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엘세바
본문: 창세기 21:22-34
우리나라가 최초로 외국과 맺은 근대적 조약은 1876년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 조약입니다. 외형적으로는 국가 대 국가의 동등한 조약이었으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처참한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이 조약에는 크게 세 가지 핵심 조항이 담겨 있었습니다. 첫째, 조선은 부산, 인천, 원산을 즉각 개항해야 했습니다. 둘째, 개항한 지역 주변에서는 일본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셋째, 일본은 조선에 신고하지 않고도 조선 연안 지역을 마음대로 측량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명백한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만약 조선이 그 당시 힘을 갖추고 있었다면 결코 이런 조약을 맺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패전국 독일과 승전국 연합군 사이에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패전국 독일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첫째, 독일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식민지를 100퍼센트 반환해야 했습니다. 둘째, 프랑스와 인접한 알자스-로렌 지역을 즉시 프랑스에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조항은 전쟁에 졌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셋째 조항인 전쟁 배상금의 규모가 실로 어마어마했습니다. 1,320억 금 마르크를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규모인가 하면, 당시 독일 국민이 1년에 납부하는 세금이 약 60억 금 마르크였습니다. 그러니 독일 국민이 내는 세금을 22년 동안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오직 전쟁 배상금으로만 갚아야 완납할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금액을 어떻게 전쟁 배상금으로 내겠습니까? 만약 독일이 패전국이 아니었다면 그런 조약에 서명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국제관계는 철저하게 힘의 논리에 의해 좌우됩니다. 강력한 힘을 보유한 쪽이 갑의 위치에 서고, 힘이 없는 쪽은 형편없는 조약에도 서명해야 하는 을의 처지로 내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한 개인 아브라함과 한 민족 블레셋 사이에 맺어진 조약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 민족과 한 개인이 조약을 맺습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민족이 갑이 되고 개인이 을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반대입니다. 아브라함이 갑의 위치에 있고, 블레셋이 을의 위치에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 이면에서 역사하신 놀라운 역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창 21:22)
아비멜렉은 블레셋 왕의 이름을 일컫는 대표 명사입니다. 블레셋 왕이 군대 장관 비골을 대동하고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일까요?
아비멜렉이 목격한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와 양떼, 소떼, 그리고 함께하는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블레셋 지경 그랄 땅에 가서 목축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땅에 와서 오랜 기간 양과 소를 먹이니까, 세금을 원활하게 징수하기 위해 볼모를 하나 잡아 두었는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였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인 줄 모르고, 아브라함이 거짓말해서 그냥 누이인 줄 알고 볼모로 잡아둔 것입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로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여인들의 태를 닫으셨습니다. 아비멜렉은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서 역사하시고 아브라함 편에 서 계심을 그때 깊이 깨달았습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낳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사람이 100세에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남자의 기력이 완전히 다 쇠진했고, 여자의 경수도 끊어졌는데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겠습니까? 그렇게 아들을 낳았다 하더라도 약해서 금방 죽을 줄 알았는데, 젖을 뗄 때까지 건강하고 무사히 살아남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정말 이 가정에 하나님께서 살아서 역사하시고 숨 쉬고 계시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와서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불신자들은 믿는 사람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저 사람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저 사람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 나와 똑같은 상황인데 나는 이렇게 결론 내리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결정하고 살아가는지, 그 과정과 결과는 어떠한지 믿지 않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믿는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굉장히 많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창 39:2-3)
보디발 이야기입니다. 보디발이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보디발은 불신자인데 어떻게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이것은 신기하고 신비로운 일처럼 보이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놀랄 것도 아니고 신비로운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셉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요셉의 삶이 보디발의 눈에 그렇게 보인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노예들은 거의 다 똑같습니다. 쉬는 것 좋아하고, 노는 것 좋아하고, 먹는 것 자는 것 다 좋아합니다. 정해진 시간만 일하려고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더 많은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종이고 노예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치 노예인데 주인처럼 일했습니다. 자기 일처럼 일했습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시키지 않은 일도 했습니다. 남들은 귀찮아 하는 일을 최선 다해서 일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면 안 되는 일을 요셉이 하니까 되었습니다. 그러니 보디발이 보기에 도대체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들여다봤더니 히브리 출신이고 그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합니다. 그러니 다르게 보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하는 일에 역사가 일어나니까,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불신자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십니까? 주변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들이 눈여겨보는데 "아니 저 사람 신앙생활하고 저 사람 교회 다니는 것은 내가 아는데, 자세히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나랑 똑같습니다. 