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강 / 여호와 이레 (22:13-24)

여호와 이레

본문: 창세기 22:13-24

1862년 철종 13년, 조선 말기에 전례 없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경상도 19개 고을, 전라도 38개 고을, 충청도 11개 고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민란이 부분적으로 발생하기는 했지만, 이처럼 전국에서 한꺼번에 일어난 것은 조선 개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철종과 조정은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원인을 살펴보니 삼정의 문란 때문이었습니다. 전정, 군정, 환곡—결국 토지세와 군역과 환곡에 대한 세금 문제 때문에 조세 저항이 전국적인 민란으로 번진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직접 사안을 살피게 했습니다. 그해 6월에는 전국의 유생들에게 대책 마련을 위한 시험을 치르게 했습니다. 시험 문제를 철종이 직접 출제했는데, 그 내용 중 하나가 이러했습니다. "인재는 예전만 같지 못하고 재력도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이 말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책이 없다는 뜻입니다. 인재도 예전만큼 뛰어난 사람이 없고, 왕실과 조정에 정해진 비용은 나갈 곳이 다 정해져 있는데, 백성들이 세금을 이전처럼 내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책문을 받고 전국의 유생들이 저마다 답을 쓰는 가운데, 김윤식이라는 분이 제출한 답안지가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글을 올렸습니다. 첫째, 군주의 의지가 문제입니다. 전정만 해도 그렇습니다. 토지세를 내는 사람을 살펴보면 민초들밖에 없습니다. 공신이라고 빠지고, 왕실의 외척이라고 빠지고, 양반이라고 세금을 면제받으니, 결국 민초들만 세금을 내는데 어찌 민란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둘째, 인재가 없다고 하셨는데, 전국에 사사로운 이익에 좌우되지 않는 인재가 넘쳐납니다. 문제는 그 인재를 조정이 등용할 생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양반들과 기득권 세력이 철저하게 포진해 있어서, 뛰어나고 실력 있는 인재들을 등용하면 그들의 이권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셋째, 왕실의 의지가 없습니다. 과거 영조 임금은 전국에 기근이 찾아왔을 때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왕실이 모범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의지가 없습니다. 예산을 줄이지 않고,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 백성들에게만 고통을 감내하라 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입니다.

김윤식의 의견이 채택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나 그가 끌려가서 곤장을 맞거나 죽지 않았으면 다행입니다. 결국 답은 뻔하게 정해져 있는데,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길까지 걸어가지 않습니다. 그 개혁의 길까지 걸어가면 병든 나라가 살아날 것인데, 누구도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길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저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답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어떻게 살기를 바라시는지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길까지 가기가 그토록 힘겹습니다. 혜택은 누리고 싶고 하나님의 은혜는 받고 싶은데, 섬기고 일하고 주의 마음에 합하게 봉사하는 것은 그처럼 어렵습니다.

이삭을 드린 예배

오늘 본문은 여호와 이레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이레는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가는 자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산, 하나님께서 정하신 정상까지 도착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결박합니다. 신앙생활 40년 만에 비로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아노라"라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그다음 일어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창 22:13)

한 숫양이 수풀에 뿔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숫양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드린 것은 양이었습니까, 이삭이었습니까? 하나님이 받으신 것은 양 한 마리였습니까, 이삭이었습니까?

보이는 것은 아브라함이 양을 드린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과거에 수십 년 동안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께 드렸을 때처럼,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드린 이 양은 그냥 한 마리 양이 아니라 이삭이었습니다. 자기의 전 존재였고, 자신의 전체였고, 자기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삭을 드린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과거의 아브라함이 40년 동안 믿음생활하면서 수백 마리 수천 마리 양을 잡아 드린 그 예배와 동일해 보입니다. 그런데 받으시는 하나님은 양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이삭을 받으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이삭을—하나님은 이러한 예배를 이렇게 드리기를 바라고 원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예배드리고 있습니까? 1시간을 봉사하고 1시간을 섬기는데, 액면가로는 1시간입니다. 그런데 그 1시간이 그냥 쓰다 남은 1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지, 아니면 내 인생의 이삭 같은 존귀하고 소중한 한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지—그것은 내가 알고 하나님이 아십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그냥 똑같은 동일한 한 시간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음생활하면서 헌금을 얼마나 많이 했습니까? 헌금생활 열심히 하고 얼마나 많이 드렸습니까? 그런데 그 헌금이 이삭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까? 가장 귀한 이삭. 똑같은 액면가, 똑같은 금액, 똑같은 물질인데, 하나님은 이삭 같은 물질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과부의 두 렙돈이 바로 이삭 같은 예물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받기를 원하셨고, 이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예배의 모범입니다. 우리가 정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따르고 있다면,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가고 그 믿음의 여정과 예배의 모습을 배워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 이레로 가는 길

