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돌아오리라
본문: 창세기 22:5-8
작년 한 해 미국 증시에서 주가가 하락한 회사들이 많았는데, 그중 테슬라라는 회사가 눈에 띕니다. 이 회사 주식은 작년 1월 3일에 399달러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2월 30일에는 128달러에서 마감했습니다. 약 70% 정도 폭락한 것입니다. 1년 동안 이 회사 주식이 떨어진 추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특이점이 발견됩니다. 이 회사의 CEO가 일론 머스크인데, 머스크가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사고를 칠 때마다 주식이 예외 없이 곤두박질쳤습니다.
작년 5월에 스페이스X의 여승무원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로 소송 중이었는데, 소송을 마무리하면서 합의금을 지급합니다. 그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마자 테슬라의 주가는 약 6% 정도 폭락합니다. 그 이후에도 각종 SNS를 통해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말들을 올리고 불편한 말들을 올릴 때마다, 이른바 사고를 칠 때마다 예외 없이 주식은 떨어졌습니다. 이른바 오너 리스크가 작동한 것입니다.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머스크가 이런 인간인 줄 알았다면 여기에 투자하지 않았을 텐데, 아마 후회가 막심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인간됨과 사람됨을 미리부터 알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인품이 좋고 실력이 있고 회사를 이끌어 갈 만한 자질이 뛰어난 사람, 비록 지금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나 그 사람이 감각이 있고 실력이 있고 사람이 좋으면 얼마든지 그 기업은 뻗어 나가고 발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회사에 투자를 하는데도 그 사람이 어떤지, 그 사람의 가치가 어떤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맺어 갈 때도 사람을 알면 알수록 이분과 평생 동안 친구로 살아가야 할지, 아니면 조금 거리를 두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만나지 않는 것이 이로울지 판단이 서지 않습니까?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여정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하나님을 깊이 알면 우리 믿음 생활이 풍성해집니다. 문제가 생기고 신앙생활이 꼬이고 엉망이 되고 상황에 압도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기 때문에 상황을 극복해 나갑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모리아 산을 향해서 아들 이삭을 데리고 사흘 길을 떠났습니다. 흔들리고 불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흘 길 동안 도망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가지 않고 믿음의 여정을 성실하게 수행해 나갑니다. 이제 모리아 산 아래까지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종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의 담대한 고백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창 22:5)
"우리가 돌아오리라." 아브라함의 이 고백은 대단히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돌아오리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나슈바'(וְנָשׁוּבָה)라는 단어를 씁니다. 히브리어는 동사의 수가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돌아오리라"가 아니고 "우리가 돌아오리라"입니다. '베나슈바'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그분의 강한 신앙고백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연히 아브라함과 이삭입니다. 그가 지금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가는데 종들을 거기에 남겨두고 올라갑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이 아들 이삭을 인신 제사로 받지 않을 거라는 확신 가운데, 지금 배웅하는 나와 이삭이 반드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는 사흘 동안 믿음의 여정, 모리아 산을 향한 여정을 걸어가면서 하나님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을 확실하게 붙잡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대단한 이유는 그가 이런 상황에 압도되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그마한 상황이 생기면 그 상황 때문에 손과 발이 부들부들 떨리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그때부터 머리가 하얗게 되고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데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고 판단력이 명석하게 되살아나는 사람을 저는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평소에 그렇게 영민하고 똑똑하고 지혜로운 분이라도 상황 앞에서 속절없이 금방 믿음이 무너져 내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리아 산 아래 도착해서 "우리가 돌아오리라"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이 생깁니다. 오히려 차분해집니다. 문제 따위에 흔들리지 않고 압도당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풍랑 앞에서 우왕좌왕합니다.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마 8:24-25)
갈릴리 바다에 큰 풍랑이 일었습니다. 예수님은 배 밑바닥에서 주무시고 계시고,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이 무서워서 두려워 죽을 것만 같습니다. 풍랑이 곧 배를 뒤집을 것 같습니다. 배가 난파할 것 같습니다. 제자들 중에 상당수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풍랑을 그들이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두려워합니다.
