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
본문: 창세기 23장 1-6절
2022년 연말, 대학 교수들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가 발표되었습니다. '과이불개(過而不改)'라는 말이었습니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정치인부터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 시대의 자화상이 되었다는 씁쓸한 진단이었습니다. 잘못을 알면 부끄러워하고 고치는 것이 상식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한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잘못을 알고도 고치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발전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지 못합니다. 잘못도 하고, 실수도 하고, 죄도 짓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깨달았다면 고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고치고 돌이켜야 성장합니다. 그렇지 않고 가만히 머물러 있으면 믿음은 정체되고, 정체된 믿음은 곧 퇴보합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은 믿음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비결은 회개에 있었고, 돌이킴과 순종의 삶에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지금 나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함께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슬픔이라는 선물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칭찬받습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 여호와 이레의 복도 받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지났습니다. 약 22년의 시간이 경과합니다. 아브라함도 늙어가고, 피할 수 없는 슬픔이 가정에 찾아옵니다.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나이라" (창 23:1)
사라가 127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사라와 아브라함은 열 살 차이였습니다. 아브라함이 137세, 사라가 127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75세, 사라가 65세에 가나안 땅에 처음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때부터 62년 동안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 생활을 해왔습니다. 오르내림도 있고 부침도 있고 문제도 있고 쉬지 못한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62년 동안 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사라가 세상을 떠납니다.
한 여인으로서 사라의 인생은 어떠했습니까? 여인으로서 보면 사라는 불행한 인물입니다. 자녀를 낳지 못했습니다. 조카 롯도, 다메섹 엘리에셀도 하나님이 다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게 할 때, 그것이 죄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할 때, 그 여인의 찢어지는 가슴과 절박한 심정이 과연 어땠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 여인 사라에게 90세가 되어서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삭을 주셨습니다. 아들의 나이 37세, 그 아들이 아직 가정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서 어머니에게 안겨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손자 하나 안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여인의 일생으로서는 완전하지 않은 삶입니다.
그런데 한 신앙인의 인생으로 보면 그녀는 성공한 인생입니다. '사래'는 공주, 왕비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사라'로 이름을 바꿔 주셨습니다. 열국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믿음의 길을 경조했습니다. 믿음 생활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안에서 충만하고 기쁘고 감사한 생활을 하다가,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에 천국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떠나간 사람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남아 있는 아브라함은 슬픔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62년 동안 함께 믿음 생활을 해왔고, 평생을 함께 동역자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라의 죽음 앞에서 아브라함은 슬픔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니라" (창 23:2)
'슬퍼하다'는 '사파드'라는 단어입니다. 머리카락을 쥐어뜯는다는 뜻입니다. '애통하다'는 '바카', 목소리를 높여 통곡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온몸을 쥐어뜯으며 목소리를 높여 슬피 울며 사라의 죽음을 가슴 아파합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이 어떻게 다가옵니까? 낯설게 보이십니까? 적어도 내가 아는 아브라함이라면, 믿음의 조상이라면, 아내의 죽음 앞에서 품격 있고 격조 있고 우아하게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울지 말라, 지금 내 아내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이삭을 달래고 조문하러 온 사람을 위로해야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감정이라는 선물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노애락의 감정을 주셨습니다.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감정도, 충분히 기뻐할 수 있는 마음도 우리에게 이미 선물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충분히 슬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을 그냥 그대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예수님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3-35)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수님도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랑하는 나사로, 그의 누이들 마르다와 마리아, 예수님과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습니까? 나사로의 부고를 받고 예수님이 달려왔더니 그들이 울고 있습니다. 문상 온 사람들이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지 않습니다. 나무라지 않습니다. 부활의 생명을 가진 예수님께서 그들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왜 우느냐? 내가 조금 있다가 그를 다시 살릴 텐데, 너희는 눈물을 멈추어라" 말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함께 울어줍니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함께 울어 주는 것이 훨씬 더 위로가 됩니다. 부활의 능력자이신 예수님께서, 곧이어서 나사로를 다시 살릴 예수님께서도, 함께 울어주는 그 마음으로 슬픔을 위로합니다.
