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본문: 창세기 25:22-26
옛날 옛적에 어느 산골에 노총각이 살았습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홀로 살아온 그는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논일 밭일 열심히 하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뙤약볕 아래 일하다가 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한 노인이 찾아와 말했습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복이 있는데, 왜 복을 찾아가지 않느냐? 서쪽 나라에 가면 당신 복이 있을 테니 어서 가서 찾아오시게."
총각은 노인의 말만 듣고 서쪽으로 길을 떠났습니다. 정처 없이 서쪽으로만 방향을 정하고 걸었습니다. 아무리 가도 서쪽 나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해가 저물었습니다. 어느 민가에 도착하여 하룻밤 유숙을 청하고 들어갔더니, 수심 가득한 얼굴의 처녀가 있었습니다. 빼어나게 예쁜 처녀인데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처녀가 총각에게 물었습니다. "저에게는 걱정이 있습니다. 저와 결혼하려고 약속한 사람이 생기기만 하면 그 사람이 죽어버립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서쪽 나라에 가신다 하니 가서 답을 찾아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듣고 보니 가슴 아픈 사연이었습니다. 총각은 그렇게 하겠다고, 내가 가서 답을 찾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이제 한참 가다 보니 부잣집을 만났습니다. 부잣집의 노인이 마당에 나와서 근심 가득한 채로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르신, 왜 이렇게 근심 가득하게 나무를 보고 계십니까?" 그 어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이 집도 사고, 땅을 넓히고, 정원을 가꾸고, 배나무를 심었는데, 배 열매가 달리질 않습니다. 당신이 서쪽 나라에 가신다 하니 가서 어떻게 하면 이 나무에 열매가 달릴지 답을 찾아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다시 길을 재촉했습니다.
이제 강에 이르렀습니다. 강을 건너려 하는데 이무기가 역시 근심 가득한 채로 있었습니다. "너는 또 왜 이렇게 근심이 가득하니?" 이무기가 말했습니다. "천 년이 지났는데 나는 승천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승천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서쪽 나라에 가시면 제발 답을 찾아주십시오." 약속을 하고 강을 건넜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이 할머니에게 자기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쭉 말했더니, 할머니가 정신 차리라고 합니다. "속았다! 그런 게 어디 있느냐? 어서 빨리 네 고향에 돌아가서 농사짓고 돈 벌어서 장가갈 걱정이나 하거라."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제 돌아가겠다고 했는데, 걱정이 있었습니다. "저야 그렇다 치고, 오다가 약속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소원을 들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부 기구하고 걱정이 많은 사람들인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할머니가 답을 알려주었습니다.
"이무기 그놈은 욕심이 많아서 아마 구슬을 두 개 물고 있을 거다. 입을 벌리게 하고 하나를 뱉어내라 해라. 그러면 곧장 승천할 거다. 노인에게는 땅을 파게 해라. 땅을 파면 돌멩이가 나올 텐데, 그 돌멩이를 덜어내면 배나무에 열매가 맺힐 것이다. 처녀에게는 여의주와 금덩이를 가진 총각을 만나서 결혼하면 총각이 죽지 않고 잘 살 것이라고 해라."