결정하는 것도 똑같고, 불평하는 것도 똑같고, 원망하는 것도 똑같고, 어려운 상황에 반응하는 것도 똑같고,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주일날 교회 가는 것만 다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분에게 어떤 귀감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이 믿음의 사람들을 지켜보는데 매사가 다르다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경제적 상황을 사는데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실 것"이라 고백하고 힘차게 살아갑니다. 인색하지도 않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나누려 합니다. 다르게 보이는 것이지요. 믿음의 사람들이 오늘 우리가 정말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지, 그들의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한번 살펴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영적 안목의 사람 아비멜렉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창 21:23)
이제 조약을 맺자고 합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나를 위해서, 내 자손을 위해서, 너와 우리 블레셋이 조약을 맺자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첫 번째로, 아비멜렉이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영적인 안목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아브라함과 친하게 지내면 자신에게 유익할 것 같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자기 자손이 가까이 지내면 자기 자손이 복을 받을 것 같았습니다. 이 사람이 하는 일마다 잘되니까, 100세에 아들을 낳으니까, 이 사람과 이 사람의 자손들은 진실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니까, 가만히 보니 자기가 이 분과 함께하면 아무런 문제없이 정말 모든 일이 평탄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약을 맺기까지 아마 여러 난관이 있었을 것입니다. 블레셋의 다섯 방백들이 안 된다고 벌집 쑤셔놓은 듯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격에 맞지 않으니까요. "어떻게 우리 한 민족이 저 한 사람과 조약을 맺을 수 있습니까? 저 사람이 찾아와서 우리 앞에 와서 엎드리고 부복하고 조약을 한번 맺어 달라고 해도 할까 말까 하는데,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 저 사람에게 찾아가서 조약을 맺어야 됩니까?" 아마 사람들이 다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비멜렉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비멜렉은 철저한 실용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하고, 저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잘되면, 저 사람과 내가 친하게 지내면 나도 복 받고 우리 자손도 복 받는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저 사람과 조약을 맺어야 되겠습니다. 대단한 영적 안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사업상 관계해야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오락과 유흥을 위해 만나야만 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으로 믿음의 눈으로 눈여겨보고 "저분은 정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다, 저분과 함께하면 내가 복 받고, 저분과 함께하면 내 자손이 복 받을 것이다"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눈여겨 살펴보고, 비록 내 자존심이 좀 상하더라도 그분과 가까이 지내려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분과 친하게 지내려 하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과연 주변에 존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는 그런 안목 없이 "저 사람이 돈이 많으니까, 저분은 나에게 출세의 기회를 제공해 줄 사람이니까" 저분과 손잡고 저분과 친하게 지내고, 그래서 나와 내 자손들이 저 사람의 덕을 입고 살아가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속물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불신자 아비멜렉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은 여기서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굴러 들어온 복을 주셨는데, 그것이 다윗입니다. 다윗은 그에게 하나님이 주신 구원자나 다름없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골리앗이 40일을 조속히 자기 몸을 나타내며 이스라엘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었을 때, 다윗이 나타나서 사울을 건지고 이스라엘을 건졌지 않습니까? 그때부터 그는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 되어서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를 품어내지 못합니다. 여인들의 노랫소리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를 쫓아냅니다. 광야로 내몰았습니다. 다윗을 쫓아내는 순간, 그때부터 사울도 내리막길이었습니다. 그의 왕권도 내리막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 다윗을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늘어졌어야 했는데,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를 붙들고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했어야 하는데, 다윗을 내보내는 순간 그의 인생도 망해버린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디모데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가 나옵니다. 이분들은 달랐습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행 16:2-3)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그 지역에 가서 그곳에서 가장 칭찬받는 사람 디모데를 데리고 그의 복음의 동역자로 삼고자 합니다. 이때 그의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가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사랑하는 아들, 손자를 떠나보냅니다. 그런데 이것은 대단한 결단입니다. 왜냐하면 1차 선교여행 때 바울이 그 지역에 와서 돌에 맞아 거의 죽었기 때문입니다. 돌에 맞아 죽었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은 그를 질질 끌어다가 성 밖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하나님이 그를 살려주셔서 다시 성안에 들어와서 복음을 선포합니다. 유니게와 로이스는 이 장면을 자기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2차 선교여행 때 바울이 와서 그의 아들, 그의 손자 디모데를 데려가려고 합니다. 만약 아들을, 손자를 떠나보내면 똑같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이 뻔한데, 그런데 떠나보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바울이 하나님의 복 주신 사람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내 아들을 바울과 함께 떠나보내면 그의 육신은 피곤하고 지치고 힘들더라도 그의 영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분명히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디모데를 바울에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굴러 들어오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 그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안목으로 사람을 보고 계십니까?
