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본문: 창세기 22:9-12
미국에서는 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 기념일로 지킵니다. 미국 전역이 공휴일입니다. 그만큼 킹 목사의 영향력이 오늘날까지 상당합니다. 킹 목사는 1929년 미국에서 침례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인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침례교 목사가 됩니다. 그러나 이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1955년 어느 날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한 흑인 여성이 버스에서 백인 남성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됩니다. 전 미국이 들끓었습니다. 흑인들이 곳곳에서 시위했습니다. 이 시위를 비폭력으로 이끈 사람이 바로 킹 목사였습니다.
킹 목사는 시위를 비폭력으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버스 보이콧 운동을 주도하고, 동시에 버스 내 인종분리법이 위헌이라는 사실을 전 국민에게 알리며 연방 법원에 위헌 판결을 제소했습니다. 결국 이 법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끌어냅니다. 미국인의 승리였고, 흑인의 승리였고, 킹 목사의 승리였습니다. 이때부터 이분은 흑인 인권 운동가의 길을 걸어가는데, 1963년 워싱턴 DC에서 20만 명의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I have a dream,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합니다. 기념비적인 연설이었습니다. 그 이듬해 1964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68년 어느 날 백인 우월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그러나 킹 목사가 남긴 유산은 분명했습니다. 법을 개정한 것입니다. 흑인이나 백인이나 여러 유색 인종이나 차별받지 않는다는 것,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확립했습니다.
그러나 법이 개정되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고, 여전히 분리가 존재하고,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었습니다. 그로부터 시작해서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2023년 12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처음으로 흑인 그것도 여성이 총장 인준을 받습니다. 하버드 대학은 1636년에 개교한 이래로 흑인 총장이 단 한 명도 배출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흑인이, 그것도 여성이, 아이티 이민자 출신인 클로딘 게이라는 52세의 여성이 총장이 되었습니다. 만약 킹 목사가 살아 있었다면 "이제야 우리 흑인들도 대학 총장이 되는구나"라고 감회가 깊지 않았겠습니까?
이처럼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시간차가 있습니다. 법이 이상이라면, 법이 현실이 될 때까지, 각 사람의 마음에 뿌리내리고, 우리가 자연스럽게 법을 받아들일 때까지는 시간이 걸립니다. 그 시간차를 얼마나 어떻게 줄이느냐가 관건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칭의(稱義)의 차원에서 의로움을 허락하시는데, 그 의로움이 나의 의로움이 될 때까지, 내 삶이 의로운 삶으로 바뀔 때까지는 시간차가 존재합니다. 그 시간차를 줄이는 것이 우리 믿음 성공의 관건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공한 인생입니다. 어떻게 아브라함이 이런 칭찬을 받게 되었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예배
아브라함과 이삭은 하나님이 정한 모리아 산 그곳까지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창 22:9-10)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인신 제사로 받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것을 알기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결박할 때까지, 손에 칼을 잡을 때까지 하나님은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셨습니다.
만약 이랬으면 어땠을까요?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산 정해진 곳까지 갔을 때, 하나님이 "수고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지? 고생했다. 이삭은 저기 가서 쉬고 있고, 내가 양 한 마리를 준비했으니 아브라함 너는 양을 잡아 번제로 드려라." 모두가 해피한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결박할 때까지, 손에 칼을 들 때까지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십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속뜻이 있습니다.
