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강 / 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 (22:3-4)

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

본문: 창세기 22:3-4

최근 서울 행정법원에서 한 의미 있는 판결문이 나왔습니다. 판결문의 마지막 결론은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라는 문장이었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이 문장을 법조계에서는 결코 평범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판사가 쓰는 판결문은 주어와 서술어, 목적어를 분명하게 기술해야 하고, 형용사와 부사를 최대한 자제하며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작성해야 합니다. 게다가 법률 용어가 난무하여 도대체 누가 잘했다는 것인지, 결론이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누가 잘못했다는 것인지 판결문만 읽어서는 알 수 없게 되어 있는 것이 대체적인 판결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번 판결문은 내용이 쉽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 소송을 제기한 분이 청각 장애인이었습니다. 이분이 자기 취업 과정에서 청각 장애인으로 불이익을 받았다는 취지의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의 판단은 불이익이 없었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법정에서 판결문을 들어야 하는데 수어 통역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려운 법률 용어가 수어 통역에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쉬운 문장으로, 그림과 삽화까지 동원해서 판결문을 써 준 것입니다. 법조계 안팎과 국민들에게 큰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법원이 변하고 있다는 하나의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법조계가 국민들에게 신뢰를 많이 잃어 오지 않았습니까? 정치 편향적인 판결도 있고, 국민들 눈높이에 맞지 않는 형량도 있습니다. 분명히 흉악범인데 형량이 너무 낮아서 "저 사람이 풀려나면 우리가 어떻게 불안해서 살 수 있을까?"라는 아우성도 군데군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을 계기로 법조계가 달라지는 계기가 될까라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어떤 조직이나 어떤 사람도 완벽하거나 완전할 수 없습니다. 불완전합니다. 그런데 완전하지 않으나 방향이 옳으면, 그 사람이 걸어가는 방향, 그 조직이 나아가는 방향이 옳으면 사람들은 응원해 줍니다. 기대감을 가집니다. 그 방향으로 나아가면 언젠가는 결과가 좋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속을 썩이기도 하고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 그러나 좋은 방향으로 걸어가려고 애를 쓰면 인내해 주고 기다려 주고 도와줍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이런 방식으로 도우십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방향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다면,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죄짓기도 하고 허물이 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기대해 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그 길을 걷고 있고,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기대하고 신뢰하고 믿어주고 계십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은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입증하라는 의미를 깨닫습니다. "지금 너에게 하나님 나는 몇 등쯤 되느냐, 지금 네 마음속에 이삭이 우상이 아니냐, 네 마음속에 하나님 나를 다시 중심에 세워라." 하나님의 음성이 바로 그런 의미인 줄 알고 있습니다. 인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밤새도록 기도하면서 그 깊은 하나님의 속마음을 읽어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창 22:3)

여기에 반가운 한 구절을 만납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창세기 21장 14절에도 나왔던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마엘을 떠나보내라 하실 때도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밤새도록 늘어지게 자고 푹 자고 아침에 기지개를 켜고 컨디션 좋게 일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밤새도록 고민하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울부짖고 묻고, 눈도 한번 붙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아침에 일찍 결단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훌륭한 믿음을 보여주는 지표가 됩니다.

아브라함은 오랫동안 고민합니다.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밤새도록 한잠도 자지 못합니다. 그런데 결단합니다. 결단한 이후에는 즉각 행동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래도 아침은 먹여서 보내야지" 하고 이스마엘에게, 이삭에게 아침을 먹이려고 그 자리에 앉아서 아들의 얼굴을 많이 쳐다보고 있었다면, 아들을 떠나보내지 못할 이유가 수십 가지나 생각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그날은 못하는 것입니다. 그날 못하면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결국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명령에는 순종하지 못하게 됩니다. 순종하지 못하고 결단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음 변하기 전에 얼른 짐을 꾸립니다. 그런 식으로 이스마엘도 떠나보내고, 그런 식으로 이삭도 함께 길을 재촉해서 길을 떠납니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기도하지만, 결단하면 즉각 행동하는 것이 아브라함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오래 고민합니다. 오래도록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단도 합니다. 그런데 이 결단이 내 손과 발로 옮겨지기가 어렵습니다. 오래 걸립니다. 어떤 분은 수년, 어떤 분은 수십 년, 어떤 분은 돌아가실 때까지 안 되는 분도 있습니다. 수백 번 결단하지만 그 행동 하나가 그렇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차이가 바로 나와 아브라함의 차이입니다.

