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강 /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24:1-9)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본문: 창세기 24:1-9

대한상공회의소에서는 5년마다 국내 100대 기업을 대상으로 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을 조사합니다. 2023년 조사 결과 1위는 '책임의식을 가진 인재'였습니다. 5년 전인 2018년에 책임의식은 5위에 불과했습니다. 그때는 도전정신, 창의성, 소통, 열정, 전문성 등이 상위권을 차지했는데, 이제는 책임의식이 창의성보다, 소통보다, 전문성보다 더 가치 있게 평가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5년 만에 어떻게 이렇게 바뀌었을까요? 지난 몇 년 동안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은퇴하고 그 자리를 MZ세대가 채웠습니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특징은 개인보다는 조직을, 가정보다는 회사를 더 위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뼈 빠지게 일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MZ세대는 다릅니다. 조직보다는 개인을, 회사보다는 가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워라밸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업 입장에서는 걱정이 됩니다. 이들을 데리고 국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이전처럼 경쟁력 있는 회사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래서 책임의식을 가진 사람을 직원으로 채용하고, 동시에 그에 따른 혜택과 보상도 준비합니다.

세상의 어느 조직이든, 어느 사회든 책임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 성과를 내면 혜택과 보상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업이 그러한데, 오늘 이 세상이 그러한데, 신앙의 세계는 어떠할까요? 하나님의 세계에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신비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택하셨을까? 왜 나 같은 존재를 택하시고 구원해 주셨을까? 그것은 우리가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봐야 될 일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원 이후에 주어지는 복은 다릅니다. 우리가 복 받을 행동을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준비하신 복을, 그 원천적인 복을 부어 주십니다. 오늘 아브라함이 그 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입증합니다.

범사의 복, 기도하는 자의 특권

아브라함은 사라의 장례를 치르면서 하나님께는 영광과 기쁨이 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빛과 소금이 되었습니다. 성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62년 동안 거주하는 동안 그의 삶은 믿음으로 성공적인 인생이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노년을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창 24:1)

여호와께서 그에게 범사에 복을 주셨습니다. 모든 일을 복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복은 특별합니다. 동사 '바라크'는 '무릎을 꿇다'라는 말과 연동되어 있습니다. 무릎을 꿇어야 그것이 복이 됩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성경 전체가 이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창 2: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안식일을 복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안식일의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셨다는 말이 아니라, 무릎을 꿇는 자에게 안식일의 복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자기주장을 내려놓고 엎드려 기도하는 자, 무릎을 꿇는 자를 하나님은 복되다 하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복을 내려주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철저하게 기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노년은 기도했고, 그 기도가 그의 범사에 복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 같으나 결코 쉽지 않습니다. 특히 나이가 들어가면서, 늙어가면서 기도하고 매사에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어가면 연륜도 쌓이고 경험도 쌓입니다. 물질도 있을 만큼 쌓입니다. 인간관계도 폭이 더 넓어집니다. 웬만한 것은 자기 경험과 연륜과 인간관계와 쌓아놓은 물질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 기도를 더 많이 할 것 같습니다. 시간도 많고 하는 일도 별로 없고 직장도 다 은퇴했으니 당연히 기도를 더 많이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살아보면 오히려 나이 들수록 기도하지 않습니다. 젊을 때는 무엇을 잘 몰라서, 젊을 때는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앞뒤 좌우를 분별하지 못해서, 기도해서 하나님 은혜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연약하니까 기도했는데, 나이 들수록 기도가 더 무뎌지고 기도의 시간이 더 짧아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반대로 살았습니다. 노년이 되어서 범사에 복을 주셨더라, 무릎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분별의 복, 시대정신을 꿰뚫어 보다

이제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성경이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 허벅지 밑에 네 손을 넣으라" (창 24:2)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은 다메섹 엘리에셀입니다. 창세기 15장에 처음 등장하는데, 롯이 소돔으로 떠나고 난 다음에 아브라함은 이 사람을 자기 상속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네 몸에서 날 자라야 네 후사라 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때 젊은이였던 다메섹 엘리에셀이 그 집에서 평생을 살아서 늙은 종이 되었습니다.