원래 아브라함은 예배의 사람입니다. 예배를 좋아하고 예배를 잘 드린 인물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니" (창 12:7-8)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부터 예배 드렸습니다. 옮겨가는 곳마다 예배 드렸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지금 여기까지 올 때까지 아브라함이 과연 몇 번이나 예배 드렸을까요? 수천 번 혹은 그 이상입니다. 그가 예배 드릴 때마다 하나님께 바친 양이 몇 마리나 되었을까요? 수백 마리, 수천 마리 혹은 그 이상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드린 그 엄청나게 많은 수의 예배와 지금 이 한 번의 예배, 그 무게가 어디로 기웁니까? 어느 예배가 아브라함에게는 기억에 남을 만한 어려운 예배입니까? 진땀 나는 예배입니까? 고통스러운 예배, 가슴 아픈 예배입니까?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드린 예배는 양을 드린 예배입니다. 자기 가정에서 키운 양 한 마리 바친 예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양을 드린 예배였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뒤로 감추어 두고 있으나 마나 한 양 한 마리씩 하나님께 드린 예배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예배가 특별한 이유는 자기 인생의 전부라고 말할 만큼 소중한 아들 이삭을 하나님 앞에 결박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힘겨웠습니다. 예배를 준비하는 과정도 어려웠습니다. 브엘세바에서 길을 떠났습니다. 사흘 길을 걸어 모리아 산으로 왔습니다. 산 아래에서 산꼭대기까지 올라오는 과정도 힘겨웠습니다. 올라와서 아들을 결박했습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린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예배를 이렇게 드리라고 내버려 두신 이유는, 진짜 예배는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임을 알려 주려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자기 가장 소중한 것을 단 한 번이라도 드린 적이 있었습니까? 수천 번 예배 드려도 소중한 것은 뒤에 감추어 두고 별로 소중하지 않은 것만 하나님께 드렸는데, 그것은 자기 만족이지 진짜 예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적어도 믿음의 조상이 되려면, 앞으로 오고 올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브라함을 보고 예배를 배워야 하는데, 예배가 무엇인지 제대로 배우려면 단 한 번 예배 드려도, 일생에 단 한 번의 예배가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이 진짜 예배임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 기독교는 공인받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이 말은 네가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라는 뜻입니다. 네 입으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시인하라. 네가 가는 발과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이 네가 예수 믿는 사람임을 입증하라.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를 각오하고 너의 몸,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 산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묶었던 것처럼, 너의 몸, 가장 소중한 것을 예배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이나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묶어서 번제로 내놓은 것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있는데 어떤 마음으로 나와 있습니까? 내 일생에 단 한 번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심정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시간과 열정과 물질을 그저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심정으로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까? 한번 예배 드려도 하나님은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을 진짜 예배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함이 아닌 여호와를 위한 제단
아브라함에게 있어 모리아 산은 다윗에게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으로 옮겨갑니다. 다윗은 말년에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짓습니다. 인구 조사를 한 것입니다. 왕이 자기 나라 백성을 계수하는데 그것이 왜 죄가 됩니까? 죄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습니다. 보통 왕들이 인구를 셀 때는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전쟁에 나갈 만한 사람이 몇 명 정도 되는지 숫자를 세고 전쟁을 계획할 때 인구 조사를 합니다. 다윗이 전쟁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전쟁하라고 하신 적이 없는데도 다윗이 전쟁을 계획합니다. 이것이 죄가 됩니다. 자기 왕국을 말년에 좀 넓혀 보겠다는 욕심으로 전쟁을 계획한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지금까지 숫자를 세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민수기에서 딱 두 번을 제외하고는 하나님께서 전쟁하라고 하실 때도 숫자를 가지고 전쟁한 적이 없지 않습니까? 다윗이 지금까지 전쟁할 때 그 수를 가지고 전쟁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셨지, 수의 우위를 가지고 전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숫자를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전염병을 내립니다. 7만 명 이상이 죽어나갑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합니다. 하나님이 살 길을 열어주십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갓에게 명령하여 다윗에게 이르기를 다윗은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대상 21:18)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오.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지금까지 다윗은 '자기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는 뜻입니다. 사무엘서 말씀에 의하면 인구조사를 하는 기간이 9개월 20일이 걸렸습니다. 그 10개월 기간 동안 다윗이 예배 드리지 않았겠습니까? 아니, 더 열심히 예배 드렸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쟁을 준비하는 기간이었으니까요. 자기 욕망이 있으니까, 그 욕심이 있으니까 얼마나 열심히 예배 드렸겠습니까? 그런데 그 예배는 자기를 위한 예배였습니다. "하나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주십시오. 제 말년에 이 나라 영토를 확장하고 싶습니다. 부디 우리나라 백성들과 함께 나가서 싸우는 전쟁에, 제 마지막 기념비적인 전쟁을 승리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여호와를 위한 예배가 아니라 자기를 위한 예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악하게 보시고 "이제 너는 나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쌓아라" 하셨습니다.