그래서 이무기를 만났습니다. 입을 벌려보라 하니 진짜 구슬이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를 뱉어내면 올라갈 거라고 했더니, 이무기는 여의주를 총각에게 주고 그 즉시 승천했습니다. 이제 여의주를 총각이 얻었습니다. 노인에게 갔습니다. 땅을 같이 파보자 했습니다. 땅을 팠더니 돌덩이가 아니라 금덩이가 있었습니다. 금덩이를 이 총각에게 주고 노인은 기뻐했습니다. 총각은 여의주를 가지고 금덩이를 가지고 처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 처녀와 함께 결혼해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아들, 딸 낳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재미난 해피엔딩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옛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중심적으로 삽니다. 남하고는 상관없습니다. 내 복만 다 누리면 그만입니다. 돈도 나 혼자 벌어서 나 혼자 쓰고 다른 사람과는 아무 상관없이 삽니다. 내가 복 받으면 그만이고 다른 사람들은 굶든지 죽든지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총각을 보십시오. 자기 인생은 뒤로하고 오며 가며 만난 사람들, 이무기까지 그들의 걱정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그게 자기 인생 문제였습니다. 처녀의 문제도, 노인의 문제도, 이무기의 문제도, 그 문제를 풀어주었더니 그 복이 고스란히 자기에게 돌아왔습니다. 오며 가며 만난 사람들의 복을 그가 그대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열심히 남을 위해서 섬기고 희생하고 헌신했더니 그 복이 다른 데 가지 않고 자기에게 그대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지혜로웠습니다. 성경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섬김의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섬기고, 남을 돕고, 헌신하고, 희생하라. 그러면 그것이 어디 가지 않고 다 너의 것이 될 것이니 희생하고 헌신하며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일상의 기도가 빚어낸 영적 예민함
오늘 본문 말씀도 같은 교훈을 전해줍니다. 리브가가 결혼했으나 임신하지 못했습니다. 리브가의 문제는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삭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부부가 함께 기도했습니다. 하루 이틀, 한 해 두 해가 아니라 20년을 줄기차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이를 주셨습니다. 생명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태동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그의 태 중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창 25:22)
리브가는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이었습니다. 쌍둥이를 가졌으니 태동이 두 배일 것인데, 이 문제도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 묻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성도들 중에는 기도를 이벤트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도가 이벤트라 함은 인생의 큰 문제가 있을 때만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취업, 결혼, 사업 등 험산준령을 만나고 건너지 못할 강을 만나면 그때만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와 기도합니다. 다른 때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금식 기도도 하고, 작정 기도도 하고, 새벽 기도도 40일, 50일, 100일을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평안할 때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일상을 기도로 채워가야 그 일상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는 법을 배웁니다.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대화하는 방식이 다릅니다. 평상시에 하나님과 기도하는 법을 충실하게 쌓아놓아야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 1:35)
예수님은 아무 일이 없을 때도 새벽에 기도하셨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평안할 때도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치기 전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 사건 전에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향하여 축사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큰 사건을 앞두고도 기도하셨지만, 매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 기도의 힘과 능력은 바로 이 일상의 기도에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을 기도로 채워가면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일상을 기도로 채워가지 않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셔도 그 응답을 알아들을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직접 응답하시기도 하고, 성경을 읽을 때 깨닫게 하시기도 하고, 설교 들을 때 마음에 갑자기 깨달음을 주시기도 하고, 누군가와 대화할 때 그분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을 말씀하시기도 하고, 자연 만물을 묵상할 때 새소리와 하늘의 태양과 달과 별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영적인 예민함이 있어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영적 예민함은 일상의 기도에서 나옵니다.