말씀의 성취
두 번째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실 때 그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셨으니" (창 12:2-3)
3절을 자세히 보시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복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지금 현실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그때 처음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실 때 이 말씀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시간이 지나서 훈련받고, 한 민족 블레셋의 왕이 자기를 찾아와서 조약을 맺자고 하는데, 불현듯 그 말씀이 생각나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을 것입니다. "민족이 내 앞에 와서 조약을 맺자고 하는구나! 내가 하나님 말씀 앞에서 훈련받고 충성되이 일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이스마엘과 하갈을 끊어내고 결단하니,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그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정확하게 성취됩니다. 성경은 이런 예를 무수히 많이 보여줍니다.
모세를 기억해 보십시오. 모세는 사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실패한 왕자입니다. 애굽 궁전에서 왕의 후계자 서열 중에 있었지만, 그는 자기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애굽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도주했습니다. 나이 80이 되어서 빈털터리가 되어서, 거지 꼴로 바로 앞에 서서 "내 백성을 보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뒤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한 사람 모세가 애굽 제국을 상대합니다. 한 사람 모세가 그 당시 최대 강국 애굽의 바로를 상대합니다. 믿음 좋은 사람 한 사람이 한 민족보다 더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 좋은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키워가시니까, 그 사람이 여러 민족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셨지 않습니까?
한 사람 아브라함이 한 민족 블레셋과 조약을 맺고, 한 사람 모세가 거대한 제국 애굽과 맞서 싸우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셔서 애굽을 심판하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능력이 오늘 우리에게 왜 임하지 않겠습니까?
여호수아는 자신의 마지막 고별 설교로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셨으므로 오늘까지 너희에게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수 23:9-10)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적게 표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이 블레셋을 상대하지 않습니까? 모세 한 사람이 애굽 제국을 상대하지 않습니까? 적어도 우리 믿음의 사람, 믿음 좋은 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일당백이 아니라 일당 십만, 일당 백만으로 만들어가실 것이라는 위대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내가 그런 사람이 된다는 사실이!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성장하고 믿음으로 자라난다면,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빈부귀천을 보지 않으시고, 인간적으로는 실패한 모세를 바로 앞에 세우신 것처럼, 인간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아브라함을 블레셋 민족 앞에 세우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 우리도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자녀들, 우리 교회학교 학생들, 여러분들은 우리 자녀를 위해서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좋은 대학 가라, 좋은 직장 들어가서 그깟 월급쟁이들하고…" 그런 식의 수준 낮은 기도가 아니라, 이렇게 기도하셔야 됩니다. "좋은 믿음을 가져서 한 민족을 상대하는 아이가 되게 해달라고, 블레셋 앞에 선 아브라함처럼, 바로 앞에 선 모세처럼, 한 명이 천 명을 쫓아내는 위대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달라고" 우리는 그렇게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 자녀들이 이런 비전을 가지고 성장하고 잘할 수 있도록 우리가 교회학교 선생님이 되어서 그들을 길러내는 것이 가슴 뛰는 축복이지 않습니까? 사춘기에 우리 아이들 눈에 초점이 없는 아이들인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넣어주고 가르쳐 주고 일러 줄 때마다 눈에 초점이 잡히고, 하나님 말씀이 그리워진다 하고, 그들이 믿음으로, 말씀으로 성장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것은 세상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자녀들을 길러내야 되고, 우리 교회학교 어린 생명들에게 우리 마음과 힘을 다해서 그들을 가르치고 양육해야 됩니다. 부디 우리 믿음의 다음 세대들이 그렇게 성장할 수 있도록 마음 다하고 최선 다해서 힘써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영원한 유산, 우물
이제 아브라함이 조약을 맺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자기 발로 직접 찾아와서 조약을 맺자고 합니다. 양과 소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어린 암양 새끼 일곱 마리를 따로 가져오라고 합니다. 아비멜렉이 궁금했습니다. 양과 소는 다 이해가 되는데, 이 조약에 어린 암양 새끼 일곱 마리는 왜 필요한 것입니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창 21:29-31)