다윗은 크게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이르자, 땅 주인 오르난이 왕을 보고 엎드립니다. "이 땅 그대로 가져가십시오. 당신 원하는 대로 다 쓰십시오." 다윗은 아니라고 합니다. 내가 큰 돈을 들여서 이 땅을 사겠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다윗이 그 터 값으로 금 육백 세겔을 달아 오르난에게 주고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여호와께 아뢰었더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부터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응답하시고" (대상 21:25-26)
26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다윗이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번제단 위에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다윗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는 말은 자기 욕심을 포기했다는 뜻입니다. 철저하게 회개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제가 제 욕심을 가지고 전쟁을 위해서 예배 드렸습니다. 제 욕심을 가지고 나와서 예배 드렸는데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는 제 욕심을 불태워 버리겠습니다." 번제단 위에 제물을 올려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서 그 번제단에 있는 제물을 다 태워 버리셨습니다. 제물을 태운 것이 아니라 다윗의 욕망, 욕심, 그 갈망을 불태워 버린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위해서 예배 드리라. 이것이 진짜 예배입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 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대하 3:1)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솔로몬이 건축한 그곳이 어디입니까? 예루살렘 모리아 산이라 했습니다. 그 모리아 산은 또 어디입니까? 다윗이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린 그곳입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아들 이삭을 묶어서 결박했던 그곳, 모리아 산 그 산 정상 번제단, 그 자리가 다윗이 자기 욕심을 묶어서 불태워서 하나님께 올려 드렸던 오르난의 타작 마당이었고, 그곳에 솔로몬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이곳이 성전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의 자리입니다.
이것이 우연입니까? 어쩌다 보니 그 자리에 솔로몬 성전이 세워졌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을 통해서 예배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배는 가장 소중한 것을 묶어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예배 드리러 오면서 쓰다 남은 시간, 시간이 남아돌아서,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나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손등 뒤에 감추어 놓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만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지 않습니까? 내 가장 소중한 시간은 드리고 싶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소중한 시간을 들여서 봉사하고 수고하는 그 수고와 시간의 봉사를 우리는 누리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내 가장 소중한 물질은 드리고 있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가장 소중한 물질을 드린 그 수고와 그 헌신을 우리가 지금 누리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내 것은 내놓지 않으면서, 내 소중한 것은 내 뒤에 감추고 살면서, 하나님 앞에서 더 달라고, 더 달라고 손 벌리고 아우성치는 그런 이중적이고 악한 모습으로 예배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적어도 성전에서는 그것은 가짜 예배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와서 제단에서 하나님께 아뢰고 기도하는 그 수많은 것들을 한번 돌아보면, 다윗처럼 하나님의 허가 없이 하나님 말씀 없이 내 욕심을 아뢰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것을 다 불태우는 것이 예배라고 했습니다. 나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여호와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예배라고 하셨습니다. 모리아 산 그 자리, 오르난의 타작 마당 그 자리, 그 자리에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것은 바로 우리에게 그것을 깨닫게 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섭리가 거기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솔로몬 성전은 하나님의 의도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그런 성전이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대제사장들, 종교 지도자들, 서기관들이 권력과 결탁합니다. 백성들의 등골을 뽑아 먹습니다. 자기 배를 불립니다. 하나님은 그런 성전 따위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손에 성전을 넘겨줍니다. 성전을 다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런 성전 따위가 왜 필요합니까? 모리아 산의 정신도 이어받지 못하고, 오르난의 타작 마당에서의 다윗의 정신도 이어받지 못하는 성전, 이제는 의미 없고 필요 없다고 하시고, 하나님은 그 성전을 다 불태워 버리시고 그 성전에 있는 모든 그릇도 다 끌려가게 만드셨습니다. 거기서 예배한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다 잡혀갔습니다. 필요 없으니까요.
