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벨라 굴
본문: 창세기 23:7-20
중국과 유럽은 16세기를 기점으로 성장과 쇠퇴의 갈림길을 걷습니다. 16세기까지 중국은 모든 면에서 유럽을 앞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16세기를 기점으로 유럽이 중국을 추월하기 시작합니다. 명나라 황제 영락제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대규모 함단을 일곱 차례에 걸쳐 해외 원정으로 보냈습니다. 초대형 선박 62척을 건조하고 2만 8천여 명의 승무원을 파견했습니다. 그들은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라비아 반도, 아프리카를 돌며 전 세계의 진기하고 희귀한 것들을 모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중국의 역사적 위대함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1406년부터 1420년까지는 자금성을 건축했습니다. 주목할 사실은 이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것입니다. 막대한 자금이 동원되었지만 중국은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자금력도, 국력도 대단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국이 16세기를 기점으로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유는 과학, 기술, 사회문화 전반에서 실용주의가 대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돈 되는 것만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장 백성들의 눈에 이익이 되는 것, 당장 유익이 되는 것만 선택하고 뿌리에는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돈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근간이 흔들리고 뿌리째 흔들려 나갔습니다.
그러나 유럽은 달랐습니다.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그들은 근간과 뿌리, 원리와 원칙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엉뚱한 연구를 해도, 지금 당장 도움이 되지 않고 돈이 되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용인하고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곳곳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유롭게 연구하고 미래를 꿈꾸어 나갔습니다. 그 시기에 수많은 발명과 발견이 이루어졌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 지동설, 세균의 발견, 미적분학의 발전 등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모두 역사를 바꾸는 혁명적이고 기념비적인 일이었습니다.
눈앞에 있는 것, 당장 눈에 보이는 실용적인 것을 취하는 것은 달콤합니다. 그러나 길게 보면 그 달콤함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반면 당장 눈앞에는 유익하지 않아도 깊게, 뿌리 깊게 내려가면 멀리 보고, 길게 가고, 오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인생은 원리와 원칙에 집중하는 인생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이 바로 그 길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흘러넘치는 대가를 치르겠다는 결단
사라가 1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요 거류민으로 살면서 땅 한 평 없었습니다. 헷 족속이 아브라함을 위로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앞에 있는 땅 어디든 택하십시오. 원하는 대로 가져가십시오. 당신의 죽은 자를 여기에 매장해도 누구 하나 막을 자가 없습니다." 땅을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감사한 일이고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이 주목할 만합니다.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주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창 23:7-9)
아브라함은 우선 감사의 인사를 합니다. 몸을 굽혀 고맙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사양합니다. 자기가 원하는 땅을 이야기했습니다. 막벨라 굴을 원합니다. 그 굴이 함께 있는 밭을 원합니다. 땅의 소유자 에브론에게 말하여 그 땅을 자신에게 팔라고 해달라는 것입니다.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충분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말레'(מָלֵא)를 사용하고 있는데, "흘러 넘치다"라는 뜻입니다. 흘러 넘칠 정도로 보상하겠다,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흥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흥정할 생각이 없으니 충분한 대가를 지불할 테니 이 땅을 팔라는 것입니다.
이제 땅 소유주인 에브론이 나섭니다.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에게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에게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창 23:11)
모든 조건이 완벽해졌습니다. 헷 족속의 지도자들이 모여서 땅을 주겠다고 했고, 이제 땅 주인 에브론도 땅을 가져가라고 합니다. 땅을 가져오면 됩니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다시 몸을 굽혀 감사의 인사를 표현한 후에 똑같이 사양합니다. 돈을 들여서 땅을 매입할 테니 자신에게 팔라고 합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지속적인 호의를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도 실례가 되는데, 아브라함이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과거 경험 때문입니다. 그는 부정적인 경험도 했고 긍정적인 경험도 했습니다.
쓰라린 경험이 남긴 교훈
첫 번째는 부정적인 경험입니다. 믿음의 초창기에 아브라함은 이집트에 내려간 일이 있습니다. 바로에게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바로가 사라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 대가로 양과 소와 나귀와 노비까지 많은 물질을 제공받았습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누이가 아니라 아내라는 것이 발각됩니다. 사라를 다시 돌려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물질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때 횡재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많은 재산을 얻어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으니까요.