이제 이렇게 아브라함이 예배드리고 나서 하나님께 신앙 고백을 올려 드립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 22:14)

여호와 이레.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듣기만 해도 기쁘고, 듣기만 해도 가슴 뛰는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이 준비하신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이 여호와 이레를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나는 어떤 것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알아서 다 준비하신다—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여기까지 올 때까지 크게 세 번의 시험을 거칩니다. 첫 번째, 브엘세바 자기 집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려라." 밤새도록 고민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갈등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길을 떠납니다. 만약 거기서 갈등하고 고민하고 염려하다가 결단하지 못했다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못합니다"라고 해버렸다면—여호와 이레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모리아 산을 향하여 사흘 길을 걸어갑니다. 흔들리고 불신하고 원망도 되고 걱정도 됩니다. 하지만 흔들렸지만 그 길을 무사히 잘 걸어갔습니다. 만약 그 길을 걷다가 숨어버렸다면, 피해 버렸다면, "저는 못하겠습니다"라고 해버렸다면—여호와 이레는 성경에 기록되지 못했고, 아브라함이 누릴 수 있는 복이 아닌 것입니다.

세 번째, 산 아래 도착해서 산 위로 올라갑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올라가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나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에 쓸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말 아닙니까? 거기에서 자신의 전 존재가 무너져 내리고, 아들을 데리고 뒷걸음질 쳐서 산 아래로 내려와 버렸다면—여호와 이레는 영원히 불가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산 위에서 양을 걸어 두시고 기다리고 계시는데, 그 세 가지 시험 중에 한 가지에만 걸려 넘어져도 양만 덩그러니 산 위를 지키고 있었을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세 가지 시험을 다 통과해서 거기까지 갔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결박했기 때문에, 여호와 이레가 그가 누리는 복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나는 믿음의 길을 걷지 않고, 내가 내 발자국을 옮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알아서 걸음을 옮기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알아서 다 준비해 주시고, 입을 벌려 주시고, 떠 먹여 주신다는 것—그것은 착각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로 가는 길은 험합니다. 어렵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여호와 이레를 경험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인생의 영혼의 훈장 같은 것입니다. 단 한 번이라도 이 길을 걷고 또 걸어가서, 흔들렸지만 모리아 산 정상까지 걸어가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양 한 마리를 보는 순간—세상 그 어떤 값진 보화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경험 아니겠습니까? 그 경험이 앞으로 삶을 살아가게끔 만들어 가는 힘이 됩니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 바울처럼, 세상 걱정 근심에 얽매이지 않고, 뒤로 물러서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던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서 여호와 이레의 준비된 양, 그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여호와 이레의 세 가지 복

그런데 이 여호와 이레의 복은 그저 양 한 마리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더 놀라운 복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창 22:17)

첫 번째 복은 번성의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을 저 하늘의 별과 같이, 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육체적 혈통의 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지 않았습니까? 너의 믿음을 본받고, 너의 믿음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따르고 있으니, 우리도 저 하늘의 별과 같은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되고, 바닷가의 모래 중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이렇게 나를 위해서 여기까지 흔들리지 않고 나왔으니, 나는 너에게, 너의 후손들에게 번성의 복을 허락하노라."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현실이 되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으로 비롯된 믿음의 후손들, 오늘 전 세계 교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믿음의 열매가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맺혔습니다.

