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백성에게 돌아가다
본문: 창세기 25:11-18
히틀러와 함께 나치 독일을 이끌며 유대인 학살에 앞장섰던 인물들이 있습니다. 선전 선동을 담당했던 괴벨스, 현장에서 직접 학살을 지휘한 하인리히 힘러, 학살 명령을 내린 아이히만, 생체실험을 주도한 멩겔레가 그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울 수 없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을 조직적으로 학살하면서 그들에게는 양심의 가책이 없었을까요?
작은 거짓말 하나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수많은 생명을 빼앗으면서도 최선을 다했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왔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이 '자기 기만'에 중독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분석합니다. 악한 일을 마치 사명처럼 수행하려면 그 행위가 정말 훌륭한 일이라고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속여야 합니다. 게르만족은 가장 위대하고, 유대인들은 그 걸림돌이니 제거해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로 자기 기만의 늪에 빠진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기만은 오늘날에도 일어납니다. 어린 자녀를 학대하고 매질하며 방치하면서도 '훈육'이라고 정당화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하갈과 이스마엘 이야기도 자기 기만의 비극을 보여줍니다. 이 본문을 끝으로 하갈과 이스마엘은 성경에서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인생이 서글프고 안타까운 이유는 끝까지 자기 기만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자리를 저버린 교만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 (창 25:12)
성경은 하갈을 '사라의 여종, 애굽인'이라고 소개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지극히 단순하고 당연한 소개입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슬프고 야박하게 느껴집니다. 하갈은 이렇게 소개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여인 하갈'이라고 얼마든지 소개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갈의 인생을 총정리하는 마지막에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라고 냉정하게 기록하고 계십니다.
하갈은 본래 이집트에서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과 은혜로 아브라함 집안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으니, 이 자체가 은혜입니다. 학대를 견딜 수 없어 집을 떠났을 때, 갈 곳을 알지 못하고 광야에서 방황하다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 만나주셨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창 16:9)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창 16:13)
'엘로이 라하이'—'나를 살피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우물'이라는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신앙 고백이 바로 하갈의 고백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고백보다 훨씬 앞선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녀에게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서 여주인의 수하에 복종하라고. 이것은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깨닫고 겸손하게 살라는 뜻이며, 은혜의 자리를 떠나지 말라는 방향 제시였습니다.
그런데 하갈은 집에 돌아가 이스마엘을 낳자마자 생각이 바뀝니다. 교만해진 것입니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이 이 집의 안주인이었던 것처럼,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합니다. 이스마엘도 그렇게 교육했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고 젖을 뗄 무렵, 대략 18세가 된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합니다. '차하크'—성적으로 희롱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갈은 제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아 그 집에 들어와 젖붙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지를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쫓아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자리를 모르는 사람, 덧붙임을 받은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 자기 기만의 늪에 빠져 사는 사람을 내보내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하갈이 '네 여주인의 수하에 복종하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겸손과 감사로 은혜의 자리에 머물렀다면, 아브라함의 늙은 종 다메섹 엘리에셀처럼 보호받고 인정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은혜의 자리에 머무른 여인'이라고 소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갈은 은혜의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의 표지, 겸손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에는 여러 표지가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겸손을 교육하셨습니다.
"네가 누구에게든지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끝자리로 가게 되리라" (눅 14:8-9)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눅 14:11)
그리스도인의 겸손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겸손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에 대해 겸손하다는 것은 말씀에 철저히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은혜가 크면 클수록,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명을 건져 주시고 영생을 주셨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하나님 말씀보다 자신의 경험을 앞세우게 됩니다. 말씀보다 자기 지혜와 상황을 먼저 내세웁니다. 하나님에 대한 겸손이 흐려지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자기 기만의 늪에 빠집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처럼, 원래 자신이 어떤 죄인이었는지, 어떤 상태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셨는지 똑바로 깨닫지 못하면 한순간에 자기 기만으로 흘러갑니다.
두 번째 겸손은 주변과 이웃에 대한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잔치 자리 끝자락에 앉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비단 혼인 잔치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는 끝자락에 앉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버둥치며 열심히 노력해도 그 끝자락을 벗어나지 못하는 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 끝자락에 우리가 앉아서 그분들의 손을 잡아주고 위로자가 되어 주는 것, 이것이 겸손입니다.
성도가 있어야 할 자리, 구원받은 백성들이 서 있어야 할 자리,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바로 거기입니다.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사람들, 누구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 그 끝자락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벗이 되고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자리에 가기를 꺼립니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많이 뻗어가고 가지려 합니다.