떠나감과 떠나보냄

아브라함의 인생을 보면 믿음의 인생이라고 하는데, 그의 믿음을 드러내는 두 가지 키워드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떠나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두 번 떠나게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합니다. 갈대아 우르는 아브라함에게는 우상의 땅이요, 죽음의 땅입니다. 자기 형제 하란이 거기서 죽었습니다. 아버지와 형제들, 가족들이 함께 길을 나서서 하란으로 갑니다. 하란에 도착해 보았더니 그곳은 우연히도 죽은 형제 하란과 이름이 똑같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죽은 아들 하란에게 빠져 그 환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시 거기서 길을 떠나게 합니다.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두 번의 떠남에 순종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경제적 기반이 거기에 다 있습니다. 평생 동안 쌓은 것이 거기에 다 있고, 인간관계가 다 있고, 거래처가 다 있고, 앞으로 창출할 수익의 미래적인 가치도 거기에 다 녹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떠나서 처음부터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 부르심을 따라서 떠납니다.

두 번째 아브라함의 믿음을 나타내는 키워드는 떠나보냄입니다. 떠나가는 것보다 떠나보내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찮은 것을 떠나보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을 떠나보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이 떠나보내라고 합니다. 이스마엘이었고 이삭이었습니다. 아브라함 그 자체 아닙니까? 평생 동안 기다려서 얻은 아들 이스마엘, 100세가 되어서 낳은 아들 이삭, 자기 인생의 전 존재라고 할 만큼, 내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이들을 하나님은 떠나보내라고 합니다. 쉽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신앙생활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기도 제목들을 한번 쭉 적어 보십시오. 전부 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거 좀 가져가십시오" 하는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습니다. 물론 가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이 더러운 성질머리 좀 가져가십시오. 하나님 이 지긋지긋한 가난 좀 가져가십시오. 입만 열면 남을 저주하는 이 못된 말버릇 좀 가져가십시오." 그렇게 기도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도 달라고 하고, 물질도 권력도 사람도 관계도 다 채우려고 하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덜어내라고 한다면, 그것을 다 비워내라고 한다면, 신앙생활의 본질이 채우는 게 아니라 비우는 것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동의하시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를 수 있겠습니까? 비우라고 한다면, 털어내라고 한다면.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이스마엘과 이삭을 덜어내라, 비워내라고 합니다.

예수님에게 한 청년이 찾아옵니다. 이 청년은 유대인의 관원이었습니다. 정치력이 있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부자였습니다. 엄청난 부자였습니다. 체력이 있습니다. 게다가 청년입니다. 젊음도 있습니다. 다 가진 사람입니다. 권력과 물질과 젊음을 가졌으니 다 가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청년이 예수님께 나와서 영생을 구합니다. "선생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저는 율법은 다 지켰습니다. 안 지킨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묻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 19:21-22)

근심하며 가니라. 따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근심하며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너 있는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만약 예수님이 "너 있는 것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이 말씀만 하셨다면 청년은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 가지 중에 하나만 잃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산만 잃습니다. 여전히 권력도 남아 있습니다. 정치력도 남아 있습니다. 여전히 젊습니다. 젊은 청년이 정치력을 가지고 있으면 물질 따위는 얼마든지 채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물질과 영생을 바꿀 수 있다면,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물질은 다시 채우면 되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못합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말씀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야 하면 정치 권력도 내려놓아야 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면 젊은 청년의 그 시간도 주님 따르다가 어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은 다 비우라는 말씀입니다. 덜어내라. 그것을 못한 것입니다. 채우려고 노력했는데, 나는 권력도 있고 물질도 있고 젊음도 있는데 영생까지 한 주머니에 더 담으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너 영생 담고 싶으냐? 그럼 다 털어." 그것을 못한 것입니다.