두 번째 복은 승리의 복입니다. 17절 말씀입니다.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악한 원수 사탄 마귀를 너의 후손이 이길 것이다,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서 성취되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1장 1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한 다윗은 백전백승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등에 업고 가는 곳마다 승리했습니다. 진 적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까지 인간은 죄와 사망의 덫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사탄은 죄를 한 손에, 죽음을 한 손에 쥐고 사람들의 목을 옥죄었습니다. 누구도 죄와 사망에서 자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기 때문에 죄 지은 사람은 다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피 값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됩니다.

"네 씨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궁극적 승리가 우리 손에 주어진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놀라운 복이 아브라함의 후손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현실이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지금 그 혜택을 누리고 살지 않습니까?

세 번째 복은 영향력의 복입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 22:18)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라함 한 사람 때문에 주변 모든 사람들이 복 받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하는 사람, 그 한 사람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다 은혜를 받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 때문에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하여 보디발과 보디발의 밭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신지라." 보디발이 무엇이 이뻐서 하나님이 보디발의 밭에까지 복을 주시겠습니까? 요셉이 그 집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승한 요셉이 거기서 믿음을 붙잡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요셉 한 사람을 보시고 보디발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요셉 한 사람 때문에 이집트 사람들의 기근이 해결됩니다.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 현실이 되지 않습니까?

양 한 마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붙잡고 모리아 산까지 갔더니, 여호와 이레가 이런 놀라운 축복으로 아브라함 그의 후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 손에 올려놓으면

만약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자기가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고 끼고 있었다면, 사람들이 볼 때 그 부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할아버지 같은 아버지, 115세의 늙어가는 아브라함. 이제 막 15살이 된 소년인 이삭. 사람들이 볼 때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저 아버지가 죽으면 저 아이는 어떻게 될까? 하나님께 올려 드리지 못하고 자기가 끼고 있고 자기가 붙들고 있으면, 사람들 눈에 불쌍한 부자밖에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손에 올려 드렸더니, 내가 붙들고 살지 않고 하나님 제단에 결박해서 묶어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양을 준비해 주셨고, 번성의 복과 승리의 복과 영향력의 복까지—아브라함이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복까지 하나님이 다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것 전부 다 이삭이 누리는 복이 아닙니까?

우리가 여기서 하나님 복의 원리를 이해해야 합니다. 내 손에 있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손에 있으면 그저 별것 아닌 것인데, 하나님 손에 올려놓으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역시 그런 맥락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한 아이의 도시락 아닙니까? 그 아이가 예수님 말씀 들으러 간다고 하니 어머니가 도시락을 싸주셨습니다. "배고플 때 이것 먹으라"고. 그 아이가 그것 끝까지 붙들고 있으면, 배고플 때 나 혼자 먹으면 끝나는 도시락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손에 올려놓았습니다. 예수님이 그 도시락을 들어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누어 주셨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요 6:11-13)

남자만 5천 명, 노인 여자 어린아이까지 수만 명의 사람들이 원 없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한 아이가 붙들고 있으면 자기 혼자 먹고 끝낼 일을, 예수님 손에 올려드리니 이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원리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모리아 산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못할 짓을 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잔인한 일을 시킨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어가면서 이삭이 걱정됩니다. 어릴 때는 그저 이쁘고 고맙고 좋았는데, 나이가 들어가고 이삭이 성장하고 자기는 늙어가면서 이 아이를 책임지려니 걱정이 됩니다. 내가 아무리 감당하려고 해도 책임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붙잡고 있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걱정을 덜어 주신 것입니다. "네가 붙잡고 있지 마라. 너는 절대로 이삭을 책임질 수 없단다. 네가 어떻게 이삭을 책임질 거냐? 나의 제단에 올려놓으면 내가 책임지마."

