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강 / 리브가 (24:15-27)

리브가

본문: 창세기 24:15-27

2011년 작고하신 소설가 박완서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마흔에 등단했습니다. 그가 등단할 당시 발표한 소설의 제목이 「나목」입니다. 벌거벗은 앙상한 겨울나무를 뜻하는 이 작품은 박수근 화백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실제로 박완서와 박수근은 한때 같은 곳에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어느 시기,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재학 중이던 박완서는 전쟁으로 학업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서울에 있는 미군 PX 점원으로 일하게 됩니다. 같은 시기 강원도가 고향이었던 박수근도 생계를 위해 미군 PX에서 점원으로 근무하며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때 잠깐 스치듯 만났습니다.

세월이 흘러 1965년 박수근 화백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작전이 열린다는 신문 광고를 본 박완서는 자신이 알던 그 박수근인지 궁금하여 전시회를 찾았고, 그곳에서 큰 감동과 충격을 받습니다. 그토록 가난했던 박수근이 끊임없이 정진하여 대한민국이 알아주는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그의 그림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나목이었습니다. 벌거벗은 앙상한 겨울나무,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화폭에 담은 것이었는데, 생명을 붙잡고 겨울을 버티며 봄을 기다리는 질긴 생명력을 자신에 빗대어 그림으로 승화시켰습니다.

큰 감동을 받은 박완서는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15년의 세월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때부터 펜을 들고 글을 쓰기 시작하여 5년 뒤 「나목」을 발표하고 등단합니다. 그 후 201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시도 뒤로 물러선 적이 없었습니다. 남이 뭐라 하건 끊임없이 배우고 정진하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며 글을 썼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박완서는 이미 대한민국이 기억하는 최고의 작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하나님과 동역하는 사람은 뒤로 물러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선을 정해 놓고 "나는 여기까지만 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진하고 나아가는 사람, 돌파하고 자기 한계를 깨뜨리며 믿음으로 또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리브가가 바로 그런 인물입니다.

급히 물동이를 내린 여인

아브라함의 종 다메섹 엘리에셀은 주인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이 있었지만 두말하지 않고 800킬로미터나 떨어진 메소포타미아 하란 땅 나홀 성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경험과 경륜을 의지하지 않고, 수많은 여인들 중에 누가 이삭의 아내가 될 것인지 하나님께 먼저 여쭈었습니다. 여인들이 쏟아져 나올 때 리브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리브가가 물동이를 어깨에 메고 나오니 그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아내 밀가의 아들 브두엘의 소생이라 그 소녀는 보기에 심히 아리따우며 지금까지 남자가 가까이 하지 아니한 처녀더라 그가 우물로 내려가서 물동이에 물을 채워 가지고 올라오는지라" (창 24:15-16)

당시 일반 가정의 여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리브가도 집안 심부름으로 물동이에 물을 채워 집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아브라함 종의 눈에 들어왔고, 그는 여인에게 다가가 물을 좀 달라고 청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신 것처럼 일상적인 인사였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리브가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그가 이르되 내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동이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창 24:18)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이 "급히"입니다. 급히 물동이를 내려 물을 마시게 했습니다. 사실 리브가가 급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급하다면 목마른 아브라함의 종이 급한 것이지, 리브가는 급하게 물동이를 내리다가 물을 쏟거나 물동이를 깨뜨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급하게 내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상대방이 목말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노인이었습니다.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이 지방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800킬로미터나 되는 먼 길을 달려오느라 옷은 남루했고, 정말 목이 마른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금 내 형편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분이 지금 급하게 물을 마시지 않으면 목말라 쓰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이런 태도는 평소에 훈련받지 않으면, 평소에 이런 삶을 살지 않으면 결코 나타날 수 없습니다. 평소에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다른 사람의 형편과 처지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결정적인 순간에도 상대의 필요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평소에 상대가 어떤 필요 속에 있는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항상 눈여겨보며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한눈에 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2장 23절에서 브두엘의 딸 리브가를 이미 언급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사건 이후,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 번제단에서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받으시고 그의 미래와 결혼 문제까지 책임지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리브가의 이름을 슬쩍 언급하셨습니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종은 이삭의 아내감을 찾고 있지만, 하나님은 이 아이가 제대로 성장했는지,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될 만한 자격이 있는지,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새겨질 만한 자격이 있는지 오래전부터 바라보고 살펴보고 계셨습니다.

리브가가 이삭의 아내가 된다면 먼 길을 떠나 가나안 땅에 가서 살아야 합니다. 열국의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열국의 어머니는 폐쇄적인 사람이어서는 곤란합니다. 개방적이어야 합니다.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상대방의 필요를 따라 채워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으로 내 좋은 것만 하고 나에게 필요한 것만 채우며 마음을 닫고 살아서는 열국의 어머니가 될 수 없습니다. 사라가 그러했던 것처럼 리브가도 열국을 섬기는 마음으로 나누어 주고 베풀어 주며 상대방의 필요를 눈여겨보고 채워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첫 번째 테스트를 통과한 것입니다.