왜 그들은 상황 앞에서 두려워합니까? 배 밑바닥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말씀으로 만드신 하나님과 함께 창조의 시간에 계셨습니다. 배 밑바닥에서 편안히 잠들어 계신 그분이 창조주이심을 알았다면,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제대로 알았다면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감히 피조물인 바람과 바다가 어떻게 창조주이신 예수님을 난파시킬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예수님과 우리가 한 배 타고 있는데, 우리는 이런 상황을 겁낼 것 없고 걱정할 것도 없다고 오히려 편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불안해 하는 것은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배 밑바닥으로 겨우 기어 내려가서 예수님을 깨웁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소서." 예수님이 일어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며 "잠잠하라" 하시니 그제서야 그들은 깨닫습니다.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그들은 그 이전까지는 예수님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창조주이심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들은 상황 가운데 두려워하지 않았을 텐데, 예수님을 몰라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가지고 나간 것이 무엇입니까? 목자의 지팡이였습니까? 물맷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골리앗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오지만 나는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나아가노라." 그는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미워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고 높이는 자를 사랑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골리앗이 40일 동안 조석으로 자기 몸을 나타내면서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했습니다. 다윗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상해서, 감히 할례받지 못한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 따위가 내가 사랑하고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을 다윗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그는 견디지 못하고 만군의 주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에게 도전합니다. 이런 다윗을 하나님이 어떻게 돕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런 다윗을 어떻게 편들어 주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을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 때문에 염려합니까? 우리가 흔들리는 이유, 걱정하는 이유, 염려하는 것은 아주 작은 문제만 만나도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신앙생활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속절없이 사탄 앞에 무릎 꿇는 이유는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면, 우리는 사탄이 나를 감히 무너지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오히려 더 강하게 믿음으로 이 현실을 돌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을까요? 어떻게 했길래 아브라함이 "우리가 돌아오리라, 베나슈바" 이렇게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평소에 깊은 영적 교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알아가는 것도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한두 시간 밥 먹고 커피 마신다고 그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수십 년 동안 부부가 함께 살아도 그 사람 속을 모르는 것이 사람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오랜 기간 교제하고, 하나님 말씀 듣고, 기도하고, 영적 교제를 아브라함이 나누었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깨달은 것입니다. 비록 부침도 있었고 죄도 짓고 하나님 기뻐하시지 않는 행동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친밀했습니다. 친밀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제대로 경험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평소에 깊은 교제를 누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의 실력이 나타납니다. 어떤 상황이 생기면 그 상황에 대처하고 넘어가고 극복할 수 있는 영적인 영향력과 힘이 그때 나타납니다. 평소에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 안에 거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가장 가까운 데서 오는 시험
"아브라함이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창 22:6)
이제 모리아 산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아들과 함께 올라갑니다. 아들의 등에는 번제에 쓸 나무를 지우고, 아브라함은 한 손에 불을 들고 한 손에 칼을 들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산을 오르는 동안 아브라함이 예상치 않은 이삭의 말을 듣습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 22:7)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말은 아브라함이 지금껏 걸어왔던 여정 가운데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무너지게 하는 위험천만한 시험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잘 견뎌왔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들, 내 독자, 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려라" 하셨을 때, 밤새도록 기도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모리아 산을 향해 떠납니다. 1단계 시험을 극복한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사흘 길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흔들리고 불안하고 염려되고, 다른 길로 가버릴까 걱정했지만, 그러나 자기와의 싸움을 잘 극복하고 믿음의 여정 사흘 길을 건너왔습니다. 산 아래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돌아오리라" 믿음의 고백을 하고 산 위를 올라옵니다.
그런데 예상치 않았던 아들의 이 질문,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말이 아브라함에게는 굉장한 시험거리입니다. 가장 사랑하고 가장 아끼고 나와 똑같은 존재인 이 아들이 그의 입을 통해서 이 말을 했을 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가장 위험한 시험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건, 하나님을 철저하게 모방한 사탄이 주는 시험이건, 시험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내가 사랑하고 너무나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시험에 취약합니다. 연약합니다. 외부적인 싸움, 바람과 풍랑은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극복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오는 시험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에덴에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건넨 이가 하와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한 하와입니다. 그가 아담에게 주매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혼자 사는 것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이 돕는 배필로 세워 주신 그 하와가 아담에게 주매 그가 먹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하와가 아담에게 시험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아끼고 사랑하셨던 제자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에게 시험이 찾아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 16:21-22)
예수님이 수난예고를 하셨습니다. "내가 고난 당하고 십자가 지고 죽어야 한다." 예수님이 이것 때문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 앞길을 막아 섭니다.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단코 주께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을 듣고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이 이렇게 강하게 반응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사탄이라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받는 유혹이 그만큼 강렬했다는 반증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나를 흔드니, 예수님의 마음, 그 흔들리는 마음을 예수님이 다잡기 위해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오는 그 시험은 생각보다 파괴력이 있습니다. 강력합니다. 예수님조차 이렇게 반응하신 마당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리 모두가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님 앞에 서야 됩니다. 누구를 통해서, 어떤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어떤 식으로 시험이 오더라도 이기고 견딜 수 있도록, 함께 망하지 않도록 우리는 정신 바짝 차리고 견디고 이겨내야 됩니다.
