, 군사력이 약해서, 그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지 못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할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이, 물질이 최고의 가치가 되고 물질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욕망까지 들어와 있다면 이것을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 가정도 위기고 교회도 이 나라도 위기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사실을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3. 결단이 열어주는 자유

이제 이 상황을 아브라함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하갈과 사라 다 놓치기 싫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 함께 거주하고 함께 살고 싶습니다. 하나라도 놓아버리면 죽을 것만 같습니다. 다 붙들고 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근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한 가지 가치를 위해서 나머지 것들을 끊어내는 것이 결단이요, 그 결단이 곧 용기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고 하나님 나라의 법칙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그 가치를 보여주시고 요구하셨고, 제자들은 거기에 몸으로, 자신들의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막 1:16-18)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물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그물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과거 전부였습니다. 수많은 사연들이 그 그물에 녹아 있지 않았겠습니까? 갈릴리 호숫가에서 나고 자라고 그물을 던지면서 그 그물은 자신의 인생 전부였습니다. 좋은 기억, 힘들었던 기억, 아버지에 대한 기억,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모든 기억이 그 그물에 온전히 녹아 있습니다.

그물은 또한 그들의 현재입니다. 그물은 그들의 현재로서 그들의 생업을 영위하게 하고 먹고살게 하고 그들의 지금을 있게 해 주었습니다. 그물은 또한 그들의 미래입니다. 미래를 꿈꾸고 가정을 꿈꾸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기르고 앞으로 잘 살 것을 꿈꾸는 그들의 미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물은 그들의 전 존재였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불확실한 미래가 아닙니까? 예수님을 따른다고 무엇이 보장됩니까? 예수님은 검증되지 않은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확실하고 가장 분명한 자신의 전 존재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난 이후에 성령이 임하고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가 됐습니다. 전 세계로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그냥 그물, 그것 붙들고 살았더라면 갈릴리 호숫가에서 평생 동안 그물에 싸여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쓰임받는 위대한 하나님의 동역자,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 가치를 위해서 자신의 전 존재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천국 가치를 얻은 믿음의 사람들,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하나님 앞에 결단할 일이 참 많습니다. 무엇 때문에 근심하십니까? 아브라함의 근심의 이유는 놓기 싫어서 근심하는 것입니다. 포기하기 싫어서 근심하는 것입니다. 다 가지고 싶고 다 욕심내고 이스마엘도 그리고 하갈도 이삭도 사라도 함께 붙들고 살기 때문에 근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가치를 위해서 나머지 것들을 놓을 수 있는 용기,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근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신지라" (창 21:13)

이 말씀이 아브라함에게는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네가 놓기만 하면 그러면 내가 이스마엘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놓지 못하는 이유는 어설픈 휴머니즘에 빠져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도 내가 아버지인데, 그래도 내가 이 아이의 아버지고 이 여인의 남편인데 내가 책임지고 돌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약 이들을 내보내지 않는다면 이 가정에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하갈과 사라는 사사건건 갈등하고 다툴 것입니다. 그 갈등과 다툼을 아브라함이 조정할 수 있습니까? 이스마엘은 지속적으로 이삭을 괴롭힐 것입니다. 이삭은 위험에 계속 노출될 것입니다. 이 위험을 24시간 따라다니면서 아브라함이 해결할 수 있습니까? 그의 근심은 갈수록 커져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내보내라, 그러면 한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하나님, 한 민족을 이루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믿고 내보내겠습니다. 한 10년 정도 데리고 있으면서 이 아이가 큰 민족이 되는 그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당연히 내보내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먼저 결단하고 내보내면 그다음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여기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내보내라. 그럼 내가 책임진다.

오늘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 우선 끊어내시기 바랍니다. 죄가 죄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회개하고 끊어 내고, 선과 악의 공존을 포기하고 끊어 내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근심에서 해방되어서, 그 근심의 에너지를 하나님을 향한 섬김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수고의 에너지로 바꾸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근심합니까? 과거에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그 죄 가운데 빠져 있어서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어리석고 미련하게도 선과 악이 함께 공존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잊지 않으시고 끊어 내게 하시고, 악을 버리라고 말씀하시고, 끊어 내라고 끊임없이 요구하십니다. 주여, 오늘 이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옵소서. 끊어 내고 정리하여 이제는 근심의 에너지를 바꾸어서 하나님을 향한 섬김과 수고와 봉사의 에너지로 마음껏 사용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