낙타 열 마리를 위한 물 긷기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려면,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 되려면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선을 정해 놓고 "나는 여기까지입니다. 내가 정한 선 이상은 넘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내 영역에 들어오는 것도 싫어한다면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런 것을 훈련시키고 가르치신 적이 있습니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마 14:15-16)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난 배경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수만 명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저녁을 제공하겠다고 사람들을 모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었고, 말씀을 듣다가 해가 져버렸습니다. 장소는 빈들이요, 제자들에게는 돈이 없습니다. 나누어 주고 싶어도 나누어 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님, 여기는 빈들입니다. 해가 이미 졌습니다. 이 사람들을 다 돌려보내어 먹을 것을 알아서 사 먹고 다시 오게 하십시다." 그런데 예수님이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예수님이 제자들의 형편을 모르셨겠습니까? 돈이 없는 것도 아시고 먹을 것이 없다는 것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제발 목자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이들을 먹이려고 하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나면 제자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맡아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영혼을 돌보고 책임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찌하든지 이들을 먹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찾아봐야 합니다. 뒤져봐야 합니다. 뭐라도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목자의 심정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선을 그어 놓고 "나는 여기까지입니다. 우리는 돈이 없습니다. 저들이 알아서 왔으니 알아서 가서 사 먹게 하십시다"라고 하는 것은 목자의 마음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듣고 찾아 나서자 한 아이의 도시락이 손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께 건네 드리니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나누어 주라 하셨습니다. 목자의 마음을 가지고 찾으니 남자만 오천 명, 여자와 노인과 어린아이까지 수만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급한데 너희도 급하느냐? 내가 급한데 너도 제발 좀 급해라." 하나님이 가장 급한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 다 제쳐놓고 영혼 구원이 가장 급합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구원받게 하는 일보다 급박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급하지 않습니다. 자기 페이스대로 움직입니다.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이고, 하다가 안 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급하십니다. 우리 가족, 사랑하는 일가친척, 친구들의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은 급하신데 우리는 느긋합니다. 급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우리도 급히 물동이를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쓰임 받습니다. 하나님이 급하시면 나도 급하고, 함께 보조를 맞춰서 일해야 합니다. 리브가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상대의 필요를 알고 급히 물동이를 내려 물을 건네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더 큰 발걸음을 리브가가 내딛습니다.

"마시게 하기를 다하고 이르되 당신의 낙타를 위하여서도 물을 길어 그것들도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급히 물동이의 물을 구유에 붓고 다시 길으러 우물로 달려가서 모든 낙타를 위하여 긷는지라" (창 24:19-20)

"급히" 그리고 "달려가서"입니다. 서 있지 않습니다. 물을 구유에 붓고 급히 달려갑니다. 걸어 다니지 않습니다. 낙타까지 다 먹이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끌고 온 낙타가 열 필입니다. 목마른 낙타 한 마리가 목을 축이는 데 물 100리터가 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리브가가 낙타 열 마리를 위해서 길은 물의 양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1,000리터입니다. 열정적입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한 걸음 나가는 것이 아니라 두 걸음, 세 걸음, 더 많이, 더 깊숙한 곳으로 나아갑니다. 체력도 좋습니다. 낙타 열 마리에게 물을 다 먹일 만큼 건강합니다.

쟁기질하듯 새기시는 하나님

이런 모습을 아브라함의 종이 묵묵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셨는지 알고자 하더니" (창 24:21)

여기 "묵묵히"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어로 "하라쉬"라는 단어가 원형입니다. 쟁기를 갈다, 새기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의 모든 행위를 자기 가슴속에 쟁기로 갈아서 새기듯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눈에 쟁기를 갈아서 새기듯이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리브가가 땀을 흘리며 물을 길어 나르고 낙타를 기쁨으로 먹이는 모습을 자기의 가슴속에, 머릿속에, 눈 속에 쟁기를 갈듯이 새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하나하나 기억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인 아브라함에게 그대로 전해 주려고 그랬습니다. 그 당시는 동영상을 촬영할 수 없었고 사진도 찍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가슴에, 눈에, 기억에 쟁기를 갈듯이 하라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하나 차분히 모든 것을 눈여겨 본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큽니다. 첫째, 하나님도 우리를 하라쉬 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언행일체를 하나님이 다 눈여겨보고 계십니다.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세상에 나와서 지금껏 살아가는 모든 삶의 과정 하나하나를,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기억, 하나님의 가슴이 우리를 담아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기억 속에 어떤 인물입니까? 하나님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십니까? 나의 과거, 부끄러웠던 과거,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 나의 현재,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이 하나님께는 어떻게 보입니까? 사람들이 몰라 준다고 낙심했는데, 그러나 내가 선행을 한 것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십니다. 상처받은 것도 하나님은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기억과 하나님의 가슴은 마치 쟁기질을 하듯이 나를 다 담아 두고 계십니다. 이것은 동시에 은혜가 되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경각심을 줍니다. 잘 살아야 합니다. 제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억 속에 내 언행일체 모든 것이 다 기록되고 있다면, 마치 쟁기로 하나님의 가슴을 갈듯이 다 새겨지고 있다면, 제대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행 10:2)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행 10:4)

고넬료는 이방인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이요 군인입니다. 그가 어떤 이유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그는 모든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예배드렸다는 말입니다. 기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나눔도 열심히 했습니다. 구제도 열심히 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의 예배와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가슴에 하라쉬 했다는 말입니다. 쟁기로 갈듯이 하나님이 고넬료의 예배와 기도와 구제를 다 새겨 놓으셨습니다.