사랑하는 자의 죽음 앞에서 같이 울어 주고 함께 눈물 흘리고 손잡아 주는 이 위로가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최고의 위로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눅 19:41-43)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고 우셨습니다. 멸망이 임박한 예루살렘 성, 이렇게 살다가는 이 성이 멸망당하고 이 성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죽을 텐데, 그 성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보시고 예수님은 울고 계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아파하는 마음으로 우셨습니다. 우리에게 눈물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온몸을 쥐어뜯으며 소리를 높여서 통곡합니다. 이 감정은 자기 위로가 될 뿐더러 함께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슬픔의 감정,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원초적인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희노애락의 감정 중에 분노는 우리가 조금 무겁게 접근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로만 가치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이 감정에 충실해야 된다고 해서 자기 분노의 감정에 충실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화난다고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물건을 집어 던지고 깨뜨리고, 폭력을 행사하고, 해서는 안 될 말을 함부로 내뱉는다면 그런 사람과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로만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것처럼,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향하여 돌진한 것처럼, 이 분노가 거룩한 분노로만 의미가 있습니다. 분노를 조절할 수 있고 슬픔의 감정에 너무 깊게 빠지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수직과 수평의 균형
아브라함은 충분히 슬퍼하고, 충분히 애통하고, 통곡하고 난 후에 이제 장례 준비를 위한 절차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시체 앞에서 일어나 헷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민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지를 주어 내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떠나 장사하게 하시오" (창 23:3-4)
장례를 해야 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땅이 한 평도 없습니다. 아브라함 앞으로 된 땅이 없습니다. 그래서 헷 족속에게 땅을 내어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물론 거저 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매입할 테니 팔 땅이 있느냐, 그럴 의사가 있느냐 물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러 갈 때 이미 부자였습니다. 집에서 기른 318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땅이 한 평 없습니다. 그가 한 말에 답이 있습니다. "나는 나그네입니다. 거류민입니다." 이분은 천국에 소망을 두고 나아가는 나그네요 거류민이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 땅 한 평 둘 이유가 없었습니다. 천국 소망을 두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랑하는 아내의 장례를 준비해야 됩니다. 그래서 땅이 필요해졌습니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한 땅이 아니라, 아내를 매장할 매장지를 얻기 위해서 땅을 구합니다.
그런데 헷 족속의 대답이 의미심장합니다.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에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시니 우리 묘지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 자기 묘지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 (창 23:6)
이방인들 아닙니까? 헷 족속은. 그런데 헷 족속이 아브라함을 일컫는 말을 보십시오. "당신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세우신 지도자입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에게 굉장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겠다." 위로부터 하나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이제는 불신자 헷 족속에게 "당신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는 놀라운 칭찬을 받습니다.
신앙생활은 수직과 수평의 균형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할 뿐더러 이웃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가족에게 인정받아야 되고, 나와 함께 항상 생활하는 일터의 직장인들에게 인정받아야 되고, 내 주변 이웃들에게도 인정받아야 됩니다. 수직과 수평의 균형이 무너지면 신앙생활은 절반이 날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단 한 줄로 표현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 2:52)
하나님에게만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도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에게 인정받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 이웃들에게도 인정받았던 것이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이 바로 그런 인생 아닙니까? 기념비적인 삶입니다. 하나님에게도 인정받고, 불신자들에게도 이렇게 인정받았습니다. 우리가 정체성을 가끔 이야기하는데, 정체성은 양방향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나는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주변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매일 예배에 출석하고 매주 주일마다 교회를 가고, 누군가가 나에게 신상을 적으라고 하면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적는데, 그래서 나는 정체성이 크리스천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내 가족조차도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가짜 아닙니까? 진짜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어떤 한 사람이 스스로 예술가라고 생각하지만, 주변 사람들 그 어느 누구도 저 사람은 예술가라고 인정하지 않는데, 그 사람을 예술가라고 누가 보겠습니까? 정체성은 양방향에서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정체성과 타인이 나를 보고 인정하는 정체성이 하나가 될 때, 나는 진짜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성공을 거둔 인물입니다.
권위의 출처
또 하나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될 것이 있습니다. 권위의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굉장한 권위를 부여받았습니다. 헷 족속이 와서 땅을 그냥 가져가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어떤 땅을 선택하든지 우리 중에서 그것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우리의 묘지 중에 당신이 어떤 것을 선택하든지 우리는 다 열어두고 다 허락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대로 가져가십시오." 이 권위가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의 권위는 많이 가져야 권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질이 많으면 권위가 있습니다. 권력이 있으면 권위가 있습니다. 사람을 많이 부려도 권위가 있습니다. 실제로 권력이 있고 물질이 있는 사람에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습니까? 줄 서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브라함은 땅 한 평도 없습니다. 그런데 권위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 권위의 출처가 무엇입니까?
