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강 /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21:14-21)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문: 창세기 21:14-21

남미 대륙의 남단,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걸쳐 한반도의 다섯 배에 달하는 광활한 땅이 펼쳐져 있습니다. 파타고니아입니다. 초속 60미터의 강풍이 휘몰아치는 이곳은 사람이 살기에는 혹독한 환경이지만, 빙하 지형과 거대한 빙벽이 장관을 이루어 빙벽 등반 전문가들에게는 일생에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꿈의 장소로 손꼽힙니다.

이와 같은 이름의 아웃도어 브랜드가 있습니다. 1973년 이본 쉬나드가 설립한 파타고니아입니다. 원래 암벽 등반 전문가였던 그는 자신이 사용할 장비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대장간을 차려 대장장이가 되어 장비를 제작했고, 이것이 입소문을 타면서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이 회사는 창립 초기부터 환경 보호에 진심이었습니다. 1985년부터 수익의 1퍼센트를 환경운동에 기부해왔습니다.

2001년 블랙프라이데이, 뉴욕타임스에 실린 한 광고가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이 재킷을 사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이 광고를 두고 논란을 벌였습니다. 역설적 마케팅으로 오히려 판매를 촉진하려는 상술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본 쉬나드의 마음은 진심이었습니다. 전문 등반가가 아니라면 굳이 이 옷을 살 필요가 없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실제로 파타고니아 제품은 재활용 원단과 유기농 면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2022년 9월, 세상을 놀라게 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본 쉬나드 가족이 비상장 지분 100퍼센트를 환경운동에 기부한 것입니다. 그 금액이 3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4조 3천억 원에 달합니다. 이로써 그동안 이 회사의 진정성을 의심했던 사람들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말 진심이었던 것입니다.

회사는 경영진의 결단으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방향을 정합니다. 믿음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단을 통해 지금까지 어떤 믿음의 여정을 걸어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결단, 그래서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아브라함의 결단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결단함으로써 자신이 걸어갈 삶의 방향을 명확하게 선언했습니다. 그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이 결단 속에 녹아 있습니다. 이 결단을 묵상하면서, 나는 무엇 때문에 아직까지 결단하지 못하는지, 아직 포기하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를 살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단의 무게, 뜬눈으로 새운 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창 21:14)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이 표현은 밤새도록 푹 자고 늘어지게 일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밤새 고민하고, 뒤척이고,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마침내 결단에 이르렀다는 의미입니다.

무엇 때문에 한숨도 자지 못했을까요? 고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아들로, 그리고 이 아들을 낳아준 아내로 함께 살아왔는데, 이 두 사람을 내보낸다는 것이 죄책감으로 다가왔습니다.

한편으로는 또 다른 무게가 그를 짓눌렀습니다. 내보내지 않으면 이삭을 온전히 지킬 수 있겠는가? 이삭에 대한 책임감이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이 양자 사이에서 그는 밤새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결단하면 이 아이 이스마엘은 내가 책임지겠다. 한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고, 신뢰하고, 결단했습니다. 그 이후에 쏟아질 비난은 자신이 감수하겠다고 마음먹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메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냈습니다.

이 결단이 아브라함을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웠습니다. 아브라함은 일생에 두 번의 위대한 결단을 했습니다. 한 번은 이스마엘을 내보낸 결단이요, 다른 한 번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간 결단입니다.

아브라함의 지난 인생을 돌아보면 오르내림이 있었습니다. 부침이 있었고,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믿음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어찌 보면 가짜 믿음처럼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죄도 짓고, 하나님 앞에서 속이기도 하고, 기뻐하시지 않는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결단했습니다.

결단은 마치 학생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를 치르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생활 수십 년 했는데, 하나님께서 "네 믿음이 얼마나 자랐는지 한번 보자" 하실 때, 우리의 믿음이 이만큼 자랐다는 것을 결단으로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좌우로 흔들리고 좌충우돌했어도, 이 결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저는 이만큼 성장했습니다"라고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남유다의 꽤 괜찮은 왕 한 분이 계셨습니다. 여호사밧입니다. 그는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했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성실하게 돌봤습니다. 왕이 이 정도면 훌륭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호사밧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습니다. 우유부단함입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 끊어내지 못하고 결단하지 못하는 것이 그의 약점이었습니다.