이러면 끝난 것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는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간구하는데, 하나님이 기도와 구제와 예배를 다 기억하셨다면 우리 모든 기도가 응답되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그러나 반면 우리가 하나님께 상처만 드렸다면, 하나님을 배신했다면, 하나님의 기억 속에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께 피눈물 나게 하는 존재가 되었다면, 형제를 가슴 아프게 하고 실족하게 하고 교회를 분열시키고 하나님을 끊임없이 실망시키는 존재로 기록되었다면, 아무리 기도해 본들 그 책임을 우리가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하라쉬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을 제외하고라도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나는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의 종 다메섹 엘리에셀의 눈에 비친 리브가는 특별한 인물입니다. 이 종이 평생 동안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여인들을 봤겠습니까? 경험이 많은 종인데, 이런 사람은 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급하게 물동이를 내려 물을 주는 것은 그렇다 치고, 낙타 열 마리에게 각각 100리터씩 물을 길어서 주는 여인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이 종의 마음에 경외감이 일어났습니다. 존경심이 일어났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이제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이 종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그의 아내를 주인으로 섬겨야 합니다. 나이가 어리더라도 존경심이 있어야 섬길 것 아닙니까? 종이 리브가의 이 모습을 보면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정말 내 주인이구나" 하는 존경심이 생겼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사람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까? 또 만나고 싶은 사람, 다시 만나서 차라도 한 잔 밥이라도 한 끼 먹고 싶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피하고 싶은 사람입니까? 아니면 기억조차 없는 인물입니까? 사람들에게 기억나는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좋은 기억으로, 존경과 사랑의 인물로 남아야 합니다.

특히 가까운 분들에게 그러해야 합니다. 자녀에게 부모는 일생에 가장 귀중한 존재일 때가 있습니다. 어린 자녀에게 부모는 세상 전부 아닙니까? 자녀가 절망하고 낙심할 때 부모의 한마디가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손잡아 일으켜 주었다면, 부모는 자녀에게 가장 중요한 기억을 선물한 것입니다. 많은 돈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부모의 한마디 한 마디, 그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자녀의 가슴에 아픈 상처로 쟁기질했다면, 그 상처가 아물어서 딱지가 앉을 만하면 다시 또 쟁기질해서 그 가슴을 또 병들고 상처나게 했다면, 그 고통을, 그 아픔을 부모가 어떻게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평생 동안 지고 가고 짊어지고 가야 할 자녀의 고통입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게 좋은 기억으로 쟁기질해야 합니다. 매일같이 얼굴 보고 사는 가족들에게, 교회 성도들끼리, 특히 가까운 분들에게 언행일체를 조심하고 좋은 기억으로 남아야 합니다. 그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넣어드리기 위해서 좋은 기억으로 쟁기질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종은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낙타가 마시기를 다하매 그가 반 세겔 무게의 금 코걸이 하나와 열 세겔 무게의 금 팔찌 한 쌍을 그에게 주며 이르되 네가 누구의 딸이냐 청하건대 내게 말하라 네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유숙할 곳이 있느냐" (창 24:22-23)

정식으로 자기가 청혼을 위해 온 대리인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당신은 선택받은 인물입니다"라고 말하며 금붙이를 선물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만나자고 청합니다. 리브가가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리브가를 선택하실 때 저울에 달아 보셨습니다. 테스트하셨습니다. 오래전에 리브가를 점 찍어 두셨지만, 정말 사람을 품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상대의 입장과 처지에서 생각하는 사람인지, 하나님의 가슴속에 좋은 기억으로 하라쉬 하고 있는지,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을 주고 있는 사람인지를 다뤄보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인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선긋기를 좋아하며 선을 긋고 나도 넘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이지 않는 삶이 아니라, 끊임없이 돌파하고 끝없이 자기를 개발하며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진취적인 사람, 리브가처럼 상대의 필요를 깨닫고 그 필요를 채우는 자, 하나님께도 사람들에게도 좋은 기억이 되는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선긋기를 좋아했습니다. 선을 긋고 나도 넘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끊임없이 돌파하고 끊임없이 넘어가고 끝없이 자기를 개발하며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진취적인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하나님 닮은, 예수님 닮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동역자의 자격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리브가처럼 상대의 필요를 깨닫고 알게 하시고, 그 필요를 채우는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리브가가 하나님의 가슴에 하라쉬 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좋은 기억이 되고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