첫째, 아브라함의 삶이 열매가 되어서 권위를 부여한 것입니다. 창세기 22장과 23장 사이에는 22년이라는 시차가 존재합니다. 모리아 산 사건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추정하건대 115세 정도 되었습니다. 23장이 시작할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137세입니다. 22년의 시간적 공백이 있습니다. 22년의 세월은 굉장히 긴 세월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모리아 산 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이 얼마나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갔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헷 족속이 한 말에서. "당신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입니다." 이 말 속에서 아브라함이 22년 동안 불신자들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가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믿음의 사람들, 신앙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니까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거울의 역할을 했습니다. 22년 동안 오해도 많이 받았을 테고, 때로는 힘든 일도 겪었을 테고, 어려운 과정도 겪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누구나 인정하는 헷 족속에게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투표로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헷 족속이 볼 때 이방인인데, 그 땅에 땅 한 평 없는 사람을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고 인정할 만큼 그의 22년의 삶은 치열했습니다.
예수님 시절,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오신 세례 요한이 계셨습니다. 성경은 이분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자라고. 말이 좋아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 한마디로 말하면 거지라는 말입니다. 광야에서 낙타 털옷을 입고 다닙니다. 미친 사람 아니면 거지입니다. 배가 고파서 메뚜기를 잡아먹고 야생 꿀을 따먹고 살아갑니다. 영락없는 거지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 사람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세례 받으려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가에 장사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배가 고파서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로 지나다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서 알갱이를 입에 털어 넣으신 적도 있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그런데 이 예수님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우리 예수님이 벳새다 들녘에 있을 때, 그때는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 예배드리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지 않고 예수님 계신 갈릴리로 왔습니다. 거기서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난 것 아닙니까?
왜 이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 몰려드는 것입니까? 그 당시 종교 권력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율법 학자, 대제사장들. 그들은 성전에서 진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위선자들만 가득했습니다. 삶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없고, 그들 스스로 종교 권력자의 자리에 앉아서 스스로 자기 권력을 과시하고 있으니, 백성들이 거기 가서 배울 것이 없지 않습니까? 삶이 바탕이 되어 주지 않으니, 말씀대로 살아가는 세례 요한, 비록 그는 가진 것이 없어도, 말씀대로 살아가는 예수님 주님에게 사람들이 몰려들고 세례 요한에게 몰려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땅 한 평 없어도 사람들이 그를 지도자라고 인정하고 세우는 이유는 그의 삶이 입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40년 50년 평생을 했는데,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물질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 한 푼 없어도, 내가 권력이 없어도, 내 주변에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잘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회개한 인물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삶을 돌이키고 회개했습니다. 그가 믿음의 초창기에 불신자 바로 왕에게 책망받았던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창 12:18-19)
화가 난 바로의 목소리입니다. 75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가나안 땅에 왔는데 기근이 찾아옵니다. 배가 고파서 그냥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두려움에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아내를 빼앗깁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겨우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때 아브라함의 수중에는 바로에게 받은 은금과 패물과 암수 나귀와 종들과 노비들이 있었습니다. 돌려주지 않습니다. 이런 책망 받고 그냥 그대로 줄행랑 쳤습니다. 하나도 그때는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이 불신자 바로에게 이 정도 책망을 받았는데 수치스럽지 않았습니다. 왜?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었으니까.
그때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는데, 살면서 살면서 그때 일을 생각할 때마다 얼굴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나만 책망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는 하나님 영광의 이름이 수치를 당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인데. 아브라함은 그때 이후로 62년 동안 부단히 노력합니다. 이제는 책망받지 않으려고, 이제는 불신자들에게 책잡히지 않으려고 믿음의 길을 달려가고 또 달려갑니다.
드디어 62년이 지난 오늘, 아브라함은 불신자 헷 족속에게 "당신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입니다"라는 놀라운 칭찬을 받지 않습니까? 이제 된 것입니다. 회개했기 때문에, 돌이켰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믿음의 초창기에 치명적인 실수를 이제는 믿음의 후반기에 영광으로 바꾸어 낸 아브라함, 회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결론
우리는 모두가 연약한 존재입니다. 죄도 짓고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하지만 회개해야 됩니다. 돌이켜야 됩니다. 굳게 잡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 놀라운 영광의 자리에, 수직과 수평의 균형의 자리에 온전히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초창기는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62년 동안 부단히 노력하고 정진하고 달려왔습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았습니다. 불신자들에게 "당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우신 지도자"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에게도 인정받고, 이웃에게도 인정받고, 가족에게 인정받고, 일터에 함께하는 동료들에게도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를 통하여 드러나게 되고, 나의 연약하고 부족한 삶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초창기는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62년 동안 부단히 노력하고 정진하고 달려왔습니다.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았습니다. 불신자들에게 "당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우신 지도자"라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주여,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에게도 인정받고, 이웃에게도 인정받고, 가족에게 인정받고, 일터에 함께하는 동료들에게도 인정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를 통하여 드러나게 하시고, 나의 연약하고 부족한 삶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