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강 / 돌아가매 (25:1-10)

돌아가매

본문: 창세기 25:1-10

소고기는 오늘날에도 비싼 음식에 속합니다. 온 가족이 함께 한우를 구워 먹으려면 큰 마음을 먹어야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이보다 더했습니다. 그 당시 소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평민들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농경사회였기에 소를 도축하는 것은 법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병든 소, 다친 소, 이제는 쓸모없어진 소가 아니면 도축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가 없이 소를 도축했다가 적발되면 초범이라 할지라도 태형 100대에 징역 3년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평민에게만 적용되는 잣대였습니다. 양반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소고기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한양 도성 안 성균관에는 항상 허가받은 소 도축장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제사가 자주 있었고, 성균관 유생들을 격려한다는 명분으로 소를 잡아 고기 잔치를 열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겉보기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사실은 고위 관료들과 양반들이 이를 핑계 삼아 고기를 먹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성균관에서 소 잡는 날이 되면 양반들은 줄을 서서 소고기를 얻어 갔습니다. 이런 이중잣대가 조선시대에는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한 가지 잣대만 있어야 하는데, 평민들에게는 이런 잣대, 양반들에게는 저런 잣대를 적용하니 그 나라가 건강할 리 없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말할 때, 복음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이유는 잣대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있어서는 돈도 권력도 물질도 지혜도 지식도 학벌도 어떤 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 그 피의 능력을 믿고 내가 죄인임을 고백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구원 얻을 길이 없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는 동일한 잣대가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감출 수 없는 죄, 드러나는 비행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여호수아나 다윗이나, 우리가 생각할 때 얼마나 위대한 하나님의 일꾼들입니까?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그분들의 비행과 악행, 그분들이 저지른 크고 작은 잘못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가감 없이 적어 두었습니다. 성경은 그들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해서 죄를 감추거나 묻어두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을 드러내십니다.

오늘 본문도 아브라함의 마지막 38년을 다루고 있는데, 아브라함의 비행과 허물, 그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창 25:1)

창세기 12장부터 25장까지 오는 동안에 아브라함 이야기가 얼마나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창세기의 방대한 부분이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길고 긴 아브라함 이야기 중에 오늘 이 짧은 한 절이 가장 당혹스럽습니다. 이 한 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했다는 사실 자체가 난해합니다. 그런데 원문을 살펴보면, 원문에는 있고 한글 개역개정 성경에는 빠져 있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이오셰프'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다시'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 킹제임스 버전에는 'then again'이라고 옮겨 두었습니다. 그 의미를 충실히 살렸습니다. 'Then again', 그리고 다시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는데 그의 이름이 그두라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리고 다시' 후처를 맞이했다면, 그 이전에도 후처를 맞이한 적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첫 번째 후처가 누구입니까? 하갈입니다. 하갈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했습니다. 두 번째 후처입니다. 그 두 번째 후처의 이름이 바로 그두라입니다.

거기까지는 그렇다 합시다. 그런데 문제는 시기입니다. 하갈을 맞이한 시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두라를 맞이한 시기가 과연 언제입니까? 사라가 죽기 전입니까, 사라가 죽고 나서입니까?