아브라함은 블레셋 지경에서 목축하면서 자기 손으로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이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여러 번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아비멜렉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기회에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영원히 아브라함의 자손의 것으로 만들고자, 일곱 암양 새끼를 줌으로써 이 지역의 우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지혜로운 일입니다. 지금 이 지역은 블레셋 지경입니다. 그런데 맹세의 우물 브엘세바를 아브라함의 것으로 언약하고 약속받음으로 인하여, 이 지역이 이스라엘 영토가 되었습니다. 이후로부터 이스라엘의 영토를 일컫는 말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가 되었습니다. 저 북쪽 최북단 단, 최남단 브엘세바, 이것이 이스라엘의 영토를 가리키는 말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유목민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도 유목민으로 살 것입니다. 그 아들 야곱도 그 자손들도 유목민으로 살 것입니다. 유목민으로 살면 언젠가는 이곳에 와서 양들을, 소들을 먹여야 하는데, 그때 우물이 없으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우물이 영원히 아브라함의 것임을, 영원히 그 후손의 것임을 천명한 것입니다.
이삭이 그 혜택을 봅니다.
"이삭이 그 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거주하며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창 26:17-18)
그의 아버지가 부르던 이름, 맹세의 우물 아닙니까? 블레셋 사람들은 비겁하게도 그 우물을 메워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가서 다시 그 소유권을 주장하고, 다시 그 우물을 파고 자기 것으로 찾아옵니다. 이렇게 그 아버지의 우물이 그 자식의 우물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 됩니까?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주려고 하십니까? 믿음이 있는 사람이나 믿음이 없는 불신자들이나 모두가 자녀들에게 공히 물질을 물려주려고 하지 않습니까? 돈을 물려주려고 합니다. 돈이 있으면 편안하게 그래도 살 수 있으니까, 생애 기반이라도 마련할 수 있으니까, 돈을 쌓아두려고 하고, 집이라도 물려주고, 땅이라도 물려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다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그것을 받아서 사업에 한 번 실패하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립니다. 한순간에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물은 마르지 않습니다. 쓰고 쓰고 또 퍼내도 어디서 그렇게 물이 솟아나는지 샘솟는 우물은 마르지 않습니다. 아버지 때 목축하고 양떼를 먹이고, 그 아들이 다시 양들을 먹여도 우물은 마르지 않습니다. 그 손자가 양들을 끌고 와서 먹여도 마르지 않습니다.
마르지 않는 이 우물은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 은혜의 우물을 파놓으면, 우리 자녀들도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가 힘들고 어려울 때 엎드려 기도하시고 그 기도의 우물을 판 것을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했다면, 우리 자녀들도 그렇게 은혜의 우물을 파지 않겠습니까? 인생이 힘들 때마다, 답을 찾고 싶을 때마다, 우리 부모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내고, 인생의 장벽이 생길 때마다 우리 부모님이 기도해서 이 답을 찾아냈다면, 그들도 그렇게 그 우물에 엎드리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자녀들에게 무엇을 물려줘야 될지를 다시 한번 이 우물을 통해서 생각하셔야 합니다. 쌓아 놓을 것이 아니라 깊이 파내려 가야 합니다. 쌓아둘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샘솟는 하나님 말씀의 생수를 그들에게 물려줘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고, 우리 자손들이 사는 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여기서부터 아브라함 인생의 성숙기가 시작됩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보내고 정리한 그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을 이루시고, 한 민족을 상대하는 위대한 인물로 세워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인물이 되기를, 우리 후손들도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하고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도 아비멜렉처럼 영적인 안목을 갖게 하여 주옵소서. 불신자였던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본 것처럼, 주여 우리도 불신자보다 더 좋은 안목을 갖게 하시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비치는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통하여 온전히 성취되고 이루어지도록, 주여 우리가 제대로 살아내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르게 살아서 우리 자녀들에게 마르지 않는 영원한 우물을 물려줄 수 있도록 주여 우리를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