종에게 허벅지에 손을 넣으라고 합니다. 아주 중요한 맹세를 할 때, 절대로 이 약속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할 때,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약속합니다. 도대체 아브라함이 이 종에게 어떤 약속을 하려고, 무엇을 다짐받으려고 그렇게 한 것입니까?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창 24:3-4)

우리는 이 말씀을 그저 믿음의 결혼을 원하는 한 아버지의 소원이라고만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당연히 믿음 있는 아버지는 자녀가 믿음의 결혼을 하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가나안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내 아들의 아내를 택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가나안 지방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관계가 좋았습니다. 사라의 장례식 때 보셨지 않습니까? 헷 족속이 와서 우리 땅을 거저 드릴 테니 가져가시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관계가 좋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에서 입지가 탄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아들 이삭의 결혼 문제는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는 그저 육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였습니다.

시대정신을 아브라함은 정확하게 읽어내고 있었습니다.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발을 담고 살지 않습니까? 이 시대에 직장생활하고 공동체 생활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시대가 악한지 선한지, 악하다면 왜 악한지, 선하다면 무엇이 좋은지, 믿음의 사람들은 어디까지 들어가도 되는지, 어느 선까지는 들어가면 안 되는지, 이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냥 좋은 게 좋은 것이 되고, 이 사람들이 사람이 좋으니까 그냥 함께 어울려 살아도 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선이 없어지고, 멈추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 우리네 삶의 현주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철저하게 가나안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그가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이 복을 주셨더라', 무릎을 꿇고 기도했기 때문에 그 시대의 영적 상황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전 2:13)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한다.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자녀의 결혼을 영적인 일로 생각합니다. 자녀의 결혼은 육적인 일이 아닙니다.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영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은 영의 일입니다. 자녀의 결혼도 그렇고, 직장을 선택하는 것도 그렇고, 일거수일투족 살아가는 모든 삶의 순간순간마다 결정하는 일은 믿음의 사람들이 영적인 눈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결정하려면 영적인 것으로 분별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영적인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이 시대의 영적 흐름을 꿰뚫어 볼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교회가 이렇게 영적인 방향과 흐름대로 흘러가는데, 내가 이 흐름과 방향에 올라타야 할지 내려야 할지, 이 방향에 순종해야 할지 거부해야 할지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 주위에 이 사람을 두어야 할지, 이 사람을 끊어내야 할지, 이 공동체에 내가 함께 한 배를 타고 가도 될지, 아니면 한 배를 타면 파산할지, 기도하지 않으면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의 모든 일은 영적인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기도했고, 기도했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의 영적 상태를 꿰뚫어 볼 수 있었습니다.

사탄이 사탄다우면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머리에 뿔 달리고 양손에 삼지창 들고 나타나면서 "나는 악합니다"라고 얘기하면 걱정할 일이 없지 않습니까? 저것은 사탄이라고 생각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사탄은 그렇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광명한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고후 11:13-15)

사탄이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했습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항상 있어 온 일입니다. 사탄의 일꾼들이 의의 일꾼으로 위장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항상 있어 온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분별합니까? 분별하지 못하면 매번 당합니다. 분별하지 못하면 매번 속습니다. 분별하지 못하면 매번 넘어집니다. 사탄에게 속고 넘어지고, 저 사람을 가까이하지 말았어야 될 사람인데, 이 공동체에 내가 발을 디뎌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거대한 영적 흐름에 내가 몸을 맡겼어야 되는데, 그때 내가 이것을 붙잡았어야 되는데, 후회하고 낙심하고,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하지 못한 것, 그렇게 한 것이 항상 후회만 남지 않습니까? 기도하지 않으니까요.

아브라함의 복은 물질의 복이 아니었고, 장수의 복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복은 분별의 복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분별을 주십니다. 부디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기도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고, 부디 기도해서 성령께서 일하실 때를 깨닫고, 부디 기도해서 이 세상의 시대정신을 깨닫는 복이 우리의 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동역자를 구하는 복

아브라함은 이삭의 신붓감만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동역자를 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평생 사명자요, 동역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비, 사라는 열국의 어미였습니다. 원래는 '아브람'과 '사래'였습니다. '존귀한 아버지'와 '공주, 왕비, 여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 사라로. 그때부터는 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온 이후부터 선교적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그 땅을 복음화시키고, 그 땅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사명자로 살게 됩니다. 존귀한 아버지가 열국의 아비로, 공주가 열국의 어미로 사명을 감당하며 살게 됩니다.