그가 남유다를 다스릴 때, 북왕국의 왕은 아합이었습니다. 아합이 지속적으로 청혼했습니다. "우리 사돈 맺읍시다."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악한 왕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과 어떻게 사돈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저 북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을 떠난 자인데 사돈이 될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요리조리 피해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각했습니다. 사돈이 되면 적어도 북이스라엘과는 전쟁하지 않겠구나. 결국 사돈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고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더라" (대하 18:1)

부귀와 영광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아합은 여호사밧의 부귀와 영광이 탐나서 사돈을 맺자고 한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끊어내지 못하고 사돈이 됩니다.

이제 사돈끼리 왕래합니다. 북이스라엘의 아합을 방문했을 때, 아합이 피할 수 없는 제안을 합니다. "우리가 사돈이 되고 동맹국이 되었으니 힘을 합쳐 저 아람을 칩시다." 여호사밧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람은 강력한 제국이었습니다. 그 당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힘을 합쳐도 아람과 싸워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돈이 된 마당에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이런저런 말로 화제를 바꿔보지만, 결국 승낙하고 맙니다.

전쟁하러 갔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아합은 교활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에 나갈 때 왕이 타는 수레도 타지 않았고, 왕의 군복도 입지 않았습니다. 일반 사병의 군복을 입고 철저하게 위장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순진하게 왕의 수레를 타고 왕의 군복을 입었습니다. 적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아람 군대는 여호사밧만 쫓아왔습니다. 아합인 줄 알고 추격한 것입니다. 죽어라 도망가다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아합은 생명을 잃습니다.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내 손을 돌려 나로 군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이 날의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왕상 22:34-35)

아합은 죽고, 여호사밧은 죽다 살았습니다. 결단하지 못하면, 끊어내지 못하면 이런 일에 휩싸입니다. 악한 사람과 사돈 맺은 것도 문제였고, 그의 청을 끊어내지 못해 말도 안 되는 전쟁에 백성들을 투입시킨 것도 문제였습니다. 자기만 위험에 빠진 것이 아니라 백성들까지 위험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결단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결단하지 못하고 끊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 이것도 가지고 싶고 저것도 가지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걸 끊어내자니 아깝고, 저걸 끊어내자니 또 아깝고, 다 가지고 있으려 하니 결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열 가지 백 가지를 다 잘라내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 한 가지 가치만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께 사랑받고 인정받는다면, 정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잊혀진 은혜, 기도 없는 눈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 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라" (창 21:14-16)

여기서 의아한 장면이 발견됩니다. 아브라함이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어깨에 메워 내보냈을 때, 하갈이 목적지로 삼은 곳은 브엘세바 광야였습니다.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목민이었고, 하갈도 아브라함과 함께 다니면서 그곳에 우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갈과 이스마엘은 그곳을 목적지로 삼아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우물이 있어야 할 그곳에서 우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당황스럽습니다. 아이는 삶을 포기하고 관목 덤불 아래 앉아 죽기를 기다리고 있고, 하갈은 그 옆에서 울고 있습니다. 보기에도 답답하고 딱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하갈이 이미 18년 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때는 뱃속에 이스마엘을 임신하고 있었습니다. 사라의 학대를 피해 무작정 집을 나서서 광야로 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하갈을 위로하셨습니다.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뱃속에 있는 아이를 지키고 책임지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 은혜를 입고 하갈은 이미 그때 신앙 고백을 드렸습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창 16:13)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신앙고백이 바로 하갈의 고백입니다. 하갈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최초의 신앙고백을 했던 인물입니다.

18년 전 뱃속에 있었던 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청년이 될 만큼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18년이 지나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 지금 울고만 있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18년 전에 저에게 역사하셔서 찾아오셨는데, 지금 저는 똑같은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저를 살려주십시오!" 엎드려 구하고 기도해야 정상인데, 기도하지 않습니다. 엎드려 구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갈뿐이 아닙니다. 우리 각자의 인생도 돌아봐야 합니다. 오래전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감격, 위기 가운데 있을 때 기도했더니 들어주셨던 그 놀라운 체험, 이런 감동들을 각자 한두 가지씩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비슷한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면, 그 순간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꺼내봐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그때 역사하셨는데 지금은 왜 말씀이 없으십니까? 그때 저를 이렇게 도우셨는데, 지금도 저를 도우실 줄 믿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간구하고 엎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혜는 점과 같습니다. 점이 모이면 선이 됩니다. 18년 전의 그 은혜가 과거의 한 점처럼 찍혀 있는데, 살아오면서 은혜를 기억하고 계속 간구하면 점이 계속 찍힙니다. 점이 모이면 선이 됩니다. 선이 모이면 면이 됩니다. 면이 모이면 입체가 됩니다. 믿음의 집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 믿음의 집을 짓고 그 집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과거의 단 한 번의 은혜를 점으로만 기억합니다. 가물한 기억으로 "18년 전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지. 그때는 그랬었지. 지금은 그냥 이렇게 사는 거야." 사람들은 그렇게 삽니다. 그래서 점과 같은 은혜를 선으로 이어가지 못하고, 면으로 만들지 못하고, 입체로 만들지 못해서 은혜의 집을 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갈이 바로 그런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어린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창 21:17-18)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갈은 기도하지 않고 울고 앉아 있고, 이스마엘은 관목 덤불 아래에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울부짖지 않아도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사랑해서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때문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이 아이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금 신실하게 지켜가고 계신 중입니다.

