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강 / 아브라함의 종 (24:10-27)

아브라함의 종

본문: 창세기 24:10-27

중국 전국시대 후기, 제나라에 맹상군이라는 유명한 재상이 있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식객들이 늘 가득했는데, 그중에 풍훤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재주가 뛰어나고 통찰력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맹상군이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하루는 풍훤을 불러 심부름을 시킵니다. 멀리 설 지방에 빚진 사람들이 많으니 가서 돈을 받아오라고 명합니다. 풍훤이 묻습니다. "제가 받아온 빚으로 무엇을 사오면 될까요?" 맹상군이 답합니다. "네가 잘 살펴보고 우리 집에 없는 것을 사오거라." 명을 받들고 설 지방으로 간 풍훤은 빚진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아 빚 문서를 가져오라 하고는 전부 태워버렸습니다. 면책해 준 것입니다.

돌아온 풍훤에게 맹상군이 묻습니다. "무엇을 사왔느냐?" "이 집에 없는 의로움을 사왔습니다." 맹상군은 더 묻고 싶었으나 한마디도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정치라는 것이 원래 오르내림이 있고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곳인지라, 맹상군도 이를 피하지 못하고 권모술수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빈털터리가 됩니다. 아무도 그를 받아주고 반기는 곳이 없었는데, 설 지방 사람들이 그를 환대합니다. 그 지방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십 리 밖부터 나와서 환영합니다. "이곳에서 쉼을 누리시고 다시 회복하시어 복권할 때까지 편안히 계십시오." 그제야 맹상군은 풍훤이야말로 자신에게 훌륭한 일꾼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브라함의 종 다메섹 엘리에셀이 등장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대단히 훌륭한 종이었습니다. 풍훤이나 다메섹 엘리에셀이나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훌륭한 종이었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일꾼인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종인가를 함께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다루기 편한 종

아브라함이 노년에 이르러 한 가지 큰 숙제를 아직 풀지 못합니다. 아들 이삭의 결혼 문제가 그의 인생에 큰 숙제였습니다. 그래서 종 다메섹 엘리에셀을 불러 다짐을 받습니다. 이 땅 가나안 자손의 여인 중에서 아들의 아내감을 택하지 말고, 자신의 고향 족속에게로 가서 여인을 데려오라고 명합니다. 가나안 땅의 영적 상태를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순한 신붓감이 아니라 사명자를 택하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의지였습니다.

종은 이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합니다.

"이에 종이 그 주인의 낙타 중 열 필을 끌고 떠났는데 곧 그의 주인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나 메소보다미아로 가서 나홀의 성에 이르러" (창 24:10)

이렇게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헤브론에서부터 메소포타미아 하란까지는 거리가 약 800킬로미터나 됩니다. 이렇게 먼 거리를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건강의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늙은 종이었습니다. 체력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둘째는 속도의 문제입니다.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낙타 열 필을 끌고 함께 갑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낙타 열 필은 혼자 끌고 갈 수 없기에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가야 합니다.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 속도를 자기 마음대로 낼 수가 없습니다. 셋째는 안전의 문제입니다. 사막 광야에는 약탈자들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떠납니다. 여인을 찾으면 여인의 친정에 결혼 지참금을 주고 와야 합니다. 금붙이, 은붙이, 각종 패물을 함께 가지고 떠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빼앗기는 것도 두렵고 생명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종 다메섹 엘리에셀은 토달지 않습니다. "제가 나이가 많지 않습니까? 주인님, 제가 늙었지 않습니까? 안전에도 문제가 되고 제 건강에도 걱정이 되고 속도에도 문제가 되는데, 저 말고 잘할 수 있는 젊은 사람을 보내십시오. 종들이 많지 않습니까? 왜 하필 제가 가야 됩니까?" 이렇게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24장 2절을 보면 이 종의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이라고 합니다.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소유를 맡았다는 것은 종들 중에 최고참이라는 뜻이요, 능력 있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늙은 종이라는 말은 이 직책을 수행한 지 오래되었다는 뜻입니다.

원래 권력이라는 속성은 한 자리에 오래 있으면 힘이 생깁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자리라도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힘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아브라함 가정의 모든 것을 통솔하는 늙은 종, 사실 아브라함보다 그의 집안 모든 것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종들의 생리를 알고 있고, 다루는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정도 되면 아브라함이 이 종을 다루기가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오래 데리고 있었던 늙은 종, 편하려면 한없이 편할 수 있는데 불편하기 시작하면 한없이 불편할 수 있습니다. 못한다고 버티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다윗에게도 불편한 일꾼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요압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다윗이 이곳으로 가서 전쟁하라면 이곳에서 전쟁하고, 저곳으로 가라면 저곳에서 전쟁하는 군대 장관입니다. 능력은 출중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버거운 인물이었습니다. 다루기가 어려웠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인물이었고 다윗 왕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원수를 갚기 위해서 아브넬을 살해해 버렸습니다. 다윗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그렇게 했기에 나라가 혼란에 빠집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다윗이 부탁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해 달라." 하지만 요압은 다윗의 말이 안중에 없습니다. 상수리나무에 압살롬이 걸렸는데 아직 생명이 붙어 있는데도 그 심장을 자기 창으로 찔러 버렸습니다. 다윗의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평생 동안 요압과 함께했지만 다루기 쉬운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분명히 자기 휘하에 있는데, 분명히 내 사람인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다윗이 죽기 전 솔로몬에게 유언을 남길 때 이렇게 말합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려 그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너는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왕상 2:5-6)