뜨거운 사명자로, 열정 넘치는 사명자로 평생을 헌신했는데 미완성이었습니다. 이제 그 사명을 아들이 이어받아야 합니다. 아들 이삭이 그 사명을 이어받으려면 동역자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한 길 가는 동역자, 한 방향을 보는 동역자. 그래서 그냥 신붓감을 데려와서는 안 됩니다. '서로 맞춰가며 살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맞춰가는 과정이 20년이 걸리고 30년이 걸리면 하나님의 일은 언제 합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지혜를 주셔서 동역자를 구하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동역자를 통해서 한 방향을 보고 한 길 가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아브라함이 그 일을 지금 이루어가고 있는 과정입니다.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신붓감을 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동역은 중요한 일입니다. 롯의 가정이 동역에 실패한 가정 아닙니까? 소돔성이 멸망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롯의 가정에 보내셨습니다. 롯은 두 천사들에게 무교병만 드렸습니다. 집에 먹을 것이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집이 가난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동역자가 없었습니다. 해거름 늦은 저녁이었는데, 롯의 아내가 보이지 않습니다. 롯의 두 딸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남자 혼자 차려서 가지고 내어온 것이 무교병밖에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동역자가 없으니까요. 롯의 가정이 하나가 되고 한 방향을 보고 나아갔다면 그들은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각자 다른 방향을 보니까 함께 멸망해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의 가정은 달랐습니다. 동역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창 18:6-7)

혼연일체가 되어서 동역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은 지도하고, 그는 송아지를 잡고, 하인들은 요리하고, 사라는 떡을 만들고,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하는 데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 가정의 동역입니다. 동역한 아브라함의 가정, 하나님은 그 가정을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동역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이삭의 동역자로 리브가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아브라함의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 아닙니까?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서 간절하게 엎드려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신 것, 이것이 복 아닙니까? 일확천금이 복입니까? 부귀영화가 복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엎드려 기도하고, 그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것이 복입니다.

통찰력의 복, 멀리 내다보는 믿음의 대가

이제 아브라함의 늙은 종, 다메섹 엘리에셀이 걱정이 됩니다. 800km나 먼 길을 가야 하는데,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경우의 수가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만약에 여인을 발견했는데 그 여인이 오려고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요? 그러면 이삭을 데리고 갈까요?" 하나님이 아니라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창 24:7)

하나님이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낸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당신의 사자를 보내십니까? 이것은 아브라함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복음화시킬 믿음의 후손, 그 가정을 이루는 일은 곧 하나님의 일 아닙니까?

오늘 이 과정을 보면 아브라함은 원칙과 방향을 정해주는 믿음의 대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분명한 방향과 원칙과 철학이 있었습니다. 종에게 방향을 정해줬습니다. 여인이 따라오려고 하지 않으면 이삭을 데려가지 마라. 철저한 원칙과 방향. 사자를 하나님이 먼저 보내실 것이다. 안심도 시켜줍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종을 보내면서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일단 한번 가 봐라. 가서 여자를 사오든지 업어오든지, 안 되면 보쌈이라도 해 오든지,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그렇게 말했다면, 이 종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도대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의 대가다웠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멀리 보이고 넓게 보이고 자세히 보이지 않습니까? 믿음의 대가가 되면 멀리 볼 수 있고,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길게 볼 수 있고, 높은 곳에서 사방을 다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하면서 얻은 통찰력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하여 통찰력을 하나님이 주셔서, 울타리를 넓게 만들어 주고, 방향을 정해 주고, 길을 알려 주는 믿음의 대가. 이것이 아브라함이 기도해서 얻은 열매입니다.

가정에 이런 어른이 있으면 좋습니다. 가정의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좌충우돌하는 아들, 손자들에게 이렇게 하라고 길을 알려주고 방향을 알려주면 그 가정은 복된 가정입니다. 교회 공동체에 이런 장로님들이 많이 계시면 그 교회 공동체는 복 받은 교회입니다. 믿음의 후배들에게 높은 망루에 올라서서 길을 알려주는 장로님들이 많이 계시면 얼마나 행복한 교회 공동체입니까?

아브라함은 늙어갈수록 멋진 어른이 되었습니다. 기도함으로 얻은 통찰력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데, 그 복은 세상이 주는 복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부귀영화나 물질 따위가 아닙니다. 통찰력을 주시고, 시대정신과 악함과 선함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사랑하는 자녀를 위한 기도가 응답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복이 우리의 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은 기도하여 복을 받았습니다. 범사의 복을 받았는데, 그 복은 선과 악을 분별하는 복이었고, 그 복은 인간적인 복이 아니었으며, 그 복은 사랑하는 자녀의 동역자를 구하는 복이었으며, 그 복은 통찰력의 복이었습니다.

주여,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여,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과 기도하고 독대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도록 도우시고, 기도하여 이런 은혜를 얻었다면 그 복을 흘려보내고 나누어 줄 수 있는, 우리도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