잔치 자리의 끝자락에는 어떤 사람들이 앉아 있습니까? 청함을 받지 못했지만 배고파서 남은 음식이라도 얻으려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 자리에 앉아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손을 내밀어 주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겸손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겸손과 인생의 끝자락에 선 자들을 돌보는 겸손, 이 두 가지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겸손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 자기를 속이게 되고, 그 끝은 하갈과 이스마엘처럼 내쫓김을 당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이스마엘은 향년이 백삼십칠 세에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고" (창 25:17)
이 말씀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창세기 24장은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을 다루고, 25장 중반 이후에는 에서와 야곱의 출생이 나옵니다. 이삭이 결혼할 때 나이가 40세였고, 이삭과 이스마엘은 14년 차이가 납니다. 그러면 이삭이 결혼할 때 이스마엘은 54세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결혼하고 아직 아이를 낳기도 전에 성경은 이스마엘의 죽음을 언급합니다. 아직 83년의 세월이 남아 있는데 말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서둘러 손절하시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의 남은 83년을 기록하지 않으시려는 의도가 읽힙니다.
"그의 나이가 높고 늙어서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으매" (창 25:8)
이것은 아브라함의 죽음을 말합니다. 같은 표현인데 '열조'와 '백성'만 다릅니다. 히브리어로는 둘 다 '암'으로, 열조로도 백성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죽어서 돌아간 그곳과 이스마엘이 죽어서 돌아간 그곳이 같은 곳일까요? 우리는 아브라함이 천국에 갔다고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표현이 같으니 이스마엘도 천국에서 눈을 떴을까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 5:29)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입니다. 돌아가는 곳이 천국일 수도 있고 지옥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차라리 죽어서 존재 자체가 소멸되면 좋겠지만, 죽어서 눈 뜨는 곳이 지옥이라면 이보다 더 원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경은 천국과 지옥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길어야 100년 남짓 살아가는 것은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이 땅에서 호흡이 끊어졌을 때 생명의 부활로 천국에서 눈 떠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돌아간 자기 열조는 누구입니까?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 셋, 에노스의 족보가 나옵니다. 에노스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예배공동체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들은 악이 관영한 시대에도 예배공동체를 굳게 지켰습니다. 노아 시절, 노아와 그 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타락할 때도 예배 자리를 지킨 분들입니다.
아브라함이 돌아간 곳은 바로 그들이 있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돌아가 눈을 떠보니 노아가 계십니다. 에노스가 계시고,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올라간 에녹이 거기 계십니다. 그들은 모두 죄악된 세상에서 예배 공동체를 지키다가 천국에서 눈 뜬 열조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지막은 영광의 부활, 생명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의 부활은 어떠합니까? 가인은 동생을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끌어안으려 하셨지만 그는 하나님 앞을 떠났습니다. 에덴 동편 놋 땅으로 가서 하나님과 단절하고 성을 쌓았습니다. 가인의 후손 중에 라멕 같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자신의 상처로 인해 소년을 죽이고, 힘이 최고라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라멕의 후손들, 노아 시절 단 한 사람도 방주에 타지 않았습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짓는 소리가 전도하는 소리인데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비가 떨어져도 방주의 문을 두드리지 않은 완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심판의 부활로 지옥에 있는데, 이스마엘이 돌아간 곳이 바로 거기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관심, 유기의 심판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의 남은 83년 인생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죄를 짓든 말든, 어떤 인생을 살든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인생에는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175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가 저지른 죄악까지 다 끄집어내십니다. 그두라 사건과 그 사이에서 낳은 여섯 명의 아들 이름까지 일일이 거명하십니다. 그 자손 중에 미디안 자손이 난 것까지 다 보여주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있으면 지적하고, 사랑하면 초달하고, 사랑하니까 나무라고 죄를 들추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롬 1:24-25)
심판 중에 가장 무서운 심판이 유기의 심판입니다.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책망하셔야 합니다. 가정에 문제가 일어나고, 삶에 문제가 일어나고, 양심에 거리낌이 생겨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잘못했구나,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개입하고 계시는구나,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죄를 지어도 아무리 잘못해도 내버려두신다면, 이것이야말로 큰일입니다. 유기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은 자기가 어떤 죄에서 구원받았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자기 기만의 늪에 빠져 있으니 하나님 앞에서 쫓겨났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서야 할지 기억하시고, 믿음의 자리를 잘 지키시며, 하나님의 관심을 받는 믿음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흉악한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 때는 자신을 왕으로, 물질을 주인으로 삼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권적으로 인도하시고 건지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원합니다. 교만하여 말씀을 제쳐두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앞세우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어떤 일이 있어도 연약하고 끝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우리도 그 자리에 함께 앉는 지혜와 겸손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아브라함처럼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생명의 부활로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믿음의 어른들, 믿음의 백성들과 함께 영원한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를 눈동자같이 살피시고 보호하시며, 죄 지을 때마다 초달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유기의 심판을 당하지 않도록 도우시고,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언제나 우리를 떠나지 않도록 그 사랑 붙잡고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