오죽하면 다윗이 이렇게 유언까지 했겠습니까? 죽기 전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불편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사건과 이런 모습을 통해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일꾼인가? 하나님은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실까, 편하게 생각하실까? 하나님이 다루시기에 나는 편안한 사람인가, 하나님이 다루실 때 불편한 사람인가?

신앙생활 삼 대째, 사 대째 하고, 교회에서 신앙생활 50년, 60년 하면서 교회를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가 돌아가는 생리를 잘 알고 있고, 중직과 직분자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그것도 권력이라고 권력을 누려왔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명령 저런 명령을 내리면 "하나님, 그거 다 해봤는데 이제는 저 말고 다른 사람 시키십시오. 저는 못하겠습니다. 하나님, 그건 이래서 안 됩니다. 저건 저래서 안 됩니다." 이런저런 핑계거리로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불편한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이 어느 세상인데, 세월이 어떻게 변하고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는데 하나님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불편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의 선택은 둘 중 하나입니다. 그 사람을 빼버리고, 그 사람을 버리고 하나님 손에 쓰기 좋은 사람과 함께 일하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그 사람을 고쳐서 쓰시든지. 둘 다 우리에게는 불행한 일입니다.

사람에게는 불편한 사람이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의를 위해서, 옳은 일을 위해서 사람에게는 불편한 사람이 되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편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명령, 하나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할 수 있고, 이 말씀이 하나님의 명령임이 분명하다고 판단되면 그때는 어떤 말씀이라도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 17:10)

명령받은 것을 다 하고 나면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의로움이 올라옵니다. 보상심리가 올라옵니다. 누구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이제 주십시오." 그런데 참된 종의 자세는 "저는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무익한 종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하나님께 우리는 다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주시고 그의 피 값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외에 더 무엇이 필요합니까? 그런데 끊임없이 우리는 하나님께 달라고 합니다. 불편한 종들입니다. 하나님이 다루시고 하나님이 부리시기에 편안한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말씀과 기도로 분별하는 종

이제 아브라함의 종은 800킬로미터를 달려가서 메소포타미아 하란 땅, 나홀의 성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걱정이 됩니다. 저녁이 되어서 우물에 물을 기르러 여인들이 쏟아져 나올 텐데, 이 많은 여인들 중에 누구를 택해야 할까?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창 24:12)

그가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연륜이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경험이 많습니다. 나이가 많은 늙은 종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안목과 자신의 경험과 연륜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평생 동안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봐왔겠습니까? 내 눈에 "이 사람이다" 하는 사람을 택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로 나아갑니다. 분별할 수 있도록 간구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말씀을 먼저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리니 너는 그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말씀은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줍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큰 흐름을 정해 줍니다. 말씀의 흐름을 붙잡고 800킬로미터를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갈림길 앞에 섰습니다. 누구를 택해야 할지 분별을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말씀과 기도가 이래서 중요합니다. 말씀은 방향을 잡게 하고, 기도는 갈림길이 나올 때 분별로 선한 길을 택하게 해줍니다. 좌로 가야 할지, 우로 가야 할지, 선을 잡아야 할지, 악을 잡아야 할지, 동서남북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게 해줍니다.

좁은 길로 가라는 말씀을 붙잡고 좁은 길로 왔습니다. 좁은 길로 가다 보니 갈림길이 나옵니다. 갈림길 앞에 서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엎드려 간구해야 합니다. "주여,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어디가 선한 길입니까?" 분별을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말씀 붙잡고 왔습니다. 이제 분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말씀을 듣지 않습니까? 예배드립니다. 이 말씀을 붙잡고 인생의 큰 줄기를 향하여 방향을 잡고 나갑니다. 한 주 동안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갈림길 앞에 섰습니까? 선택의 순간을 얼마나 많이 직면하셨습니까? 그때마다 기도하셨습니까? 그때마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큰 문제는 엎드려서 간구하고 부르짖어야 하고, 크고 작은 문제 앞에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쁜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선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 1:9-10)