리브가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일상을 기도로 채워갔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에게 큰 기도도 들어주시고 소통하시며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창 25:23)
이 본문을 어떻게 읽으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을 예정론을 뒷받침하는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날 때부터 어떤 사람은 천국으로, 어떤 사람은 지옥으로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에서는 날 때부터 하나님이 영원토록 유기하시고, 야곱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천국으로 인도하기로 작정하셨다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선입견을 배제하고 이 말씀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여기에 천국과 지옥이 어디에 있습니까? 선택과 유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이 말씀에서 가장 핵심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입니다. 큰 자는 형 에서이고, 어린 자는 동생 야곱입니다. 그러면 형이 아우를 섬기는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법칙이고 기독교의 원리입니다. 많이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위해 섬기고 베풀어야 합니다. 많이 배운 자가 못 배운 자를 위해 섬기고 베풀어야 합니다. 목사들이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 정상입니다. 교회 중직들이 신앙생활 40년, 50년 오랫동안 하신 분들이 이제 막 신앙의 첫걸음을 뗀 분들을 돌보고, 그분들을 위해 곁을 내어주고, 그분들의 연약함을 보살펴주는 것이 상식입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 땅에 오신 분 중에 역사상 가장 큰 자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가장 큰 자가 이 땅의 어린 자들을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어린 자들을 섬긴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병든 자들, 어린 자들 아닙니까? 나병 환자들,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자들. 예수님은 그들을 일일이 찾아가셔서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의 몸에 손을 대고 기도해 주셨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 누구도 그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어린 자 아닙니까? 예수님이 그 여인을 만져주시고 고쳐주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에게 가셔서 그 관에 손을 대시고 시신을 만지시며 그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는데 그중에는 예수님을 배신하는 가룟유다도 있었습니다. 가룟유다도 어린 자 중의 하나입니다. 잘못된 이념에 사로잡혀 자기 선생을 은 삼십에 팔아치운 가룟유다, 그 어린 자의 발도 예수님께서 씻어주셨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겨주셨습니다. 이 땅에 예수님이 그 정신을 가지고 오셔서 삶으로 보여주셨고, 큰 자이신 예수님께서 어린 자들을 섬기신 가장 위대한 역사가 십자가에서 극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섬기지 않아 빚어진 비극들
성경의 역사를 보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지 않아서 일어난 비극들이 많습니다.
가인과 아벨을 보십시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동시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배를 받으셨습니다. 가인이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내가 장남인데, 내가 형인데, 내가 인정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인정하시지 않는가?" 여기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만약 가인이 아벨에게 가서 "넌 어떻게 예배를 드렸니? 네가 어떻게 예배드렸기에 하나님이 그렇게 네 예배를 받으신 거니? 내가 드린 예배는 도대체 뭐가 문제였니?" 하고 마음을 열고 겸손하게 동생에게 물어봤더라면 그는 살인자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버림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큰 자인 가인이 어린 자 아벨에게 겸손하게 나가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앞에서 자기 존재의 연약함을 인정하기가 싫었습니다. 장손으로서 어린 자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 굴욕스럽고 싫었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어떻습니까? 이스마엘은 아브라함 집에 먼저 태어난 아들이고, 이삭은 두 번째 태어난 아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그 가문의 믿음의 혈통을 이어가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면 열네 살이나 많은 이스마엘이 동생을 잘 돌봐주고, 은혜의 접붙임이 되었으니 그 과정에서 믿음 안에 잘 머무르면 됩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이삭을 학대했습니다. 쫓겨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내가 큰 자라고 생각하면, 남들보다 조금 더 가진 자라고 생각하면, 어린 자를 섬겨야 합니다. 어린 자를 섬기는 것이 오늘 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어린 자를 섬기고 연약한 자를 돌보면 그 섬김은 결국 나에게 복이 됩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기 전에, 성경이 들어오기 전에, 우리 조상들은 재미난 옛이야기로 섬김이 복이 된다는 것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섬김의 가장 중요한 모범이 되시는 예수님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섬기지 않습니까? 왜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삽니까? 부모가 자식을 섬기는 것이 당연하고, 교회 중직들이 어린아이들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 당연함이 일상이 되어야 그 공동체가 은혜로운 공동체가 됩니다. 잘 섬기고, 그 섬김이 주님께 영광이 되고, 그 섬김은 결국 나에게 복이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깨끗한 그릇이 귀한 그릇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지옥과 천국에 대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에서를 지옥으로 보내고 야곱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이 선택은 장자권을 누구에게 주느냐 하는 선택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과 리브가에게 두 아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그 생명의 주인입니다. 주인이신 하나님이 둘 중에 하나에게 장자권을 주는 것조차 결정할 수 없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주권자인 하나님이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 사건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롬 9:20-21)
하나님을 토기장이라고 비유했습니다. 토기장이인 하나님이 가마 앞에서 천히 쓸 그릇도 만드시고 귀하게 쓸 그릇도 만드실 수 있지 않습니까?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이 에서와 야곱 형제 중에 장자권을 둘째 아들인 야곱에게 주고 싶다고 결정하실 권한이 없겠습니까? 분명 있습니다. 하나님이 토기장이시고, 하나님이 그 생명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에게 불편한 구석이 있습니다. "천히 쓸 그릇, 귀히 쓸 그릇"이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하나님, 누구는 날 때부터 귀한 그릇이고 누구는 날 때부터 천한 그릇입니까? 저는 귀한 그릇이 되고 싶습니다. 왜 저를 천하다고 하십니까?"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니 나는 아무래도 천한 그릇 같아서 기분이 나쁘고 불쾌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이 말씀을 다시 해석해 주십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딤후 2:20-21)
큰 집은 하나님의 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그릇들이 많습니다. 금 그릇, 은 그릇, 질그릇, 나무 그릇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이 귀한 그릇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보기에는 어떤 그릇이 귀한 그릇입니까? 깨끗한 그릇입니다. 잘 준비된 그릇, 깨끗한 그릇입니다.