동시에 내가 제대로 서지 못하면 내가 하와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악과를 건네는 하와가 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됩니다.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십자가를 지지 말라고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베드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내가 제대로 진리 위에 서지 못하면, 내가 제대로 서지 못하면 아담과 함께 내가 망하고, 내가 제대로 서지 못하면 예수님을 시험에 빠지게 하는 베드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지 않습니까? 사탄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한다는 사실을 꼭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전진하는 믿음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이런 가장 위험한 시험을 어떻게 극복합니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창 22:8)
아브라함은 지혜로웠습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브라함과 이삭은 함께 길을 계속 걸어갑니다. 신앙생활에 성공할 수 있는 여부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중요한 것 한 가지는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할 일만 하면 됩니다.
번제할 어린 양, 누가 준비해야 됩니까? 지금 번제할 어린 양을 준비해야 될 분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입니까? 하나님이십니까? 헷갈리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사흘 길을 걸어오면서 하나님이 인신 제사를 태워서 받기를 원치 않는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종들에게 "우리가 돌아오리라, 베나슈바" 확신하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확신을 가지고 올라오는데 아들이 "번제할 어린 양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때부터 혼미해집니다. 헷갈립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것이라면 적어도 양 한 마리는 하나님이 데리고 오라고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올라오는 길에 어린 양 새끼 한 마리든, 하다못해 염소 새끼라도 하나 어디 걸려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왜 안 들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하실 일을 끝까지 하나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내가 하려고 하면, 그것이 교만이고 그것이 월권이고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들은 성격에 따라 하나님 하실 일을 내가 하려고 하면 일을 휘저어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포기해 버립니다. 그런데 차분하게 이것이 내가 해야 될 일인지 하나님이 하셔야 될 일인지 워낙에 믿음으로 살펴야 됩니다.
번제에 쓸 어린 양은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던졌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은 자기가 할 일을 결정합니다. 함께 전진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번제할 어린 양 어떻게 하지? 멈추어서 잠깐 생각해 보자"라며 그냥 산 중턱에 머물러 있었다면, 머물러 있는 것은 다시 뒤로 후퇴함을 의미합니다. '혹시 우리가 올라오다가 못 봤을지 모르니 내려가 보자.' 내려가면 다시 올라올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해야 될 일, 하나님이 부르신 모리아 산 꼭대기 정상의 제단, 그 번제단을 향하여 두 사람이 뒤로 물러서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모리아 산으로 오는 사흘 길, 그 길이 길게 느껴졌을까요? 아니면 이삭의 이야기를 듣고 그때부터 한 걸음 한 걸음 산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이 발걸음이 무거웠을까요? 후자가 훨씬 더 무거운 발걸음입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히 10:38-39)
믿음을 가진 사람은 뒤로 물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뒤로 물러나는 자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뒤로 물러나는 것 곧 멸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뒤로 물러날 핑계거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브라함 같으면 "번제에 쓸 어린 양 찾아보자" 그것이 핑계거리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도 핑계거리가 많습니다. 내 건강도, 내 물질도, 내 가정 상황도, 내 일터도, 내 직장도, 모든 것이 다 핑계거리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이 부르신 그 번제단, 그 산 정상을 향해서 올라가야 하는데 내 발목을 잡는 것들이 많습니다. 핑계거리가 시험거리가 되어 저 사람이 나를 시험에 들게 하고, 이것이 기분 나빠서 나는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서게 만드는 것들, 극복해야 됩니다. 그것 다 뒤로하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부르신 곳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될 일입니다.
그 믿음을 굳게 지키고 믿음의 여정을 한 발짝 한 발짝 옮겨 가시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흔들리면서도 모리아 산을 향하여 걸어왔던 아브라함, "우리가 돌아오리라"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고백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주여 우리에게도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모르면 상황에 흔들리고 압도당하고 불안하고 염려되고 무너져 내리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아브라함처럼, 다윗처럼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사오니, 주여 우리가 하나님과 깊고 친밀한 교제를 매 순간 나누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여,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 부르신 곳으로, 산 정상으로 나아가는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우리를 핑계하게 하고 시험에 들게 하고 무너지게 하고 나를 붙잡는 여러 가지 시험에서 이 모든 것 극복하고, 하나님께 맡길 것 맡기고, 나는 믿음의 여정을 걷게 하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