이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고 난 이후에 성도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거기서 성도들의 정체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11)

성도의 정체성을 거류민과 나그네라고 정의합니다. 천국 길 가는 나그네,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동가식서가숙하면서 괴나리봇짐 하나 지고 가는 나그네, 짐이 무거워서야 쓰겠습니까? 그 무거운 짐을 가지고 어떻게 나그네가 길을 떠나다닐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육체의 정욕은 자꾸 채우라고 합니다.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고 자꾸만 담으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나그네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영생을 얻기에 부담스러운 몸이 됩니다. 비워내라, 덜어내라, 그것을 비워내야 나그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이 청년의 대화를 기억하며 성도의 정체성은 나그네임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정의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왜 비워내라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왜 덜어내라고 하실까요? 이스마엘도 이삭도 아브라함이 그렇게 원하고 그렇게 바라던 것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자기 마음 중심 가장 깊은 최고의 자리에 자기 아들을 떡하니 앉혀 놓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될 그 자리에,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데 그 복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것 덜어내라, 그 빈자리에 내가 들어가서 앉아야 되겠다. 나는 너를 창조한 창조주이고, 나는 너를 복주는 복의 근원이고, 나는 너를 인도하는 아버지인데, 내가 네 마음 중심에 자리할 자격이 없느냐? 내가 너의 마음 중심에 있을 자격이 없느냐? 너 가지고 있는 것 다 비워내라, 내가 너에게 1번이 되어야 하겠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중심에 누가 계십니까? 성도의 신앙생활은 주인 자리를 위한 투쟁입니다. 평생 동안 누가 주인이냐, 평생 동안 내 주인이 누구냐를 명확하게 밝히는 과정이 성도의 신앙생활 과정에 숨어 있습니다. 누가 주인입니까?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네 마음 중심에 1번이 누구냐? 네 자식이냐? 네가 지금까지 이룬 너의 재산이냐? 너의 명예냐? 너의 가치냐? 그게 뭐냐?" 물으신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질문 앞에 입증해 보여 드려야 됩니다. "하나님이 1번입니다." 다른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 비워내고 덜어내라"고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 아닙니까? 그 질문에, 그 요청에 응답해야 됩니다.

제삼일에 눈을 들어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창 22:4)

아브라함과 이삭과 종들이 모리아 산으로 길을 떠나서 3일 동안 방향을 잡고 갑니다. 이제 3일째, 저 멀리 모리아 산이 보입니다. 성경에서 3일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나는 3일 중에 가장 중요한 3일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날이 3일째입니다. 그래서 그 3일은 사망 권세에 사로잡혀 있었던 우리의 죄의 사슬을 끊고, 죽음의 사슬을 끊으시고, 이제는 부활로써 그 역사성을 입증하신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참된 구주가 되시는 그 아름다운 날이 3일입니다.