금 그릇과 은 그릇이라 하더라도 그 안이 오물로 가득 차 있으면 주인이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오물을 버려도 냄새가 계속 날 것인데, 그러면 금 그릇과 은 그릇도 함께 버려야 합니다. 질그릇과 나무 그릇이라 하더라도 깨끗한 그릇이라면 주인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됩니다. 깨끗한 그릇이 귀한 그릇입니다. 더러운 그릇이 천한 그릇입니다. 주인이 보실 때는 그렇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깨끗한 그릇이 될 수 있을까요? 금 그릇, 은 그릇, 질그릇, 나무 그릇 따지지 말고, 어떻게 해야 내가 깨끗한 그릇으로 주인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질그릇 같은 나에게 이 보배가 들어와 있습니다.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하면 질그릇 같은 인간에게 들어올 수 있습니까? 나를 비워내야 합니다. 내 욕심을 비워내고, 내 자아를 비워내고, 인간성의 모든 탐욕과 더러운 것들과 욕망을 다 비워내야 합니다. 그런 자를 우리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겸손한 사람만 남을 섬길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이 어떻게 남을 섬깁니까? 자기 자아로 가득한 인간, "내가 장남인데" 하는 자의식으로 가득한 가인이 어떻게 아벨에게 "너의 예배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받으심이 되느냐?"고 묻겠습니까? 자기 욕심으로 가득한 이스마엘이 어떻게 이삭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이유는 보배 중의 보배 되신 예수님을 모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비록 무명해도, 무능해도, 가진 것이 없어도, 연약하고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다른 사람은 팔방미인으로 모든 재능과 능력과 지식과 지혜와 물질과 권력까지 다 가지고 있어도, 그들이 자기를 비워내지 못하면 주인 쓰시기에 깨끗한 그릇, 귀한 그릇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가진 것이 없어도 나를 비워 예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질그릇 가운데 보배가 계시면, 우리 인생 문제는 깨끗하게 해결됩니다. 그래서 섬김이 복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를 비워낸 자만이 섬길 수 있고, 섬기는 자에게 예수께서 임재하시고, 섬김의 아이콘이신 예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우리 인생에 걱정할 것이 무엇입니까? 빚 대신 예수, 보배 대신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시니 염려할 것,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분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그분과 함께 섬김의 복된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는 여전히 금 그릇과 은 그릇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가지지 못해서 원망했고, 배우지 못해서 원망했고, 늘 부족한 것을 탓하며 살았습니다. 내가 부족하고 미련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살았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제 우리가 다시 주 앞에 구하고 또 구하오니, 우리 자신을 비워서 깨끗한 그릇 되기를 원합니다. 빈 그릇 가운데 보배 되신 예수님이 임재하여 주시옵소서.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모시고 살며, 우리도 남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물질을 가졌다면 물질로, 시간을 가졌다면 시간으로, 건강을 가졌다면 건강으로 이웃과 사람들과 하나님을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섬김 가운데 빛나는 영광이 있도록 도우시고, 그 영광을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들 삼아주시옵소서. 모든 말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