아브라함 일생의 말년에 가장 중요한 일, 그가 공을 가장 많이 들인 일이 이삭의 아내 리브가를 맞이하는 일이었습니다. 일생일대의 가장 중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아브라함은 직접 가지 못했습니다. 기력이 쇠해서 아브라함의 늙은 종 다메섹 엘리에셀을 불러다가 몇 번이나 다짐받습니다. 그에게 당부하고 기도해 주고 먼 길을 떠나보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기력이 있었다면, 거기 갔다 올 만한 힘이 남아 있었다면 아브라함은 자기가 직접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종을 보낼 정도로 그는 기력이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은 후에 그두라를 아내로 맞이해서 6명의 아들을 두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또 한 가지, 만약 사라가 죽은 후에 아내를 맞이했다면 '후처'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내가 죽었기 때문에 그냥 '아내'라고 표현하면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후처'라고 명확하게 명시해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은 사라가 죽기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사실 이 사건은 창세기 16장과 17장 사이에 위치해야 옳은 본문입니다. 창세기 16장에는 아브라함이 하갈을 맞이해서 이스마엘을 낳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마엘을 낳고 나서 아브라함은 13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86세에 이스마엘을 낳고, 창세기 17장이 시작되면서 99세가 되었던 어느 날 하나님이 그를 불러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말씀하실 동안, 13년의 긴 공백과 침묵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13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첫 번째 후처 하갈을 맞이해서 이스마엘을 낳고, 두 번째 후처 그두라를 맞이해서 6명의 아들을 낳았던 기간이 바로 이 기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비행을 기록하신 이유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왜 굳이 그때 창세기 16장에서 밝히지 않았던 아브라함의 비행을 이제 와서, 그의 죽음과 함께 밝히시는 것입니까? 읽는 사람이 불편하게 말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아름답게 마무리했으면 좋겠는데, 그의 일생의 마무리가 복되고 좋은 일만 가득하고 축복 가득하게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는데, 왜 굳이 "그가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라고 기록하셨습니까?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더 이상 실망할 것이 남아 있습니까?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일이 틀린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신 일은 모든 것이 선을 이루는, 우리를 위한 일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세 가지 정도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 앞에서 감출 수 있는 죄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속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감정도 감출 수 있습니다. 어릴 때는, 젊을 때는 마음속에 혈기가 올라오고 분이 올라오면 감출 수가 없습니다. 표정 관리가 안 됩니다. 목소리도 떨리고, 화가 나면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노련해집니다. 감출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누를 수 있고 얼마든지 감출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은 당신을 미워하고 당신을 증오하나, 그러나 내 입술은, 내 눈은 웃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감출 수 있고 거짓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난날 살아왔던 모든 일, 일거수일투족들, 모든 사람은 다 속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기 전, 하나님은 다 드러내시고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네가 그때 어떤 일을 행했는지 나의 책에 다 기록해 두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하갈과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그두라와 6명의 아들은 하나님이 그냥 모른 체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하나님은 그의 말년에 죽음을 기록하면서 성경에 분명히 기록해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한 순간 한 순간, 내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 내가 계획하는 모든 일들, 하나님 나라에 나를 다룬 책이 있다면 거기에 하나님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록해 두셨을 것입니다. 굳이 기록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잊어버리시는 적이 없고 다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보여주는 두려운 말씀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이 다 기억하고 계신다면 두렵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누구도 완전한 자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그분을 통해서 믿음을 시작하시고 이루어 가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브라함조차도 이런 정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모세는 자기 혈기를 이기지 못해서 사람을 죽였습니다. 살인한 자입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부하의 아내를 자기 아내로 빼앗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충성스러운 부하를 사지로 내몰아서 죽였습니다. 그런 인물이 다윗입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입니다.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신비로운 것은 하나님이 그런 자들을 불러서, 그런 자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위대한 지도자로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훈련시켜 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들어서 민족의 지도자로 만들어 가고 세우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왕 중의 최고의 왕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왕으로 만들고 빚어가지 않습니까?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나 같은 인간도,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히면 훈련받아서 변화될 수 있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를 통해서 얼마나 많이 절망합니까? 죄에 무너지고 연약하고 쓰러지고, 결단하고 결심하고 이를 악물고 나서지만, 매 순간 넘어지고 쓰러지는 나. 난 정말 안 되는 인간인가 보구나, 그런 생각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도, 그 약함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일하시고 하나님이 그를 세워 가신 것처럼,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도 일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살인자도 세우시고, 약한 자도 세우시고, 거짓말쟁이도 세우시고, 정욕으로 넘치는 자도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훈련받으면 하나님이 그를 바꾸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주변의 완악한 자들을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 같은 정욕적인 사람, 다윗 같은 욕심 많은 사람, 모세 같은 혈기 넘치는 사람,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이 손가락질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훈련시켜서 만들어 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말씀을 기록해 두신 이유가 바로 우리에게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죄의 대물림, 미디안의 비극

세 번째, 이스라엘 백성들, 후손들에게 지금 그들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이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려고 이 말씀을 기록해 두셨습니다.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 (창 25:2)

6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두라를 통해서 낳은 6명의 아들 중에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미디안입니다. 짐작하시는 바와 같이 이 미디안은 훗날 미디안 족속의 조상이 됩니다. 그의 자손들이 번창하고 또 번창해서 미디안 족속, 한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미디안 족속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좋았습니까? 친밀했습니까? 그들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갈등했습니다. 그들은 사사건건 충돌했습니다. 미디안 때문에 이스라엘이 당한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는 여정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이라는 곳에서 한때 머무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모압 사람들이 미디안 여자들과 함께 나와 이스라엘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성적으로 유혹했습니다. 그들을 음란의 죄에 빠지게 했습니다. 동시에 그들을 우상 숭배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하루아침에 전염병을 내리셔서 24,000명을 죽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아침에 24,000명이 죽게 된 것입니다. 그 시작에 미디안 족속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이 다 일단락되고 나서 진노하시며 모세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미디안인들을 대적하여 그들을 치라 이는 그들이 속임수로 너희를 대적하되 브올의 일과 미디안 지휘관의 딸 곧 브올의 일로 염병이 일어난 날에 죽임을 당한 그들의 자매 고스비의 사건으로 너희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민 25:16-18)