그런데 그 물질이 화근이 됩니다. 가정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납니다. 첫째, 롯이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롯이 이집트에 내려갔다 온 이후로 물질의 노예가 됩니다. 더 많은 재산을 얻기 위해서 롯이 소돔 땅으로 건너갑니다. 소돔 땅에서 롯과 롯의 아내, 롯의 두 딸들이 망해 나가지 않습니까? 믿음을 잃어버리고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 그의 가정이 초토화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손으로 수고하지 않고, 이마에 땀 흘려서 얻은 물질이 아니라 횡재한 물질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아들같이 아끼던 조카 롯의 믿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가슴을 치고 땅을 치며 후회할 일입니다.
둘째, 그때 함께 따라온 노비 중에 하갈이라는 이집트 여인이 있습니다. 하갈로 인해서 아브라함의 집에 일어난 평지풍파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습니까?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수고하고 땀 흘리고 그 수고한 대로 먹는 것이지, 내가 수고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애쓰지 않았는데 주어진 것에는 반드시 문제가 있습니다. 당장 눈앞의 이익에 집중하고 집착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손해가 됩니다. 더 심각한 문제가 벌어집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부정적인 경험을 한 이후에 결단합니다. "두 번 다시는 내 손으로 일하고 땀 흘린 정당한 대가가 아니면 취하지 않으리라."
두 번째는 긍정적인 경험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 땅에 갔다가 왕들의 전쟁에 휘말려서 포로가 됩니다. 롯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재산까지 빼앗겼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집에서 기른 318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나가서 사람들을 구출하고 전리품도 찾아옵니다. 그때 소돔 왕이 아브라함을 마중 나와서 말합니다. "사람은 나에게 보내고 물질은 가져가십시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 (창 14:21-23)
이것이 아브라함의 정신이었습니다.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취하지 않겠다. 나중에 내가 어떤 이야기를 들을지 모르니까." 아브라함은 이후에 깨끗하게 일이 처리됩니다.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땀 흘려서 수고하지 않은 것을 취하지 않고, 수고하고 땀 흘린 정당한 노동의 대가만 취하기로 결정한 이 소신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는 것입니다.
실용의 관점, 원칙의 관점
이 문제를 바라볼 때 실용의 관점과 원칙의 관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실용적인 관점으로 아브라함의 선택을 보면, 그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 아닙니까? 모든 것이 완벽한 조건이었습니다. 헷 족속의 지도자들과 땅 주인 에브론까지 땅을 그냥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받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큰 돈을 들여서 땅을 사겠다고 합니다. 금전적으로 엄청난 손해입니다. 만약 우리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몇 번 사양하다가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고 받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실용의 관점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원칙의 관점에서 한번 보십시오. 여기서 원칙이라고 하는 것은 상황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헷 족속과 아브라함의 관계,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지도자인 관계, 그들과의 깊은 관계를 배제하고 원칙의 관점에서 접근해 보십시오. 타인의 땅을 가져오는데 돈을 주지 않고 가져오면 됩니까? 타인의 땅은 그 사람들이 노력하고 수고해서 일구어 얻은 땅입니다. 그런데 그 땅을 내 것으로 만드는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도 됩니까? 원칙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연히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아브라함이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과 함께 하며 살아가는 방향은 철저하게 원칙적이어야 합니다. 실용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당장 눈앞에 닥친 이익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이익이 영원할 수가 없습니다. 당장 나에게 유익이 되고 이롭다고 그것을 가져갔다가 나중에 몇 배, 몇십 배, 몇백 배의 고통을 당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직접 경험도 했고 간접 경험도 했지 않습니까?
세상은 상식과 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상식과 법 위에 집을 짓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상식과 법,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집을 짓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상식과 법이 하나의 울타리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또 다른 울타리를 이루는 이분법적이고 이원론적인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식과 법을 아우르는 하나님의 법이 훨씬 크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의 상식과 법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법도 함께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이 지난하고 어려운 과정입니다.