"내가 기도하노라." 기도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다섯 가지가 다 선합니다. 그중에 가장 선한 것, 그것을 분별하기가 쉽습니까? 차라리 선과 악이라면 분별이 쉽습니다. 악은 그냥 눈에 보이니까, 가지 않으면 되니까. 그런데 여기 있는 모든 것이 다 선합니다. 그중에 가장 선한 것, 베스트하게 선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하란 땅에 왔습니다. 나홀의 성에 왔습니다. 그 여인들이 다 좋아 보입니다. 그중에 가장 적합한 여인,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이 여인을 내가 택해야 하는데, 그것은 기도밖에 답이 없습니다. 자신의 경험과 연륜으로는 정답을 찾을 길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내 인생의 가장 선하고 중요한 것을 분별하겠습니까? 말씀으로 방향을 잡았다면 기도로 분별하고 답을 찾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은혜의 자리에 머무는 종

아브라함의 종이 가장 훌륭한 점은 그중에서도 은혜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창 15:2-3)

한때 이런 적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녀가 없었을 때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다메섹 엘리에셀, 이 사람을 나의 상속자로 삼고 싶습니다." 상속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의 재산이 다 상속자에게로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네 몸에서 날 자라야 너의 후사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은 기대했을 것입니다. 내가 이 집의 상속자가 될 것이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상상의 나래를 펴며 내가 이 집의 상속자가 되는 그날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니라고 합니다. 높은 곳에 있다가 땅바닥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그 집에 있고 싶겠습니까? 떠나고 싶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세월이 지나서 그 집에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장성했습니다. 자기는 늙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아들의 배필을 고르기 위해서 먼 곳으로 떠나라고 합니다. 마음에 꽁한 감정이 남아있는 사람 같으면 그 말에 순종하겠습니까? 불쾌하고 기분 나쁘고, 한때 이 자리가 내 자리였는데 나더러 이제 이 젊은 두 번째 주인의 배필을 구하러 가라고 하다니,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종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왜 그랬을까요? 능력이 없어서? 다른 데 받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능력이 출중했습니다. 왜냐하면 젊었을 때부터 아브라함이 상속자로 삼고자 했을 만큼 능력 있는 인물입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 집의 모든 소유를 다 맡길 만큼 그는 탁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른 데 가지 않고 아브라함 곁에 머물렀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아브라함과 함께하는 것이 은혜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니 하나님이 택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하는 일마다 잘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분과 함께하셔서 복에 복을 더해 주십니다. 내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이분에게서 흘러나오는 복이 나의 복이 될 것 같습니다. 이분과 함께 있으면 나는 이 사람과 함께 영원한 복을 누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자존심 상해도, 때로는 불쾌하고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그러나 그 자리가 은혜의 자리라면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지혜입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딤후 4:9-11)

데마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울을 떠나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가버렸습니다. 이 편지는 바울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디모데에게 편지했습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지금 바울 곁에는 누가만 있습니다. 누가와 디모데, 그리고 마가. 한때는 데마도 그들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특별한 인물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특별한 은총을 주신 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있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육신적으로는 고되고 힘들고 피곤하고 지치나, 그러나 그분과 함께라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매 순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데마는 이 은혜의 자리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리석은 인물입니다.

우리가 떠나야 할 자리는 죄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머물러야 할 자리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보디발의 아내가 매 순간 찾아와서 동침하자고 청할 때, 그때 그는 그 자리를 떠나버렸습니다. 도망가 버렸습니다. 죄의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랬더니 감옥에 들어갑니다. 감옥이 그에게는 차라리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죄의 자리를 떠나 감옥에 들어갔는데 오히려 그 자리가 은혜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어디를 떠나야 하고 어디에 머물러야 할지를.

아브라함과 롯과 다메섹 엘리에셀이 한때 한 집에 살던 때가 있었습니다. 한 식구로. 롯은 아브라함의 혈육이 아닙니까? 조카 아닙니까? 아들이 없을 때 아들처럼 기른 인물입니다. 그런데 롯은 세상을 사랑하여 소돔 땅으로 떠나버렸습니다.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다메섹 엘리에셀, 높은 곳에 올랐다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자리에 머무르고, 오랫동안 그의 종으로 충성되이 그 자리를 지키고 또 지켜서, 그는 진정한 믿음의 상속자가 됩니다. 물질의 상속자는 이삭이었지만, 믿음의 상속자는 다메섹 엘리에셀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처럼 그도 순종했고,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예배드리고 기도했던 것처럼 그도 주인의 믿음을 본받아 기도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은 것처럼 그도 아브라함을 떠나지 않고 철저하게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누가 진정한 승자입니까? 그가 진정한 제자요, 진정한 승리자 아닙니까? 이것이 지혜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지혜와 은혜와 능력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의 믿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 토달지 않고 하나님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주여, 기도하여 분별하게 하옵소서. 말씀으로 방향을 잡고 기도하여 길을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기도의 능력과 분별의 영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아브라함의 종이 아브라함을 떠나지 않고 은혜의 자리에 머물렀던 것처럼, 우리도 은혜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은혜의 자리에 함께 머무르는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