미디안인들을 치라고 하지 않습니까? 앞으로 너희 역사가 존재하는 동안 너희는 미디안인들과 대적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를 유혹한 이 미디안인들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올라가고 올라가고 또 올라가 보니 아브라함에게까지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이 '그리고 다시' 후처를 취해서 그두라를 취해서 낳은 자손 중에 미디안이 눈에 보입니다. 우리 조상 죄 때문이구나! 우리 조상 아브라함 때문에 그 후손들이 지금 우리와 적대 관계에 있게 되었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의 악연은 계속됩니다.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가사에 이르도록 토지 소산을 멸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에 먹을 것을 남겨 두지 아니하며 양이나 소나 나귀도 남기지 아니하니" (삿 6:3-4)

이스라엘 백성들이 파종할 때만 되면 미디안이 선두에 서서 다른 소수민족들, 이방민족들을 이끌고 올라와서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먹을 것을 다 털어갑니다. 가축들도 다 잡아갑니다. 이것이 사사 기드온이 출현한 배경입니다. 사사시대 미디안 민족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굉장히 많이 괴롭혔습니다.

이렇게 미디안인들에게 압제받고 괴롭힘 당하고 힘겨울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을 떠올립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한순간 정욕을 참지 못하고 '그리고 다시' 후처를 취한 것 때문에 우리가 이런 일을 당하는구나!

만약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성경에서 그의 죄를 빼고 기록하지 않으셨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의 원인이 도무지 어디서 온 것인지, 도대체 누구 때문인지, 도대체 왜 이 민족과 악연 가운데 얽히고설켜 살아야 되는지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분명히 알게 하십니다. 아브라함 때문이라고.

두렵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들, 지금 우리가 내뱉는 말들,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일거수일투족들이 훗날 대를 넘어서 우리 후손들에게 해를 끼치고 악을 끼치고, 그들에게 우리가 불평의 대상이 된다면, 원망의 대상이 된다면 두렵지 않습니까? 잘 살아야 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잘한 것도 기록하셨지만, 그의 악행도, 그의 정욕도 있는 그대로 다 기록하심으로 후세대들에게 귀감을 삼으신 것입니다. 너희는 잘 살라고, 너희는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삭을 보호하려 한 아브라함의 노심초사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산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쪽 땅으로 가게 하였더라" (창 25:5-6)

재산 분할을 다 마쳤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고 나서 이삭을 장가보내고 나면, 이제는 좀 편안하게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자기 말년을 편안하게 살아야 하는데 편하지 못했습니다. 걱정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을 때는, 이스마엘은 이미 저 멀리 떠났고, 이 6명의 아들들이 이삭을 괴롭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죽고 나면 이들이 이삭과 함께 있고 가까이 있으면 이삭에게 해를 끼칠 텐데... 그 걱정 때문에 밤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래서 불러다가 재산을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기 생전에 내 눈앞에서 멀리 떠나라고. 이것이 할 짓입니까? 다 떠나라고! 이삭 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6명의 아들들을 다 멀리 떠나보냈습니다.