이들이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그 옛날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고 13년 동안 하나님 앞을 떠나 살았지만 그 가정에 이삭을 선물로 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과 약속을 성실하게 이루어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하셨다면, 하갈과 이스마엘은 그때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아야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울고만 있어도, 18년 전 은혜를 기억하지 못해도 찾아오셨군요. 이제 기억났습니다. 18년 전 그 놀라운 역사가. 이제 하나님 안에서 살겠습니다." 이래야 옳았습니다.

은혜의 장막을 떠난 자들

그러나 이스마엘과 하갈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정반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창 21:20-21)

하나님은 그 아이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활 쏘는 자'가 됩니다. 단순히 문자 그대로 활을 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활 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힘을 의지하는 자로 살아갔다는 뜻입니다.

아담의 족보는 두 갈래로 나뉩니다. 아담에서 셋, 에노스로 이어지는 예배 공동체를 세워가는 족보가 있고, 가인의 족보로서 라멕처럼 자기 힘을 의지하는 자의 계보가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활 쏘는 자'가 되었습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고, 자기 능력을 의지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함께하시며 돌보셨고, "너는 은혜의 장막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은혜의 장막 안에 거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활 쏘는 자가 되어 자기 힘을 자랑하고, 자기 힘으로 온 세상을 평정하려는 자로 성장하고 말았습니다.

하갈은 어떠했습니까? 며느리감을 구하는데 애굽에서 데려왔습니다. 자기가 애굽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은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의 집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이들을 은혜의 장막 안에 두시려고 하셨지만,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 앞을 떠나버렸습니다. 마치 가인처럼, 하나님이 가인을 붙잡으시고 "내가 너를 돌보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에 성을 쌓고 하나님과 철저하게 단절하고 산 것처럼, 이들도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거부하고 자기들 멋대로 살아갔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이미 한 가지 중요한 표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창 21:19)

아브라함의 집에서 나왔을 때, 하갈과 이스마엘은 브엘세바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샘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보이지 않았을까요? 왜 찾을 수 없었을까요?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가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밝히셨습니다. 이제 샘물이 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주신 분명한 메시지였습니다. "하갈아, 이스마엘아, 너희가 비록 아브라함에게서 쫓겨났지만 내가 너희를 책임지겠다. 나만 따라오면 눈이 밝아져서, 이 아들 데리고도 광야에서 걱정 없이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나만 믿고 따라오라. 만약 나를 떠나 살면, 너의 눈이 어두워져서 샘물을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방황하고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니, 나만 믿고 따라오라." 하나님은 그 표징을 이미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하갈과 이스마엘은 물만 마시고 떠나버렸습니다.

그 후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스마엘은 향년이 백삼십칠 세에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고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창 25:17-18)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 지리적으로 맞은편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적대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하갈과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적대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은혜의 장막 안에 거하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의 눈을 밝혀서 이 광야에서 살아남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성실하게 지키시고 이루어가셨는데, 하갈과 이스마엘은 그 은혜의 장막을 떠나서 그 후손까지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결론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결단하라고 하실 때 철저하게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하라 하실 때 은혜 아래 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뿐 아니라 우리 후손까지 힘들어집니다.

부디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결단을 내리고, 은혜의 장막에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결단을 요청하시는데, 우리는 여전히 결단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장막 안에 거하라 하시는데, 우리는 활 쏘는 자가 되어 내 힘을 세상 앞에 과시하려 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장막, 그 아래 머물게 하옵소서. 미련한 이스마엘과 하갈처럼 살지 않도록 도우시고, 지혜로운 아브라함처럼 철저하게 결단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자녀로 서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