헤롯 성전은 어땠습니까? 헤롯이 유대인들을 위해서 지은 그 성전, 예수님 시절 그 성전도 타락의 온상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거기에서 자릿세를 받아먹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명절마다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자들이 성전 뜰까지 들어왔습니다. 돈 받고는 환전상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성전이 돈놀이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성전을 다 뒤집어엎으십니다. 다 쫓아내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하시고, 그 성전도 AD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않고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필요 없으니까요. 그런 성전은 의미 없는 성전 아닙니까? 벽돌로 지은 성전, 거기에서 타락만 일어난다면 하나님이 다 불태우고 끌려가게 하고 무너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시온 예루살렘 성전 바로 옆에 자그마한 언덕이 있습니다. 골고다 언덕입니다. 그 언덕에서 진짜 예배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전이 아닌 그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하나님이 인신 제사로 받지 않으셨지만, 진짜 자기 아들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그 피 값으로 오늘 우리가 다 구원받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진짜 예배를 보여 주셨습니다. 가장 소중한 아들을 내어 주심으로 진짜 예배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이라고 아들이 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진짜 예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가 습관적으로 드리는 수천 번, 수만 번의 예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예배, 진짜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칭의에서 성화로 이르는 여정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11-12)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 말씀이 아브라함에게 좀 서운하게 들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 지금까지 제가 하나님께 한 것은 뭡니까? 전 한다고 했는데요." 그런데 이 말씀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이 75세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 사건 때 아브라함 나이가 몇 세쯤 되었을까요? 100살에 아들 이삭을 낳았으니까, 그 아들이 산에 번제에 쓸 나무를 짊어지고 올라갈 정도 나이가 되어서, 15세 정도라고 본다면, 최소한 아브라함의 나이가 115세 정도 된다고 추정합니다. 40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후에 40년이 지나서야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는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의심하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데리고 가서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고 "네 자손이 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이를 믿으매 하나님이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그때 그 의로움은 칭의 차원의 의로움입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창세기 22장에 올 때까지 아브라함에게 얼마나 많은 부침이 있었습니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고, 이스마엘에게 13년 동안이나 푹 빠져 살았고, 이삭을 낳았고, 이삭을 마치 자기 우상처럼 붙들고 살았던 아브라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또 걸어갔습니다. 일상적인 양만 바치던 아브라함이 이제는 가장 소중한 자기 아들을 묶어서 하나님의 번제단에 올려놓았을 때, 그는 드디어 하나님의 칭찬을 받고 성화의 완성을 이루게 됩니다.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
우리 인생이 비록 흔들리더라도 이 길을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죽기 전에 한번은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는 칭찬 한번은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살면서 그 어떤 삶의 목적이나 목표보다 하나님께 이 말씀 한번 듣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 믿음의 백성들, 믿음의 여정을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목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음성 한번 듣고 천국에 간다면 가장 복된 주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 40년 만에 들려진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부침이 있었습니다. 무너질 때도 있었고, 거짓말할 때도 있었고, 하나님을 떠나 살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을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산꼭대기로 올라가고 가장 소중한 아들 이삭을 꽁꽁 묶어 하나님 앞에 결박해서 올려 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 하셨습니다. 칭의 차원의 구원이 성화의 완성으로 승화되는 순간을 하나님 우리에게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 하나님께 이 칭찬 받는 길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가장 소중한 것 드리게 하여 주시고, 우리의 욕심을 불태워 드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