성공했습니까? 아브라함 생전에는, 자기 눈앞에서는 돈을 받고 저 멀리 다 떠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죽고 나서 그 후손 중에 미디안이 세력을 키웁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뜻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미련한 존재입니다. 당장 10년 뒤에 일어날 일을, 당장 한 세대 뒤에 일어날 일을, 내가 죽고 나서 그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견하지 못하는 미련하고 완악하고 연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한순간 정욕에 도취되어서 '그리고 다시' 후처를 취하는 이 미련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탐욕 때문에 쓰러지고 욕심 때문에 망하고 나서도, '그리고 다시' 욕심의 죄를 짓는 인간이 바로 나 같은, 우리 같은 존재들입니다. 말실수 때문에 상대방을 상하게 하고, 그를 넘어지게 하고, 그를 쓰러지게 하고도, 다시는 내가 입 조심해야 되겠다고 말하고도 다시 말실수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다음 일어날 일을 예견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아브라함도 자기 말년에 좀 편하게 살 수 있었는데, 이제는 누리고 편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었는데, 죽기 직전까지, 마지막까지 인생의 말년을 자기가 뿌린 씨앗, 그두라 때문에 고생하고 염려했던 불행한 인간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헤브론에서 7년을 유다 지파의 왕으로 살았고, 예루살렘에서 33년을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헤브론에서 7년 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6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6명의 어머니가 다 다릅니다. 1년에 한 명꼴로 여자를 바꿨다는 이야기입니다. 왕자가 6명이 7년 동안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왕자, 밧세바를 통해서 낳은 솔로몬입니다. 7명의 어머니가 다 다릅니다. 다 배가 다릅니다. 서로 갈등하지 않겠습니까? 서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셋째 아들 압살롬이 큰아들 암논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멀리 도주합니다. 내친김에 아버지의 왕위를 압살롬이 찬탈했습니다. 압살롬을 징벌하는 과정에서 압살롬이 세상을 떠납니다. 첫째 아들, 셋째 아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나섰습니다. 솔로몬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습니다. 그의 반란을 제압합니다. 솔로몬이 진정한 왕이 되고 나서 아도니야를 죽여 버립니다. 형제들끼리 죽고 죽이고 미워하고 살육하는 일이 매 순간 일어납니다.

누구 죄 때문입니까? 다윗 때문입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7년 동안 6명의 여자를 통해서 6명의 아이를 낳은 것,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인간은 이렇게 그다음 일어날 비극과 파국을 계산하지 못하고 머릿속에 두지 못하는 부족하고 완악한 존재입니다.

화평의 씨앗을 심으라

우리가 지금 무엇을 뿌리는지, 우리가 지금 무엇을 심고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 3:18)

화평을 심으라고 합니다. 현재 우리가 화평을 심는 것은 지금 화평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한참 뒤에, 내 인생의 말년에, 혹은 내 자녀, 또 그 자녀의 자녀까지 아무런 걱정 없이 화평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화평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화평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래야 의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미워 죽겠습니다. 원수를 갚아 버렸습니다.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 사람은 내 자녀에게 또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국가 간, 민족 간, 전 세계에 이런 일이 전쟁과 전쟁을 계속해서 불러오고 있습니다.

정욕을 참고, 탐욕을 억누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을 심고 화평을 심기 바랍니다. 내가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 모든 것이 훗날 의의 열매로 우리 자녀들에게 돌아온다면 할 만하지 않습니까? 왜 못하겠습니까? 할 수 있는 한 화평을 심고, 시간이 한참 지나면 지날수록 그 열매가 우리 자손들을 복되게 하고, 우리 자손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이 나라와 민족의 영광이 되고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창 25:7-8)

175세에 아브라함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인생 175년, 영역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75세에 부르셨으니 1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100년 동안 비겁한 거짓말쟁이로도 살았습니다.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적도 있습니다. 정욕에 눈이 멀어 13년 동안 하갈, 그두라를 취했습니다. 그 문제로 자신의 말년이 편치 못했습니다. 물질을 쫓아 산 적도 있고, 하나님 앞에 거짓말하고 죄 지은 적도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아브라함이라는 그 사람은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와 다를 바가 어디가 있습니까? 어쩌면 지금 우리가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도덕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깨달아야 되는 것은 아브라함의 훌륭함이 아닙니다. 그의 위대함과 그의 뛰어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뛰어나심입니다.

이런 인간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붙드시고, 그를 사랑만 들어가시고, 그를 빚으시고, 그를 훈련시키시고, 그를 바꾸어 가시고, 그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 주시고, 그를 들어서 사람 되게 하시고, 떠나게 하시고,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게 하시고, 이스마엘을 떠나보내게 하시고, 이삭을 모리아 산 번제단에 올려놓게 하신 그 하나님의 능력이 위대하지 않습니까?

나 같은 인간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처럼 이끌어 가시고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그 능력입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우리가 추앙하거나 떠받들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별볼일 없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를 부르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이 대단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아브라함의 인생을 돌아보고, 우리는 화평의 씨앗을 뿌리고 심는 믿음의 백성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믿음의 여정을 다 살펴본 결과, 우리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인내와 하나님의 자비만 찬양합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그와 함께하신 하나님, 참으시고 인내하시고 견디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브라함에게 길이 참으신 것처럼, 주여, 오늘 우리에게도 참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인내를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변화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죄짓지 않게 하시고, 당장 그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견치 못하는 미련한 자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화평을 심고 의의 열매 거두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