우리가 자식을 책임질 수 있다고 믿습니까? 내가 하고 있는 사업, 내가 책임지려고 붙들고 있으면 기껏해야 내 경험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내 자녀, 내 기업,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도 내 능력과 내 힘을 가지고는 한계치에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이 걱정, 이 염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아끼는 것일수록 염려가 많지 않습니까? 그것을 하나님 제단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그것 붙들고, 그것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느라 주의 일을 하지 못하고, 하나님 일에 마음 쓰지 못하고, 주를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 나의 제단에 가지고 와라. 내가 책임지마"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번성의 복 줄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승리의 복, 영향력의 복 줄 수 있습니까? 못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올려놓으니 하나님이 해결하시고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리브가를 예고하신 하나님

이제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창세기 22장은 사실 19절에서 끝나야 맥락이 맞습니다. 그런데 20절부터 24절까지를 보면 뜬금없는 족보가 끼어듭니다. 그런데 그 족보도 아브라함의 형제인 나홀의 족보입니다. 갑자기 왜 나홀의 족보가 여기에 나타날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신비한 것을 여기에 숨겨 두시고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 여덟 사람은 아브라함의 형제 나홀의 아내 밀가의 소생이며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창 22:23)

이상하지 않습니까? "브두엘은 리브가를 낳았고." 왜 이상한가 하면, 성경에 나오는 이 당시 족보는 여성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리브가는 여성 아닙니까? 여성의 이름만 기록합니다. 동시에 브두엘은 아들도 낳았습니다. 리브가의 오라버니 라반입니다. 라반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리브가를 돋보이고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리브가는 창세기 24장에 가면 이삭의 아내가 됩니다.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할 당시의 나이가 40입니다. 지금 이 사건, 모리아 산 사건은 15세 전후입니다. 25년 후에 일어날 일을 하나님께서 이미 그때부터 "너의 아들 이삭의 결혼은 내가 책임지마. 걱정하지 마라."

아브라함이 얼마나 걱정이 되겠습니까? 이 아들 결혼시키지 못하고 죽을까 봐. 이 아들 가정 이루지 못하고 내가 세상 떠날까 봐. 내가 이 믿음의 여정을 걸어오는데, 결혼 잘못하면 믿음의 여정이 한꺼번에 다 무너져 내릴까 봐. 아브라함이 얼마나 염려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제단에 올려놓으니, 그때부터 하나님이 결혼까지 책임지십니다. "너는 이제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25년 후에 일어날 결혼, 그 대상자 리브가를 하나님이 여기서 이름을 언급하심으로 "내가 책임지겠다, 내가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의 결혼 문제 책임질 수 있습니까? 우리가 자녀를 위해서 남겨줄 수 있는 것, 평생 동안 벌어봐야 얼마나 남겨 줄 수 있습니까? 내가 정말 사랑하는 그 일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해결하셔야 합니다.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일수록,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이 해결하셔야 답이 됩니다. 내 능력 밖의 일은 하나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주의 일을 하면 됩니다. 나는 주께서 맡겨 주신 일에 성실하게 감당하고,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걱정 염려는 아버지께 맡기면 하나님이 다 풀어 주실 것입니다.

결론

이것이 진정한 여호와 이레입니다. 여호와 이레는 입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리더라도 푯대를 향하여, 목표를 향하여 거기까지 가시기 바랍니다. 그 길 끝에서 놀라운 여호와 이레의 복이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여호와 이레를 사모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알아서 책임진다고 오해했습니다. 이제 여호와 이레의 복을 받아 누리기 위해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려 합니다. 여러 가지 시험도 극복하고 모리아 산까지 가려 합니다. 양을 허락해 주시고, 번성의 복도, 승리의 복도, 영향력의 복도, 내 인생 가장 큰 숙제였던 사랑하는 자녀의 결혼 문제도 해결하셨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손에 모든 것, 염려 걱정거리 다 맡겨 드리오니 하나님 해결하여 주옵소서. 나는 능력이 없습니다. 부족하고 무능하고 미련합니다. 그저 저는 주께서 맡겨 주신 사명 감당하겠습니다. 교회 열심히 섬기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성실하게 감당하고, 열심히 맡겨주신 일 감당할 테니 나머지 하나님 해결하여 주옵소서. 진정한 여호와 이레의 복이 우리 인생을 가득 채워 주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