예수님께 바리새인들이 와서 시험합니다. "예수님, 세금을 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예수님 시절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로마의 식민지로 살았습니다. 로마에 대한 저항 의식이 있습니다. 세금 내기 싫어합니다. 예수님께 이것을 가지고 시험합니다.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마 22:19-21)
무슨 말입니까? 둘 다 하라는 말입니다. 세금은 세금대로 내고 하나님께 바칠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상식과 법의 잣대로도 살아가고, 동시에 우리는 더 큰 범주인 하나님의 말씀도 지키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이 어려운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 우리 교회가 이 땅에 66년 동안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데, 세상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세상의 상식과 법도 지키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 지킨다고, 하나님의 말씀 듣는다고 자기들끼리 모이는 게토화된 교회라면 그런 교회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교회는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인정할 수 있을 만큼 상위 개념과 높은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교회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모든 가치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창조 세계를 보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고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연 만물을 함부로 사용했습니다. 자연이 파괴되었습니다. 세상은 탄소중립법을 만든다고 야단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교회가, 세상 사람들의 가치가 높이 올라와 있는데, 자연을 사랑하고 보전하는 것이 세상의 가치인데, 교회가 그것보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존중받고 그래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 작은 실천이 교회를 교회답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부심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에브론이 보여주는 세상의 민낯
아브라함의 선택, 그는 철저하게 원칙적이었습니다. 타인의 땅을 가져오는데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당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환경과 상황, 실용적인 관점을 배제하고 철저하게 원칙적인 방향으로 접근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에브론을 보면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에브론이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창 23:14-15)
땅값을 슬쩍 알려줍니다. "이것이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가 되지 않으면 땅값을 알려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입니다"라고 슬쩍 알려 줍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시면 받겠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체면 때문에, 자신의 위치 때문에, 헷 족속 모든 사람들이 땅을 내놓겠다고 하니까 마지못해서 자기도 하겠다고 표현한 것일 뿐, "사백 세겔 땅값을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라는 속내를 드러낸 것입니다.
은 사백 세겔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습니까? 그 당시 성인 남성 노동자의 1년 연봉이 은 5세겔에서 10세겔 정도였습니다. 건장한 청년이 1년 동안 일하면 은 10세겔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은 사백 세겔은 건장한 청년 40명의 1년치 연봉에 해당합니다. 땅값이 이 정도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을 듣자마자 두말없이 땅값을 치릅니다.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창 23:16)
놀라운 사실은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떼로 모여 있는데도 말리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은을 달아서 상인들 앞에서 돈을 지불하는데도 가만히 보고 있습니다. 에브론도 더 이상 사양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철저하게 실용적인 가치를 좇아가는 세상 사람들, 체면상 한두 마디 말은 하나 철저하게 자기 눈앞의 이익만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의 원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지혜로운 사람들입니까?
결론
아브라함은 지혜로운 선택을 했습니다.
"마므레 앞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의 밭 곧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과 그 밭과 그 주위에 둘린 모든 나무가 성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 (창 23:17-18)
"확정되다"라는 히브리어 '미크나'(מִקְנָה)는 영구히, 법적으로 소유가 확인되었다는 뜻입니다. 후손들을 위해서 이렇게 한 것입니다. 지금 아브라함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서로 간에 좋은 관계이니까요. 그러나 아들 이삭 대, 손자 야곱 대로 내려가면 에브론의 손자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할아버지와 우리 할아버지 사이에는 좋은 관계가 있었으나, 이제 우리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땅을 돌려주십시오. 당신의 조상들의 묘지도 우리에게 반납하십시오." 난감한 일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확정해 버렸습니다. 법적으로 영구히 자기의 소유로, 흘러넘치도록 많은 물질을 주어서 더 이상 말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해버렸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삶을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상황에, 논리에, 실용주의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따라서 지혜롭게 세상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원칙을 가지고 살아간 사람, 아브라함이 우리 믿음의 조상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브라함을 통해서 지혜를 배웁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보다 더 높은 가치와 더 높은 하나님 말씀의 원칙을 가지고 살아갈 때 존경받고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에게 통찰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원칙을 가지게 하여 주옵소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따라, 실용주의를 따라 살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눈앞의 이익을 버리고 포기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멀리 보고 길게 보며, 사람을 얻고 명예를 얻고 존중을 얻는 선택을 하도록 역사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교회가 법과 상식을 뛰어넘어 말씀 붙잡고 살아가는 교회 되게 하시고, 교회가 교회 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존중받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가 창립 66주년을 넘어서 70년, 80년, 100년을 향하여 걸어갈 때 이 자리, 이 지역에서 복되고 존중받고 귀한 교회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