3일째 되던 날 모리아 산이 보입니다. 이 3일 동안 아브라함과 이삭이 부자지간에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성경은 침묵합니다. 한마디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물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아들을 인신 제사로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데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불안하지 않았을까요?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고 있으나,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막상 모리아 산에 올라가면 천사들을 붙여서 이삭을 결박하고 그를 잡으라고 하면, 이삭을 잡고 피를 보는 것이 하나님의 진심이었다면, 그럼 그때 난 어떡하지? 이대로 그냥 숨어버릴까? 동굴을 찾아서 거기에 들어가서 나오지 말까? 아이의 손을 잡고 다른 길로 가버릴까?" 온갖 생각이, 수백 가지 생각이 3일 동안 그의 마음을 지배하지 않았겠습니까? 의심하면서 믿고 싶고, 믿으면서도 불안하고, 불안하면서 의심하고. 이 과정이 3일 동안 지속적으로 반복되었을 것입니다. 모리아 산으로 가는 그 길은 그에게 있어서 고통의 시간이고, 온갖 생각이 "내가 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해서 이런 일을 겪어야 되는가" 자책감까지 더해져서 복잡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여정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데 순도 100%의 믿음을 가지고 산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는 100%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넌 믿음을 좀 강하게 보여라. 산기도를 가든지 금식 기도를 하든지 강력하게 믿음을 하나님 앞에 보여서 지금 50%밖에 되지 않는 믿음을 100까지 올려라." 그런데 애초에 순도 100%의 믿음은 허상입니다.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요구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시절 왕의 신하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아들이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우리 집에 내려오셔서 내 아들을 고쳐 주소서." 예수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요 4:50-51)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믿고 내려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영적 권위에 순종할 수밖에 없어서, 그 권위에 눌려서 아버지가 뒤돌아서서 자기 집으로 내려가지만, 그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정말 예수님의 말씀을 100% 믿고 내려갔을까요? 불안이 없었을까요? 내려갔는데 아이가 죽었으면 어떡합니까? 내려갔는데 아이의 열이 떨어지지 않고 여전히 아이가 아픈 상태면 어떡합니까?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왔는데, 이 예수님이 돌팔이 같다는 마음이 들고, 내가 혹시 지금 다른 의사를 찾아가야 되는 것 아닌가, 이런 복잡한 심정이 그 아버지에게 들지 않았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그 아버지 마음속에 있는 믿음의 순도를 보셨다면 아들은 낫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려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불안하고 의심이 생기고 걱정되고 염려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서 그 발걸음을 그의 집으로 옮겨가는 그 믿음,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이 흔들리지만, 때로는 비틀거리고 때로는 쓰러지고 때로는 죄 짓고 넘어지지만, 하지만 방향이 옳아야 됩니다. 그 방향이 하나님께서 원하고 지시하시는 길이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출애굽 여정을 겪으면서 그들은 원망과 불평이 체질화되어 있었습니다. 모세를 돌을 들어 쳐서 죽이려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합니다. 입만 열면 불평입니다. 입만 열면 저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은 잘 따라갑니다. 방향은 놓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 작은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도 방향이라도 옳으니, 나를 욕하고 저주하지만 그래도 그 길이라도 따라오니,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모리아 산으로 가는 그 길, 아브라함 마음속에 불신, 원망, 염려, 걱정, 의심이 일어나도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방향이 옳으니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신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걷는 길, 확신하십니까? 불안하지 않습니까? 수십 년 신앙생활 했는데 한 작은 사건 때문에 무너집니다. 내 마음이 이렇게 연약한 줄 몰랐고, 내 믿음이 이렇게 약한 줄 몰랐고,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지는 나를 보면서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디 가서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괜찮습니다. 넘어져도 비틀거려도 흔들려도 의심이 일어나도, 정신 차리고 방향만 바로잡고 걸어가면 됩니다. 그 길이 모리아 산으로 가는 그 길이면 괜찮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시 123:1-2)

시인은 성전에 올라가며 이 시를 부릅니다. 발걸음이 성전을 향하고 있습니다. 눈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릅니다. 절절한 사연을 가지고 성전에 올라갑니다. 성전에 올라가면서 기대감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들어 주시겠지." 그런데 불안도 있습니다. "안 들어 주시면 어떡하나, 안 되면 어떡하나." 염려와 불안과 의심을 가득 가지고, 발걸음은 성전으로, 눈은 하나님을 향합니다. 그러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것 하나 보시고, 이 시인의 믿음을 보시고, "이 믿음 귀하다"고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비워내는 것입니다. 그 비워낸 자리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됩니다. 우리 믿음은 순도 100%를 하나님이 요구하지 않습니다. 연약하고 흔들리고 비틀거리고 넘어져도 방향이 옳으면 하나님은 귀하다고 인정하십니다. 그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가면 그 길 끝에서 하나님이 "수고했다" 하시고, 손잡아 주시고, 안아주시고, "참 고생했다" 하시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기대하시고, 좋은 방향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자꾸 채우려고 했습니다. 더 달라고 하고, 더 가지려고 하고, 더 채우려고 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없다고 원망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셨는데, 어처구니없게도 복을 하나님 자리에 앉혀 놓고 우상숭배하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이스마엘을, 이삭을 하나님 자리에 두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비워내고 덜어내라, 내가 그 자리에 좌정하겠다 말씀하십니다. 주여, 우리는 그런 미련한 자 되지 않기 원합니다. 내 마음 중심에 하나님 오시게 하옵소서. 우리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1번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복이, 명예가, 권세, 능력, 건강도 하나님 자리에 세우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신앙생활은 비록 흔들리지만,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그 믿음의 여정을 모리아 산을 향하여 걷는 길이라 말씀하셨사오니, 주여 우리가 눈을 똑바로 뜨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그 길 따라 걷게 하옵소서. 쓰러지고 넘어져도 또다시 일어서게 하시고, 이렇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손잡고 다시 힘내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길 끝에서 우리 주 예수님 만나게 하시고, 하나님이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안아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따뜻한 품을 느끼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